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국가는 전쟁을 수행하고 전쟁은 국가를 만들어나간다". 현대 역사사회학의 주요 사상가인 찰스 틸리 선생 (1929-2008)의 명언입니다. 틸리만은 아닙니다. 마이클 만 (1942년생) 등의 저서만 봐도 초기 국가가 전쟁을 수행해가면서 기층민에 대한 파악과 동원 능력, 징세 능력 등을 강화하고 법률 등 제반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사를 배우면서 나는 이 역사사회학자들의 통찰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자주 느꼈습니다.
한반도 삼국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들은, 그 국가들의 수취 제도 발달, 그리고 관료 조직 발전의 가장 중요한 촉매제이었습니다. 전통 시대의 초기국가만도 아닙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도 전쟁 속에서 태어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왕권 시기의 근세 국가들이 부단한 전쟁들 속에서 중앙집권화하여 그 재정 능력들을 최대화하고, 나중에 그 능력을 대포나 총, 제복 등 군수 생산에 전시 주문 형태로 투입한 것은 바로 산업 혁명의 기폭제가 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전쟁은 국가의 '어머니'입니다. 어떤 종류의 국가든 말이죠.
"어떤 종류의 국가든"이라는 부분은 여기에는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사회주의는 본래 군사주의, 군국주의에 대해 '비판세력'이었습니다. 칼 리브크네크트 (1871-1919)의 1907년의 <군사주의와 반군사주의>는 근대사에 있어서는 군사주의라는 현상에 대한 아마도 최초의 본격적인 비판의 시도인데, 그 저자는 바로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 지도 인물이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만 해도 1904-5년 러일전쟁에 반기를 든 것은 바로 일본 <평민신문> (平民新聞) 중심의 초기 사회주의 세력이었습니다.
한데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전부 다 전쟁의 와중에서 국가 형성의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내전 (1918-1922년)을 거쳐 국가의 기본틀이 형성된 소련도 그렇고 국공내전과 항일항전을 1927-1949년간 치른 중국 공산당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도 그렇습니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남북한은 마찬가지로 6.25 속에서 제도 정비의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주의의 본래의 이상주의적 성향과 무관하게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내걸지 않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 내지 아예 그 이상으로 - 철저한 상명하복, 위계질서 본위의 권위주의 사회가 궁극적으로 된 것은 바로 '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쳐서입니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어나간다"고 했을 때에는 이 "국가"란 결코 민주주의 국가는 아닙니다. 형식은 민주주의라 해도 본질상 권위주의 요소가 상당히 강한 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6.25를 거쳐 60만 대군을 갖게 된 한국을 보면 가장 전형적입니다. 북한이 출발했을 때부터 그 공민들에게 사회적 권리 (무상 의료, 교육 등)를 약속한 데에 반하여 한국이 출발했을 때부터 그 국민들에게 정치적 권리, 즉 민주적인 참정권을 약속했습니다. 한데 6.25를 거쳐 이미 이승만의 독재 정권 밑에서도 그 약속은 거의 유명무실했습니다.
1950년대말 미 대사관의 비밀해제된 문건들을 보면 민주당의 지도부마저도 대체로 이승만이 김일성처럼 종신 집권을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이승만 사망"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4.19는 그들에게 아주 큰 충격이었죠. 하지만, 군대가 국내의 가장 크고 가장 예산이 많은 조직이며 남북 대치 상황하에 전시가 무한정 영구화된 상태에서는, 민주주의는 오래 갈 리는 없었습니다. 1961년에 "군"은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민주화가 돼도 군의 일각에서 권위주의로의 회귀를 십분 획책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지난 번 내란 상태에서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결코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반대면 반대죠. 한데 근대 국가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는 '전쟁'의 함의는 각각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제1,2대전들이 수백만 명의 평민들을 강제 동원한 전쟁들이었고, 무기를 들게 된 노동자와 농민으로부터의 압박은 궁극적으로 보편적 선거권과 복지국가 등의 도입을 촉진한 부분 역시 있었습니다. 반대로 베트남 전쟁의 단계에서는 1960-70년대 저항 운동의 저력은 일차적으로 반전 운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1990-91년의 걸프 전쟁은 1991-2008년간의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의 등장을 알린 신호탄이었는가 하면, 2003-9년 사이의 이라크 전쟁 등은 일극 체제의 위기와 몰락, 그리고 미 패권의 치명적 위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위태로운 휴전으로 이어진 2026년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은 미국과 이스라엘군의 파괴력도 입증했지만, 동시에 미 패권의 완전한 몰락의 순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2026년2월28일, 즉 개전의 날보다는 ,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하고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이란은 훨씬 더 강력한 국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정권 교체"나 "이란 미사일,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파괴" 등을 포함한 그 목적들을, 미국과 이스라엘은 전혀, 하나도 달성하지 못하여 사실상 참패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신권위주의를 지향하는 트럼프 2기 정권은 금년에는 거의 지속적으로 군사 행동을 전개하거나 군사 행동을 갖고 협박을 하고 있지만, 힘보다 힘이 모자라다는 점을 더 많이 과시하는 것입니다.
