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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종북몰이/카카오 사태/우크라이나/이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10. 24.

전지윤

종북 낙인과 혐오 선동은 김문수의 개인적 특징이 아니다

요 며칠간 김문수의 막말과 혐오발언들이 우리의 귀와 세상을 더럽혔다. ‘윤건영은 종북본성을 가지고 수령님께 충성한다’, ‘쌍용차 노조는 자살 특공대다’, ‘노조는 머리부터 세탁해야 한다’, ‘화물연대가 하는 것은 북한과 똑같다’, ‘노란봉투법은 공산주의’,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이고 총살감’,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김정은의 기쁨조’...

그런데 이것을 김문수라는 개인의 돌출적 해프닝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윤석열 정권의 정치적 성격과 방향, 계급적 기반과 긴밀히 연결된 문제이다. 이런 막말과 극언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럿에게서, 그것도 핵심 지도부에서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다음 대표로 떠오르고 있는 김기현은 얼마 전 김정은·이재명·민노총은 대한민국 3적이고 청산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전 대표 권성동은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은 종북공정이라고 했고, 국감장에서 김제남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에게 혀깨물고 죽지라고 했다.

이런 자들의 뒤에 있는 대통령 윤석열이 지난 대선기간에 지지율 하락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꺼낸 카드는 멸공 챌린지였다. 그리고 윤석열 당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막말과 혐오선동 극우유튜버들이 대거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은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이런 극우유튜버와 연결된 세력들은 최근 ‘2022 개정 교육과정 공청회에 대거 참가해서 온갖 막말과 극언,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르며 교과서에서 노동’, ‘성평등’, ‘반차별’, ‘생태’, ‘평화등의 단어와 가치가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이 정권의 방향을 뒷받침했다.

윤석열 정권의 성격을 단순화하자면 검피아-모피아-족벌언론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족벌언론들의 핵심이면서, 중요한 국면마다 윤석열의 정치적 방향과 선택을 조언하고 있는 것은 <조선일보>라는 것은 날리면 사태를 겪으면서 더 분명해졌다. <조선일보>의 정신적 기둥인 전 주필 김대중은 윤석열 당선 직후에 이런 조언을 했다.

“우선하는 것은 좌파 5년을 바로잡고 헌법에 따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적 신념을 저해해온 각종 사회 권력을 정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민노총·전교조·참여연대 등... 문재인 5년을 ‘청소’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지난 5개월간 윤석열 정권이 추진해 온 정책적 방향에 줄기를 이뤄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야당과 비판세력에게 종북의 딱지와 낙인을 찍는 것은 핵심적 수단이다. 이것을 앞장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 검찰, 감사원, 족벌언론들이다.

그래서 감사원과 검찰은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을 어떻게든 문재인의 종북 반역 행위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고, 최근 소통령 한동훈은 이재명, 박원순 등이 북한에 암호화폐를 지원하려고 했다는 새로운 카드를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프레임을 만들어 상대방을 낙인찍으며 혐오선동을 통해 지지자를 결집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전형적인 정치적 극우반동 세력의 방식이다. ‘이슬람은 지구에서 제거해야 하고, 이민자들은 총살해야 한다던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가 권력을 잡은 방식이 바로 그랬다.

물론, 한국의 극우는 이슬람이나 이민자보다는 여전히 종북을 주요 표적으로 삼는다. 그것은 (종북은 인권도 없고 죽어도 된다는)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낸 차이이고 본질은 다를 것이 별로 없다. 무엇이 더 효과적이냐에 따라서 언제든 표적은 바뀔 수 있다. 한국의 극우반동 세력은 국민의힘이라는 상대적으로 포괄적 우파정당(의 중심부)에 섞여 있다는 특징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일부 지식인들처럼 한국의 극우반동 세력을 유럽과 뭔가 다르거나 민주당과 비슷한 보수세력이라고 착각할 이유는 될 수 없다. ‘하지만, 북한은 실제로 핵을 개발하는 위험한 독재국가가 아니냐? 유럽의 극우도 당연히 이란과 같은 신정독재 국가와 이슬람근본주의 테러그룹의 존재를 자신들의 명분으로 삼는다.

