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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프란츠 파농 - 알제리 혁명과 그 너머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4. 10.

피터 후디스PETER HUDIS

번역: 두 견

남반구에 대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정치적 비전에는 추상적인 것이 없었다. 그것은 알제리 해방 투쟁에서 단련되었다. 그 투쟁에서 파농의 역할은 사회 혁명 없이는 민족 독립이 공허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글은 파농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정치의 열정적 선구자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내용의 한계에 대해서도 결코 간과하지 않고 깊이 고민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고민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이 글의 필자인 피터 후디스는 구소련 사회에 대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오크톤Oakton 커뮤니티 칼리지의 철학과 교수이자 <프란츠 파농: 바리케이드의 철학자>의 저자이다.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22/01/frantz-fanon-algerian-revolution-wretched-of-the-earth-legacy-decolonization

지난해 125일 프란츠 파농의 서거 60주기를 맞아 그의 유산에 대한 여러 가지 고찰들이 있었다. 일부는 파농이 그의 "유언"이라고 부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아프리카 혁명에 대한 그의 선구적인 평가인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The Wretched of the Earth>은 그가 서른여섯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하기 불과 몇 주 전에 완성되었다.

출간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3세계 혁명의 성경"이라고 칭송했지만, 이 책은 아시아, 중동,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발전들에 대해 일시적인 언급만 할 뿐 당시 활동했던 많은 아프리카 해방 운동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제공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것의 초점은 1953년 알제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저자가 직접 참여한 알제리 혁명에 대한 상세한 매개이다.

알제리의 지렛대

파농이 알제리 혁명을 더 넓은 아프리카 혁명의 지렛대이자 선봉장으로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제국주의가 1950년대 후반까지 아프리카 식민지에 정치적 독립을 양보하려고 했지만 알제리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이 나라에는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럽 정착민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사실상 사회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프랑스의 모든 주요 정치 경향은 이 나라의 독립을 반대했다. 파리는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수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반란 진압 전쟁으로 거의 백만 명이 죽었다.

파농은 만일 알제리 혁명이 패배하거나 유럽 식민주의가 만들어낸 비인간화에 대한 대응으로 새로운 휴머니즘을 낳지 못한다면 새로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신식민주의의 더 교묘하지만 그만큼 음험한 힘에 종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은 부분적으로 알제리 대중의 10년간의 무장 투쟁 과정에서 생겨난 창조성과 자기 조직화의 분출을 찬양한다. 파농은 이 책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 이렇게 썼다.

“탈식민지화는 결코 간과될 수 없는데, 이는 그것이 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며, 하찮은 상태에 짓눌린 관객을 역사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거의 숭고한 방식으로 포착된 특별한 행위자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새로 독립한 국가들이 인종화된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물신화된' 형태의 인간 관계를 뿌리 뽑을 수 있는 사회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권위주의, 종족적 배타주의, 부족주의로 퇴행할 것이라고 엄중한 경고를 했다. 파농이 예언적으로 말했듯이, “민족주의가 설명되지 않고, 풍부해지고, 심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매우 빨리 사회적, 정치적 의식, 인본주의로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투사로서의 파농

파농은 원래 혁명의 일부가 되기 위해 알제리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알제리 외곽 빌다-조인빌Bilda-Joinville의 정신과 의사로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령 카리브해 섬 마르티니크Martinique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북아프리카 사회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으며 아랍어나 커바일어Kabyle를 구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빨리 배우는 사람이었으며, 1954111일 민족해방전선(FLN)이 혁명을 시작한 이후 조직의 지지자이자 나중에는 대변인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농은 그때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1959년부터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나라들의 순회 FLN 대사처럼 활동하며 알제리 독립을 위해 온전히 헌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혁명에 대한 지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그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농은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을 쓰기 오래 전부터 FLN의 방향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통일된 대중의 얼굴을 투영했지만 모든 해방운동과 마찬가지로 FLN은 수많은 정치적 경향들을 포함했다. 일부는 FLN 사령관 슬리마네 데힐레스Slimane Dehilés(일명 사데크Sadek 대령)와 같이 파농이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일찍이 1955년에 FLN의 마르크스주의 분파의 일부로 여겨졌던 데힐레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더 중요한 것은 람다네 아바네Ramdane Abane이었다. 아바네는 1955년 알제리에서 FLN의 주요 조직자가 되었고 1956-57년에 유명한 알제리 전투의 설계자가 된 세속적 사회주의자였다. 파농은 아바네와 동맹을 맺었고 많은 면에서 그의 정치적 멘토로 여겨졌다. 1954년 말 대중에게 등장할 당시 FLN은 목표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했지만 이 "로네오드Roneoed 선언"은 운동의 이데올로기, 구조 및 궁극적 목표에 대해 모호했다.

