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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푸틴과 지식인/ 푸틴과 박정희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5. 11.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들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푸틴 독재와 전쟁, 그리고 지식인

한국의 1970-80년대 지식인 사회를 보면, "냉전 시대의 원로""진보적 신진파"들의 대결 구도 같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신 독재와 신군부 독재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기도 하고 강한 거부감도 불러일으켰지만, 분단과 6.25를 거쳐서 보수 진영에서 주도적 위치를 확보해, 1970년대에 이르러 "원로"가 된 일부 지식인 사회 거두들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편에 서주긴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이승만 시절부터 "문단 권력"을 손에 쥐기 시작한 김동리나 조연현 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1970년대에 이 둘은 서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친정부"라는 차원에서는 하등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종화나 전숙희 등 일부 보수적인 원로 작가들이 1970년대에 통일주체국민회의로 진출하기도 하고, 1980년대에 서정주는 이 시로 영원히 그 이름을 더렵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 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시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 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

19871, 그러니까 6월 항쟁이 발생되기 몇개월 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독재자에게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와 같은 찬사를 바쳤다는 것은 지금 우리 상식으로 이해하기가 힘든데, 엄연히 사실이었습니다. 한데 동시에 이런 문단 권력자나 친권력 "협력"에 공들여온 "원로"와 달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새로운 저항 문학 주체들이 탄압과 시련 속에서 "탈냉전/반독재 문학"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고은이나 황석영 등은 1990년대 이후에는 또 새로운 문단 권력으로 떠올랐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좌우간,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문단은 친독재 냉전 문학과 반독재 탈냉전 문학으로 양분돼 있었고, 이 두 성향을 나누는 여러 요인들은 "나이"나 역사적 체험, 권력에 대한 태도 등이었습니다.

그러면 푸틴 시대 말기, 우크라이나 침공 시대의 러시아 문단은 과연 어떤 상태인가요? 저는, 문단을 포함해서 러시아 지식인 사회 전체에서는 신체적 "나이"나 어떤 정치적 "성향"보다도, 친독재와 반독재, 그리고 주전과 반전의 의견이 갈리는 중요한 지점은, 차라리 "국가에의 의존"의 여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는 냉전 시대 한국과의 중요한 차이가 보이는 것이죠. 월탄 박종화나 황순원 선생 같은 분들이 비록 매우 내지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었으나, 사실 정권 없이도 충분히 문학 시장에서 살아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만큼의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만큼의 스스로의 기반이 탄탄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반공 성향이란 결국 단순한 민족주의적 보수성으로부터 시작돼 분단, 6.25의 대립 속에소 굳어진 것입니다.

이와 달리, 순수하게 "이념" 차원에서 푸틴 정권과 그 전쟁을 지지하는 러시아의 "시장 경쟁력이 있는 작가"는 극소수입니다. 최근에 친우크라이나 세력들에게 폭탄 테러를 당할 만큼 열광적인 전쟁 옹호론으로 악명을 떨친 자하르 프릴레핀 (Zakhar Prilepin)이나 체첸 출신의 게르만 사둘라예프 (German Sadullaev)등을 들 수 있는데, 극소수일 뿐입니다.

대체로 "민족 보수적" 성향의 에브게니 보돌라즈킨 (Evgeny Vodolazkin)같이 이 진영을 대표하는 작가들은 아예 전쟁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반대 진영인 자유주의 쪽에서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Lyudmila Ulitskaya)나 보리스 아쿠닌 (Boris Akunin), 그리고 드미트리 글루코브스키 (Dmitry Glukhovsky) 같은 주요 작가들이 외국에 망명하는 등 "전쟁/독재 반대""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한국의 극우 정권들에게는 적어도 "반공주의" 코드를 공유하여 친정권이나 중립의 자세를 취할 만한 문단 권력 내지 지식계가 있었다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으로는 푸틴 정권은 지식인 사회에서 "민심 이반"을 초래해 이념적으로 보수적인 작가 등 지식인 사이에서의 어떤 헤게모니적 권위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푸틴에게 남은, 즉 전쟁을 지지하는 작가들이란 누구인가요?