한데 이번에 내가 다루고 싶은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다소 가려진 러시아의 지난 35년간의 전쟁 수행 경험들입니다. 1991년에 현재의 러시아가 태어났을 때에는 그 탄생의 이념적인 배경은 바로 - 소련식 당국가를 대체한 - '민주주의'였습니다. 러시아의 지난 35년간 전쟁들이 이 신생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형해화시켰는지, 오늘날 러시아식 권위주의 체제와 전쟁의 상관 관계가 어떤지 바로 이번에 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핵심입니다.
1991년에 소련의 폐허에서 태어나게 된 신생국 러시아는 말그대로 "신생국" 그 자체였습니다. 경제는 1990년대말까지 탈산업화돼 가면서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고, 살인율 (10만명 당 살인 연례 건수)만 해도 30 가까이 돼서 베네수엘라나 남아공 등 격차가 극심한 세계체제 주변부 사회 수준이었습니다. 부정부패는 사회 생활의 주된 원리이었고, 민주 다당제는 형식적으로 도입됐지만 사실 신념파 당원들의 다수를 확보하고 있는 정당으로서는 연방 공산당은 거의 유일했습니다.
그 당시의 지도자이었던 옐친은 공산당을 뛰쳐나온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서 '정당'이라는 대중적인 배경 없이 자신의 인기, 카리스마, 그리고 가면 갈수록 자신 측근이라는 '패거리', 그리고 그 패거리와 유착한 재벌들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과 퇴락 속에서는, 러시아는 여전히 소련 시대로부터 그 유산으로 물려받은 세계적 규모의 군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소련 해체 그 당시에 러시아가 인수인계하게 된 소련군의 인적 규모는 무려 280만명 정도이었는데, 평시 군으로서 세계 최대의 군 조직이었습니다.
경제가 퇴락에 퇴락을 거듭하고 사회가 불안한 신생 국가 러시아에서는, 이 세계적 규모의 군은 처음부터 정부가 매우 손쉽게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가 됐습니다. 사실, 1991년 이후의 러시아 역사를 조감해보면 2022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혀 의외의 사건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1991년 이후부터 러시아는 계속해서 이런저런 전쟁들을 여기저기 해왔습니다. 단, 이 전쟁들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그다지 관심 내지 연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단 1992년부터 시작하자면, 러시아 군에 소속되는 제14군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에 무장 개입하여 친러 성향의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을 몰도바 군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고 양쪽의 휴전을 이끌어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사이의 러시아의 전략적 교두보로서의 이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은, 사실 지금도 계속 존재하는 것입니다. 몰도바 군은 러시아 군대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기에 이 개입은 비교적 단기간에 마무리됐습니다.
