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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마르크스,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페데리치의 개입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6. 16.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번역: 두 견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가 지난해 출간한 새로운 저서 <임금의 가부장제: 마르크스, 젠더, 페미니즘에 관한 노트>(PM Press, 2021)에 대한 서평이다. 비록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된 것은 아니지만, 이 서평은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한 여러 흥미있는 쟁점들을 짚고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소개한다. 이 글의 필자인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고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발전시키며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Women And Work: Feminism, Labour, and Social Reproduction - Pluto, 2020)의 저자이다.

출처https://anticapitalistresistance.org/engaging-federici-on-marx-capitalism-and-social-reproduction/

<임금의 가부장제>에 대한 소개는 이 모음집이 "마르크스로의 페미니즘적 복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젠더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마르크스의 관련성에 대한 확장되고 발전된 비판은 아니다. 페데리치는 곧 나올 두 번째 책에서 이것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대신, 독자들은 "페데리치로의 복귀"를 얻게 된다. 짧은 서론을 제외하고는 이 책에는 새로운 글이 없다. 이 다작이면서 도발적인 페미니스트 이론가로부터 새로운 것을 찾는 독자들은 실망하겠지만, 이 에세이 모음집은 수염 난 남자[마르크스]의 아이디어와 영향력에 대한 비교적 응집력 있는 비평, 즉 내가 보기에는 항상 공평하지는 않더라도 균형 잡힌 비판을 전달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페데리치의 대표적인 비판에 내재되어 있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작업에서 결정적인 결함을 정확히 지적했다. 바로 그가 자본주의적 가치 창출과 이윤이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상품인 노동력의 생산을 이론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근본적으로 무급 사회적 재생산 노동과 임금 노동 사이의 구별을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에 마르크스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독자들을 어떤 의심스러운 길로 이끈다. 이 융합은 페데리치가 그것의 일부인 자율주의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 전통의 일반적인 곤경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잠재적으로 유망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범주를 확장하려는 충동은 그것이 명확하게 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혼란스럽게 하는 특수성의 부족으로 인해 약화된다.

핵심 프레임워크: ‘가사노동에 임금을에서 임금의 가부장제로

마르크스에 대한 페데리치의 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의 더 넓은 이론적 골격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녀의 작업에 정통한 사람들은 페데리치의 무급 가사노동에 대한 초기 통찰이 전반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한 생산자들을 설명해주는 무임금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녀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본질적인 기여와 더 나아가 해방정치에 있어서 그들의 중심성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마르크스 둘 다 이러한 생산자들을 인식하는데 실패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임금의 가부장제>의 에세이들은 페데리치의 생각에서 이러한 진화를 추적하지만, 그녀의 원래 정식화와 관련된 어려움을 항상 다루거나 해결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적으로 비생산적" (사회적 재생산) 노동을 "자본주의적으로 생산적"인 노동과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되는 어려움이 그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쓰여진 1장과 2장은 이후의 장들이 다시 돌아가서 확장하는 아이디어와 논쟁을 소개한다. 여기에서 페데리치(및 공동 작가 니콜라 콕스Nicola Cox)는 가사노동과 무임금 노동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둥"(12)으로 이론화하는 사례를 발전시키면서 자본주의를 임금 노동만의 체계로 좁게 이해하는 "생산주의적" 좌파와 가사노동의 정치화에 대한 그들의 멸시(대신 여성해방에 대한 전망을 임금노동 참여에 묶어버리는)을 강력 비판한다.

그들은 "좌파는 집안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데 관심이 없고 단지 우리의 일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쓰고 있다(26). 이 장들은 그들에 대한 비평가들이 종종 가려버리는 점을 유용하게 확인시켜 준다. 페데리치가 공동 설립한 '가사 노동에 임금을' 캠페인은 금전적 보상을 위한 개혁주의적 시도로 상상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임금[노동], 따라서 반자본주의적 요구였다.