개전 초기에 러시아의 <문학신문> (Literaturnaya Gazeta)"작가 500인 선언"을 발표했는데(https://lgz.ru/article/-8-6822-23-02-2022/kto-khochet-zhertv/) 거기에 서명한 이들 중에서는 일단 독자 사이에 알려진 이름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체로 각종의 작가 협회들을 통해 국가로부터 나오는 "지원금"에 의존해야 하는 문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국고 보조금 없이 문단 생활을 할 수 없는 이들은 국가가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 - 싫든 좋든 - "박수"를 쳐주어야 하지만, 최소한의 시장력이 있는, 즉 국가로부터의 독립이 가능한 작가들은 전쟁 옹호 발언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일을 - 그 성향과 무관하게 - 극적으로 피하는 추세입니다. , 좌파든, 자유주의 신념이든 혹은 (온건) 민족 우파든, 전쟁을 벌이는 독재자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러시아에서 이제 "작가"로서 참아 할 수 없는, 최악의 부끄러운 일이 된 것이죠.

작가들의 민심이 떠났다고 해서 물론 러시아라는 관료 국가가 전쟁을 당장에 그만 둘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데 문단의 그런 반응은 의미심장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군국주의 국가는 그람시가 이야기한 "헤게모니", 즉 지식인 등에 대한 설득력/호소력을 상당히 결여하고 있는 것이죠. 이와 같은 헤게모니 결여를 공포 정책이나 물질적 시혜 등으로 만회해보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러시아 권력층이 어떤 길을 택할는지 두고 볼 일입니다.

푸틴과 박정희의 차이

200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서울의 한 대학에 계시는 중진파 고대사 연구자 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대체로 1980년대와 같은 민족주의 좌파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역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 당시 러시아 현실로 화제가 옮겨졌습니다. 그 때에는 체첸 침략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푸틴이 막 집권한 시기이었습니다.

저는, 전쟁 살육으로 정치 자본을 축적해서 집권한 인간이 아주 싫다는 제 소박한 소견을 밝혔습니다. 한데 상대방은 제게 "조금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푸틴이 지금 48살이지? 그죠? 나하고 똑같네. 박정희는 집권했을 때에는 44살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사람이 어쩌면 러시아의 박정희가 돼서 모종의 개발의 성과를 이룰 것 같기도 한데, 좀 지켜보게"

1980년대에 데모를 많이 하신 분이 박정희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그 비교는 저로서 유의미하게 들렸습니다. 더군다나 푸틴이 2004년에 러시아의 최고 부호인 호도르코브스키를 감옥에 보내는 등 신흥 재벌에 대한 절대적인 생사여탈권을 확립했을 때에는, 정주영 같은 재벌들에게 중동 건설이나 조선업 착수를 지시했던 박정희의 상이 떠올랐습니다.

대자본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한 개발 독재 정권이 탄생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개발 성과가 그다지 없었지만, 유신 독재와 같은 푸틴의 사실상의 종신 집권 구도나 군수 공업 진흥, 전반적인 군사화, 관제 복고풍과 "방첩" 광풍 등은 정말로 한국의 1970년대를 빼닮은 것 같은 느낌을 계속 주었습니다. 한데 한 가지 큰 차이도 확인되었습니다. 박정희와 달리, 푸틴에게 "김대중", 즉 승산이 있는 자유주의 진영의 대항마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1950년대의 한국은 혁신 정당 운동에 관심과 지지가 높았던 사회이었습니다. 나중에 법살을 당한 사민주의자 조봉암은, 1956년 대선에 23%나 거두고,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의 표를 휩쓸었던 거죠. 그래서 "두번째 조봉암"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게 1960-70년대 혁신계에 대한 탄압은 태심했습니다. 한데 공식 야당의 김대중 같은 "젊은 기수"들은 온건 좌파의 면모까지 띠면서 1960년대말부터 박정희에 대한 유력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1971년 대선에 박정희는 53%, 김대중이 45%를 각각 얻었는데, 조작이 없었다면 김대중에게 실질적 승산이 있었던 구도이었습니다. 한국이 실제적 정치 성향의 차원에서는 이미 1960년대말에 양당제 사회로 발전했는데, 그 구도를 무력화시켜 종신 집권을 도모하려고 박정희가 다음해부터 유신을 선포한 겁니다. 한데 그 무리수를 두었다가는 7년도 못가서 경제 위기와 민심 동요 속에서 자기 부하의 손에 죽고 만 거죠.

