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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다음 혁명의 주체는 누구일 것인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5. 15.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변절에 변절을 거듭한 과거 급진노동운동가 출신 김문수가 극우들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가 엘리트들의 이너서클이 더 선호하는 극우 관료와 충돌하게 돼 연일 뉴스에서 그 이름이 오르고 내립니다. 사실, 김문수의 경우 급진노동운동을 떠나 제도권, 나아가서 극우진영 안으로 들어간 것은 '변절' 이외에는 다른 이름을 붙이기가 힘듭니다.

'변절' 내지 '배신'은 절개 내지 신뢰를 버린다는 이야기, 즉 한 때에 신뢰 관계를 가졌던 어떤 타자나 집단과의 신뢰를 무단 파기한다는 이야기를 의미합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김문수의 변절이 이루어진 1990년대나 지금이나 김문수가 한 때에 몸담았던 급진노동운동은 상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민노총 등 노동계급의 거대조직들은 꼭 "급진"까지는 아니더라도 김문수가 결국 붙어버린 극우측과는 늘 갈등적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극우들은 노동자 조직의 약화를 늘 노리고 있었는데, 변절을 결심한 과거 노동 지도자들을 영입한다는 것은 그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개인 영달을 위한 조직/타자에 대한 신뢰 관계 파기", 즉 변절/배신은 맞는 겁니다.

한데 미국의 노동계 현실을 보면 꼭 김문수와 같은 변절이 아니더라도 노동계 지도자들은 보수를 넘어 극우적 목소리를 내는 경우들은 많습니다. 예컨대 최근의 "트럼프 관세" 정국을 한 번 봅시다. 트럼프가 제시한 고관세부과는 영세민을 포함한 미국 소비자들에게도 더 높은 물가인플레이를 안겨주고 특히 베트남이나 방글라데시 등 미국에 방직 상품 등을 납품하는 많은 가난한 나라들의 노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대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고관세 부과안에 대한 미 노동계의 반응은? 전혀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최대 노조라고 할 국제운전사형제단 (팀스터즈, 130만명 노조원 가입), 트럼프의 안을 전폭 지지했습니다. 이유는 바로 "미국 국내 일자리 창출의 가능성""미국 노동자들의 협상력 제고"였습니다. 예전에 민주당에 더 가까웠던 국제운전사형제단이 최근에 공화당 편에 서게 된 것은, 트럼프주의의 보호주의적 의제에 다수의 조합원들이 지지를 보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통합자동차산업노련 (United Autoworkers, 퇴직자를 포함하여 약 1백만 명의 조합원 가입) 역시 "우리 부문의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될 조치"라고 긍정적 메시지를 보내고, 통합금속산업노련 (United Steelworkers, 80만명의 조합원 가입)은 캐나다 등에 대한 관세 부과를 반대하더라도 전체적으로 관세를 통한 보호주의적 의제의 실현을 지지했습니다. 총체적으로, 미국의 노동연맹-산별조직회의 (AFL-CIO, 전국 노총, 15백만명 조합원 가입)는 트럼프의 고관세 부과를 포함한 보호주의에 찬동하면서도 트럼프의 일부 조치 (공공부문 노동자 해고 등)를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트럼프의 의제 상당부분을 지지하는 위의 미국 거대 노조 관료들은 굳이 "변절"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왜 극우 정객을 지지하느냐"고 따지면 그들은 "조합원들의 이해 관계와 조합원들의 정서, 의중"을 들어 "민의를 표현했을 뿐"이라 답할 것입니다. 미국의 고졸 출신 백인 조직 노동자들의 62%나 트럼프에 투표했으며, 미조직 백인 노동자 중에서는 그 비율은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 트럼프와 여러모로 이념적으로 잘 통하는 푸틴에 고정적으로 투표하는 노동자 출신의 유권자들은 지난 25년간 약 55-60%로 집계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보게 되는 현상은 바로 "보수화된 일부 노동자 계층"인 셈이죠. 그걸 대변하는 일부 노조 관료들의 극우 지지는, "변절"과 구별돼야 하는, 사실 다소 정상적인 (?) 정치 행위라 볼 수도 있습니다. 보수적인 유권자들을 대변하다 보면 보수, 극우 정객에 붙게 되는 것이죠.

보수화되기 쉬운 노동자란 대체로 어떤 존재인가요? 일단 "기득권"이 있으면 당연히 보수화되기가 쉽습니다. 젠더, 인종 서열이 사실상 - 비공식적으로라도 - 존재하는 사회들에세는 기득권자인 백인/현지인 남성 노동자들은 더 쉽게 우파의 지지자로 변합니다. 또 다른 변수는 '국가''국제경쟁', '세계화'와의 관계입니다.

주된 고객이 국방부인 군수복합체 노동자들로서는, 국방예산을 전통적으로 증액하기를 지향하는 우파에 대한 지지는 논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비교적 고임금인 대기업 노동자들은, 공장의 해외 이전이 이루어지는 경우 받게 되는 타격이 아주 큰 만큼은, 보호주의 극우파에게 쉽게 설득 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 경쟁에 노출돼 있는 철강 내지 자동차 부문에서는 또 외국 노동자들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국가적 보호"를 요구하기가 비교적 쉽고요.

, 생각해보면 1917년의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들을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노동자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금속부문 - 상당부분 군수 복합체의 - 대공장의 고임금 정규직 남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1917년의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그 자체는 아직 충분한 의미에서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기존 체제에 제대로 통합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기존 체제의 명분, 정당성도 믿지 않았고, 볼셰비키 지지자가 아닌 노동자라 해도 다른 사회주의 정당을 지지하면 하지, 비사회주의 정당 지지는 공장에는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이미 기존 사회에 통합이 다 된 오늘날 상황과는 그대로 비교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혁명의 주체란 기존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계층입니다. 인구의 다수가 귀족이 지배하는 농촌의 농민이었던 18세기말의 프랑스에서는, 인구의 소수를 차지했던 파리 등 대도시의 중산계층에 대해 나름의 지도력을 갖고 있었던 자유주의 지향의 인텔리켄차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와 귀족 본위의 사회에서 제대로 통합되기가 힘들었던 사람들이었죠. 19세기 유럽이나 20세기 초반의 유럽 후진국 러시아에서는 거의 "비국민"으로 인식되고 스스로도 "국민"보다 먼저 "노동계급"으로 인식한 노동자들은 그런 계층이었고요. 저는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잠재적으로 혁명의 주체에 해당될 수 있는 몇 개의 그룹들은 * 주변화된 인테리와 * 고학력의 젊은 여성, 그리고 * 이민자 출신의 노동자 라고 봅니다.

이미 초포화 상태인 학계의 노동시장에서 정규직 취직이 어려운 학계의 '무산계급' (대학과 연구소 등의 비정규직들), 기후 참극 등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고 인류 전체를 위협할 이 참극을 예방하자면 이윤추구 경제라는 시스템을 철저히 변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고학력의 젊은 여성 역시 기후 참극 등에 대해 - 사회적 재생산의 잠재적 담지자라는 차원에서 - 보다 강력한 인식을 갖고 있는가 하면, '여성'인 만큼 여전히 사회적 폭력과 차별에 노출돼 있습니다. 특히 현지인과 인종적으로 다른 이민자 출신의 노동자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인종주의적 코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 "완전한 통합"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이들이 힘을 같이 합친다면 정보시대의 사회를 포스트자본주의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기후 참극이 다가오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우리가 이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 희망이라고 없습니다

(기사 등록 202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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