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이주 노동자, 여성 등의 삶이 극우 세력에 의해 위협받는 시기에, 이들 집단의 요구와 분석을 그들 자신의 용어로서뿐만 아니라 자본 관계에 맞선 더 넓은 투쟁의 일부로 다루는 일은 중요하다. 이는 생산 지점을 넘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침투하는 자본주의적 소외에 대한 확장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앨런 시어스(Alan Sears)의 신간 <에로스와 소외(Eros and Alienation)>는 마르크스주의 소외 이론과 퀴어 이론을 결합하여, 노동의 소외가 우리의 창조적이고 생명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자본주의적 이윤 생산에 종속시켰으며, 여기에는 우리가 성별과 성적 지향을 경험하는 방식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인간의 번영을 위한 우리 역량의 실현 가능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방어하고 창조하는 퀴어 형태의 공동체와 투쟁에서 예시된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앨런은 소외에 대한 확장된 개념, 자본주의적 소외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에로틱한 것의 역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 등 그의 신간에 담긴 주제들을 논한다.
앨런 시어스는 1980년대 중반부터 퀴어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사회 변혁과 국가에 관해 글을 써 왔다. 그는 토론토 메트로폴리탄 대학교(Toronto Metropolitan University) 사회학과 교수였다. <에로스와 소외> 이전의 주요 저서로는 <다음번 신좌파: 미래의 역사(The Next New Left: A History of the Future)>와 제임스 케언즈(James Cairns)와 공동 집필한 <민주적 상상력: 21세기 민중 권력 구상하기(The Democratic Imagination: Envisioning Popular Power in the Twenty-First Century)> 등이 있다. 그의 연구는 퀴어 운동에서의 당사자이면서 활동가적 참여와 깊이 얽혀 있다. 비록 그의 책이 번역돼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 사회운동의 혁신에 대한 고민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번역 소개한다. 글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것은 첫 번째이다.(번역: 두견)
출처: https://www.historicalmaterialism.org/alienation-eroticism-and-utopia-an-interview-with-alan-sears/

# 이 책의 아이디어와 발전 과정은 어떠했나?
여러 면에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의 탄생은 아마도 1980년대 초 칼턴 대학교(Carleton University) 대학원생 시절, 캠퍼스 내 퀴어 조직인 '칼턴의 게이 사람들(Gay People at Carleton)'(다음 해에 레즈비언이 추가되었고 이후 명칭은 계속 바뀌었다)에서 훨씬 더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일 것이다. 나는 또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국제 사회주의자들(International Socialists, IS)에 가입하여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좌파 활동을 해왔지만, 주로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NDP)에서 활동했다. 따라서 이는 더 왼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자 퀴어 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퀴어 정치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가지가 내 마음속에 함께 있었으나 항상 조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참여했던 퀴어 이슈 관련 활동들은 종종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았고, 퀴어 정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 저작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 연결 고리들을 직접 맞춰나가야 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에 관한 훌륭한 세미나에 참석하여 소외에 관한 초기 저작들을 포함해 마르크스의 글을 많이 읽었다. 대학원생으로서 나는 소외가 성(sexuality)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장난스럽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카를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을 모은 나의 옛 책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인간의 감성적 실천(human sensuous practice)"이라는 문구에 밑줄이 처진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들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다른 주제들을 다루었다. 이 아이디어들을 조화시키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퀴어함과 소외를 함께 생각하는 나의 접근 방식은 더욱 체계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회재생산 이론, 생태 마르크스주의 등 나에게 영향을 준 다른 아이디어들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이는 내가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생각들로 나를 다시 이끌었다.
# 이 책은 당신의 다른 저작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글쓰기 측면에서 나는 약간 사방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석사와 박사 과정 동안 나는 국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게 되었다. 국가와 사회 정책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학부와 대학원 사이의 기간에 사회 복지 분야에서 일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대학원 시절 내내 이어졌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사실 70년대 후반에 정신과 치료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주거 정책을 고민하고, 사람들이 공동체에 재통합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퀴어함과 마르크스주의라는 또 다른 층위의 전기적, 이론적 관심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지적 초점은 주로 국가에 맞춰져 있었다. 에이즈(AIDS) 조직 활동으로 인해 공중보건과 국가에 관한 연구를 했고, 그 후 교육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국가와 교육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즉, 국가에 대한 나의 관심은 내가 해온 일의 종류를 통해 발전했다.