다음은 1992-7년 사이에 극심한 내전에 시달렸던 타지키스탄이었습니다. 내전의 배경은 복합적이었고 지역엘리트간의 대립 등 여러 측면이 있었지만, 일단 소련 때부터 계속 권력을 독점해온 레니나바드 지역의 엘리트들은 분명한 친러 성향을 갖고 있었고 이슬람주의적 구호를 내건 반대편은 반러 성향이었습니다. 타지키스탄에 주둔했던 러시아 국경경비대와 특수부대들은 친러 성향의 세력을 지원했으며, 결국 그들이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신생 러시아는 경제나 사회적으로는 그야말로 "실패작"에 가까웠지만, 소련 시대로부터 상속 받은 그 군은 이렇게 구소련 지역에서의 패권을 점차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1993년에는 신생 러시아의 실패한 경제와 정치는 대대적인 위기를 빚고 말았습니다. 옐친 정권의 "충격 요법", 즉 물가 통제 포기와 초고속의 국영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조치에 국가 주도의 경제를 지향했던 국회 측 세력들이 반기를 들고, 양측은 결국 타협없는 대립에 들어갔습니다. 옐친은 국회의 해산을 선포하고 국회는 옐친의 하야를 요구하는 등 대치가 지속됐습니다. 결국 대치는 무장 충돌로 비화되고, 옐친은 국회세력에 맞서 군을 동원했습니다. 군은 처음에 주저했지만, 결국에 옐친과 손을 잡고 모스크바로 진입해 국회를 포격했습니다.
탱크와 대포를 보유하지 못했던 국회 세력들은 백기항복해야 하고, 옐친은 사실상 독재자에 질 바 없는 권한을 갖게 됐습니다. 1993년말에 채택된 새로운 러시아 헌법은 러시아를 초강력의 대통령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1993년 이후는 삼권 분립은 비록 헌법에 명시돼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문화되고 말았습니다. 국회 해산에 탱크를 동원한 '전능한 대통령'의 눈치를, 사법부와 입법부는 부단히 봐야만 했습니다. 대통령 선거는 여전히 다당제 경쟁 선거 형태로 진행됐지만, 옐친이 선거에서 패배해도 권력 이양을 거부할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에게는 군이라는 보호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한데 독재자가 돼가는 옐친과의 유착관계에서는 군도 그 나름의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군의 숙원은 바로 체첸에서의 독립운동의 무장 진압이었습니다. 1991년 이후 북코카서스의 체첸공화국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는 러시아 측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체첸공화국 지도부와의 이런저런 소통을 계속 해왔습니다. 체첸공화국의 예산은 여전히 중앙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있는 등 실질적으로는 완결된 독립국가가 됐다고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체첸 공화국의 지도자인 조하르 두다예프는 옐친과의 정상회담과 교섭을 통해 정치적 해결을 찾고 싶다고 나섰지만, 군과 손을 잡은 옐친은 회담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1994년에 러시아군은 체첸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1-2차 체첸 전쟁이 계기가 되어 형식적으로 도입된 러시아의 신생 민주주의가 푸틴 중심의 1인 통치 방식의 철저한 관료 독재 체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체첸 공화국의 경우는, 러시아의 다른 자치 공화국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체첸인 만큼 러시아 정복에 치열하게 저항한 종족은 러시아 제국에 없었습니다. 수십만 인구의 작은 산악 지역이지만, 거대한 러시아 제국이 체첸지역을 정복하는 데에 1817년부터 1859년까지, 40여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뒤에도 게릴라성 저항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1917년의 혁명을 체첸인들이 대체로 환영했지만, 그들의 자치권을 침해할 수 있는 소비에트 국가의 중앙집권화를 극력 반대했습니다.
1920년에 체첸인들의 1차 봉기가 일어난 뒤에는 크고 작은 항전 사건들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말의 강요된 농업집단화 등은 체첸인들의 저항을 오히려 더 부추겼습니다. 1940년, 소련이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체첸공화국에서 다시 게릴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944년에 스탈린 정권이 체첸인들을 "집단적인 친독일 협력자"로 규정하여 모든 체첸인(과 이웃 민족인 인구시인들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놓았습니다. 거의 50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 중에서는 생활의 악조건 등으로 말미암아 약 20-30%나 병사한 것입니다.
