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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화물연대/예스!/삼성전자/늑구/이스라엘/ 트럼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6. 5. 4.

전지윤

서광석 열사 투쟁을 돌아보며

* 운송료 7% 인상  * 단체교섭 정례화   * 조합원 불이익 금지  * 분기별 1회 유급휴가 추가  * 손배, 고소고발 전부 취하

* 화물연대 인정과 활동 보장   * 유가족에 사과와 위로보상

동료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싸운 화물노동자들이 권력기구와 연결된 거대한 유통자본 CU를 무릎꿇린 거의 '완승'에 가깝다. 이제 이재명 정부 차원의 사과와 경찰책임자 처벌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투쟁을 2023'양회동 열사 투쟁'과 비교하게 된다.

그때도 지금도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두 죽음 모두 자본과 정권에 책임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처절한 투쟁과 분노의 연대가 있었다. 다만 2023년에는 정권이 더욱 직접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윤석열 정권은 국가기구를 동원해 언론과 손잡고 대대적 '건폭몰이'를 했다.

그것이 양회동의 죽음을 낳았다. 그후에 정권은 멈추긴커녕 오히려 더욱 강경한 탄압에 나섰다. 매일같이 체포, 구속이 이어졌고 건설노조 조합원은 거의 30% 이상 줄어들었다. 이것은 노동운동 전체에 타격을 가했다. 패배감 속에 민주노총 조합원과 노동조합 조직율은 계속 줄어들었다.

이번에도 경찰은 관성적으로 자본의 편에 섰고, 그것이 죽음을 낳았다. 하지만, 그후 정권은 당혹하고 흔들리다 CU자본에 양보를 압박했다. 결국 화물연대는 대부분의 요구를 쟁취했고, 이제 더많은 운송노동자들이 화물연대로 뭉칠 것이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도 투지와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 2023년 건설노조의 투쟁과 연대가 2026년 화물연대의 투쟁보다 부족했을까? 그보다는 그 사이에 있었던 '윤석열 탄핵 투쟁과 정권 교체'가 중요했다. 그 결과로 사회적 세력관계와 구조가 바뀌었다. 정권도, 자본도, 노동도 모두가 여기에 영향을 받고 있다.

전형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투쟁의 승리가 생존권을 위한 경제투쟁의 승리로 이어지며 상승작용'하는 상황이다. 노동운동에 기회의 창이 열린 것이 재확인됐다. 물론 이것은 양측면이 있다. 무조건 칼을 휘두르는 노골적 반노동자 정권에는 강력한 투쟁과 연대만이 답이다.

반면 '노동 존중''대화와 타협'을 말하는 자유주의 정권에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고려하고 대응해야 한다. 노동절 명칭 변경과 휴일 지정도 마찬가지다. 5.18 국가기념일 지정과 비슷하다. 한편에서는 오랜 투쟁의 결과로 사회 전체가 그 의미를 인정하고 함께 기념하게 됐다는 의미가 있다.

동시에 사회적 운동이 기성체제에서 제도화되며 생기는 부작용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성과를 제도화하면서도 급진적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변화된 상황과 조건에 맞는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통해 노동운동의 획기적 성장을 이루기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 <예스> 상영 철회하라

지금 '팔레스타인과연대하는한국시민사회긴급행동'은 전주영화제에서 이스라엘 영화 <예스>의 상영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기금을 지원받아 만들어져 이스라엘 제작사에 의해 유통되는 영화이므로 팔레스타인 국제연대 'BDS'(보이콧·투자 철회·제재) 운동의 가이드라인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https://pal.or.kr/wp/more-like-no-the-jeonju-international-film-festival-must-cancel-the-screening-of-israeli-film/

따라서 전주영화제측이 긴급행동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내놓은 '국제적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자본도 투자했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는 주장들은 반박이 될 수 없다. BDS 운동은 영화의 예술적 작품성이나 미학적 성취를 평가하고 검열하는 심판관들이 아니다.

오랜 친이스라엘 동맹국들인 프랑스, 독일 자본의 투자도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관객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도 비겁한 변명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전주영화제측은 분명히 나름의 기준과 판단으로 200여편의 영화를 선정해서 추천하고 있다.