운동가들은 임금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우리는 임금을 받지 않았지만, 우리는 결코 그 외부에 있었던 적이 없다)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모든 부문을 그것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19) 투쟁했다. 자본을 위한 재생산을 거부하면서 가사노동에 임금을 페미니스트들은 시장에서 우리 자신의 가치를 매길 수 없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22).

그러한 역설적 논리는 현명하지만 궁극적으로 혼란스럽다. 임금에 대한 요구는 결국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임금에 대한 요구이다. 페데리치와 콕스도 우리는 재정적 자립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업에 얽매이지 않고 시간과 에너지를 회수하기 위해 임금을 원한다”(20)는 의미를 피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페데리치는 여기서(각주나 이후의 장들에서) 이것들과 다른 혼동들에 대처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그보다 그녀의 후기 에세이들은 임금에 대한 요구를 낮추면서도, 자신이 여성의 무급 노동에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한 비판들을 다루지 않는다. 예를 들어, 2017년 에세이에서 페데리치는 계속해서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과 성노동을 여성 억압의 정의적 특징으로 위치지우면서 자본주의는 남성이 우리의 무급 노동을 감독하고 명령하고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규율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고 적었다(44).

많은 여성들이 집에서 파트너에게 억압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주장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실과 거리가 있다(1970년대보다 오늘날 편부모 또는 동성 커플이 가장인 미국 가정의 수가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페데리치는 그러한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그녀는 억압에 대한 이러한 묘사가 일반적으로 흑인 여성의 경험에 공명하지 못한다는 (1981년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여성, 인종 및 계급>에서 시작된) 오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페데리치가 분석을 가정주부 이상으로 확장할 때 인종과 인종주의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 논의는 짧고 불만족스럽다. 2014년 에세이에서 그녀는 급여를 받지 못하고 저평가되는 주부의 조건을, 다른 임금 노동자를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을 낮게 유지하는 구실을 하는 식량과 의복을 생산하는 생계형 농부 및 비공식 노동자의 조건과 연결한다(57).

그녀는 이들이 노동시장을 분할하기 위한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함께 자본에 착취당하지만 인식돼지 못하는 노동자들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관찰은 자본주의가 공식 경제에서의 임금 노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노동에 의해서 번창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종주의가 노동시장의 글로벌 조직화 속에 구조화된 것을 사회적 재생산의 전반적인 비용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인종주의를 자본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이론화하는데, 꽤 명백하지만 충분하거나 미묘함을 담아낸 설명은 아니다.

더욱이, 이 구절은 자본주의 내에서 인종적, 식민지적, 성차별적 관계의 특수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또한 인간 생명을 생산하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과 자본주의 시장을 위해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삶에 필수적인) 불안정한 비공식 노동자들 간의 의미 있는 구별을 지워버린다.

근본적으로 다른 작업 조건을 견뎌야 하는 노동자 그룹 간의 이러한 미끄러짐은 이 에세이에서 포괄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중요한 구분을 간과하거나 우회하는 보다 일반적이고 실망스러운 경향을 나타낸다. 근본적으로 다른 노동 조건을 견뎌야 하는 노동자 그룹 간의 이러한 미끄러짐은 이 에세이에서 포괄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중요한 구분을 간과하거나 우회하는 보다 일반적이고 실망스러운 경향을 나타낸다.

우리는 페데리치의 마르크스주의 범주들의 수용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임금을 못 받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은 자본에 의해 직접 조직되지는 않지만(57)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완전히 포섭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42). 우리는 또한 여성의 이혼 또는 자녀 수 감소 결정이 자본에 대한 "반란"이 된다(29)거나 여성의 출산 거부가 "글로벌 노동 시장 형성"의 추동력이 된다는 제안과 같은 그녀의 보다 서술적인 구절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다(93).

그러나 페데리치의 포괄적인 접근 방식에는 장점이 있다. 그녀는 전체적 시각, 자본주의의 총체성을 결코 놓치지 않는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녀가 종종 미묘한 차이를 무시하지만 그녀는 자본주의의 핵심 동역학을 강조하는 더 큰 패턴을 식별한다.