1957년에 - 고려인들과 달리 - 체첸인들이 다시 고향으로 올 수 있게 됐지만, 그들과 모스크바의 관계는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로마 (집시)족 다음으로 소련의 종족들 중에서 체첸인들 사이에서의 공산당 당원의 비율이 저조했습니다. 체첸 공화국의 수도인 그로즈느시에서의 정유산업 등 기업체에서는 체첸인들이 거의 고용되지 않았으며, 체첸인들이 주로 사는 산악지역에서는 공업 투자들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중앙'에 대해서 체첸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나 적대감은 늘 강했습니다. 그러니 1991년, 소련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체첸 민족 운동의 지도자가 된 두다예프 등 소련군 장교 출신들이 체첸 독립을 선포했을 때에는 다수의 체첸인들이 이를 당연시했습니다.
두다예프와 1993년에 무장투쟁을 벌인 체첸의 재야파들도, 독립만큼은 절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단, 두다예프의 대표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비에트식 국가구조 (당, 비밀경찰, 경찰 등)가 와해된 뒤에는, 사실상 독립된 체첸에서는 두다예프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생겼다고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두다예프는 각 지역, 마을 등을 대표하는 군벌들의 민병대에 의존한 것이고, 계속해서 경쟁세력들의 견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과거와 같은 국가가 증발된 상황에서 체첸영토에서 각종 범죄들이 엄청나게 많아진 점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소비에트 시대의 산업 경제 - 정유산업 이외에는 - 거의 마비된 상황에서는 각종 사병 조직 이외에는 젊은이들이 갈 수 있는 마땅한 "직장"도 없어진 것이죠.
범죄 성행 등은, 러시아의 최고 통치자인 옐친이 1994년에 체첸 전쟁을 시작했을 때에 사용했던 명분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명분은 명분일 뿐이었습니다. 옐친은 1991-3년 사이에 체첸의 사실상 독립을 실질적으로 묵인한 거나 마찬가지고 굳이 "급한 문제"로 보지 않았던 듯한데, 1993년의 모스크바에서의 시가전에서 옐친을 승리자로 만든 군은 전쟁을 요구했습니다. 군으로서는 전쟁이란 소련 몰락 이후에 불가피해 보였던 감군을 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고, 치명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군비 예산을 증액시킬 수 있는 "건"이기도 했습니다. 개별적인 군 장성, 장교들은 체첸영토에서 반군에 러시아 무기를 팔아주는 등 각자의 "돈벌이"로 재미를 보기도 했습니다.
군으로서는 그들에게 전쟁이라는 "이권"을 안겨줄 옐친이 필요했고, 옐친으로서는 군에 기대지 않고서는 국영기업 민영화 등 러시아인들의 다수가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둘의 찰떡 궁합은 바로 체첸의 전장 속에서 공고화된 것입니다. 전쟁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1995년, 러군이 그로즈니를 포위하여 정복하는 과정에서만 해도 적어도 2만5-7천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당수는 사실 그쪽에서 거주해온 러시아인들이었습니다. "동족" 여부와 무관하게 러군은 시민들의 생명에 무관심했습니다. 한데 "빈민개병제"식으로, 뇌물을 주고 병역 면탈하지 못한 빈민 가정의 징집병 출신으로 구성된 러군은, 사기가 최악이었습니다.
7만 명 규모의 러군보다 오로지 지원자만으로 구성된 체첸 민병대들의 규모는 거의 10배 이상 적었지만, 러군은 그들을 전혀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96년 8월에 하사브유르트 조약으로 러시아와 체첸공화국은 정전을 하고, 체첸 독립 여부 등의 문제 처리를 2001년까지 유보하는 식의 타협을 봤습니다. 이미 군의 도움을 받아 1996년 6-7월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옐친으로서는 어차피 "지는 게임"인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인기를 추가적으로 상실하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 법적 위치가 불분명한 체첸은, 옐친과 그 측근들로서는 정치 공작의 좋은 "재료"이었던 것이고, 그들이 이 "재료"를 잠시 그대로 놓아둔 채 다음에 "체첸 카드"를 다시 써먹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체첸 전쟁의 전화 속에서 군과의 유착을 공고히 한 옐친의 통치는 참사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소련 시대 국영 기업들의 민영화와 인플레이 억제 위주의, 러시아 화폐의 가치를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상시키고 그 상품의 해외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린 옐친 정권 내각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1992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의 연속은 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소비에트 시대의 계획경제와 국가의 개발주의 정책 대신에 온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 속의 권력자들과 유착한 업자들의 "먹튀"들과 자원의 수출, 공산품의 수입 식의 주변부적 경제 모델인데, 그게 노동자계층의 붕괴와 대대적인 민심 이반 등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비에트 시대의 산업이 망해가는 가운데 옐친 정권이 국고를 국채 발행으로 메꾸고 있었는데, 1998년에 한국까지 강타한 아시아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사실상 일종의 피라미드식 사기에 가까웠던 그 국채 장사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러시아는 디폴트에 빠지고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였습니다. 옐친이 부득불 국무총리로 임명한 케인스주의자인 에브게니 프리마코브 등 신자유주의 반대편에 섰던 정치인들이 다음 대선에서 이길 경우, 옐친과 그 측근들을 기다렸던 것은 감옥행이었습니다. 불보듯 뻔했던 일이죠. 이 상황에서는 옐친의 패거리가 꺼낸 카드란 "전쟁"과 "푸틴"이었습니다.