윤석열 정권이 김문수를 경사노위 위원장 자리에 올린 것은 실수가 아니다. 윤석열 정권의 노동정책의 방향은 민주노총에 종북낙인을 찍어서 마녀사냥과 탄압의 명분으로 삼고, 노동운동 내부에서 갈라치기와 분열을 일으키는 것에 있다. 이미 족벌언론들은 민주노총 위원장 양경수는 주사파라는 프레임을 지속 유포해 왔다. 바로 박근혜 정부가 갔던 길이다. 그것에 김문수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본 것이다.

가장 분노스러운 것은 이를 위해 저들이 또다시 신영복 선생님을 무덤에서 끌고나와 기둥에 묶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신영복은 김일성주의자이고, 신영복을 존경하는 문재인도 김일성주의자'라며. 고인의 사유와 성찰이 얼마나 넓고 깊이 있었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도 관심없는 자들에 의해서... 한국사회에서 한번 종북으로 낙인찍히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이렇게 다시 드러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북’이라고 하면 바로 조용해져요. 더 이상 논의가 진전이 안 돼요. … 그냥 한마디로 끝이에요. 더 이상의 논의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아주 마법 같은 정치용어가 역모, 종북, 이런 거거든요... 저도 그 부분을 일정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시민운동 하는 젊은 사람들이 좀 참여해 달라고 불러낼 때에도 저로선 굉장히 조심스럽죠””(신영복, 2015년 한겨레 인터뷰)

 

나도 김일성주의자고 총살당해야 하나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

요즘 얼룩소에도 글을 올리고 있는데 어떤 분이 내가 김문수를 비판하며 신영복 선생님을 방어한 글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반론을 달아서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럼 나도 김일성주의자이다. 나도 총살당해야 하는가라고 말하고 싶어지고, 신영복 선생님의 함께 맞는 비가 그리워지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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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의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성의있고 정중하게 의견을 제시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온라인상의 논쟁에 대한 부정적 경험과 인식이 많아서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잘 반응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죄송한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래도 이 문제는 저에게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간단하게 의견을 드리겠습니다. 요 며칠간 일정들이 많아서 이제야 답변 드리는 점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먼저 님이 김문수 등의 종북 혐오선동과 친일적 안보정책에 대한 야당의 비판을 동일선상에 놓고, 둘 다 비슷한 잘못이고 문제인 것처럼 설명하시는 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치를 경험한 유럽에서 친나치적 인물이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혐오선동이라고 보지 않듯이, 일제식민지배 경험을 가진 이 나라에서 보통의 친일 비판을 혐오선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일제해방 이후에도 친일적 인물이나 정치세력들이 억압받는 소수자로서 법적 제도적으로 탄압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의 지배적 주류와 권력의 핵심부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집권여당이나 대재벌, 족벌언론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국가보안법같은 법으로 잡혀가고 사형당하고 심지어 학살당하고 한 것은 그 반대로 반일친북으로 의심받거나 낙인찍힌 사람들이었죠.

그럼에도 만약 야당 인사가 친일적 인물이나 정치적 방향에 대해 선을 넘는 과도하고 격한 언어로 비난하고 낙인찍으며 총살하자는 식으로 증오심을 부추기는 발언을 했다면 저는 적극 비판, 반대했을 것입니다.(비슷한 글을 과거 얼룩소에 쓴 바도 있습니다.https://alook.so/posts/kZtn19)

