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파니치Leo Panitch
번역: 두견
이 글의 필자인 레오 파니치(Leo Panitch: 1945 ~ 2020)는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 교수였고, 25년 동안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의 편집자로서 국제적 좌파의 이론과 실천에 많은 기여를 해 왔다. <위기 속의 노동계급 정치>, <의회 사회주의 종말>, <사회주의를 찾아서: 벤에서 코빈으로 가는 노동당 신좌파의 프로젝트> 등의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우리는, 2020년 연말에 코로나19로 인한 갑작스레 사망한 파니치의 주요 글들을 다시 소개하는 기획 연재를 지속하고 있다.
출처: https://socialistproject.ca/2017/11/b1507/
러시아 혁명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혁신적이고 설득력 있는 새로운 설명은 볼셰비키가 역사의 ‘전철수’switchmen 역할을 한 것에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용어는 지역 혁명가들이 오랫동안 비밀 회의를 위해 모였던 러시아 제국 전역의 철로 곳곳에 있는 작은 부스들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1917년에 사회주의라는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 역사의 기관차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정치 역으로 선로 전환시키려는 소위 '합법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경멸하기 위해 이 용어를 별명으로 사용했던 차이나 미에빌China Miéville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역사의 측면을 고려하는 것보다 목적론의 발자국에 더 해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1917년 10월을 단지 '근본적으로 비극적'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근본적으로 고무적'으로 만드는 것은 '황량한 역사를 관통하며 숨겨진 선로로 전환'하기 위해 결단력 있게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Miéville, 2017, pp. 1, 318-19).
물론 숨겨진 선로는 없었다. 이 은유가 계속 전개되려면 1917년 10월 봉기의 측선에서 분기선을 형성할 선로가 아직 단조되고 놓여지지 않았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반란을 주도한 볼셰비키, 특히 레닌과 트로츠키는 분명히 병행하는 분기선을 건설할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의 궤도에서 이미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기차들이 임박한 시점에 자본주의의 종착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믿었다.(레닌이 1916년에 제국주의에 관한 소책자에서 언급한 "최고단계")
그리고 그들은 그 열차가 일찍이 러시아 '전철수'의 결의에 영감을 받아 그 역을 서둘러 떠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 다음 스위치를 다시 작동시켜 사회주의 역으로 가는 역사의 선로에 합류할 것이다. 그러나 1919년 독일 공산주의 혁명의 실패로 빠르게 알 수 있었듯이 주요 선로의 열차들은 자본주의라는 역을 떠나지 못했다.
미에빌의 표현대로, ‘그 결과 혁명은 몇 달과 몇 년 동안 궁지에 몰리고, 공격당하고, 고립되고, 골절되고, 깨질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고 있다: 숙청, 강제 수용소, 기아, 대량 학살.’(미에빌, 2017, 306쪽)
실제 구축
내전에서 레닌 말기의 시장화된 신경제정책NEP를 거쳐 스탈린의 중앙 계획적 산업화 및 강제 농업 집산화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럽게 전개되며 실제로 건설된 지역 선로는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복선의 시간을 현실로 만들었다. '일국 사회주의'적 실천에 의해 가장 날카롭게 공격받고, 그 특정한 방법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혁명가들은 여전히 트로츠키가 1932년 망명 상태에서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하나의 세계 체제로서 살아남았다'고 믿었다(트로츠키, 2016, 208쪽).
그리고 1945년 이후 시대의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적 역동성 속에서도 개발도상국에서 혁명가들과 많은 괜찮은 개혁가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산업화를 향한 소비에트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10월 혁명의 측면에서 건설된 평행적 지역 선로임이 밝혀졌다.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이제 자본주의 선로를 따라 달리는 고속 열차를 주시하는 새로운 전철수들은 또다시 스위치를 작동시키려는,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21세기로 질주해 들어갔던 그 트랙에 합류하려는 의지에 가득차 나타났다.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제 은유법을 없애야 할 때이다. 그리고 또한 제거되어야 할 것은 임박한 '자본주의의 종말'을 선언하는 성향이다.(Streeck, 2016). 그러나 유용한 역사적 유물론은 자본주의가 이전의 생산 방식을 어떻게 대체했는지를 밝히고 자본주의 이후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사를 관통하는 숨겨진 선로가 없음을 여전히 증명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에서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오래된 모순과 새로운 모순에 대한 필수적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이러한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더라도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제약이나 경제 위기, 심지어 생태 위기도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종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역사를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고, 그 새로운 역사가 사회주의가 되려면 그들도 그럴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추정되는 '자연적 발전 경로'에서 러시아를 벗어나도록 한다는 너무 보편적인 견해에 내재된 목적론의 강한 자취에도 유의해야 한다. 여기서 1917년 10월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위 '사회주의 실험'을 수행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그룹이 러시아 사회의 배후에서 조직한 독단적 행위를 의미한다.
사실, 데이비드 만델David Mandel이 100주년을 기념하는 또 다른 새 책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10월에 여전히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지지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이다. '10월은 참으로 대중적인 혁명이었다'(만델, 2016, 155쪽).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 25년 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 가능성에 대한 몇 가지 새로운 성찰을 야기하는 한, 이것은 두 가지 단서를 포함하면서 매우 환영할 일이다.
첫째, 적절한 출발점은 1917년 이전 사반세기, 즉 새로운 정치적 현상과 함께 노동계급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조직화된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의 광범위한 출현이다. 둘째로, 이 귀환의 목적은 그들이 보여준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인식과 한계도 확인하고 배우는 것이어야 하며, 피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대할지 더 잘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최소한 21세기 자본주의 조건 하에서 행해질 새로운 시도에서 초월하여,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의 형성 속에서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중심축 역할을 할 새로운 정당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의 변혁이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유산
종속적 계급은 역사적으로 노예 반란이나 대개 여성에 의해 주도된 식량 폭동에 가담해 왔지만, 19세기 후반에 생겨난 대중적 노동자 계급 정당과 같은 오랜 기간 존속하는 기관들은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현상이었다. 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포함하거나 그러한 장수를 유지할 수 없었던 이전의 다양한 조직들의 합류를 종종 수반했다.