그래서, 전주영화제에 가면 우리는 <부정선거>가 아니라 <남태령>을 볼 수 있다. 영화제측의 판단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의 가자 집단학살에 대해서는 우리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가해자 쪽에서 나온 목소리만 들을 수 있어야 하냐고 묻는 것이다.

물론 <예스>는 가해자를 적극 옹호하는 영화는 아니다. 나다브 라피드 감독도 "끔찍한 사건들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관점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사실, 역사적 범죄의 진실을 밝히려면 피해자의 폭로와 고발뿐 아니라 가해자 쪽의 '내부고발'도 필요하다.

홀로코스트의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인종청소를 직접 목격, 수행한 가해자들의 증언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1) 먼저 피해자들의 고발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고 2) 더 중요하게 귀 기울어져야 하고 3) 나아가 가해자의 내부고발이 충분한 정당성과 진정성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예스>의 경우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올해 전주영화제 200여편의 영화 중에서 1편의 팔레스타인 영화도 찾을 수가 없다. 만약, 피해자들이 너무 공포에 질리고 용기가 부족해 침묵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3년간의 가자 집단학살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스스로 진실을 알리는 목소리들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많아졌다. 영화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전주영화제는 그것을 외면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듣지는 않겠다는 뜻이 된다.

만약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알리는 영화들이 충분히 더 앞서서 상영되면서, <예스>같은 영화가 일부 포함됐다면 우리가 이토록 실망하고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라피드 감독과 <예스>'가해자의 내부고발과 성찰'이라고 하기에는 진정성과 정당성이 충분하지가 않다.

이스라엘의 국가를 작곡하게 된 예술가 부부의 좌충우돌을 풍자적 블랙코미디로 그렸다는 이 영화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 속에도, 담론 속에도, 미디어 출연에서도 자신의 사회가 낳은 희생자들에게 어떤 공간도 내주지 않는다"(BDS 프랑스)

라피드 감독 자신도 '예술가는 어느 편도 만족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며 자신을 초월적 자리에 위치짓고 있다. 나아가 자신이 BDS 운동에 반대한다는 뜻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은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스스로 성찰하고 피해자들에 용서를 구하는 자세와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이스라엘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고, 이스라엘 국내 영화제의 후보로 오르고,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이스라엘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선전에 이용되고 있다. 물론 극우 시온주의자들은 이 영화를 싫어하겠지만, 라피드 감독이 정치적 탄압과 박해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같은 이들이 겪는 구금, 투옥, 추방, 상영금지 등을 라피드 감독은 한번도 당한 적이 없다. 결국, 전주영화제도 '집단학살을 비판해서 가해자인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입막히던 고발의 목소리를 듣자'며 이 영화를 선택했다고 변명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국제적인 논란 속에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라는 평가 밖에 없다. 일부 국제영화제와 영화비평가들은 폭격과 학살 속에서 누가 죽고 누가 죽이고 있는가보다, 그것을 얼마나 잘 예술적이나 미학적으로 표현해 냈는가에 더 신경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날카로운 풍자의 카메라 뒤에서, 누가 돈을 대고 있는지 보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독립영화', '대안영화'를 위한 공간이라는 전주영화제의 취지와도 어긋난다.

윤석열 정권 시절에 기획재정부 관료 출신의 우범기 전주시장이 대표적인 친우파 연예인이자 사업가인 정준호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낙하산 임명할 때부터 전주영화제의 방향에 대한 우려는 많았다. 당시에 진보적 독립영화계 인사들은 반발하면서 이사회에서 사퇴했었다.

그후 전주영화제가 '대중성을 이유로 정체성을 잃어간다'는 비판은 많았다. 지금도 '논란' 속에서 오히려 노이즈 마켓팅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기에 지금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낳는 고통이 너무나 심각하다. 전주영화제는 팔레스타인과 연대운동의 요구에 답해야 한다.

삼성전자 파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삼성전자 파업이 다가오면서 친기업 보수언론들의 발작이 갈수록 심해진다. '세계유일의 반도체 노조'가 왜 문제인가? 노조가 없는게 문제지. '명문대나온 박사들보다 전문대나 고졸의 생산직이 더 받는게 공정한가'라며 '공정성', '박탈감'을 운운하고 있다. 이토록 투명한 학벌의식...