그러나 지금 벌어진 일은 그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님이 김문수나 이재명이나 똑같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신다면 전혀 납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총을 난사하는 사람과 그것에 맞서 돌을 던지는 사람 중간에 서서, 둘 다 문제고 잘못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공정과 불편부당한 중립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지금, 아쉽게도 많은 중도적 언론과 지식인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님이 이 논의를 친일과 친북 중에 어느 쪽의 위험이 더 크고 실질적인가의 문제로 끌고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유럽에서 친나치적 혐오발언을 비판하는 좌파들을 향해서, 극우세력이 그러면 친이슬람과 친중국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보느냐고 대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친나치 혐오발언을 비판하는 대부분의 좌파들은 친이슬람과 친중국을 지향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트럼프에 너무 타협한 것이 문제였던 문재인 정부가 종북과 거리가 멀 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양자택일 구도를 만든 다음에, 상대방에게 친이슬람, 친중국등의 낙인을 찍은 후 마치 중요한 토론거리인 것처럼 만드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김문수의 표현은 과도했지만 발언의 핵심은 타당하고 논의해볼만 하다'는 식의 접근을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종북이나 김일성주의자라는 (한국사회에서는 치명적인) 말도 안 되는 낙인을 찍고 총살해야 한다는 발언에 어떤 합리적 핵심이 있습니까. 이게 어떤 점에서 상대방과 공론장에서 상호 존중과 대화를 해보려는 태도입니까.

신영복 선생님이 과거에 법적 처벌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재심으로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은 이상은 기존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구요? 군사독재 시절에 국가보안법같은 희대의 악법으로 20년간 옥살이하고 평생 고통받은 사람에게 그것이 할 말일까요? 만약 님이 홍콩에 사시는 분이라면 과연, 지금 홍콩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된 사람에게 당신이 법적으로 처벌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 판결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실까요.

그러면 과거에 국가보안법으로 몇 번 처벌받은 적 있고, 신영복 선생님의 수업을 들은 적도 있고, 신영복 선생님을 많은 부분 존경하고, 그 책도 대부분 구입해 읽어온 저는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그럼 나도 김일성주의자이다. 나도 총살당해야 하는가.’ 중요한 많은 논의를 짧게 쓰다보니 행간을 읽으시면서 약간 격하게 들리는 점이 있더라도 양해해주시길 바라고, 말씀드렸듯이 온라인 공방을 계속 이어가고 싶지는 않은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 김수영(1960.10.6.)

카카오 사태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시장과 독점

카카오 사태 속에서 나온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흥미있는 것 중 하나는 IT 전문가 박지훈님의 분석과 제안이었다. 정경심 교수 재판에서도 검찰의 증거 조작을 지적한 박지훈님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세밀하고 분석했지만, 대안적 해법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관심이 갔다.

https://www.facebook.com/Jeehoon.Imp.Park/posts/pfbid0wiMWpdSSKuReVd9f8aYzzn5xcVA4xqob9kU32Pu9ecKQnFh4YeWuySXeWa6LjgCRl

'API와 통신 프로토콜을 공개해서 카카오 서비스가 외부 프로그램과 연동할 수 있도록 하고, 서로 다른 메신저 프로그램들이 서로 통신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국민메신저라고 할만큼 공공적이고 국가기간 통신망에 버금가는 기업이 된 카카오를 국유화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러면 국가가 우리의 사적 메시지들을 아무 때나 들어다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에 머뭇거리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공공플랫폼을 만들어 카카오를 어떻게 사회적 소유나 통제로 돌릴 수 있을지 대안을 마련해나가는 과정에서 과도적 요구로서 의미있어 보이는 것이다.

정말로 'API와 통신 프로토콜을 공개해서 카카오 서비스가 외부 프로그램과 연동할 수 있도록 하고, 서로 다른 메신저 프로그램들이 서로 통신할 수 있어진다면, 편리할 것 같다. 그러면 텔레그램이나 라인, 밴드 등에서도 카카오로 메시지를 보내는 게 가능해지고, 나처럼 카톡을 거의 쓰지도 않는 사람도 가입하고 깔아야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에 따른 카카오의 공룡과 같은 독점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입돼 있기에 그 자체로 거대한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고, 울며 겨자먹기로 그것을 가입하고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부조리하다. 이것은 오늘날 디지털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데이터를 원료로 삼아서 추출, 정제, 사용하며 발전하는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플랫폼을 장악하고 데이터를 독점한 자본은 계속 거대해지고 불평등은 더 첨예해진다. ‘네트워크 효과는 승자독식 경향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플랫폼 선점 효과만으로 데이터와 정보를 독식하면서 성장한 거대기업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돈벌이 대상으로 삼는다.