그러나 엘레이Eley가 단언했듯이 1870년대와 1920년대 사이에 등장한 사회주의 정당들은 무수한 노동조합 투쟁뿐만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와 반란에 대한 이전의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시민권의 경계를 바깥으로 그리고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낡은 정권들이 그것을 거부한 민주적 권리를 요구했고, 이어지는 공격으로부터 민주적 이익을 방어하고, 끊임없이 확대되는 포용성에 대해 압박했다. 좌파 정당인 사회당과 공산당은 때때로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부를 구성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존의 민주주의적 이익을 옹호하고 새로운 이익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시민사회를 조직했다는 것이다.’(엘레이, 2002)
CB 맥퍼슨Macpherson이 언제가 말했듯이, 비록 “19세기에 민주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이론에 도입된 원리가 그것을 자유민주주의로 만들기는 했지만 … [그것은] 인간을 단순히 효용성의 소비자가 아닌 최소한 잠재적으로 인간적 능력의 행위자, 행사자, 개발자 및 향유자로 보는 개념이었다. 그러한 개념의 실질적인 발전은 노동계급의 '민주주의 의식의 혁명'을 통해 명시적으로 '민주주의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행위자의 출현에 크게 좌우되었다.”(맥퍼슨, 1973, pp. 51-2, 173-4, 182-4).
이 정당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1848년 <공산주의 선언>으로부터 얻은 많은 좋은 영감들은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형성하고 그에 따라서 정치적 정당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강조였다.(마르크스, 1996, p. 13).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일찍이 '인간의 대규모적인 개조가 필요하고, 그것은 실질적인 운동, 즉 혁명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변화'라고 주장했을 때, 그들의 '운동'과 '혁명'에 대한 개념은 반란의 자발적인 카타르시스적 순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합하게 되기' 위해 노동자의 역량이 개발될 수 있는 계급 조직과 제도 구축의 긴 과정을 수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마르크스, 1947, p. 69; 또한 카버Carver와 블랑크Blanks, 2014a; 2014b; 님츠Nimtz, 2000).
그들은 아마도 1840년에 런던에서 설립된 독일 노동자 교육 협회와 같은 것을 여기에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한 포스터에서 이렇게 광고했다. “사회의 주요 원칙은 인간은 지적 능력을 함양해야만 자유와 자의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저녁 모임은 교육에 전념한다. 첫째 날에는 영어, 다음 날에는 지리, 세 번째는 역사, 네 번째에는 그림과 물리학, 다섯 번째에는 노래, 여섯 번째에는 춤, 일곱 번째에는 공산주의 정치를 가르친다.”(벤더Bender, 1988, p. 10).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역사적 사명'의 일부로 교육 협회를 설립하고 나중에 선언문을 제정한 공산주의자 동맹자들은 - 그 밖에 '곧 파리의 거리를 가득 채운 2월혁명 당원들quarante-huitards '(가브리엘Gabriel, 2011, pp. 109, 132) - 약 40년 후, 1889년 바스티유 기념일에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으로 구성된 제2인터내셔널이 창설될 때쯤에야 이것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직은 정당으로서의 자격이 거의 없었다.
1850년에 공산주의자 동맹이 분파적 논쟁 속에서 해산되었을 때, 마르크스는 치명적인 분열의 원인을 혁명적 시기에 대한 접근에서 자신의 편에 있는 유물론과 상대편의 이상주의 사이의 차이로 정의했다. ‘[공산주의] 선언의 유물론적인 관점은 이상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혁명은 현실적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의지에 따른 노력의 결과로 보여진다. 반면에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말한다: 당신은 세상을 바꾸고, 권력 행사를 위해 스스로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15년, 20년, 50년의 내전을 겪어야 한다. 우리가 단번에 권력을 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침대로 가야 할 것이다.(마르크스, 1978, p. 626; 님츠도 참고. 2016, pp. 248-52).
정당 건설에 대한 마르크스의 시간표는 놀라울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었다. 이후 15년, 20년, 50년에 걸쳐 등장한 새로운 사회민주당은 이 수십 년에 걸쳐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엥겔스가 1895년에 말한 것처럼 노동계급의 대중적 참여를 자신들 활동의 전제로 삼았다.
‘무의식적인 군중의 선두에 있는 의식 있는 소수에 의해 행해지는 기습 공격을 통한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 그것이 사회 조직의 완전한 변혁의 문제인 경우 대중 자신도 그 안에 있어야 하며, 무엇이 판돈으로 걸렸고,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는지 몸과 마음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지난 50년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대중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엥겔스, 1960, pp. 199-200).
이 새로운 정당들이 끌어들이고 적지 않게 만들어낸 마르크스주의 유산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으로' 형성하는 데서 그들 자신의 핵심적 역할로서 ‘선언’의 상대적 모호성을 되돌리는 것을 포함했다. 이것은 조직 구축과 대규모 대중 교육의 참을성 있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명백하게 보여졌다. 1914년 이전의 사회주의 정당 강령 - 1891년 독일의 기본적인 에어푸르트Erfurt 강령을 시작으로 벨기에, 스웨덴, 프랑스, 러시아의 사회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의 강령도 포괄한다 - 에 대한 가장 최근의 포괄적인 분석은 고무적인 사회주의적 목표가 항상 보다 즉각적인 개혁의 정식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생활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것부터 참정권 확대, 결사의 자유, 법치주의를 목표로 하는 것, 여성의 완전한 평등 보장, 정교 분리, 보편적 세속 교육, 예술과 문화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는 다양했다.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이 언젠가 말했듯이, 그들은 광범위하게 규정된 노동계급에게 정당들이 '단순히 도착 날짜를 아무도 모르는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그들에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위해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자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과 관련해서 '노동계급이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지배하도록 지적, 문화적으로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확실히, 마르크스가 1875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고타 강령에 대한 비판에서 진행한 독일당의 국가주의적 경향에 대한 책망은, 그가 파리 코뮌에서 일시적으로 입증된 민주주의적 행정 형태에 대해 표현한 찬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여기에 항상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주목할만한 표시이다. 어쨌든, 마르크스가 죽을 때까지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1878년 ‘반사회주의법’에 의해 법적으로 금지된 상태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은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1890년까지 이 법의 폐지를 강제한 것은 역사적 승리였으나 또한 엥겔스가 사민당의 1891년 에어푸르트 강령에 대한 비판에서 '반사회주의 법의 부활을 두려워하여' 당에서 특정한 '기회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것이 당의 모든 요구가 '독일의 현재 법 질서' 내에서 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강령에 명백하게 수용된 것에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사회가 사회주의로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령에 함축된 것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엥겔스, 1970, pp. 434-5).