나는 내가 속해 있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IS와 신사회주의자들(New Socialists)의 일원으로서 퀴어 정치에 대해 쓰고 발표했지만, 나의 학술적 작업은 분리되어 있었다. 그 후 연대와 결집에 관한 책인 <다음번 신좌파>에서 저항의 기반 시설(infrastructures of dissent)에 대해 썼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후, 나는 내가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고 생각한 더 근본적인 층위의 소외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 어떤 면에서 <에로스와 소외>는 의도치 않았더라도 나의 이전 작업들을 많이 통합하게 되었다. 사회재생산과 소외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자 국가가 다시 초점으로 들어왔다. 집단성과 저항의 기반 시설 또한 다시 돌아왔다.
여러 주제에 대한 일종의 최종적인 성찰로 이 책을 쓰려던 것이 반드시 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주제들이 여기서 모두 하나로 모였다. 활기찬 사회재생산 관점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유지하는지, 어떤 관계가 삶에 도움을 주거나 해를 끼치는지 등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 마르크스주의는 소외를 인간 실현의 소원함과 한계로 이해한다. 사회재생산 이론(SRT)은 이를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으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구체 노동이 추상 노동으로 포섭되는 것으로 본다. 퀴어 이론은 우리가 소외에 대한 더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내가 생각하는 마르크스주의 소외 이론의 핵심 요소는 폭넓게 이해된 노동, 즉 사람이 제작자(makers)라는 생각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차원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만드는 존재이며, 여기에는 물리적인 제작, 상상력, 그리고 온갖 종류의 집단성이 포함된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이론화에서 발견되는 현상은 도로시 스미스(Dorothy Smith)가 마르크스 자신에게도 일어났다고 주장한 것처럼, 이 개방적인 제작의 개념에서 자본을 위한 생산성이라는 노동의 좁은 정의로 이동한 것이다. 이는 소외에 관한 많은 마르크스주의 작업들이 유급 고용의 영역, 즉 일터에서의 구체적인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와 종속된 노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자아 실현의 상실로 매우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감을 의미한다.
내가 더 성찰하기 시작한 것은 제작자로서의 우리의 활동이 유급 노동에서 수행하는 소외되고 종속된 노동에 포섭되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우선, 온갖 종류의 무급 노동이 있다. 사회재생산 이론이 강조하듯이, 임금 노동과 동일한 관계망 속에 갇혀 있기에 소외된 무급 노동 과정이 많이 존재한다. 따라서 소외가 우리가 자본을 위해 직접 수행하는 노동을 훨씬 넘어서 어떻게 확장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가정에서 수행하는 노동은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충족의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관계망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항상 모순이 존재한다.
나에게 퀴어함은 항상 존재하는 에로틱한 요소들을 상기시켜 주었으며, 이는 마르크스주의 소외 이론에서 확실히 많이 논의되지 않는 부분이다. 우리의 제작은 넓은 의미에서의 에로틱한 충족을 포함한다. 그것은 연결의 한 형태, 즉 사회적 연결이자 신체화된 충족이며,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에로틱한 것이 제작 과정으로부터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분리되는지 생각하면서, 나는 우리가 삶의 여러 영역에서 수행하는 다양한 유형의 노동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약간 다른 렌즈를 갖게 되었다.
# 에로스와 놀이가 침투한 인간의 생명 제작 활동이라는 확장된 개념에서 시작하여, 이러한 요소들이 소외 극복(disalienation)의 과정을 어떻게 형성한다고 보는가? 에로틱한 생명 제작 활동과 인간 실현 사이의 이러한 관계가 해방에 도달하기 위해 에로틱한 영역으로부터 발을 빼는 정치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인간 요구의 다양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중심에 둔다는 것이 사람들을 성적 행위자라는 좁고 성적인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보기에 에로스가 가진 광범위함과 일치하지 않는다. 에로틱한 충족은 흔히 다른 종류의 충족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충족의 일부로서 에로스를 진정으로 지향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차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에로틱한 요소를 포함한 일련의 다양한 충족을 가질 수 있다. 에로틱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종의 개방성이 존재하며, 특히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그것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사회적 연결과 신체화된 충족의 접점으로서의 이러한 넓은 의미의 에로틱함은 우리 삶의 많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그들의 에로티시즘이 가진 개방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은 세상을 입에 넣고, 기어오르고, 그것과 관계를 맺고, 탐험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함께 일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엄청난 즐거움뿐만 아니라 고통도 생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 퍼거슨(Sue Ferguson)은 현재 이러한 주제들과 아동기 차원에서 작동하는 소외에 대해 매우 훌륭한 글을 쓰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넓은 의미의 에로틱함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정원 가꾸기, 먹기, 요리하기뿐만 아니라 즉각적으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 많은 활동 등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가져온다. 우리의 제작은 항상,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에로틱한 차원을 수반한다. 제작을 자본주의적 의미의 생산성, 즉 자본주의 시장에서 인간의 능력을 거래함으로써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국한함으로써, 소외는 우리 삶 속에서 에로틱한 것을 좁히고 분리시킨다.