그러한 패턴 중 하나는 3장과 6장에서 나타나며, 그녀는 가정 생활에 대한 국가 개입의 증가(1842년 영국에서 보호법이 통과된 것을 시작으로 1870년대를 거치면서 성노동의 범죄화, 의무적 교육, 가정 예술 훈련 및 일일 탁아소의 등장으로 이어지며 세기가 바뀌면서 강화되었다)를 자본주의적 착취의 지배적 형태의 변화와 연결한다. ,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의 전환은 보다 탄력적이고 훈련돼 있고 "숙련된" 노동력을 요구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사회적 재생산은 노동 시장의 필요와 자본주의적 노동 규율에 더 밀접하게 묶이는 특정한 국가적 주도력의 대상이 된다”(42)고 쓰고 있다. 이것은 페데리치가 "임금의 가부장제"라고 부르는 시대를 시작하며, 이 시대는 임금이 노동계급 남성에게 아내(및 자녀)의 신체와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하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여기에서 페데리치의 논평은 권력 관계의 복잡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는 단순히 자본가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며 남성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 임금 노동에 못 들어오도록 공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형태의 착취와 관련하여 사회적 재생산의 국가적 규제를 추적하려는 움직임은 연구의 장으로서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일종의 경험적 작업이다. 새로운 기여 -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와 함께 안토넬라 피치오Antonella Picchio, 월리 세콤베Wally Seccombe의 책은 이 점에서 선구자이다 - 가 없다면 페데리치의 논문은 추가적 연구를 위한 중요한 참고의 초점 역할을 한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국가 개입에 관한 논문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의의 일부로 전개된다. 여기서 페데리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마르크스는 여성 억압과 사회적 재생산 노동을 특별히 이론화하지 않는가? 그리고 왜 페미니스트들에게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한가? 그녀는 거리낌없이 두 번째 질문에 답한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적 방법론과 분석은 주로 그가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이 어떻게 착취적이고 사회적 적대와 종속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언어와 일련의 개념을 제공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필수적이다.

"경제와 정치의 분리에 대한 거부"(52)에서, 경제가 고전적 정치경제학이 우리에게 믿게 하는 폐쇄된 시스템이 아님을 마르크스는 보여준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노동의 공동체적 조직에서 사회적 해방의 열쇠를 찾는 데에도 필수적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를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작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점에서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개념적 틀과 추론에서 그러한 한계를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위에 요약된 약점은 마르크스의 결함에 대한 그녀의 설명에서 다시 나타나며, 그녀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방적이고, 이에 따라서 부정확한 설명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증거를 늘리거나 잘못 해석하게 만든다.

페데리치는 왜 마르크스가 페미니스트가 아닌지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설명을 고려한다. 하나는 그의 사회-역사적 위치를 감안하고 다른 하나는 그의 이론적 개념과 분석이다. 전자에 대해 페데리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경되었음을 알린다(38-39).

초기 에세이에서 그녀는 마르크스가 가부장적 프롤레타리아트 가족이 아직 통합되지 않은 순간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쓴다. 노동계급의 여성과 아이들은 처음에 공식적인 유급 노동에 휩쓸렸기 때문에 그가 가사노동을 경시한 것은 용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페데리치는 더 이상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녀의 회의주의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대한 항상 공정하지는 않지만 사려 깊은 판단이다. 페데리치는 일찍이 1830년대에 페미니즘적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가사의 사회화에 대해 토론하고 실험하고 있었다고 지적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여성은 공장 노동자의 20~30%에 불과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출산과 함께 유급 노동을 그만뒀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가사 노동을 저녁 시간에서 토요일 오후로 전환시키는 노동 시간 단축을 위해 고군분투했다.(38-39) 그래서 가사노동은 마르크스 시대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였다. 더욱이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여성 공장 노동자의 가혹한 조건과 남성 가장이 아내 노동의 임금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한탄하지만 이러한 젠더화된 권력 불균형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근본적인 예외의 존재를 인정했을 것"(85) - , 법률상의 "자유"가 모든 노동자의 보편적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쓰고 있다. 이것은 페데리치를 일련의 추측으로 이끈다.