하지만 이들은 의사들이 파업할 때나, 판검사들이 전관예우로 수십억을 받을 때는 절대 '공정성과 박탈감'을 말하지 않았다. 반도체 초호황으로 지난해 삼성 이재용이 4천억의 배당금을 받을 때도 '이재용이 젠슨황과 치맥 회동했다'며 셀카사진들을 올려주기 바빴다.

조선일보의 발작은 역으로 이번 삼성 파업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반도체는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산업이지만, 대부분의 나라에 노조가 없고 자본의 일방적 지배력이 강하다는 말이다. 이번에 삼성에서 노조 조직화와 파업이 성공하면 그것은 국제적인 파급력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삼성전자 노조는 무노조 경영을 뚫고 5년전에 처음 만들어졌고, 2년전에 역사적인 '55년만의 첫 파업'을 했다. 그 파업은 한달만에 끝났고 당시 조선일보 등은 '노조가 빈손으로 패배했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후 삼성전자 노조들은 위기 속에 힘이 약해지고 갈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2년만에 다시 조합원 수가 3배 가까이 늘어나며 9만의 강력한 조직으로 재등장해 삼성의 목줄을 쥐고 흔들고 있다. 이 상황은 'MZ 세대는 강성노조나 파업을 싫어한다'던 신화들도 무너뜨리고 있다. 물론, 새롭게 등장한 삼성노조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노동운동은 독재정부에 맞서며 약자들과 연대해 사회정의를 위해 싸울 때 가장 강력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밥그릇만 지키려고 했을 때는 사회적 신뢰를 잃고 고립됐다. 우선, 삼성전자 노조들은 하청,협력업체 노동자들도 성과 배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늑구와 동물원의 의미

늑구가 돌아온 것인지, 잡혀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총맞아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 평생 갇혀 있다 죽을 것이다. 뭐가 더 비극일까. 늑구를 구경거리 삼아 한몫 챙기려는 사람들 중에서 대전시가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는 것 같다. 친윤극우 이장우 대전시장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대전 오월드는 8년전에도 퓨마가 '탈출'한 적이 있는 곳이다. 러시아에서 사온 늑대를 "한국 늑대 복원"으로 포장해서 번식시키며 "귀여운 아기 늑대"라며 광고하던 곳이다. 물론 오월드만은 아니다. 수많은 실내동물원, 체험동물원, 야생동물카페들이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한다.

동물을 구경거리 삼고 SNS에 올릴 사진거리로 만들며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핑계를 댄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갇혀 있는 동물 구경'을 좋아해야 한다고 배운다. 동물원은 제국주의 시대에 잡아온 동물(심지어 원주민도)을 정복의 전리품으로 전시, 과시하던 전통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전시나 과시의 대상이 되는 생명체의 의사나 요구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동물원이 소수의 사육사가 수십 종의 동물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다. 동물원 동물들이 개인들이 집에서 기르는 반려동물보다도 더 돌봄을 받기 어려운 조건은 여기서 생긴다.

그나마 '구경'에 알맞은 신기하고 귀여운 동물들은 더 나은 관심과 돌봄을 받지만, 대부분의 동물원에는 어떤 이유로든 전시에 부적합해져 사육장 뒤켠에서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동물들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동물들은 '감금이 낳는 정신병'에 걸린다.

머리를 쥐어뜯고, 딱지를 긁고, 자기 몸을 깨물거나 할퀴고, 몸을 흔들고, 제자리를 빙빙 도는 반복적 정형행동들... 그 동물들은 그렇게 철창 속에서 구경거리로 살다가 결국 죽는다. 그래도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동물은 인간보다는 열등하니까?

하지만 어떤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보다 더 낫거나 못하다는 비교는 가능한가? "우리가 다른 동물들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하고, 건방지고, 근거가 없으며, 지독하게 이기적인 처사다... 삶의 형태는 각기 다르다. 하지만 각각은 그 유형의 존재에게 옳은 것이다."(마사 누스바움)

이번에 늑구는 나름의 의사 표현을 한 것인지 모른다. 사실 동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끝없이 드러낸다. 아프면 소리를 지르고, 위험을 느끼면 도망치듯이, 늑구는 열린 문으로 걸어 나왔다. 밖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지만, 좁은 철창보다는 나을 거라고 봤던 것일까?