FLN의 방식과 방향에 대한 내부 분열이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568월 숨맘Soummam에서 이러한 이견을 해소하기 위한 비밀스러운 회의가 열렸다. 파농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아바네의 주도로 그곳에서 채택된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러한 입장에는 군 지휘관보다 FLN의 정치적 지도력이 우선시되고 알제리 외부에 있는 세력들보다 "내부 세력"의 우선 순위에 대한 강조가 포함됐다.

회의는 또한 FLN이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기반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결의했고, 프랑스에서 그 대의를 위한 지지를 얻을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독립 후 알제리에서 유대인과 유럽인 소수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약속했다.

FLN 내부의 균열들

그러나 FLN의 급진적이고 세속적인 사회주의 세력과 아랍-이슬람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더 보수적인 세력 사이에 긴장이 지속되고 곪아갔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FLN의 망명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페르하트 압바스Ferhat Abbas에 따르면 아바네는 군 사령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군사력에 기초한 힘을 만들었지만 정치는 다른 문제이며 문맹과 무지로는 할 수가 없다.”

또 다른 경우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독립 알제리를 위해 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정확히 반대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절대 권력은 도전받지 않고 지배할 수 없다." 파농은 아바네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FLN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지지하지 않았다. 나중에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독립 알제리의 초대 지도자가 된 아흐메드 벤 벨라Ahmed Ben Bella는 숨맘 회의에 반대했던 아바네의 경쟁자였다.

1957년 여름, 그는 압델하피드 바우스프Abdelhafid Boussouf 와 라크다르 벤토발Lakhdar Bentobbal의 도움을 받아 아바네를 FLN 지도부에서 몰아냈다. 파농은 후자의 두 인물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친구에게 그들이 "독립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상상하지" 못하면서 "지속적으로 권력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미래의 알제리가 어떤 모습일지 물어봐도 그들에게는 실마리가 없다. 세속 국가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 그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이것들은 그들에게 완전히 낯선 것들이다... 그들은 이 새로운 알제리에서 권력을 갖기를 원하지만, 그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 스스로도 모른다. 그들은 단순한 진리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 혁명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파농은 여전히 FLN에 완전히 충성을 다했고, 아바네가 불가사의하게 "실종"됐다고 했을 때도 공개적으로 그러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 1962년에 집권한 이후, FLN은 그의 동료 지도자 중 일부가 그를 살해했다고 인정했다.

아바네의 죽음은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파농을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FLN 내부의 의견 불일치를 드러낸다면 프랑스 제국주의가 이를 이용하여 운동을 분열시킬 것임을 이해했다. 파농은 강력한 적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에 참여하는 혁명적 조직의 일원이 될 때 수반되는 규율을 받아들였다.

독립에 대한 파농의 비전

여러 해 동안 파농과 긴밀히 협력했던 앨리스 체르키Alice Cherki는 그가 인생의 말년에 가장 걱정하던 부분 중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농은 독립 이후 알제리에서 나타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걱정했다. 전망은 어두웠다. 다른 사람들이 중단한 곳에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된 새로운 부르주아지, 또는 다른 종족들 간의 권력 투쟁, 또는 국가의 본질을 결정하는 데 성공할 종교 운동 등.”