사실 사적 소유와 자유시장속에서 이런 부조리는 흔한 일인데, 최근에 다시 그것을 느낀 것은 휴대폰 충전 케이블이 이제서야 통일이 된다는 뉴스를 보고서였다. 나같은 기계치인 사람도 휴대폰 충전 케이블만 3종류를 사도록 만들고, 어디가서 맞지 않는 충전 케이블 때문에 불편하고 찾아 헤매도록 만드는 일은 황당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과 낭비가 누군가에게는 시장 독점과 이윤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문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회적 조율과 통제보다는 무정부적인 경쟁을 벌이는 개별 기업들의 돈벌이를 위한 근시안적 판단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최근 부자 감세와 긴축 정책을 통한 작은 정부를 추구하다가 45일만에 사퇴한 영국 총리 리즈 트러스에 대한 일부 언론과 사람들의 평가는 동의하기 어렵다. 리즈 트러스가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서 주가 폭락과 금융 대혼란을 낳고 사퇴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보적경제학자도 그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평가는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도 잘못된 환율과 재정 정책으로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거나 맞서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코치를 하는 것으로 연결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시장의 반발을 일으키며 주가 하락 등을 낳을 가능성이 큰 반시장적 진보정책들에도 주저하고 반대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정확하게 보자면, 리즈 트러스는 친시장, 친기업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트러스는 신자유주의의 선구자인 대처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대처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거나 통제하지 말고 작은 정부를 만들어야 하고, 기업들의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와 복지를 줄이며 자유로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입만열면 자유만 반복하는 윤석열이 읽고 또 읽었다는 밀턴 프리드만의 <선택할 자유>의 핵심적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번 리즈 트러스의 감세와 긴축 정책이었고 그것은 영국 경제와 시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이것은 자유로운 시장 경쟁에 맡겨서는 자유시장조차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신 사례일 것이다.

자유시장에서의 경쟁은 결국 독점을 낳고, 이윤만 추구하는 독점 대기업은 공공의 이익을 위협하게 된다. 그러나 친기업, 친시장 정책만 추구하는 정부는 그것을 방치하고 오히려 더 악화시킨다. 윤석열 정부가 바로 이 길을 가고 있지만, 리즈 트러스와 다른 점은 지지율 추락과 비판에 직면해 물러설 양심과 기미조차 안 보인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민주당같은 곳에서도 너무 부족해서 문제였던 소득주도성장을 오른쪽에서 비판하면서 좋은 불평등과 낙수 효과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친시장, 친기업 정책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윤석열 퇴진 촛불이 커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모순적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푸틴은 무덤을 파고 있고, 러시아 국민이 일어설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푸틴의 침략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크림대교 폭발 사건 이후에 러시아 푸틴 정부는 하루에만 100개의 미사일을 무차별적으로 우크라이나 도시와 민간인 지역에 쏟아 부으며 야만적 보복을 저질렀다.

민간인 학살을 주특기로 삼는 자를 새롭게 전쟁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이런 만행은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전술핵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계속 커지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강대국들이 주도해 온 핵무장 경쟁이 공포의 균형확장 억제가 아니라 세상을 더욱 위험천만하게 만들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럴수록 정말로 실망스럽고 안타깝고 참담한 것은 일부 좌파와 지식인들이 우크라이나에게 책임을 물으며 굴복을 촉구하고 있는 태도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의례적으로 러시아의 침공은 잘못된 것이고 규탄해야 하지만이라는 말머리를 붙이면서도, 지금의 처참한 파괴 상황을 우크라이나가 스스로 자초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돌린다.

그리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면서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굴복을 주문한다. 이것이 침략과 학살을 당하는 사람들이 저항을 포기할 때 평화가 온다는 전형적인 식민지배 논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런 사람들이 갑자기 키신저같은 이들을 인용하며 그런 논리를 펼치는 것을 보면 더욱 서글프다.