그래서 나에게 무성애(asexuality)와 무성애 활동주의 같은 것들을 생각할 때, 그것이 반드시 '비에로틱'한 것은 아니다. 특히 에로틱한 것을 더 넓은 의미로 생각할 때, 그것은 충족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에 따라 사람들이 자아 실현의 주체가 되는 것에 더 가깝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sexuality)은 매우 좁은 용어로 정의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적인 것과 무성애적인 것 사이에 이분법을 만든다. 왜냐하면 성적인 것이 너무 좁게 정의되고, 종종 참여하는 사람들의 에로틱한 욕구의 관점에서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인간 해방의 정치를 논할 때, 그 중 많은 부분은 우리가 인간의 몸에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에 대한 개방성을 인식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성적 활동이라는 의미에서의 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많은 종들이 그렇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이러한 것들은 항상 개방성을 가지며, 자신의 신체적 자아 실현의 주체가 되는 것에 관한 것이고, 이는 항상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을 수반한다. 우리는 자아 실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떻게 함께 조직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여기에는 민주적 결정과 우리 삶의 방식이 초래할 생태적 결과 등 온갖 종류의 다른 질문들이 포함된다.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생태적 결과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생태적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영향을 미치는 데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활용 통에 무언가를 넣는 것과 같은 지극히 사소한 일은 할 수 있지만, 생태계와의 파괴적인 관계에 대한 더 넓은 질문들을 다루는 데는 흔히 불가능함을 느낀다. 따라서 나에게 집단적 조직화와 생산 수단의 장악, 사회의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재구성, 삶과 노동의 모든 영역에서의 밑으로부터의 반란은 우리 스스로 자아 실현을 정의하기 시작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 정의는 자본을 위한 생산성이라는 좁은 렌즈를 통한 자아 실현에 반대되는 것으로, 그러한 생산성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더라도 무엇이 성적이고 무엇이 에로틱한지에 대한 정의를 제약한다.
확실히 성(sexuality)이나 무성애에 대한 아이디어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우리 자신의 원함과 필요에서 시작하는 대신 우리에게 특정한 형태의 순응을 강요하고 기준에 맞출 것을 요구하는 시스템으로서의 성이라는 개념의 산물이다. 크리스 치티(Chris Chitty)가 보여주듯이, 에로틱한 인클로저(erotic enclosure) 아이디어는 토지에 일어났던 인클로저 아이디어와 평행한다. 이 아이디어는 에로틱한 것이 분리되어 나간다는 사실에 기반하며, 그 결과 우리는 성이 마치 우리 외부에 있는 고유한 역학을 가진 것처럼 간주하고, 우리 자신의 정의(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욕구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는 대신 성적이기 위해 요구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의 역량을 거래하게 된다.
직장은 성희롱과 성폭력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성 외부에 있는 장소다. 그러나 직장은 또한 성이 여러 방식으로 금지되는 곳이기도 하며, 에로틱한 것이 노동으로부터 분리되고 노동은 단지 임금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 과정을 통해 성은 고유한 역학을 발달시키고 수치의 영역이 된다. 성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sexuality) 아이디어 중 일부는 그것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다.