여기에서 엥겔스가 분별한 것은, 말하자면 베른슈타인의 설익은 형태, 후에 '수정주의'로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로운 길이 가능한지 여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진적인 노동자들의 혁명적 야망과 민주적 역량보다는, 오히려 억제되는 내부의 당적 실천들 속에서 다수 당원들로부터 당 지도부의 자율성이 증가하는 관점에서 '기회주의'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이것은 어느 정도 사라졌고 로베르토 미헬스Roberto Michels는 공교육 시스템에 그의 희망을 걸면서 SPD 내의 '과두제의 철의 법칙'의 작동에 대한 그의 유명한 연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노동계급 운동의 과두제 경향에 대응하기 위해, 대중의 지적 수준을 높여 그들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여전히 미헬스는 '모든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과 민주주의 정신에 진정으로 고무된 모든 운동이 과두제 경향의 약화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특정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미헬스, 1962, pp. 368-9).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분명하게 정당화하고 정식화한 '오늘날 사회가 사회주의를 향해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관점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1898~99년에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일련의 유명한 기사들에서 고취한 것은 바로 이 민주주의 정신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완전한 발전에 수반되는 생산과 금융의 집중과 사회화에 의해 지속되는 노동조합과 의회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 개혁은 내재적으로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룩셈부르크는 이러한 유형의 개혁만을 추구하면 '사회민주주의의 일상적 실천 활동은 사회주의와의 모든 연결을 잃게 된다'고 주장했다.(룩셈부르크, 2004e, p. 141).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의 즉각적인 실질적 결과를 … 주요한 목표'로 취급하는 당과 자본가와 노동계급 이익의 양립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전략적 관점이 '빈틈없는 교섭과 슬기로운 외교적 조정의 보상 정책'의 채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명확성으로 예측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분명하고 타협할 수 없는 계급적 관점'에 기초한 혁명적 관점은 당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보일 것이다.
그로 인해서 사라지는 것은 '노동조합과 의회적 투쟁의 위대한 사회주의적 중요성'이었다 - 그것은 바로 '그것들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그것은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직접적인 사회화를 위한 도구로만 간주된다면 그것들은 그들의 추정된 효과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을 위해 노동계급을 준비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역할도 중단된다.' 룩셈부르크는 혁명적 관점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끊임없이 증가하는 모순과 사회 변혁을 통해 이러한 모순을 진압하는 것의 불가피성에 대한 노동계급의 이해의 결과일 것이다. 수정주의의 경우처럼 첫 번째 조건이 부정되고 두 번째 조건이 거부될 때 노동운동은 단순한 조합주의와 개혁주의 운동으로 축소되고 계급적 관점의 전면적 포기를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인다.”(룩셈부르크, 2004, p. 142).
이것은 1890년대 후반에 '지금까지 모두가 동의한' 당의 혁명적 전략을 옹호하기 위해 처음에 명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세기의 전환기 이후부터 사회민주주의의 지배적인 수정주의적 실천을 매우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1914년 세계대전 발발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가 각각 한 편에는 특정한 국가와 지배계급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또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적 관점을 유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역사적 분열로 나아가며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수정주의 관점에 대항하는 혁명적 관점의 표현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유산에 깊이 박혀있는 문제들을 반영했다. 그것은 둘 다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들에 의해 계승되고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첫 번째는 룩셈부르크가 단순히 '붕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모순을 완화하면서 사회주의로의 변형을 용이하게 하는 '적응' 경향이 있다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 이론의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출발점'은 단순히 '일반적이고 재앙적인 위기'가 아니라 '그 자체의 내부 모순'의 결과로 자본주의가 '그것이 단순히 존재 불가능해질 때'로 이동한다는 '근본적 생각'이라고 주장했다.(룩셈부르크, 2004, p. 132).
엥겔스는 1895년에 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원래는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에 출판됐던)에서 그와 마르크스가 – ‘그리고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던 모든 이들이’ - 당시의 조건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제거하기에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것은 틀렸음을 인정했다. 19세기 후반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여전히 '거대한 확장 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했다.(엥겔스, 1960, pp. 191-2).
그러나 세기말에 엥겔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팽창이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쇠퇴의 도래를 가속화했다'는 룩셈부르크의 견해를 일반적으로 공유했다. 카르텔을 통한 자본의 집중에 수반되는 금융 신용의 확산이 자본의 이동성을 허용하여 '속박된 생산력'을 극복한다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맞서며, 룩셈부르크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더 큰 무정부 상태'를 반영할 뿐이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제적 성격과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적 성격 사이의 모순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룩셈부르크, 2004e, pp. 134-9).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과 이후에도 혁명적 전략에 매우 기본적이었던 (실제로, 1930년대의 대공황을 통해 사실로 보였던) 이 관점은 심각한 자본주의 위기를 억제하기 위한 자본주의 국가의 적응 능력이나 자본주의 생산력의 계속적인 역동적 확장을 예견하지 못했다.(파니치Panitch와 긴딘Gindin, 2011, pp. 1-20).