옐친 쪽에 확실히 줄섰던 것처럼 보였던 레닌그라드 비밀경찰 출신의 푸틴은, 연방안보국 국장 등 안보라인 요직에 임명됐습니다 (한국과의 외교 스캔들을 일으키고 한국의 안기부 계열 외교관을 추방시킨 것도 그 때였습니다. 일종의 인기몰이 작전이었죠). 그러다가... 1999년 여름에 체첸의 일부 이슬람 근본주의 계열의 민병대들은 러시아 연방의 지역인 다케스탄으로 침입했습니다. 나중에 그 수장 중의 한 명인 샤밀 바사예프는, 그 당시 옐친의 측근인 신흥 재벌 보리스 베레조브시키가 제시한 돈을 받고, 그의 주문대로 침입했다고 주장했는데, 좌우간 푸틴이 지휘했던 것처럼 전국적으로 방송 보도된 그 침입의 격퇴는 푸틴을 일약 "국민적 스타"로 띄어주었습니다. 다게스탄 상황에 이어 같은 1999년9월에 모스크바에서 몇 군데의 아파트가 폭파됐습니다.
307명의 피살된 주민들 중에서는 이상하게도 (?) 외국인도 거의 없고 노동자, 빈민 이외의 계층 성원들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러시아인들이 사는 빈민 아파트에 누군가가 테러를 저지른 것입니다. 체첸 지도부로서는 이 테러행위로 이득 볼 것이라고는 추호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테러가 러시아측에 전쟁을 다시 일으킬 "명분"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체첸 지도부는 테러와의 그 어떤 연루도 줄곧 부인했지만, 총리로 임명된 푸틴은 아랑곳하지 않고 체첸공화국으로의 재침을 준비하는 데에 착수했습니다.
나중에 러시아의 고급 관료 출신 한 명 (스테파신 전 내무부 장관)의 증언에 의하면 사실 재침의 계획서는 이미 같은 해 3월에 작성됐으며, 테러 행위 등은 그저 "명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2차 체첸 전쟁은 발발됐고, 그 바람에 인기를 얻은 푸틴은 2000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됐습니다. 푸틴은 지금도 대통령이며, 2000년부터 지금까지 러시아가 전쟁없이 몇년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푸틴이 집권하자마자 옐친에게 종신 면책권을 부여하는 대통령 명령서에 서명했습니다. 일단 "책임 면피"라는 옐친 주위 패거리들의 목표는 달성됐습니다.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민간인 피살자들의 숫자를 아무도 정확히 모르고 있지만, 국제엠네스티 측은 적어도 2만5천 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수십만 명이 피난민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유럽에서만 해도 지금까지 약 15만 명의 체첸 피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모스크바가 체첸에서 임명한 새로운 친모스크바 지도부에 대해서는 살인, 고문, 불법 구금 등과 같은 인권 단체들의 보고들이 계속 나옵니다. 한데 2009년쯤에는, 친모스크바 지도부는 독립지향적 민병대들을 격퇴시키거나 포섭, 흡수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수만 명의 민간인과 군인들의 죽음, 수십만 명의 실향, 그리고 러시아 기준으로 봐서도 너무나 심한 독재는 과연 "승리"인가 라고 충분히 물어볼 수 있지만, 좌우간 푸틴 정권은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이 "승리"는, 푸틴과 그 지도부의 가장 큰 정치 자본이 된 것입니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의 경제 모델은 1990년대에 비해 전혀 업그레이드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수출의 대부분을 자원이 차지하고, 2010년대 초반 이후의 대체 산업화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계류나 공산품 등에 있어서는 수입 의존은 현저합니다. 한국만 해도 세계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 정도지만, 러시아는 수입대체 산업화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2%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도 대부분은 무기 생산입니다. 브라질만 해도 러시아보다 세계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 큽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의 5개의 명문대를 "세계 톱100"에 올리겠다는 야심찬 국가 프로젝트를 가동했지만, 러시아에 다소 친화적인 상해교통대학의 랭킹만 봐도 "세계 최고 100개 대학" 중에는 3군데의 한국 대학이 있어도 러시아 대학은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즉, 통상적인 "개발"의 차원에서는 푸틴의 러시아는 아무리 좋게 봐도 "지지부진" 이상의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최첨단 과학, 기술 등에서는 러시아의 존재감은 극히 일부의 무기 생산 이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소련 시대에 비해 상당히 추락한 것이죠.