복잡성을 둘러싼 수치심 때문에 사람들이 친밀한 파트너에게조차 욕망과 원함에 대해 소통하지 못하는 방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욕구의 메뉴는 이미 인쇄되어 있다. 페미니즘 투쟁, 반인종주의 투쟁, 퀴어 투쟁 등으로 인해 자본주의 하에서 그것이 변하기는 하지만, 폭력의 만연함,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과 젠더 폭력은 여전하다. 우리의 욕구를 진정으로 에로틱하게 실현하는 것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이 책에서 소설을 일부 활용한 이유는 소설 쓰기 과정에는 사회 이론 쓰기에는 없는 개방성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으로부터 몇 세대 후의 모습이 어떠할지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 해방된 상황에서 에로틱한 자아 실현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그 답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과는 아주 다를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에 대한 당신의 참여에서, 당신은 손대지 않은 '제1의 자연'으로의 회귀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착취적인 '제2의 자연'의 대사 관계를 극복하는 것은 소외되지 않은 인간 활동과 인간과 자연계 사이의 소외되지 않은 관계인 '제3의 자연'을 개발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상품화와 인간 산물로서의 신체 제작 사이의 평행 관계의 기초는 무엇인가? 퀴어와 트랜스의 자기 형성이 이러한 '제3의 자연' 발전에 기여할 잠재력이 있음을 인식할 때, 이 신체화(embodiments)를 규범적이고 소외시키는 것들과 다르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생태학에 관한 장을 쓰면서 나는 내부의 자연과 외부의 자연,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의 신체화에 대한 감각과 우리 주변 생태계와의 관계는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소외는 양자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리앤 심슨(Leanne Simpson)의 토착성(Indigeneity) 관점을 통한 생태학 연구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친밀함의 생태학(an ecology of intimacy)", 즉 다른 인간, 다른 종, 다른 생명체와의 호혜적 관계를 묘사한다. 이것은 그녀의 민족(Nation)의 질서와 그들이 묶여 있는 관계의 망 속에서 이해되는 관계다.
자본주의적 강탈(capitalist dispossession)—이는 리앤 심슨의 용어라기보다 나의 용어다—은 잔혹한 폭력을 통해 그 친밀함의 망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집단 학살의 차원이 포함되며, 우리는 지금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캐나다 국가와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s: 원주민 중에서 이누이트족과 혼혈인을 제외한 이들)의 관계에서도 이를 목격한다. 그러한 상호 관계와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우리를 추방하고, 우리를 문화적,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 우리는 벌거벗겨진 채 결핍 상태로 남겨지며, 그 벌거벗음과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오직 자본주의 시장만이 남게 된다.
내부의 자연과 외부의 자연 모두에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집단성, 상호성, 호혜성을 재발견하고, 자아 실현의 측면에 존재하는 개방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쇼핑몰 포스터 속의 몸이 매력적인 사람의 표본이기 때문에 그 모습이 되기를 갈망해야 한다는 관념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기 형성(self-making)'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디로 이어질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트랜스성(transness)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때 인류 사회에서 젠더의 미래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자아 실현의 가능성이 진정으로 열려 있다고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상황 속에 우리가 존재해야 한다.
나에게 그것은 밑으로부터의 생산 수단에 대한 민주적 장악을 요구한다. 그러한 반란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처하게 된 처지를 설명하고, 집단 학살적 파괴와 외부 자연과의 관계라는 측면 모두에서 자본주의 하에 발생한 다세대에 걸친 피해를 배상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이러한 소외 극복(disalienation)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창조적 역량을 재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러한 국가 관념을 넘어서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회 정책이 우리의 가능성에 대한 감각에 어떻게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육 시스템은 특정한 형태의 신체화, 전문성에 대한 특정한 관념,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특정한 생각을 생산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는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더 좋은 학교를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교육을 기초부터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문제다.
나는 제3의 자연에 대한 아이디어가 여기서 유용하다고 생각하며, 의료 체계를 재고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건강 측면에서의 사회주의적 자기 형성이 자본주의 의학이 학습한 모든 것을 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데, 특정한 종류의 수술이나 백신 같은 것들은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지식들을 인수하되, 의사나 외과 의사 같은 동일한 역할이 지배하는 이전과 같은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환경에 그 지식들을 배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확실히 이러한 역할들은 포스트 자본주의 상황에서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고, 같을 수도 없다. 현재의 역할들은 우리 자신의 건강 측면에서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것을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이지만, 일단 우리가 그것을 넘어서서 국가가 개념들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생성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게 된다면, 그곳에 존재하는 개방성이 국가가 우리의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형성하는 방식을 더 잘 인식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국가 형태를 포함하여 현재 존재하는 것 너머로 나아가는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우리가 더 잘 인식하게 해줄 것이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6.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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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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