그리고 20세기 초에 세계적 규모의 체계적인 자본주의 붕괴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룩셈부르크의 표현대로 '역사적 필연성'으로 제시한 전략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노동계급 주체적 행위의 중요성에 집착했던 혁명가들에게 사회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개념은 사실 역사에 대한 경제주의적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질적 조건과 모순에 기초하여 노동계급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혁명적 주체로서의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룩셈부르크는 '계급투쟁의 외부에 고정되어 있고 계급투쟁과 무관한 시간을 가정하는 ... 사회 발전의 기계적 개념'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그녀는 -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동만큼 어마어마한 변혁이 단 한 번에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 그 대신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전에 불가피하게 한 번 또는 여러 번 “너무 일찍” 권력을 잡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룩셈부르크, 2004e, p. 15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임박한 붕괴에 기초한 전략적 지향(게다가 룩셈부르크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현재까지 얻은 민주주의적 권리에 대한 부르주아 사회의 포기'에 대한 예상이 결합되었던)과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악을 위한 노동계급의 준비'에 필요한 순수한 시간적 길이와 정치적 공간의 정도에 대한 전략적 인식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분리가 있었다.(룩셈부르크, 2004, p. 153).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의 관점에서 '장악'이라는 그 못지않게 문제가 되는 전략적 개념을 열광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으며, 이는 노동자가 '권력 행사를 위해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과 관련된 '오랜 끈질긴 작업'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이었다.(파니치의 논의를 보라, 1985, pp. 231-40).
룩셈부르크는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닭장'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형태의 사회로의 안내라는 역사상 가장 어마어마한 사회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평화로운 행사' 가능성에 대해 마르크스를 인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룩셈부르크, 2004, p. 157). 그러나 그녀의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20년 후에 그녀의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대한 비판적 논평에서 '독재의 문제'로 아주 유명하게 정식화한 것을 완전히 제쳐 두었다.
“레닌은 부르주아 국가는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의 도구이고 사회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억압의 도구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는 오직 자본주의 국가만이 그것의 머리 위에 서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 단순화된 관점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부르주아 계급 지배는 적어도 특정한 좁은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는 인민 대중 전체에 대한 정치적 훈련과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는, 그것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바로 그 공기와 같은 요소이다.”(룩셈부르크, 2004d, pp. 304-5).
러시아 혁명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은 항상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 사이에서 예외적인 존재였다. 엥겔스로 하여금 봉기가 과거의 일이라고 주장하게 한 1890년대까지 서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은 당시 러시아에서는 단순히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RSDLP는 러시아 제국의 도시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급속한 성장에 기반을 두었지만 훨씬 더 큰 종속계급으로 남아 있는 것은 농민이었다. 20세기 초의 러시아는 1848년의 독일과 훨씬 더 비슷했다, 그로부터 반세기 후의 독일보다는 말이다.
더욱이 러시아의 짜르 정권은 1890년대까지 독일에서 SPD와 그 산하 노동조합이 이용할 수 있었던 정치적 공간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RSDLP의 첫 번째 총회에서 '러시아에서 사회민주당은 지하에서 일하고, 거짓 신분을 만들고, 다른 형태의 속임수에 의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가 명시적으로 말했듯이, '혁명적 규율, 조직 및 지하 활동의 강화와 발전 없이는 정부에 대한 투쟁은 불가능하다.' (알리Ali, 2017, p. 79).
라스 리Lars Lih가 보여주듯이, 전위가 주도하는 정당으로서 RSDLP의 조직은 독일의 대중적 사회민주당 모델에 대한 레닌의 거부라기보다 러시아의 짜르 정권에서 그것을 운영하는 문제에 더 가까웠다.(리Lih, 2005, pp. 517, 527, 547-8). 확실히 레닌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혁명적 분파와 확고부동하게 같은 편에 섰다. <무엇을 할 것인가>(1902)는 사회민주당을 '사회 혁명의 정당에서 사회 개혁의 민주주의 정당으로' 변화시키려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경향'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중대한 책자에서 '혁명적 활동에 대한 훈련'에 가한 강조는 폭력적인 봉기의 기술을 숙달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오히려 헤게모니적 역량을 개발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어떤 계급이 영향을 받든 간에 모든 종류의 정치적 폭정, 억압, 학대 사례에 대응하도록 노동자들이 훈련받지 않는 한, 인구의 모든 계급 계층과 그룹의 삶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실제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적 의식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노동 대중 앞에 정치적 폭로와 정치적 선동을 심화, 확대 및 강화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문제에 대한 폭로를 촉구하며 모든 수치스러운 분노를 충분히 광범위하고 뚜렷하며 신속하게 폭로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당을 통해서만 뿌리를 내릴 수 있다.(레닌, 1970, pp. 175-7).
여기서 강조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을 위해 노동계급을 준비시키는' 당의 핵심 역할 측면에서 룩셈부르크와 유사했다. 그러나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계급으로 조직화되는' 것에 있어서 노동조합과 의회적 투쟁에 그녀보다 훨씬 적은 비중을 두었다. 이는 러시아에서 이러한 모든 활동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감안했을 때 예상되는 결과일 뿐이었다.
그리고 룩셈부르크가 1905년 러시아의 대규모 파업을 SPD가 자체적으로 무엇보다 가장 조정해야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으로 보게 된 것은, 계급적 역량을 발전시키는 면에서 독일 자체에서 노동조합과 의회 활동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척도였다. 이에 대한 그녀의 유명한 1906년 소책자의 중심적 논거는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사회민주당의 계획적 전술의 인위적인 산물이 아니라 자연적인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절대주의적 러시아에서 '현대적 계급 분열의 모든 결과와 함께하는 대규모 산업, 날카로운 사회적 대비, 대도시에서의 현대적 생활과 현대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은 보다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의 전체 사이클이 제 궤도에 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녀는 그 결과로 러시아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부르주아지가 '부분적으로는 직접적으로 반혁명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약하게 자유주의적'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차례로 러시아가 제2인터내셔널의 전략적 고려 사항에 있어 예외가 되기는커녕 선두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현재의 혁명은 절대주의 러시아의 특수한 사건들에서 국제적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인 결과를 실현하고 있으며, 낡은 부르주아 혁명의 마지막 계승자라기보다는 서구의 새로운 일련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선구자로 보인다. 이 가장 후진적인 나라는 부르주아 혁명이 너무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계급투쟁의 길과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룩셈부르크, 1971, pp. 70-3)
이것이 '불균등하고 결합된 발전' 이론과 실질적으로 유사하다면, 그것은 레닌은 고사하고 트로츠키조차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적 함의의 측면에서 아직 주장할 수 없었던 수준을 넘어섰다. 룩셈부르크는 1907년 RSDLP 제5차 대회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대열에 만연한 총파업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태도: 그것은 순전히 무정부주의적인 것이고 해로운 유토피아에 대한 반동적인 슬로건을 의미한다고 생각되었다’를 비난하며 이 같은 문제와 관련한 신호를 보냈다.