한데, 2012년에 대통령직에 컴백해서 박정희와 같은 종신집권 구도를 굳히려 했던 푸틴은, 사실상 그 목표만큼 달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전쟁의 상황에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대부분의 분석가들이 푸틴의 "사실상의 종신 집권"의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왜 박정희와 달리 푸틴에게 온건 좌파나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의 "대항마"가 없는 것이죠?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박정희에게 있었던 "대항마"가 푸틴에게 없는 이유는, 한국과 러시아의 당위적인 정치 패러다임, 혹은 정치적 명분을 얻는 방식과 다수가 당연시하는 정치 체제가 각각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우, 1912년 신해 혁명 등의 성공에 힘입어 이미 독립 운동가들부터 차후의 "새나라""민국", 즉 공화국으로 1910년대말 이후 당위적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더군다나 1945년 이후 한국에 이식된 "교과서적" 민주주의란 미국식 양당제이었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군사 보호령이었던 이상 박정희가 야당을 아예 근절시킬 수 없었고 용인해야 했죠. 그리고 정부-재벌의 개발 블럭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자연스럽게 야당의 품으로 오고, 권위주의적 지배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고학력자들의 경우에는 특히 젊은층(학생 등) 같으면 친야당 성향은 거의 당위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은 궁극적으로 군부 정치를 극복해 지금 같은 안정적 양당제로 나아간 겁니다.

이와 달리 소련 몰락 이후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에게는 여전히 당연시되는 국가는 유일 지도자를 "모시는" 유일당 국가, 즉 당국가입니다. , 공산당이 1989-91년에 공중 분해를 한 뒤에는 그 빈 자리를 메운 것은 푸틴을 정점으로 한 안보 관료 위주의 관료시스템입니다. 한국을 번갈아서 양당 정치인들이 관리한다면, 러시아는 영구집권하는 관료제가 지속적으로 지배합니다.

그 관료시스템이 내치 차원에서 소련식 재분배 메커니즘 (무상 의료 및 교육, 노후 연금)을 어느 정도 계속 가동시키면서 외치 차원에서 다수가 ""으로 인식하는 "서방"과 적당히 대치하면서 계속 신무기 등의 발표로 "국위선양"을 하기만 하면, 다수는 그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고 있고 선거마다 그 수반에 찬성표를 던집니다.

수반의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푸틴이 죽은 다음에 그가 임명했거나, 그 사망 뒤에 경쟁자를 제압해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계자도 같은 방식으로 이 시스템을 계속 운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스템에서는 "공식적" 연방 공산당은 푸틴 등 지배 관료들의 하위 파트너이며, 자유주의는 "서방 공기를 많이 마신" 일부 지식 분자나 젊은 도시 중산층의 신념입니다.

전쟁을 할 때에 푸틴은 "최고"의 지지율을 얻습니다. 2014(크림 반도 병합)에는 84%, 2015(시리아 내전에의 무장 개입)에는 88%를 기록했으며, 우크라이나 침략이 벌어졌을 때에는, 20222-3월 사이에 그 지지율은 70%에서 83%로 껑청 뛰었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무능한 대응 등으로 몇 번 60% 정도까지 인기가 내렸지만, 그 이하로 떨어진 적은 최근에 거의 없었습니다. 박정희가 꿈에서도 볼 수 없었단 지지율이겠죠?

푸틴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12-14%는 대체로 대도시의 지식 분자와 젊은 중산층들입니다. 그들 중에 침략 전쟁에 대한 비판 등으로 이미 수백 명이 수감되고, 또 그 계층 중에서 수십만 명이 작년과 금년에 이민을 갔지만, 푸틴은 대체로 이 계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과 거의 교감이 안되는 중산층들이 결국 "집단 반항"이 아닌 "이민"을 택할 것을, 푸틴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관료 독재가 제대로 흔들리자면, 러시아의 노동계급부터 계급 의식을 갖고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을 시작해야 합니다. 한데 전쟁 동원과 탄압 속에서 바로 이 부분이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가. 저는, 진정한 변화들이 러시아에서 그래서 조만간에 오기 힘들 것이라고, 다소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 , 중장기적으로 노동계급의 조직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래도 믿고 있는 것이죠.

(기사 등록 202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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