언제부터 베트남전쟁의 도살자가 인용할만한 지정학의 전문가가 된 것인가. 레닌을 엉뚱하게 인용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일부 좌파들의 화석화를 비판하는 박노자 교수의 지적도 타당하다. ‘친러시아계 주민들의 자결권을 핑계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 강제병합을 지지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반러시아 주민들을 죽이고 쫓아내고 총을 든 군인들의 감시 속에 실시한 주민투표가 어떤 정당성이 있는가. 영국의 독립사회주의자인 사이먼 파라니는 이것을 영국 제국주의가 친영국 주민들을 이용해 억압을 정당화한 북아일랜드의 경험과 비교한다.

북아일랜드에서 노동계급 개신교도들은 오랫동안 오렌지정당뿐 아니라 무장한 친영국 준군사조직들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힘이 영국 제국주의라는 것을 이해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따라하지 않았고, 노동계급 개신교도들의 태도를 근거로 아일랜드의 자결권을 부정하지 않았고, 영국군의 철수를 촉구했다.’

물론 지금의 전쟁은 독재러시아와 민주주의서방의 대결이 아니라는 일부 반미좌파분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의 민주주의를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는커녕 서방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패권을 위해 독재자들과 손잡고 민주주의를 파괴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렇다.(사우디와 삐걱거리기 시작했지만)

사실 지금도 유럽 강대국들과 거대자본들은 국내 반전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도 우크라이나의 적당한 굴복을 원한다. 그들에게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시장이고 오랫동안 거래하고 협력해온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부 반미좌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푸틴이 말하는 반미’, ‘반서방의 추악한 실체이다.

푸틴은 미국과 서방은 동성애, 트랜스젠더, 낙태, 마약 등으로 인류를 타락시키고 있는 악의 근원이라며 러시아를 인류와 기독교 문명의 요새로 포장한다. 이런 푸틴의 방향을 국제적 극우와 신나치들도 공감해 왔다. 푸틴은 벨로루시, 미얀마 독재자들의 친구이기도 하다.

따라서 푸틴의 침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민중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 맞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단호하게 푸틴의 반대 편에, 우크라이나 민중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이다. 약소국을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독재자를 후원하는 강대국에 맞서던 반미좌파전통의 진정한 핵심을 제발 되찾으라고 호소하고 싶다.

푸틴이 예비군 동원과 징집을 시도하자 곧바로 7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러시아 탈출을 시도했다는 현실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오히려 외국에서 우크라이나로 돌아오던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과 비교해보라.(물론, 우크라이나에도 병역거부자가 있고 그 선택권은 존중돼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사회학자인 블로디미르 이치첸코는 이 모든 것이 단지 푸틴이 정신나간 비이성적 지도자라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푸틴은 권력에 굶주린 미치광이도, 이념적 광신도도 아니다. 그는 러시아 지배계급의 합리적 집단이익을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비군 동원과 징집은 특수군사작전의 실패를 뜻한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은 강제징집을 확대하려고 할 때였다. 푸틴이 러시아 제국을 확대한 사람이 아니라 무덤을 판 사람으로 역사에 남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사회주의자인 보리스 카갈리츠키는 강제징집에 대한 저항이 다케스탄같은 가난한 변두리에서 더 강력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1917년 차르 정권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은 혁명가들이 아니라 전쟁에 끌려가길 거부한 병사들에게서 나왔다고 지적한다.

러시아의 좌파 이론가인 일리야 부드라이츠키스도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푸틴 정권이 무너져야 한다며 러시아 혁명의 교훈을 지적한다. ‘러시아 혁명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노동자와 농민이 짜르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는 3년의 유혈 전쟁과 사회경제적 위기가 필요했다.’

얼마 전 온라인 회의에서 힘든 상황에서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미얀마 현지 혁명투사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미얀마 군부를 돕고 있는 푸틴을 비판하며 희망이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푸틴과 모든 독재자들이 손잡고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푸틴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고, 러시아 국민들이 일어설 것이다. 푸틴을 따라서 미얀마 군부도 같이 죽을 것이다.’