우리도 같은 상황이었라면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동물원은 이미 100년도 더 전부터 있었지만, 동물원에 대한 법은 2016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그 법에서도 동물은 시설의 일부로 다루어졌다. 동물의 복지, 권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은 별로 오래돼지 않았다.

동물을 보전, 교육, 연구한다는 거짓 핑계로 인간의 구경거리를 위해 동물을 희생하는 동물원은 이제 그만 없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들은 계속 커지고 있다. 당장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더 이상 동물원에 갇힌 동물이 늘어나지 않을 수 있는, 그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유대인 학살'과 비교한 이재명

이번에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 전쟁범죄 비판 발언 중에서 특히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을 "유태인 학살"과 비교한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를 경시"했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이것은 홀로코스트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무지나 의도적 왜곡을 보여줄 뿐이다.

홀로코스트는 인류가 절대 잊어선 안되는 역사적 범죄이자 비극이며, 그 본질은 나치의 파시즘과 극우적 인종주의가 6백만명의 집단학살을 낳았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인류는 절대 다시는 파시즘과 극우적 인종주의가 권력을 잡고 인종청소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도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왜곡된 신화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첫번째가 '집단학살은 유대인만 겪은 예외적 범죄이고 그 피해자들을 대변하는게 시온주의(이스라엘)'라는 신화다. 하지만 히틀러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장애인, 성소수자, 점령지 주민들도 집단학살했다.

홀로코스트는 자본주의 위기의 시기에 파시스트들이 집권하면 누구든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보편적 인권의 문제라는 말이다. 더구나 시온주의는 파시즘에 철저히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온주의자들은 파시즘이 유럽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는 것을 사실상 반겼다.

유럽에서 인종을 넘어선 민중 연대보다 중동에서 유대국가(이스라엘)를 만들자는 시온주의가 힘을 얻을 기회로 본 것이다. 그럼에도 초기에 유대인의 20%만이 이스라엘로 이동했고, 지금도 유대인 절반은 이스라엘 밖에 있다. 즉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를 대표, 독점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미국과 유럽국가들이 홀로코스트 방관을 반성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도우며 속죄했다는 신화다. 물론, 이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제대로 막지 않았다. 반유대주의는 이 나라들에서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라들은 유대인들의 망명과 이민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유럽과 미국은 중동의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랍인들을 내쫓고 유대국가를 만들어 주는 길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 인종청소(홀로코스트)와 다를 게 없는 아랍인 인종청소(나크바)가 벌어졌다. 영국, 미국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잘못과 빚을 아랍인들에게 떠넘겨 스스로 탕감했다.

아랍인들은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왜 우리가 대신 짊어져야 하는가'를 물었다. 답은, 서방의 강대국들이 중동에서 석유를 장악하고 빼앗아가고, 아랍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같은 자신들의 전초기지(경비견)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에 있다.

세 번째는 '반시온주의는 곧 반유대주의'라는 신화다. 이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 극단적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시온주의는 신파시즘의 대표적인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트럼프와 네타냐후는 국제 극우 네트워크의 핵심 지도자들이다.

30년대의 파시즘이 희생양 삼았던 것이 유대인이라면, 오늘날의 신파시즘이 희생양 삼는 것은 무슬림이다. 유대인 혐오는 이슬람 혐오로 변화하고 발전해 있다. 따라서 오늘날 극우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유대주의만큼이나 시온주의에도 철저히 반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이 지금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유대인 학살'과 비교한 것은 아주 시의적절했다. 지금 전세계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과 시온주의에 반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유대인의 절반 이상, 특히 유대인 청년층의 대다수가 네타냐후에 반대한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경시'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중시'하기에 '유대인의 이름으로 또다른 집단학살을 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네타냐후의 집단학살과 전쟁범죄를 막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길이다.

