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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구할 수 있었는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9. 6.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그가 공산당의 총서기가 됐을 때에는 저는 13살이었습니다. 이미 정치 의식이 형성돼 가는 나이인데, 그 당시를 충분히 기억합니다. 그가 총서기로 임명되고 나서 머지 않아 "2의 수도"인 레닌그라드를 찾아 왔는데, 저는 적지 않게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는 길거리 사람들, 노동자들과 준비된 연설문도 없이, 즉석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죠. 이미 의례화되고 "즉석 발언"이라고 없는 공산당 최고급 간부들의 "스타일"과 사뭇 다른 태도임으로, 뭔가가 기대를 걸 만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처음부터요.

그의 태도를 보면 오히려 1920년대의, 달변이고 노동자들과의 대화에 자신이 있는 책 속의 당 지도자들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마르크스를 통 읽지 않았다는 브레즈네프 등과 달리 그는 레닌과 플레하노프 등을 실제로 읽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좀 감동적이었습니다. 주로 경제 관리자 격인 간부들이 차지했던 최고위직에, 오래간만에 진짜 사회주의나 마르크시즘에 유관심한 "별종의 간부"가 오른 것 같아, 좀 좋은 예감이었습니다. 1985년 그 당시에 말이죠.

물론 고르바초프 개인이 - 소련 후기의 최고급 간부의 대부분과 달리 -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해서 그의 개혁은 "사회주의의 강화" 쪽으로 실제로 갔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의 명분은 마르크시즘 내지 사회주의 건설이었다 해도, 실질적으로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국가가 외국 또한 국내 개인 자본을 대체한 특별한 종류의 개발주의 사회이었습니다. "적색" 개발주의 모델은, 1980년대에 심각하게 삐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본래 이 모델에서는 농업 부문의 잉여를 (저곡가와 농촌에서의 저임금 등을 통해서) 빼내 신규 공업 투자를 국가가 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미 공업화가 다 된 1980년대 소련에서는 농촌에서 더 이상 빼낼 만한 잉여라고 없고 반대로 국가의 보조금이 들어가야 할 부문이 된 것이죠. 그러니 해외 투자나 암시장에서 돌고 도는 돈을 합법화해 투자하게 하는 방식이 요구됐지요.

둘째, 본래 이 모델에서는 기술을 해외 선진국에서 그냥 빠른 대로 사들여 소련에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추격형 개발을 노렸습니다. 1930년대의 스탈린식 공업화는 거의 전부 미국, 독일 기술로 이루어졌습니다. 전후에도 예컨대 이탈리아 Fiat의 기술을 사들여 1967-9년에 톨랴티에서 "라다" 자동차 공장을 세우는 등 같은 방식을 일부 추진했지만, COCOM 등 미국 주도의 냉전 시기 대소련 수출 조절 기구의 통제 때문에 최첨단 기술을 사들일 수도 없고 자력 개발도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IT쪽에서는 1980년대의 소련은 미국에 심히 뒤쳐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기본적인 민주적 참여가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당원이 아닌 상당수의 인민들은 노동에의 열의나 관심을 잃어 공장에서 보드카를 퍼마시고 좀도둑질이나 하고 있는 것은 이미 "참사" 지경이 된 겁니다. 당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상당수의 구성원들이 "태업"을 하고 있었던 거죠. 어떤 방식으로든간에 당은 대중들과 다시 소통을 해서 그 태도를 바꾸어야 했습니다.

이 문제들을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저 "땜질" 방식, 예컨대 위로부터의 "통제 강화" 방식으로 이미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오야붕이었던 유리 안드로포브가 1982년에 총서기가 되고 나서 비밀 경찰을 총동원해 노동 시간에 술 마시거나 영화 보고 여유를 즐기는 "태업 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고, 전체 경제의 30-40%에 이르는 암시장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총서기가 되고 나서 또 주류 판매 제한 조치를 취하고 "알콜 중독과의 투쟁"을 벌였지만, 주류 판매에 의존했던 소련의 재정에 큰 타격을 입혔을 뿐, "태업"이라는 현장의 상황을 타개하지 못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총서기가 되고 나서 일체 공장에다 독립적인 품질 관리 기구를 세워 품질 관리 강화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불량품 비율이 약 30-40%이었습니다.