이란 79년 미완의 혁명이 이번에는 성공할 것인가

우크라이나 민중이 러시아의 무자비한 폭격과 침공에도 굴복하지 않고 있듯이, 이란 정권의 극심한 통신 검열과 200여명이 사망할 정도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이란 민중의 저항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엊그제 MBC 뉴스를 보니, 이란 국영방송의 저녁 메인뉴스가 중간에 해킹됐다고 한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불길에 휩싸인 사진과 함께 희생된 여성들의 사진이 나오면서 반정부 투쟁을 호소하는 구호가 자막으로 방영됐다. 실제로 지금 이란의 반정부 시위는 계층, 지역, 부문을 뛰어넘어 확산되면서 이제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들이 석유가스 부문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호소하고 그것이 실제로 실행되는 단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파업 노동자들이 두려워마라! 우리 모두 함께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다.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은 79년 이란에서 반왕정독재 혁명의 핵심 동력이었다.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인 나라에서 대다수가 히잡 의무착용의 폐지를 요구할 정도로, 이 문제는 이미 종교적 관습의 문제를 넘어섰다.

따라서 이 모든 게 미국의 제재때문이고 반정부 투쟁의 배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다는 이란 정부의 논리는 먹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날리면 사태는 MBC의 자막 때문이고 그 뒤에는 민주당이 있다는 윤석열 정권의 주장처럼 어처구니없는 핑계일 뿐이다. 미국의 제재가 아미니를 죽인 것도 아니고, 미국과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반정부 시위에 함께하고 있는 게 진실이다.

엄격한 이슬람 교리를 강조하는 지배권력자의 자녀들은 유럽으로 놀러가고 유학가서 베일도 벗고 사치하며 살고 있는데, 자신들은 실업과 가난과 억압 속에 있다는 것에 이란 민중은 분노하고 있다. 특히 이란 권력체제의 특수성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과 소수민족 차별로 나타났고, 쿠르드족 청년여성 아미니의 죽음은 쌓여온 분노가 폭발하는 방아쇠가 됐다.

쿠르드 로자바 자치지역에서 여성해방 운동가들이 처음 만들었다는 구호인 여성, , 자유는 이제 이란 모든 민중이 함께 외치는 구호가 됐다. 그리고 투쟁의 요구는 히잡 의무착용 반대를 넘어서 더 일반적인 민주주의와 생존권에 대한 요구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래도 사우디보다는 여성 억압이 덜하지 않냐거나 친미 왕정을 전복하고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왔다는 것으로 까방권을 누리려는 이란 지배권력자들의 시도는 더 이상 잘 먹히지 않을 것이다. '남자, 조국, 번영'을 외치는 관변우익 시위대를 통해서 맞불을 놓으려는 전략은 더 큰 반발만 부를 것이다. 물론 이런 억압과 폭력은 이슬람의 종교적 특징이라거나 이란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프랑스에서처럼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착용할 권리를 강제로 금지하고 해수욕장에서 노출된 수영복을 강요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일 것이다. 브라질에서는 개신교 복음주의가 정치적 억압의 도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쿠르드족 여성인 아미니가 도덕경찰에 끌려가 죽은 것은 소수자 억압과 경찰 폭력이라는 점에서 2년전 미국에서 흑인청년들이 경찰에 총기에 죽어가던 사태와 유사성이 있다.

이란 민중은 히잡을 강제 금지했던 과거의 친미 팔레비 왕정과 히잡을 강제 착용시키는 현재의 이슬람 권력이 불평등과 억압이라는 점에서 뭐가 다른 것인지 묻고 있다. 친미 왕족과 석유재벌들만 자유롭던 나라에서, 반미 종교지도자와 관료자본가들만 자유로운 나라도 바뀐 게 아니냐는 물음이다.

그래서 40년 전 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왕정과 자유시장 체제를 붕괴시켰던 그 사람들이 이제 가부장적 이슬람-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체제를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그것을 무너뜨릴 권리도 있을 것이다. 물론 79년 이슬람-가부장 권력의 수립은 친미독재왕정을 무너뜨린 혁명의 결과이기보다는 반동의 결과였다. 40년전 미완의 혁명이 이번에는 꼭 성공하길 바라면서 연대의 마음과 응원을 보낸다.

#JusticeforMahsaAmini #iran #IranProtests2022

(기사 등록 20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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