트럼프의 이란 침략전쟁이 남긴 것

지금, 트럼프와 미국은 마치 불을 지른 다음에 그것을 끄지도 못하고 도망치려는 망나니처럼 보인다. 따라서 2주간의 임시 휴전과 그 이후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은 남아있지만, 왜 트럼프가 이런 처지로 몰렸는지, 그동안을 돌아보며 잠정적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

하메네이 참수에 성공한 초기만 해도 트럼프의 앞 길은 밝아 보였다. 이란의 쫓겨난 왕세자인 레자 팔레비는 "이슬람공화국이 무너지고 있다", "승리에 가까이 왔다"며 흥분했다. <조선일보>"전광석화 같은 공격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라며 트럼프를 찬양했다.

트럼프는 이 전쟁을 "짧은 외출”, "즐거운 소풍"이라고 불렀고 3개의 항모전단을 동원하고 하루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으며 헤그세스는 "우리는 그들이 쓰러졌을 때 두들겨 패고 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전쟁광들 얼굴에서는 금새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이란은 중동 지역의 미군기지들로 전장을 수평적으로 확산시켰고, 이제 전쟁은 이란의 3천만원 짜리 드론을 미국의 60억 짜리 미사일로 격추하기 급급한 비대칭적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고성능 레이더와 초고가 전투기들이 파괴됐고, 무엇보다 호르무즈가 막혔다.

그러자 전 세계 경제와 무역 전체가 중단되기 시작했다. 고통받는 전세계 사람들이 트럼프를 원망하고 욕하기 시작했다. '저항의 축'의 하나인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까지 봉쇄하겠다고 위협하기 시작하자, 세계경제는 동맥경화를 넘어 심장마비 증세로 발전해 갔다.

트럼프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십만 지상군을 투입해서 이란 전체를 점령하고 정권을 교체하거나, 하르그섬과 주변 해안을 장악해 호르무즈를 열거나, 하다못해 특공대라도 투입해 농축 우라늄을 뺐아오면서 '핵개발을 막았다'고 포장해야 했다.

처음에 트럼프는 "나는 지상군 투입에 울렁증이 없다"며 큰소리를 뻥뻥쳤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특히 이것은 4월초의 이란에서 추락한 미군 조종사 구출 작전을 통해 명백해졌다.

1명의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서 수백대의 항공기와 수천 명의 병력을 투입해하고서도, 수송기와 헬기 4대가 파괴된 것은 미군의 능력이 아니라 무능을 보여준 결과였다. 이 상황에서 트럼프가 미군의 대규모 사상을 낳을 지상 작전을 추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결국 트럼프는 시간이 갈수록 험악하고 천박한 표현의 협박을 쏟아내는 '입을 통한 전쟁'으로 나아가며, 뒤로는 파키스탄을 통해 이란에 협상 메시지를 전달하는 처지로 전락해 갔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2주간의 임시 휴전에 합의했다. 지금 미국이 입은 상처는 매우 심각하다.

먼저 신뢰의 위기다. 협상을 하다가 뒤통수를 치고, 말을 수시로 바꾸는 미국을 믿을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미국의 군사적 능력은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다'는 신화도 무너졌다. 또한 이것은 동맹의 위기다. 어떤 나라도 미국을 돕지 않았고 나토는 해체 위기에 있다.

'페트로 달러' 체제도 흔들리고 있고, 그것을 주도하던 걸프 국가들은 '과연 우리 땅의 미군기지가 우리를 지켜주는가, 아니면 우리를 공격의 표적으로 만드는가'라는 근본적 회의에 빠졌다. 또한 이것은 트럼프의 국내 정치적 위기로 연결되고 있다.

트럼프의 지지율은 날개없이 추락하고 있고, 의회에서 탄핵안이 쏟아지고 있으며, 나아가 수정헌법 25조에 따라 대통령 직무를 중지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것은 트럼프로 대표되는 국제적 극우 네트워크와 신나치 정치세력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미국 패권의 중대한 위기로 수렴되고 있다. 이번에 트럼프는 준비, 목표, 계획, 전략이 모두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란을 침략했다가 '전략적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베트남전이나 이라크전에서 미국의 패배보다도 더 큰 전략적 패배로 평가되고 있다.