그것은 완전히 정확한 것보다 희망적인 생각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파업에서 새로운 형태의 투쟁을 보았다... 그리고 총파업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서두르며, 특정 조건 하에서의 독일에서의 적용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룩셈부르크, 2004a, p. 201).
그러므로 대중파업은 사실상 러시아의 후진성을 나타내며, 독일에서 이를 모방하는 것은 최악의 전략적 실수가 될 것이라는 카우츠키의 확고한 주장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잇따른 논쟁이 이어졌다.(룩셈부르크, 2004f, pp. 208-31). 따라서 SPD에서 혁명가들과 개혁주의자들 사이의 당내 투쟁은 다른 수준으로 옮겨졌고, 이는 곧 다가올 역사적 분열을 예고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또한 대중파업이 일찍이 1904년에 러시아 정당에 대해 드러낸 사실에 대해서도 우려했으며, 이후 그녀는 극도의 중앙집권주의와 전위주의적 파벌주의의 치명적인 결합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독일과 다른 곳에서... 보다 임기응변적 정당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계급투쟁의 위대한 창조적 행위에 직면하여... 전술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의식이 있는 소수의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룩셈부르크, 2004c, p. 256; 또한 2004b pp. 266-80).
어쨌든, 1907년과 1911년 사이에 파업의 물결이 명백히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적 국가 탄압 속에서 RSDLP는 수십만 명이 넘는 회원에서 수천 명의 회원으로 무너졌다. 당의 멘셰비키 분파가 소규모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전략적 동맹을 맺는 것을 점점 더 추구하는 동안, 망명 중인 레닌은 미에빌Miéville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어떤 조각들 – 여기서의 경제 침체, 그리고 저기서의 급진적 출판물들의 상승세 - 도 '전환점'으로 해석하는 가련한 낙관론에 매달렸다."(미에빌, 2017, p. 27).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1912-14년의 새로운 노동반란 급증을 예측하지 못했을 때, 이것은 룩셈부르크의 일반적인 주장, 즉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주도권과 의식적인 지도력은 그러한 발전에서 극히 미미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볼셰비키가 이 시점부터 계속해서 '노동 운동에서 지배적 정치세력'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르블랑Leblanc, 2016, p. xi).
1905년 '피의 일요일' 12주년 기념일인 1917년 1월 9일의 대규모 시위 이후, 2월말에 그것이 무너질 때까지 구체제를 뒤흔든 수많은 시위와 파업의 물결에 발을 맞추는 데 가장 예리하게 적응한 사람들은 볼셰비키였다. 그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이러한 대중적 상승세를 통해 "페트로그라드Petrograd 카페에서 웨이터로 일하거나 피아토고이르스크Piatogoirsk에서 마차 운전사로 일하더라도 '노동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코르너Koerner와 로빈슨Robinson, 1992, p. 135).
당시 언론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가 보여주었듯이, 볼셰비키의 파업 보고서들이 특별히 구별되는 것은 "점포 보조원들과 같은 일반적인 '휴직' 노동자들과 여성 세탁소 직원들의 활동적인 행동은 그 자체로 진정한 정치적 개입의 문제"라는 인식이었다. 더욱이 볼셰비키 신문의 편집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설득력있는 사회주의 편집자들은 파업 운동에 의해 그려진 계급투쟁을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개념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노동력의 다양한 부문들이 자신들의 편협한 이해관계를 버리고 제조업 산업의 한계를 초월한 노동계급으로서 자신을 정체화하도록 독려했다. 여기서 도출한 결론은 특히 중요하다.
“점포 보조원을 가죽 노동자와, 세탁소 직원을 산업 노동자와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이해관계의 광범위한 공통성과 이러한 근거에서 러시아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는 것을 공유할 정당한 권리가 있는 전체 노동자의 '계급'을 시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 이라는 경쟁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임시정부 권위의 기반이 되는 자유주의적 가치도 마찬가지로 약화되었다.”(코르너와 로빈슨, 1992, p. 143).
소련에서 스탈린이 강제로 추방한 후 처음 몇 년 동안 쓴 트로츠키 자신의 기념비적인 러시아 혁명의 역사는 2월 혁명 직전에 있었던 두 가지 중요한 사건과 관련하여 정확히 이것을 포착했는데, 둘 다 대부분의 설명에서 기록되지 않았던 종류의 것들이다. 첫 번째는 노동자들과 코사크Cossack(기병대)의 거리에서의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변호사가 창문에서 그것을 관찰하고, 대리인을 통해서 전달하는... [그것은] 비인격적인 과정의 에피소드였다. 공장에서 온 무리가 막사에서 온 무리에게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감히 윙크를 한 코자크나 코자크가 '친근한 태도로 윙크했다'고 단번에 판단한 노동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군대와 인민의 분자적 상호침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군대의 온도를 주시하고 임계점에 접근하는 것을 즉시 감지했다.”