이러한 우려는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에서 그의 주장을 직접적 근거로 삼았다. 알제리의 민족해방 투쟁은 농민, 도시 노동자,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민족 부르주아지로 구성된 다중계급적 운동이었다.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후자 계급의 구성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농은 권력을 잡으면 그들이 퇴행적 구실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족 의식의 함정"이라는 유명한 챕터는 아프리카 맥락에서 민족 부르주아지를 경제적 힘이나 사상이 없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기생 계급으로 묘사했다. 집권하면 대중을 희생시키면서 편협한 자기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러므로 저개발국에서 진정한 민족적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소명은 부르주아지이자 자본의 도구라는 지위를 부인하고 인민이 대표하는 혁명적 중심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파농은 이것이 지난 50년 동안 저개발 국가의 역사를 다룰 때 제기되었던 이론적 문제, 즉 부르주아적 단계를 효과적으로 건너뛸 수 있는지 여부를 제기했다고 썼다. 여기에서 "지난 50"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의 기간을 말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짜르 체제 전복 이후에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지도력 하에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했다.

당시 러시아는 저개발 국가였으며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로의 즉각적인 이행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지도부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나중에 러시아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이론적인 교훈을 중국과 같은 다른 저개발 국가로 확장했다.

파농은 부르주아적 단계는 논의해봐야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역사적 논쟁을 당대의 아프리카 혁명과 관련시켰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했는가? 파농은 몇 년 전 자신이 정기적으로 기고했던 튀니스 망명 생활에서 발행된 FLN의 신문인 엘 무자히드El Moudjahid의 기사에서 이 문제를 처음 언급했다.

"민주주의 혁명"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알제리에서 민족해방 전쟁은 민주주의 혁명과 구별할 수 없다." 이 민주주의 혁명에는 두 가지 구성 요소가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으로 간주되는 개인에 관한 현대 인본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끌어낸다. 개인의 자유, 시민의 권리와 의무의 평등, 양심과 집회의 자유 등 개인이 자신의 판단과 주도권을 자유롭게 꽃피우고 발전하며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것을 말이다.”

민주적 다원주의를 이보다 더 강력하게 옹호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파농은 한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억압과 폭정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사상은 권력의 개념으로 정의된다. 이 경우 모든 권력과 주권의 근원은 인민에게서 나온다는 뜻이다.” 분명히 그는 민족적 독립이 부르주아지보다 대중의 통제 하에 있는 민주적 공화정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한 정치적 틀만이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에 안녕을 고하면서 혁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분권화하는 정치

파농은 "민족적" 의식에서 "사회적" 의식으로, 식민 지배에서 사회주의적 미래로의 전환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인민 대중을 근간으로 하는 철저한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 독립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알제리의 경우 인민대중의 대다수는 농민이었다(파농은 추정에 따르면 인구의 82%).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민족적 독립의 달성은 '빈 껍데기'가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렇다면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모든 권력과 주권의 원천이 인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주의적 전환을 어떻게 구상했는가? 그 중심에는 탈중앙집중화가 있었다. 당시의 거의 모든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이 수용한 중앙집권적 개발 모델에 반대하여 파농은 "데미우르고스demiurge(조물주)가 인민이고 마법이 오직 그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최대한 분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도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 관리들은 한 장소에 상주하지 말고 농촌 및 도시 대중과의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야 한다. 이것은 그가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반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국유화가 경직된 국가 통제의 양상을 띠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3차 부문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사고팔기 위한 협동조합을 민주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을 공적인 업무 관리에 참여시켜 이러한 협동조합을 분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파농은 단일한 정당이 혁명의 "전위"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일당 국가를 현대적 형태의 부르주아 독재 가면과 분장과 양심을 벗고 모든 면에서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며 강력하게 그의 반대 의견을 선언했다. 물론 그는 정당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와 마찬가지로 당도 최대한 분권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농은 FLN의 대사로서 널리 활동하면서 중앙집권화된 단일 정당 국가들이 과메 은크루마Kwame Nkrumah의 가나Ghana, 세쿠 투레Sékou Touré의 기니Guinea 같은 보다 급진적 이미지를 가진 나라들을 포함하여 당시 새롭게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이 정치적 모델이 알제리 민중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자"라고 선언한 FLN이 건설하고자 열망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파농은 독립 투쟁 기간 동안 통합된 민족해방 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일관되게 옹호했다. 그러나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필요했던 정치적 형태는 독립을 성취한 후에 목에 걸치는 올가미가 될 수 있었다. 바시르 아부마네흐Bashir Abu-Manneh는 최근에 “<버림받은 자들>은 파농이 계급 정치가 기본이 되는 그의 대안적인 정치적 세계관을 발전시킨 곳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식민주의가 지배하는 한 민족적 투쟁이 우선순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류가 민족주의적 요구의 단계를 넘어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그와 반대로, 그 무거운 결과와 함께, 민족적 단계를 놓치는 것이 실수라고 믿는다.” 파농은 민족적인 것에서 사회적 의식으로의 이동이 전자를 뒤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가 아닌 민족적 의식은 우리에게 국제적 관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식민화된 세계를 규정한 인종차별주의의 초월은 민족의식이나 인종적 자긍심을 추상화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아가는 것으로 성취될 수 있었다. 해방으로 가는 인종을 삭제한 길은 없었다. 그러나 파농은 정치 엘리트가 인종 또는 민족 정체성을 오용하여 대중이 자신의 권력과 특권에 도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은 어떤 접근 방식에도 맞서는 날카로운 경고였다.