1956년에 수에즈 운하을 통제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세계 패권을 놓치며 몰락하기 시작한 영국과 비교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이란을 침략한 2026228일은 미국 패권 몰락의 세계사적인 전환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루 빨리 이란 침략전쟁을 끝내도록 압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이란에서도 신정체제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시민들이 숨쉴 공간을 찾고 다시 목소리를 내고 행동에 나설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과 폭격도 중단시켜야 한다. 그것은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모든 선을 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던 이스라엘의 가자 집단학살과 전쟁범죄를 중단시키고 책임을 묻는 것으로 향해야 마땅하다.

<사회 이론의 두 환원주의를 넘어서>를 읽고서

정태석 선생님이 보내주신 새로운 책 <사회 이론의 두 환원주의를 넘어서>를 이제야 다 봤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많이 늦어졌다. 덕분에 이론적 시야를 넓히고 고민을 확대할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었다. 정태석 선생님은 사회학자로서 하나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혁신을 모색하고, 현실적 적용을 시도하고 발언해온 드문 지식인이다.

특히 진보정치의 발전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 책에서도 오늘날 한국사회 진보정당들이 위기와 분열 속에 갈수록 축소되는 현실에 대해 큰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모든 문제는 자본주의가 초래했다는 지나치게 단순한 환원주의적 주장'을 반복하고, "노동자 대중의 다수가 이러한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것 같다.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한국 사회의 급진적 진보정당과 진보 정치인들이 점점 대중적 지지를 잃어 가고 국회에서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은 신념윤리에 매몰되어 책임윤리를 도외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행하는 구분대로면 가치(A)와 이익(B)을 효과적, 전술적으로 결합해 성과를 만드는 C그룹의 정치가 부족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낸시 프레이저의 '식인 자본주의' 이론과 샹탈 무페의 '경합적 다원주의와 좌파 대중주의' 이론을 비교 검토하면서 현실적 적용에서의 의미와 한계를 평가하는 게 이 책의 주요 내용과 줄기이다. 먼저 '낸시 프레이저는 경제 환원주의를 넘어서 모순과 적대의 다원성에 주목'한다며 그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프레이저의 식인 자본주의 이론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가 보여 온 경제/토대 결정론과 환원주의를 넘어서려는 시도라는 말이다. 실제로 프레이저의 이론은 상품 생산만이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과 생태적 의제, 계급만이 아니라 젠더, 인종, 민족을 넘나들며 착취와 수탈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려는 정교한 시도를 보여 준다.

하지만,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반자본주의 투쟁 근본주의를 주장함으로써 환원주의 논리를 재도입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경제가 중심이 되어서 비경제적 부분들까지 전체를 결정한다는 환원주의적 사고'를 벗어나려 하면서도, '사회적 모순의 근원을 식인 자본주의라는 단일구조 안에서 모두 설명'하는 또다른 환원주의로 돌아갔다는 지적이다.

결국, 모순과 적대의 다원성과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식인 자본주의와 식인종인 자본가 계급'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것만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도식에 머문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운동에서 '체제전환운동' 네트워크를 그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다양한 차별과 착취를 비판해 온 급진적 사회운동 세력은 2024년 경에 '체제전환운동'이라는 네트워크 조직을 구성하여, 자본주의 체계가 기후 위기를 비롯한 다원적 착취와 차별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반자본주의 체제(체계) 전환'을 추구하는 근본주의적 연대를 추구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이어서, 다원적 적대 속의 연대와 등가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샹탈 무페의 '경합적 다원주의와 좌파 대중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우선은 그 의미와 기여를 평가한다. 이러한 이론적 도전이 '다원적 정체성의 비결정성과 담론의 우연적 접합에 기초한 헤게모니 정치'를 모색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다.

