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평상시에 1920-30년대의 역사를 연구합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를 이미 15년 넘게 해왔지만, 지금도 싫증이 나지 않고 여전히 너무나 흥미롭고 신이 납니다. 전 그 시기가 어쩌면 인류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재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물론 가장 끔찍한 시대이기도 했죠.
1914년 이전까지의 세계는 영국 패권의 세계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인류의 약 4분의 1을 통치했습니다. 1815-1914년 사이에는 대영제국에 "도전"을 제대로 던질 수 있었던 열강이라고 없었습니다. 소련이 1950-80년대에 미국과 제3세계에서 경쟁을 벌였듯이, 유라시아대륙의 대국 러시아는 영국과 "great game"이라고 하는 중앙아시아, 티베트, 이란, 아프간에서의 경쟁을 벌였지만, 주된 무대인 유럽에서는 감히 영국에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한 번 내밀었다가는 1853-56년간의 크림전쟁에서 너무나 많이 얻어맞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2003-9년의 이라크 전쟁처럼, 영국이 1899-1901년의 보어전쟁에서 초기의 예상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고 나서 그 패권 전략 역시 일변됐습니다.
동맹을 맺지 않고 "홀로" 가던 패권 국가 영국이 1902년에 일본을 주니어 파트너로 영입하고 (이는 조선 식민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1907년에 숙적 러시아하고도 동맹을 맺어 세상을 감짝 놀라게 했습니다. 푸틴에 손을 내밀고 있는 트럼프가 던지고 있는 오늘날의 충격파와도 비슷했는데... 좌우간 1901년 이후에는 흔들흔들했지만, 1914년까지의 세계는 여전히 대영제국의 세계였습니다.
1914-8년 사이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세계대전으로 영국이 여태까지 뒷받침해왔던 그 세계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도에서는 전후에 독립운동이 앙양돼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1920년대에, 인도가 언젠가 독립되어, 대영제국이 해체되는 일이 궁극적으로 "시간의 문제"라는 부분은 분명해졌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급진 사회주의 세력들이 권력을 잡았는데, 6만 명 규모의 영국군을 필두로 하여 중국, 일본, 그리스까지 포함한 연합국 간섭군이 아무리 4년 동안 무장 간섭을 시도해도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손실만 보고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거야말로 영국 패권이 무너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의 외국군 간섭 실패를 뒤이은 것은 패권 국가의 통치를 벗어난 세계적 급진 좌파의 폭발적 성장이었습니다. 사실, 1914년 이전의, 패권 질서 "안"에서의 유럽 좌파는 그다지 역동적이지 못했습니다. 제2차 인터네셔날의 경우, 일본 이외에는 비서구 국가들은 아예 대표되지도 않았습니다.
"식민지 문제"를 토론하긴 했지만, 베른슈타인을 비롯한 상당수 우파 사회주의자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를 "자본주의를 이식시키고 발전시키는 이상 객관적으로 진보적 현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사실 이게 오늘날 한국의 뉴라이트 세계관에 가깝습니다). 유럽 사민당들은 의회주의 전략을 열심히 따르고, 제1차 세계대전을 전혀 막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완전히 대조적으로, 1919-1943년의 코민테른은 "식민지 해방"을 목표로 설정하고 식민지 급진 민족주의자들과의 전략적 동맹 전략을 택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바로 급진 좌파와 급진 민족주의의 이 동맹은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영국 위주의 기존의 패권 질서의 붕괴와 전세계적인 해방 지향적 세력들의 대대적인 폭발적 성장은, 정치적 상상력도 창작적 상상력도 풀어 놓았습니다. 코민테른 계열과 종종 전술적 동맹도 맺고 또 어떨 때에 등도 돌리곤 했던 아나키즘 세력들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도 1920-30년대입니다.
동아시아만 봐도 아나키즘 운동이 1920년대에 가장 번성하고, 1945년 이후에 거의 완전히 쇠퇴한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코민테른 못지 않게 세계 각국의 문호들이 거의 일제히 좌파적인 색채를 띠고 서로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의 고리끼, 프랑스의 로맨 롤랑, 독일의 베르톨드 브레흐트와 토마스 만, 미국의 시어도어 드라이저, 중국의 노신과 노사 (老舍), 조선의 임화와 김남천...
이들이 지리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모두들이 모종의 좌파적 신념을 그 공동 분모로 했습니다. 피카소나 달리 등으로 대표됐던 전위 미술 역시 대체로 좌파적 지향을 공유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아이슈타인으로 대표됐던 가장 최첨단의 과학도 그 좌파 지향과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냉전 초기에도 불구하고 1949년에 <먼슬리 리뷰>의 창간호에 <왜 사회주의인가?>를 기고한 만큼 강철 같은 인도주의적 사회주의 신념의 소유자이었습니다.
이 패권의 공백기는 1945년에 마감됐습니다. 미국이 새 패권 질서를 잡자마자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좌파 손보기"에 나섰습니다. 전후 패권 질서의 또 하나의 축이었던 소련에서는 비주류 좌파들은 일찌감치 1937-8년 대숙청의 와중에서 이미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결국 냉전 시기의 서구의 주류 좌파는 사실 1914년 이전까지의 의회주의로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비록 다소 급진적인, 독일의 좌파당 같은 좌파 정당이라도 이 의회주의 전략과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 전략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2기 때에 미국 패권의 쇠락은 과거에 비해 더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머지 않아 패권 공백기의 세계적 혼란 현상이 더 뚜렷해질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세계 좌파들에게는 "개혁"의 한계를 넘어 1920-30년대처럼 좀 더 큰 목표를 지향해볼 기회는, 전쟁과 혼란, 기후 참극, 전세계적 경제위기와 무질서 속에서 아마도 다시 주어질 것입니다. 이번에 좌파가 세계를 바꾸어볼 이 기회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기를 기대해봐야 합니다....
(기사 등록 202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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