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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트럼프의 미국사: 미래가 될 과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7. 9.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역사'는 하나의 현실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연구자가 쓴 저서의 제목대로 "과거는 외국"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가볼 수도 없는, 그 국경이 봉쇄된 외국이지요. 과거는 사라지고, 과거로부터 남는 것은 결국 "기억""문서"인데, 그 사료들은 그 작성자의 이해관계/세계관이 서로 다른 만큼 다 주관성과 한계성 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2003-9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 연합군의 이라크 침략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미국측, 이라크 저항운동측, 그리고 예컨대 한국 내지 일본 파병군측 자료를 놓고 보면 그들 각자가 보는 전쟁은 각각 아주 다를 것입니다.

역사가들이 그 사료의 주관성 등을 감안하여 여러 사료의 교차 비교 등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일의 "객관적인 전모"를 복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리 의식적으로 "객관성"을 지향해도 '과거 복구'를 하는 데에 그들의 목적의식이 또 나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진보 사학자들이 이라크 같은 침략을 연구하려는 의지 뒤에 "두 번 다시 이런 범죄를 반복해서 안된다"는 반전평화 의지가 강력하게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객관성 지향은 사학자의 직업적 덕목이지만, 연구 동기 중의 하나가 되는 그런 사명 의식 같은 게 없는 사학자도 실제로 거의 없을 겁니다.

사학자들도 과거를 다룰 때에 각자 나름의 미래를 향한 모종의 '의식'이 있지만, 정치인들은 더할 것이고, 특히 미국 정치인들은 아주 그럴 것입니다. 미국 정치는 반지성주의적 특색이 강하고, 특히 20-21세기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이렇다 할만한 독서가들이 드뭅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정도 되면 그나마 해군사 관련 서적 수집을 하는 등 지성적 취미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통령 재임 중 거의 독서를 하지 않았답니다.

케네디를 포함해서 전후 대통령들은 거의 독서하지 않았고, 트럼프는 그 중에서도 아주 심한 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역사"를 건드린다면 그 뒤에는 아주 분명하게 "현재적 의도"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 다르게 말하자면 트럼프 같은 정객이 역사 속 무엇을 중시하는가를 알면 그가 계획하는 미국의 미래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트럼프는 외국사는 물론이거니와 자국사에 대한 체계적 학습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는 단편적인 과거의 에피소드나 문서, 법률 등을 언급하는 그의 태도를 봐도, 그가 계획하고자 하는 "미국"의 모습을 엿볼 수는 있지요.

건국기, 18세기말 미국의 법률 중에서는 트럼프가 종종 그 외국인 추방 정책 등의 법률적 근거로 삼는 것은 1798년의 <적성외국인법> (Alien Enemies Act)입니다. 1,2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인 내지 일본인에 대한 억류정책을 실시했을 때에 소환했던 법이기도 한데,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건국 초기의 미국의 최고의 우방은 바로 (영국과 적대했던 나머지 미국의 독립을 지원한) 절대왕권 시대의 프랑스였습니다. 한데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받은 차관을 갚지 못한 바도 있었지만, 1789년 이후의 프랑스의 혁명은, 대개 농장주이자 노예주이었던 미국 혁명의 지도자들이 바라는 지점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1794년초에 프랑스의 카리브해 식민지를 포함하여 모든 프랑스령 지역에서의 노예해방령을 공포했는데, 이는 노예주인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는 조치였습니다. 그들이 프랑스령 아이티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이 미국 남부에서도 일어날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죠. 결국 이 <적성외국인법>이 겨냥했던 사람들은 바로 외국 이민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급진 사상 등에 "전염된" 이나 급진 혁명, 노예 해방 "선동"을 시도한 이 등이었습니다.

지금 트럼프 정권이 이 법을 근거로 삼아 친팔레스타인 시위 "주도자"들을 추방시키려 하는 것인데, 사실 이 경우에는 이 법의 "본래 취지"를 정확히 살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건국 집단인 농장주, 재산가 등이 미국이 "급진 사상이 들어오지 못하는 재산가들의 천국"이 될 것을 원했던 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트럼프 역시 "보수의 보루 미국"상을 그리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는 트럼프가 특히 애호하는 인물은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 (재임기간은 1897-1901)입니다. 역사에 무식한 트럼프가 그래도 이 맥킨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영토 확장, 고관세, 그리고 인종주의 이 세 가지일 것입니다. 맥킨리는, 작가 마크 트웨인 등 "반제 동맹"을 창설해 제국주의 정책을 반대한 미국 사회 명망가 상당수의 저항을 뚫어 하와이를 합병하고 ("이는 우리의 명백한 운명"이라고 하면서), 필리핀 등을 식민화했습니다.

쿠바를 사실상 보호령으로 삼고 필리판과 쿠바의 옛 식민 본국인 스페인에 상당액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전쟁과 ""을 겸비하는 영토 확장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맥킨리 시대에는 미국은 아직 연방 개인 소득세는 미도입됐고, 연방 정부의 주된 수입원은 40%에 달했던,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측에 속했던 관세였습니다. 부자들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고, 고관세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부담으로 전가됐죠. 맥킨리는 "고관세는 우리 노동자들을 보호한다"고 노동자들에게도 호소했는데, 그가 상대하려 했던 노동자들은 오로지 백인 노동자였습니다.

남부 백인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던 그는, 흑인 우체국 국장 등이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아도 별로 반응하지 않고 북캐롤라이나의 윌밍턴 (Wilmington)에서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수백 명의 흑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벌이고 흑인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추방해도 연방 군을 파견하지 않는 등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위대한 미국"이 대체로 어떤 모습인지 이제 짐작은 가지요?

20세기 미국 역사 속에서는 트럼프가 특히 좋게 언급하는 것은 1930년의 스무트-홀리 관세법입니다. 미국의 평균 관세율을 20%로 올리고 캐나다 등 가장 가까운 무역 상대국으로부터의 보복을 초래한 이 법은, 반대로 미국의 실업률을 높이고, 금융 시장 상황을 악화시키고 대공황을 심화시켰습니다. 이외에는 트럼프가 긍정적으로 언급하곤 하는 시기는, 비서구 이민이 극도로 통제돼 있고 시민 운동이 아직 미약하고 한국 전쟁 등으로 미국 기업들이 큰 돈을 벌어들여도 반전 운동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1950년대입니다.

이런 트럼프의 자국사 인식은 무엇을 가리키는가요? "트럼프" 현상은 결코 미국 정치사상의 "우연"이나 갑작스러운 "돌연변이"는 아닙니다. 트럼프 현상은 미국 건국부터 태동된 미국의 보수주의, 급진 운동 혐오증, "외국 급진 분자" 혐오증, 인종주의, 영토 확장론, 고관세와 저세율을 통한 "부자를 위한 복지" 등의 전통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것입니다.

그런 전통을 그 토양으로 삼은 MAGA 운동, 그 운동의 "수령"인 트럼프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트럼프주의와의 미국의 진보, 혁신 운동가들의 투쟁은 힘들고 위험하고 오래 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의 진보 운동이 그 투쟁 속에서 그들의 좋은 우군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야만 하지요.

(기사 등록 20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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