두 번째 사건에 대한 트로츠키의 설명은 전차 승무원에 대한 상원의원의 분노한 보고서의 인용문에 근거한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이 없던 승무원의 얼굴이 보인다: 성을 내며 단호한, 일종의 늑대의 모습" 그는 거리 시위를 만나자마자 즉시 모두에게 내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주의 관료가 이미 '늑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그 단호한 승무원은 전쟁의 시기에 제국 페테르부르크의 거리에서 관료들도 태운 차를 자기 혼자서 멈추게 하기 위해 높은 의무감에 지배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라이티니 대로Liteiny boulevard의 승무원은 역사의 의식적인 요소였다. 역사는 그를 미리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트로츠키, 1934, pp. 167-8).
이에 따라서 트로츠키는 '자발성'에 대한 그의 뛰어난 비평을 소개한다.
“자발성에 대한 신비주의 교리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상황을 정확히 평가하고 적에게 일격을 가할 순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대중이나 그 지도적 층위가 역사적 사건을 검토하고 그것을 측정하는 기준이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 추상적인 대중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과 러시아인들의 대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중 전체에 걸쳐서 1905년의 경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유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의 헌법적 환상을 비판하고, 혁명의 관점들을 동화시키고, 군대의 문제에 대해 수백 번 숙고해보고, 그것들의 가운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는 흩어진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 그들이 관찰한 것에 대해 혁명적인 추론을 하고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에 혁명적 선전에 의해 장악됐거나 최소한 영향을 받은 진보적인 병사들이 수비대의 병력에 있어야 했다.
모든 공장마다, 조합마다, 회사마다, 각각의 선술집, 군병원에서, 환승역에서, 심지어 인구가 적은 마을에서도 혁명사상의 분자적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로 노동자들 사이에서, 도처에서 사건들의 해석자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소식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로부터 필요한 말을 기다리는가?
이러한 지도자들은 종종 그들 자신에게 맡겨졌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들의 손에 도착한 혁명적 일반화의 조각들에 영양을 공급받았으며, 자유주의 신문들의 행간을 독학하며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연구했다. 그들의 계급적 본능은 정치적 기준에 의해 다듬어졌고, 그들이 가진 모든 생각을 끝까지 숙고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은 끊임없이 그리고 완강하게 한 방향으로 작동했다. 경험, 비판, 진취성, 자기희생의 요소는 대중을 통해 스며들어 피상적으로는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지만, 의식적 과정으로서의 혁명 운동의 내적 역학을 창조하는데 그에 못지않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다.“(트로츠키, 1934, p. 169).
이중 권력
볼셰비키가 2월과 10월 사이에 그랬던 것처럼 지도부 간에 상당한 분열이 없이 점진적으로 전략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이것에 대한 그들의 적응이었다. 비록 그들이 초기에 공식적 사회민주주의 강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에게 여전히 공통적이었던 시기에 '두마'에서 구성된 계급 간 정당 동맹과 관련하여 트로츠키가 지적한 "모호한 공식인 '민주주의 독재'"를 받아들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자신은 어떤 그러한 의회적 동맹에도 참여하지 않았다.(트로츠키, 1934, p. 337).
그들의 날카로운 감각은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들이 뭐라고 약속을 하든지 간에, 그들은 '농민이 원하는 보상없는 토지 개혁'이나 공장에서 채용 및 해고뿐만 아니라 '내부 업무 규칙을 감독'하는 공장 위원회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에 대한 노동자들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요구들은 고사하고, 하루 8시간 노동도 실제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델Mandel, 2016, pp. 119-54).
자산계급의 대표자들과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의 다양한 시도로부터 볼셰비키가 더 크게 거리를 두면서, 그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점점 더 커졌다. '이중 권력dual power'이라는 새로운 개념 - 볼셰비키 전략의 중심에 있는, 노동자와 병사 평의회('소비에트')에 있는 다양한 계급의 대표자들에 의한 임의적인 민주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개발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10월 봉기 직전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강경한 슬로건 아래 즉각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지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기 전까지 지도부 내에서는 커다란 논쟁을 수반하는 많은 가다서다가 있었다.
확실히, 이것은 레닌이 이른 봄에 망명지에서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의 성향이었다. 나중에 트로츠키가 얼마나 ‘경험, 비판, 진취성, 자기희생의 요소는 대중을 통해 스며들어 피상적으로는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지만, 의식적 과정으로서의 혁명 운동의 내적 역학을 창조하는데 그에 못지않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를 관찰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레닌의 유명한 4월 테제 - 이미 '혁명의 첫 단계부터... 두 번째 단계까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가장 가난한 부분들의 손에 권력을 넘겨야 한다'는 경로를 선포했다(알리Ali, 2017, p. 162) - 는, 반혁명주의자들이 ‘집권하자마자 착수하는 무책임한 사회주의 실험’이라고 조롱했던 것을 시작하려는 의도로 그 중심메시지가 주로 구상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약한 고리에서 자본주의 사슬을 끊는 것과 전략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 - 즉, 끔찍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참여를 결정적으로 끝내는 것은 독일과 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다른 곳에서 혁명을 고무시키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여전히 이것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실행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필수불가결 조건으로 보았다.
취약하고 동요하는 케렌스키Kerensky 정부에 대한 친짜르 반혁명이 성공할지 모른다는 축적된 감각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러시아의 지속적인 참전의 고통과 혼돈에 대한 널리 퍼진 뚜렷한 분노가 10월 혁명에 대한 대중의 거대한 지지의 배후에 있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만델David Mandel은 그것에 대하여 추가로 결정적인 요소가 전투적이고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 사이의 두려움이었다는 완전히 설득력있는 평가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에게 볼셰비키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905년 봉기로 깨졌던 장기간의 봉쇄에 고용주들이 다시 의지할 것이라는 문제에 가장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후에 일어난 일에 관해서도, 그는 그것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있다. ‘수도의 볼셰비키 조직은 10월 혁명 다음 해에 거의 사라졌다.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노동자들 -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볼셰비키 당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 은 이제 인민이 권력을 장악한 지금의 임무는 소비에트에와 경제적 집행부서들에서 일하고 적군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느꼈다.’(만델, 2016, p. 162).