그녀는 아마도 마르크스가 그 시대의 피조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1830년 이후 점점 더 국가와 대중적 상상에서 "노동자""열심히 일하는 순수한 임금 노동자"를 의미했다고 지적한다(82). 더 불안정하고 덜 신뢰가 가는 하위계층 구성원과 구별되는 도덕적이고 권리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페데리치는 덜 신빙성이 있는 또 다른 추측으로 넘어간다. 마르크스의 가사노동 경시는 "정치적 편의"의 문제였다는 것이다(86). 1872년 제1 국제노동자협회IWA의 지도자로서 마르크스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빅토리아 우드헐Victoria Woodhull이 이끄는 ‘12부문’(Section 12)의 축출을 지지했다.

그는 IWA의 모든 부문 회원의 3분의 2가 임금소득자여야 한다는 결의안을 촉구함으로써 어떤 부문도 무임금 가정주부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촉구했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성차별주의에 대한 증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IWA 총평의회의 유일한 여성인 해리엇 로Harriet Law를 인용한다.

로는 마르크스가 가족임금에 대한 논쟁에서 이른바 "울타리치기"(87)를 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여성의 공장 노동권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노동의 조건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로는 이것이 반페미니스트들의 힘을 강화해주었다고 믿는다. 페데리치는, 그러한 견해가 IWA 회원 대부분에게 잘 받아들여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르크스에게 이것이 아마도 정치적으로 편리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들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지는 않지만, 감질나게 하는 추측이다. 페데리치가 인정하듯이, 마르크스의 가족임금에 대한 명백한 지원은 아마도 "일시적"이었고 의심할 여지 없이 양면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가족의 해체를 예상했고, 여성들이 임금 노동자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환영해야만 노동계급의 의식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2부문'의 추방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지에 관해서는 (페데리치는 거부하고 있지만) 최소한 그의 명시적 정당화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중긴계급 개혁주의자들이 IWA의 영역을 휩쓸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할 드레이퍼Hal Draper에 따르면 이것이 1840년대 이후부터 마르크스의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무급 가사노동이 개인 또는 집단적 투쟁의 요점이라는 사실에 대해 단순하게 무지한 것에 대해 마르크스가 변명할 수 없다는 페데리치의 말은 옳지만, 우리가 마르크스의 동기를 결코 확실히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마르크스로부터 물려받은 이론적 장치에 관한 그녀의 다른 질문은 더 관련성이 있다.

여기에서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 있는 "모순"(55)을 확인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특정한 사회적 형태를 취하는 사회적 활동으로 보았지만 이러한 이해를 출산, 육아, 가사 및 성 노동으로 확장하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활동의 자연화는 그가 노동력(그가 이해한 이 상품은 자본/노동 관계 외부에서 생산되었다)의 판매를 기반으로 자본주의적 축적 이론을 구축하기 때문에 특히 성가시게 하는 일이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깨달아야 했다고 말한다. “가사노동은 오래된 자연적 활동이자 개인적 봉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품의 생산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특수한 유형의 노동,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한 분리는 교환가치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가사노동은 프롤레타리아트 공동체에서는 노동력 생산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말이다.”(39)

페데리치는 이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관심이 체제의 "내적 논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81). 그녀는 그의 정치 이론에 따르면 가족과 젠더 관계의 영역은 자본 축적이나 노동자의 주체성과 계급 형성의 구성에서 특정한 기능을 하지 않았다고 썼다(77).