샹탈 무페는 오래 전부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환원주의와 결정론을 벗어나기 위한 이론적 혁신을 시도해 왔다. 알튀세르의 중첩결정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활용해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를 개척해온 선구자들이다. 무페의 문제 의식은 오늘날 '좌파 대중주의' 전략으로 발전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 우파 대중주의가 득세하는 오늘날 '과두제에 대항하는 중산층과 소수자의 다양한 민주주의 요구로 등가의 사슬을 형성'하고 민주적 정당성을 얻어서 공공성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급진좌파의 새로운 전략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략은 서유럽의 새로운 급진좌파들 의해 현실정치에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무페의 이론과 전략에도 몇가지 문제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먼저 이론과 전략의 토대가 돼야할 '사회경제적 권력관계 구조의 현실을 분석할 사회 이론과 설명 체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좌파 대중주의' 전략이 '정감(정념? 정동?)과 헤게모니'를 강조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정감의 동원은 감정적 대립을 부추기면서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과정을 제어하기 어렵다." 따라서 무페의 이론은 "정당성과 합리성보다 헤게모니와 정감에 의존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헤게모니-정감 환원주의'의 경향"이 있고, 그것은 '대인관계에서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경합에 치중하는 대인관계 환원주의'라고 비판한다.

결국, 프레이저와 무페는 환원주의의 양측면이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프레이저의 '체계 환원주의'와 무페의 '대인관계 환원주의'는 사회 이론 또는 정치철학에서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그리고 "이중의 환원주의에서 벗어나려면, 탈인격적 관계로서 체계에 대한 분석과 인격적 관계로서 대인관계(권력/인식-정서)에 대한 분석이 서로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은 '서구의 현실에서 나온 이론적, 실천적 주장들을 그대로 가져와 근본주의적 주장을 내세우는 것', '현실이 자신들의 이론과 안 맞을 때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이론을 수정하는게 아니라 이론을 정교화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대안적 가능성으로서 조란 맘다니의 사례도 제시한다.

"맘다니는 추상적인 이념이나 가치를 내세워 대중의 정감을 동원하려는 전략보다 실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내세워 시민들을 설득하려는 전략을 추구하였고, 이를 통해 다수파 연합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합리적 정책과 대중의 정감을 동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구분될 수 없고 함께 구사'해야할 전술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프레이저의 '포괄적 대항 헤게모니'이든 무페의 '등가적, 헤게모니적 접합'이든 다수 시민의 지지와 공감을 얻으려면, 다원적 모순/위기/적대들이 서로 맞물리거나 엇갈리는 체계의 양상들을 객관적, 구체적으로 분석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대인관계에서 더 많은 시민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민주주의적 분할선을 구성해 가야 한다.“

이 책 전체에서 강조하는 "사회를 체계와 대인 관계(권력/인식-정서)의 비대칭적 복합체로 이해하는 문제틀"은 타당하고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사실, 사회변혁에서 객관적 구조와 주체적 개입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느 것을 더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반복돼 왔다. 그에 따라 구조 결정론이나 주의주의라는 양편향도 나타나 왔다.

정치적 원칙에서 전술을 도출할 것인가, 대중 정서에 적합한 전술을 채택할 것인가, 실용적인 최소강령으로 충분할 것인가도 논쟁돼 왔다. 이 책이 주목하고 분석하는 두가지 대척점의 환원주의나, 합리성이냐 정감이냐는 그러한 논쟁의 연장선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분석들은 그런 논쟁과 고민을 오늘날에 맞게 더 심화,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 '한국의 급진적 사회운동은 고유한 현실에 적합한 사유와 전략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타당하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책이 제시한 문제의식들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그것에 적합한 전략과 전술에 대한 제시를 다음 작업의 결과물로서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든다.

다만, 체제의 근본적 변혁에 대한 추구를 모두 '근본주의''환원주의'로 묶어버리지 않는가 하는 우려는 있다. 다양한 모순과 적대가 교차하는 체계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총체적인 분석은 근본적 변혁에 대한 고민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런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찾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체제전환운동' 네트워크와 같은 운동 방식의 난점을 근본주의와 환원주의로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급진적 정치조직들이 힘을 모아서 더 폭넓은 '체제전환운동'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기도 하다. 그런 네트워크는 더 넓은 대중운동 속으로 개입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일 수 있다.

다만 정치조직, 대중조직, 시민단체 등이 층위없이 섞여서 체제 내에서 개혁의 과제와 체제를 넘어서는 변혁의 구호들이 구분없이 제기된다면 문제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정치조직이 유연한 전술을 개발하는 데도, 대중조직이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데도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점들을 더 고민, 토론해 나가기 위한 좋은 이론적 자극을 던져준다.

(기사 등록 20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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