여기에 쉴라 피츠패트릭Sheila Fitzpatrick의 통찰력 있는 관찰이 추가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관료제의 작동에 관한 제도적 이해는 전혀 거의 알지 못했던... 급진적 지식인’들이 낡은 국가의 가장 높은 직위에 들어서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의 구성원들은 당규율에 묶여있는 사회주의자가 특정 부문(산업, 교육, 군대)을 담당하게 되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합의가 도출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피츠패트릭, 2015, p. 184).
전체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 혁명적 활동의 전체적 목표라는 개념은 항상 반혁명주의자들의 상상력의 산물이었거나 그들의 이념적 도구 상자에서 냉소적으로 배치된 화살이었다. 반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입장은 항상 혁명 자체에 대해서는 불가피성보다 우발성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나, '문제가 혁명의 스탈린주의적 결과에 적용될 때는 우발성이 아니라 불가피성을 주장'했다.(피츠패트릭, 2017, p. 13).
소련에 대한 피츠패트릭의 모든 위대한 역사적 저작들은 외부에서 볼 때 당과 국가가 훨씬 덜 획일적이거나 덜 관료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레닌에서 스탈린의 지도부와 심지어 후자의 기층으로의 직접적인 이동은 없었다. 관료적 국가주의에 대한 레닌 자신의 반감은 10월 혁명 바로 직전에 쓰여진 <국가와 혁명>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전시 독일 국가(특히 우체국)의 계획 역량의 일부 측면을 칭찬하면서 그의 중심 관심사는 혁명을 만드는 과정에서 형성된 소비에트를 기반으로한 '노동자'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를 '편의시설과 편리함'과 같은 것들로 대체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크라우즈Krausz, 2015, p. 183).
그것이 가능성에 대한 냉정한 평가라기보다 비현실적인 수사학으로 간주되더라도, 레닌은 또한 '비숙련 노동자나 요리사가 즉시 국가 관리의 일을 맡을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점에서 자신이 '유토피아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요점은 '부유한 집안에서 뽑힌 관리들만이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편견에 도전하면서 레닌이 혁명의 중심 과업을 노동자들을 이 과업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10월 혁명 이후에 레닌이 새로운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발표한 "대중에게"라는 첫 번째 선언문은 분명히 이러한 관점을 반영했다. ‘동지들이여, 일하는 사람들이여! 이제 여러분 자신이 국가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 자신이 단결하지 않고 국가의 모든 일을 손에 넣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소비에트는 이제부터 국가 권력의 기관, 완전한 권한을 가진 입법부입니다.’(레닌, 2016, p. 173).
노동자와 군인이 1917년 동안 소비에트를 통해 발전시킨 능력이 무엇이든, 그들이 그러한 권고에 얼마나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가 가장 가혹한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자본주의 국가의 군사적 및 기타의 개입과 독일 혁명의 실패로 인해 더욱 악화된 내전 기간 동안에 말이다. 미에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압박 속에서, 몇 달과 몇 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만과 고통, 기아, 대량 사망, 산업과 문화의 거의 완전한 붕괴, 강도, 포그롬[증오범죄], 고문, 식인 풍습이 있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정권은 자체적인 붉은 테러를 개시했다.’(미에빌, 2017, p. 311).
혁명가들이 구상하고 약속한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1918년부터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이라고 불리는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면,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가 나중에 통찰력 있게 말했듯이, 그것은 '계급 자체가 아니라 기껏해야 계급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볼셰비키가 '단순히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집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공화국의 운명을 자신들의 운명과 동일시하면서 - '혁명을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서 야당을 금지하고,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소비에트를 새로운 당-국가의 대리인으로 재구성한다 - 그들은 '굶주리고 감정적으로 흔들리던 국가가 그들의 정당에게서 권력을 박탈하고 피비린내 나는 혼돈에 빠지도록' 허용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럼에도 그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혁명에서 자신들을 지지한 노동계급의 대다수가 사회주의의 전체 강령을 완전히 수행할 때까지 변함없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했다. 순진한 가정이었지만, 사회주의는 탁월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일단 그것을 고수했다면 그것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주의를 수립하려는 시도가 가능한지 또는 용인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도이처, 1954, pp. 505-6).
로자 룩셈부르크가 10월 혁명의 첫 해에 알아차린 것이 곧 그 결과를 결정적으로 나타내게 될 것이었다. 혁명정당 자체가 '실제로는 12명의 뛰어난 지도자들만이 영도를 하고 노동계급의 엘리트들이 때때로 집회에 초청되어서 지도자들의 연설에 박수를 보내고 제안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하는 '파벌적 업무'가 될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예견한 가장 큰 위험은 '총선거가 없고, 무제한적인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고, 자유로운 의견들의 논쟁이 없다면, 모든 공공제도의 삶은 죽어버리고 단지 삶의 겉모습만 남아서 관료주의만이 활동적 요소로 남아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룩셈부르크, 2004d, pp. 304-6).
레닌 자신은 1923년에 인민의 행정을 위한 능력 개발에 사실상 진전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국가 기관이 '차르 체제에서 많은 부분을 물려받은 위압적이고 중앙집권적이며 무자비한 러시아 관료제'의 모든 흔적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한탄했다. 타마스 크라우즈Tamas Krausz는 최근에 레닌이 죽기 직전에 도달한 이러한 진퇴양난적 결론을 적절하게 요약했다.
“역사적 상황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부과된 한계 때문에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독재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제한된 마르크스주의적 대답만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남아있고 점점 더 강력해지는 국가 권력에 맞서서 '노동계급은 자신의 국가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정치적 억압을 보상하려고 했다. 그는 바로 그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은 국가에 맞서야 하면서도 동시에 국가와 그 모든 제도를 방어해야 한다. 그러한 모순에 대한 변증법적 해결책은 없었다.” (크라우즈, 2015, pp. 342, 368).