민주주의와 해방

파농의 모든 작업을 찬양하면서도, 많은 작가들은 철저한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헌신의 깊이는 등한시한다. 그가 민족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판을 일반 수준에서 하고 알제리나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 그 개인이나 조직적인 장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세네갈의 레오폴 상고르Léopold Senghor나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 Houphouët-Boigny와 같은 신식민주의에 대한 타협자들에게만 그러한 비판이 적용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파농은 또한 아프리카 혁명 내의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경향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제도적 수준에서 민족적 부르주아지는 의회적 단계를 건너뛰고 국가 사회주의적 형태의 독재를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두들겨 맞고 침묵 속에 갇힌 후 지하로 쫓겨났다.”

대중에 철저히 기반을 둔 민주적 통치에 대한 파농의 헌신은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가 엄청난 다수의 이익을 위한 엄청난 다수의 자의식적이고 독립적인 운동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아프리카에서 엄청난 다수를 구성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농민이었다. 그래서 파농은 그들을 혁명적 주제로 지목했다.

"올바른" 전위 정당이 이끄는 소수파적인 노동계급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에게 완전히 낯설었다. 민주적 통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혁명적" 군대에 종속된 농민이 동일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파농은 마르크스주의 좌파와 민족주의 혁명적 좌파 모두에서 지배적인 경향의 대부분과 모순되는 입장을 내세웠다.

아프리카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역할에 대해 파농은 경험적으로 옳았는가? 증거에 따르면 그가 너무 성급하게 글을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비판한 많은 이들도 농민들이 결코 독립적인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데서 너무 성급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시대의 맥락에서 다루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의 민주주의적 전환 개념의 동시대적 관련성을 살펴봐야 한다.

지난 60년은 파농이 구상했던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전환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경향의 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접근 방식은 계속해서 실패로 이어졌다. 오늘날의 사회운동은 이러한 경험의 교훈을 흡수하여 운동이 직면한 모든 이슈에 대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공개 토론이 특징인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인 형태를 일관되게 채택하고 있다. 그들의 실천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파농의 새로운 휴머니즘에서 발견된 통찰력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것은 그의 생각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이것은 파농이 우리에게 부르주아 사회를 뛰어넘는 방법에 대한 어떤 청사진을 제공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마지막 작업에서 여전히 이러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고 있었고 많은 문제들을 손대지 못하고 두었다. 비록 그는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의 모든 페이지에서 알제리를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 책은 FLN이나 그 주도적 인물들과 경향들을 명시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독립을 위한 싸움은 여전히 그 당시에 진행 중이었고, 파농은 그것을 약화시킬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고 전념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의 역사적인 시기의 약점을 반영했다. 열린 토론의 전통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 때부터 1920년대 초까지를 특징지었지만 스탈린주의의 발흥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묻어버리고 억압하며 대부분 잊혀지게 했다.

이것은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 운동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FLN과 같은 이들을 포함한 전 세계 혁명가들의 접근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행히도 오늘날 우리는 다른 현실에 직면해 있어서 파농 사상의 해방적 내용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

(기사 등록 202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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