인민들이 파업 투쟁 같은 것을 벌이지 못해도 엄청난 규모의 기업주 격인 "-국가"의 요구대로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열심히 근로"할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업자도 노동 이민도 없었던 "완전 고용"식 소련 경제에서 이 "일 안하려는 인민"들을 해고하여 "열심히 하는" 노동자로 대체할 수도 없었던 것이죠. 무종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페레스트로이카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계산은 대략 이랬습니다. 그는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해서 동유럽을 서방에 양보함으로써 1. 서방의 투자와 기술을 받고 2. 소련 군비와 동유럽 위성 국가 유지 비용을 줄여 3. 대중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해 그들과 당의 관계를 보다 좋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는 서방 자본과의 합작 기업소 등은 그 노동자들에게 보다 높은 임금을 받게 하여 소련 인민들의 삶이 윤택해져 당에 대한 태도가 개선되길 바랐습니다.

일단 대공장들에다 독립적 가격 책정 권한과 대외 경제 교류의 권리, 노동자 임금에 대한 자율적 인상의 권리를 주어서 공산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대도시 대공장 노동자들의 환심을 사려 했습니다. 그리고 경쟁 선거, 즉 민주화를 도입함으로서 자신에 대한 전반적인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했습니다.

얼핏 보면 그럴싸한, 상당히 괜찮은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그 계획대로 갔다면.... 아마도 소련은 사회민주당이 된 공산당과 자유주의 정당이 교대로 권력을 쥐곤 하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돼도 나름의 자율성을 계속 보유하는 혼합 경제의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 계획의 성공적인 실천이 두 가지 변수에 달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서방의 대소련 투자 의욕 및 기술 이전 용의, 둘째 사회민주당으로 되려 하는 혁신적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바닥 민심"의 지지 여부, 셋째, 경쟁 없는 시장에서의 대공장의 임의 가격 책정 등 물가 인상이 몰고 올 인플레이에 대한 국가의 통제 능력 등이었습니다.

대단히 아쉽게도 이 세 가지가 결국에 다 안 된 것입니다. 서방은 임금이 아주 싸고 인구가 매우 많고 (그 당시에는) 정치적 부담이 없어 투자하기가 편했던 중국에 올인했지, 이미 상대적인 임금이 높았던 소련을 외면했습니다. 기술 이전 제한의 상당 부분은 당장에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1985-90년에 대공장들이 특히 수출을 직접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그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확 올랐지만 그 대가는 태심한 인플레와 아직도 공급이 제한돼 있는 시장에서의 물자 부족 사태이었습니다. 역사상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당은 인플레 대처에 무능하고, 하도 전례가 없었던 일인지라 민주적 경쟁 선거에서는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러시아를 제외한 14개의 소련의 구성 공화국에서는 (부르주아) 국민 국가의 형성을 지향하는 현지 정치 세력들이 패권을 쥐게 되는 한편, 러시아에서는 엘친을 중심으로 해서 뭉친 우파적 지향의 시장 경제 도입론자들은 중도적 사민주의자인 고르바초프를 경쟁에서 억누르게 됐습니다. 결국 19918월의 보수적 안보주의자들의 실패한 쿠데타로 힘을 잃었지만, 이미 1990년쯤에 고르바초프가 고립에 빠진 레임덕이었습니다. 보기가 안타까웠던 것이죠....

궁극적으로는 고르바초프의 실패로는 러시아의 세계 체제 편입 과정은 사민주의적 루트가 아닌, 극우적 루트를 통해 가게 된 것입니다. 엘친의 계승자인 푸틴은 자유주의의 외피를 벗어던져 러시아를 비밀 경찰 출신들이 독점적으로 다스리는 극우파적 국가주의 지향의 군사 국가로 만든 겁니다. 고르바초프가 건설한 사민주의 정당은 2000년대에 당국의 통제에 부딪쳐 활동하지 못하게 되는가 하면, 연방 공산당의 지도부는 푸틴 체제에 포섭돼 당원 사이의 민심과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우크라이나 침략을 열심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이 침략 소식에 비통해하고, 그 억울함을 품고 죽었다고는 합니다. 고르바초프의 몰락은 러시아 좌파 세력의 커다란 역사적인 패배를 의미한 것인데, 민주적 선거를 도입한 고르바초프에 돌을 던지기 전에 왜 그 선거에서 공산당이 대도시마다 무참히 연전연패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정도로 오랜 스탈린주의 독재 시절에 "독점"에 익숙해진 공산당에 이미 "경쟁력"이 없어진 것이죠.

고르바초프는 초인적 능력을 가졌다 해도 무능해진 공산당을 능력 있는 정당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병 소련 구하기"를 위한 고르바초프의 작전은 아마도 처음부터 승산이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패배의 아픈 경험을 딛고, 러시아 좌파는 다시 환골탈태하고 민중들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야죠. 오만한 스탈린주의 관료의 모습이 아닌 반전 투쟁, 반자본 투쟁, 민생을 위한 투쟁 조직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기사 등록 202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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