이것이 노동계급의 의식과 민주적 역량에 미치는 영향은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인 1990년에 볼가 자동차 공장의 지역 노동조합 위원회 지도자가 표현한 바에 냉정하게 잘 포착되었다. ‘노동자들이 후진적이고 저발전한 것은 1924년 이래로 실질적인 정치 교육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당에 의해 바보로 만들어졌다.’(파니치Panitch와 긴딘Gindin, 1992, p. 19).
여기서의 말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은 단지 바보처럼 속은 것이 아니라 바보로 만들어졌다. 그들의 민주적 역량이 훼손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체제에서 '뒤틀린 노동자 국가'라기 보다는 뒤틀린 노동계급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실질적인 교훈이 있다. 혁명정당이 길고 적극적인 계급 형성 과정을 거친 후 사실상 '민주주의의 극대화'를 가져오는 국가의 변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 결과는 계급의 변형이 될 것이다.
결론들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의 21세기적 관점에서 볼 때 제2 인터내셔널 내부의 혁명가들의 이해 -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점진적으로 전향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자본 집중과 사회 개혁은 기껏해야 자본주의 내부의 특정한 모순과 갈등만 개선하는 한편 다른 것들은 더욱 심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 가 완전히 옳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더욱이, 점점 더 불안정하고 비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외국인 혐오적 호소 앞에 정치적으로 벌거벗은 채로 남겨진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의 위태로운 상태는 계급 형성에서의 역할을 통해 민주적 역량을 개발하는 데 참여하는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 부재의 결과를 우울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계급 형성과 국가 변혁 사이의 지렛대와 같은 정당의 역사적 중요성과 함께 우리가 시작했던 곳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다 준다.
우리가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완을 멈출 수 없는 것은 향수의 문제가 아니다. 40년 전 시모네 시뇨레Simone Signoret가 이미 자서전 제목을 '노스탤지어는 지나간 문제가 아니다'라고 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시뇨레, 1976). 또한 '과거의 패배한 혁명'에 사로잡혀 현재에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좌파의 우울증'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 엔조 트레버소Enzo Traverso가 '생산적 우울증'이라는 개념에 부여하려는 놀랍도록 긍정적인 선회를 효과적으로 무효화한다.
‘사회주의 사상이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기억이 상실되고, 숨겨지고, 잊혀지고 보완될 필요가 있는 시기에 사회주의를 다시 생각해 본다는 의미이다. 이 우울증은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비혁명적 시대에 혁명적 프로젝트를 다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트레버소 Traverso, 2016, p. 20).
1968년의 격렬한 정신의 각성 이후 새로운 레닌주의 정당들을 통해 '혁명적 프로젝트를 복구'하려는 다양한 시도는 그러한 다시 생각하기를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불모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랄프 밀리반드Ralph Miliband는 1976년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에 실린 그의 유명한 '다음으로Moving On'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모든 조직은 1917년 10월 볼셰비키 모델에 따른 혁명적 권력 장악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주의적 변화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출발과 도착의 공통 지점이며, 그들의 전체 존재 양식을 결정하는 대본과 시나리오이다.’ 어떤 타고난 '종파주의, 독단주의, 모험주의, 권위주의'라기보다 이러한 '기본적 관점'이 그들이 '대중 정당이나 심지어 큰 정당이 되지 못한 이유'뿐만 아니라 '전혀 정당이 되지도 못한 이유'까지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낳은 '고립은 그들의 불편한 특성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는 생성했다.'(밀리반드, 1976, pp. 138-9).
1989년과 1991년 사이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의 최종 몰락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사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사례에도 불구하고 급진화된 1960년대 좌파 세대에게는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의 역사 궤적이 이미 훨씬 전에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는 사실은 1990년대에 블레어의 '제3의 길' 같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겁한 수용으로 나타난 '상상력 없는 현실주의'[의 도래] 전에도 이미 알 수 있는 바였다.
공산당과 사민당의 전통적인 노동계급 지지자들은 21세기 초의 기괴하게 증가하는 계급 격차(선진적 자본주의, 선진적 불평등, 혹자는 그렇게 부를 것이다)에 대한 어떤 – 물질적은 물론이고 - 이데올로기적 완충 장치도 없이 남겨졌기 때문에, 오늘날 그들이 정치적 불량배들의 애국주의에 희생양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50년 동안 공산당과 사민당의 누적된 실패는 광범위한 범위에서 '운동주의'를 향한 급진 좌파의 뚜렷한 이동을 동반했다. 압력 단체이든 시위 지향적인 차원이든.
조디 딘Jodi Dean이 최근 주장했듯이, 그렇게 해서 '정당의 제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그것의 오류들의 실재'로 축소시켰으며, 그러면서 '집단적 열망과 영향의 집중체로서의 역할은 그것이 잊혀지거나 축소되었다.' 그녀는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운동의 행위자들이 '모든 의도와 목적이 본질적으로 일회성인 대중 시위와 무정부주의적 거리 투쟁의 즉자적 지역주의, 이슈 및 정체성 중심적 행동주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정치의 한계를 점점 더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정당 형태의 정치적 가능성을 다시 생각하면서 다시 조직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관찰한다.(딘, 2016, pp. 202-3, 205)
이것은 또한 새로운 정당들 사이에서 시리자Syriza와 포데모스Podemos에 더하여 낡은 정당들에서도 ‘코빈/모멘텀Momentum’과 ‘샌더스/우리의 혁명Our Revolution’의 반란에 대한 중요성뿐 아니라 불충분함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파니치와 긴딘, 2016). 이들은 오래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의 자체 기반에서조차 심각한 동원 해제 효과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분명히 볼셰비키 모델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21세기의 매우 다른 조건에서 이 두 가지를 계승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정당 형태가 나타날 것이며, 국가 변혁은 물론 계급 형성에도 영향을 미칠 것인지 모든 것은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매우 분명하다. 한때 역사적 유물론의 목적론적 표현에 동력을 제공하는 증기기관차처럼 취급받고 역사의 정치적인 쓰레기더미로 밀려난 것으로 보이던 정당에 관한 문제는 명백히 좌파의 의제로 돌아왔다.
(기사 등록 20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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