그리고 그녀는 이것이, 그가 더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분리를 고착화codify하도록 이끈다고 문제제기한다. 텍스트의 이 지점에서 페데리치는 독자들에게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의 이론>[잉여가치 학설사] 1부에서 그가 쓴 것을 인용한 내용으로 안내한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은 상품을 생산하거나 노동력 자체를 직접 생산, 훈련, 개발, 유지 또는 재생산하는 노동이다.”(93, n. 21). 페데리치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이 가치 생산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마르크스도 그러한 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보았다고 주장한다.(82)

이것은 솔직히 말해서 틀린 것이다. 이 인용은 마르크스가 재생산 노동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해를 논의한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미스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범주에서 재생산 노동을 배제한다고 말한다. 스미스가 제시한 것과는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마르크스도 동의하는 입장이다.

여기에서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잘못 대변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요점은 그녀가 나아가기를 바라는 올바른 주장과도 관련이 없다. , 마르크스가 더 잘 알았든 모르든 그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을 이론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실패는 노동력이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산되는 살아있는 노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그의 명확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 논리"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자본주의적 노동이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어떻게 마련하는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명백한 오해에 뿌리를 둔 또 다른 것에 손을 뻗는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노동을 남성, 백인, 임금 노동으로 좁게 정의했고 노동은 긍정적이고 해방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봤다고 했다. ,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 건설에 필수적인 자질인 "통일성, 규칙성, 기술적 발전의 원리"(60)를 가르치는 한 대규모의 산업화된 작업으로서 자본주의적 노동의 조직화를 이로운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가 이 견해를 자신의 소외된 노동에 대한 비판과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산업화 이전의 생산 형태를 후진적이라고 비난했으며 기술의 생산력에 대한 믿음을 미래 사회주의 사회를 제공하고 노동의 고단함에서 노동자를 해방시키는 기반으로 삼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사회적 재생산 노동은 일반적으로 합리화와 기술화에 저항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관심 영역 밖에 있다고 페데리치는 관찰한다. 더욱이 그녀는 자본주의(및 자동화)가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에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존재했던 협동적 형태의 노동을 파괴하고 노동자에게 필수적인 기술과 지식을 강탈하며 세계 생태계를 파멸적으로 고갈시킨다고 지적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도시 정원 가꾸기, 시간 적립과 나눔, 오픈 소싱(67)과 같이 스스로 조직된 "공통화communing 활동"을 우선시하는 커먼즈commons의 정치에 찬성하여 이 "기계기반적 공산주의"(62)를 거부해야 한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노동 자체가 재구성되어 자본주의적 의미와 가치 생산을 전복시킨다고 주장한다.

페데리치가 여기에 쓴 것의 일부는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임금 노동에 중점을 두었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으로 산업화와 산업적 노동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그녀는 노동자들이 단순히 기존 기술을 인수하여 집단적 정의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현명하게 경고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견해는 페데리치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비판적이다. 그녀는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빨리 그 점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마르크스가 농업의 기계화가 토양과 노동자에게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직관”(61, 강조 추가)했다고 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과 <고대 사회>에 대한 그의 독서 이후에 "분명히 그의 정치적 공리 중 일부를 포기했다"(52, 강조 추가).

이것은 캐빈 엔더슨Kevin Anderson, 헤더 브라운Heather Brown,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페데리치가 인용한 모든 연구자들)와 같은 사람들의 탐구에 대한 진지한 개입을 피해가는 분명히 절제된 진술이다. 마르크스의 비판에서 이것과 다른 측면들을 경시하는 것은 페데리치의 큰 그림정치와는 부합하지만 그녀의 결론에 대한 확신을 높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리뷰의 독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양면성을 느낄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나 자신의 포괄적인 선언을 하기는 어렵다. 페데리치의 글에 동의하지 않고 설득력이 없는 부분도 많이 있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기여를 존경하고 가치 있게 생각한다.

좌파에게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반자본주의 이론, 특히 해방이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주저하지 않는 반자본주의 이론을 촉진하려는 페데리치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녀의 분석적 융합과 포괄적인 진술은 사회주의 비판과 정치를 발전시키는 데 작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종종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적 아이디어를 우리가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고, 그 자리에 더 나은 공동체적, 진정 민주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주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페데리치로의 복귀'는 많은 것을 보여 준다

(기사 등록 202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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