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요즘은 이 시대를 1930년대의 '극단의 시대'(에릭 홉스범)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유행처럼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이유 있는 유행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패권의 위기가 오고, 자본주의적 축적의 위기가 심화된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위기 국면에서 "국민 국가"가 다시 한 번 사회와 경제의 중심에 서고, 기존의 세계화 경향은 국가주의/민족주의/보호주의 경향으로 교체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핵심부 고소득 국가들의 정치는 우향우하고 있습니다. 한데 이와 같은 공통점들이 있는가 하면, 만만치 않은 차이점들도 분명하게 관찰됩니다. 아주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1930년대와 달리 2020년대의 파시즘은 "고전적" 파시즘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파시즘입니다. 그래서 1930년대와 상당히 판이한 특징도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 1930년대는 "동원"의 시대였습니다. "수정의 밤" (1938년11월9-10일 독일에서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중적인 포그롬과 학살) 같은 경우에는 수많은 "민초"들이 동원되어 "국민적 배제"의 타깃이 된 소수자들을 죽이고 그 재산을 파괴하는 등 폭력 행위를 통한 "국민적 결속"을 다졌습니다. 1930년대는 곳곳에서 대중적인 포그롬의 시대였는데, 그 중의 하나는 바로 1931년의 그 악명 높은 조선에서의 "만보산 사태"였습니다. 한데 지금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동원"보다는 "탈동원"을 훨씬 더 지향합니다.
미국에서 언어도단 경지의 이민자들에 대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성난 극우적 '대중'이 아니라 이민단속국 직원들입니다. 러시아에서는 대중들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동원"된다기보다는 개별적으로 큰 돈에 몸을 팔아 군에 가서 전장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부분 동원에 걸린 사람 이외의 경우 대다수는 - 특히 대도시에서는 - 전쟁과 거의 관계 없는 평상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사회는, "국민적으로 총동원된" 대중들보다는 그냥 쇼핑몰을 메우고 물건이나 열심히 사가는 "소비자"들을 원합니다.
● 1930년대는 "국유화"의 시대였습니다. 소련에서는 공업 경제 전체가 국유화됐는가 하면 "뉴딜"의 미국에서는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의 순위는 기존에 비해 훨씬 높아졌습니다. 제국 일본이나 그 식민지 조선의 경우, 주주들은 기업의 주식을 계속 보유할 수 있어도 주총에서 주주로서의 권리를 더 이상 행사할 수 없었고 고정의 소액 배당금만 챙겨 갈 수 있어 주식과 채권의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주주 자본주의가 국가 자본주의로 변모된 것이죠. 지금은 트럼프와 같은 극우도 재미있게도 급진 좌파도 전반적인 경제 국가화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트럼프 같은 극우들이 집권하면 "전략적 가치 있는" 일부 기업들의 지분을 국가가 사가고, 급진 좌파는 여전히 사회 기본 시설의 공유화를 원하지만, 극우도 급진 좌파도 "국유화"에 아주 큰 방점을 찍지 않고 있습니다. 극우들의 입장에서는 국유화는 신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의 이윤 뽑아내기를 방해할 수 있는 거고, 급진 좌파는 국유화에 올인했던 소련형 사회들의 실수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일단 "국가 소유"보다는 기업 활동에 대한 "사회적 통제", 그 공공성 제고와 환경, 기후 영향 본위의 접근을 요구합니다.
● 1930년대는 "신념"의 시대였습니다. 아직 종교성이 강한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좌든 우든 정치 신념은 높은 수준의 종교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좌파는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상상 이상의 고통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순교를 할 자세가 돼 있었는가 하면, 극우들도 많은 경우 "민족"이라는 정치 종교를 위해 "멸사봉공"할 자세가 돼 있었습니다. 일제말기의 특공대야말로 '고전적' 파시즘 시대의 극우 분자의 이상형에 가깝습니다.
한데 저는 "윤어게인" 시위를 벌이는 얼간이들을 보면 그들이 정말 윤이라는 "위대한 리더"를 위해서 한 몸을 벌여 순교할 자세가 돼 있는 것처럼 결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차라리 극우적 활동을 "소비"하는 자세로 보이는 것이죠. 사실 신자유주의 사회로서는 종교와 같은 "신념의 정치"는 극도로 위험한 것이고, 트럼프와 같은 "쇼의 정치"야말로 딱 안성맞춤입니다. 대중들이 동원돼 이 "쇼"에 직접 참여한다기보다는 그냥 화면에서 보면서 소비하는 겁니다.
●1930년대는 "개발"의 시대였습니다. 일제 시대의 일본에서든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든 공장의 굴뚝이야말로 "발전", "진보", "미래"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소련만큼은 아니지만, 말기의 일제나 만주국에서도 노동자, 즉 "산업 전선의 전사"를 칭송하는 선전, 각종의 "증산 운동" 등은 계속 눈에 띄었습니다. 오늘날은 트럼프 같은 극우들이 아무리 고율 관세를 때려도 핵심부 재공업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대쪽에서는 급진 좌파는 공업 일자리 이상으로 기후 정의 등 "개발"의 후과들을 더 중시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전간기 (1918-1939)와 자본주의 말기 (1970-80년대 이후)가 서로 다른 만큼 1930년대의 정치 문화와 오늘날의 정치 문화도 다르고 극우화의 모습들도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극우들은 "동원"과 "국유화", 그리고 그 추종자들의 "신념"이나 사회적 목표로서의 "개발"을 1930년대에 비해 훨씬 덜 지향하는 것입니다.
2020년대의 극우란 그냥 트럼프에게 한 표를 던지는 이상의 정치 활동을 그다지 하지 않고, 그저 텔레비전이나 핸드폰의 화면으로 이민자 단속 장면들을 보면서 환호를 하고, 트럼프나 윤에 대해 "신념"이라기보다는 그저 "쿨하다"는 "느낌" 정도만 가지고 국가에 "개발에서의 성공"을 꼭 요구하지 않는 소비 사회의 원자화된 구성원입니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뽑은 극우적 지배자들이 벌이는 이민자 단속 등의 야만적 행각들이 덜 위험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원자화되고 탈동원된 소비 사회 개인들의 소외 속에서도 결국 사회가 다시 권위주의로 회귀하고 민주주의가 형해화됩니다. "소프트한" 파시즘도 결국 파시즘이지요.
(기사 등록 202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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