한데 푸틴 치하에는 무기 산업은 국가의 총애를 받아 성행했으며, 전쟁들은 끝없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전쟁들은 26년째 국가를 통치해온 독재자의 인기몰이 방법이 되고, 국가의 존재 양태가 됐습니다. 체첸 유격대 토벌이 채 끝나지도 않은 2008년에 러시아는 조지아 (그루지아)와의 6일간의 전쟁을 벌여 코카서스에서의 그 패권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체첸에서의 토벌전이 끝나고 나서도 다게스탄 등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 민병대와의 전투는 2010년대 내내 계속 진행됐습니다.
2000년 취임 이후 거의 전쟁을 쉰 적이 없었던 푸틴은, 2013년말 우크라이나에서의 친서방 정부의 탄생에도 곧바로 군사 개입, 즉 크림반도 점령과 합병, 그리고 돈바스에서의 분리주의 전쟁 획책으로 대응했습니다. 군사적 대응이란 이미 러시아 정부로서는 거의 "관행"이 된 겁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투 등까지 겹쳐져 러시아의 군비 예산 역시 빠르게 증가돼 갔습니다. 2000-2024년 사이에 러시아 정부의 (달라로 환산된) 군비 지출은 약 600%나 늘어난 것입니다. 이 과정은 2022년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 개전 이후에 더 빨라져 러시아는 세계의 가장 군사화된 사회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지금 러시아 국민총생산에서의 군비 비율은 7.5%로, 한국보다 거의 3배나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옐친은 그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실패를 체첸 전쟁으로 덮어버리고, 제2차 체첸전쟁과 푸틴의 등용을 통해 책임을 면탈하는 데에 "성공" (?)했습니다. 푸틴의 장기 집권기에는 산업의 여러 부문 중에서는 무기산업만이 진정한 성장을 이루고, 전쟁은 국가의 주된 정책으로 부상됐습니다. 푸틴은 "영구화된 전시"를 이용하여 사실상의 종신 집권에 "성공" (?)하고 그 어떤 반대도 용인하지 않는 절대적 독재 권력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의 병영화 등을 방불케 하는 면도 상당히 있지만, 1970년대의 한국과 달리 러시아는 그다지 "개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군사 부문 이외에는 과학, 기술, 제조업의 "부흥"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중국에의 의존이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개발의 실패는, 쉴 사이 없는 전쟁으로 계속 덮어져 있는 것입니다. 전쟁은 러시아 민주주의를 압살시키고 러시아의 발전의 가능성들을 차단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은 "국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말기인 현재에는 많은 경우 전쟁들은 "국익", 즉 어떤 개발주의적인 의제보다도 차라리 그저 국가 통치자들의 개인적 권력 기반 구축이나 그 주변 패거리의 돈벌이 등과 더 긴밀히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란 침략이 일부 석유재벌가 등의 주머니를 살찌우고 트럼프 측근들에게 짭짤한 추가 소득을 올려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을 포함한 세계경제로서는 크게 봐서는 "장애물"입니다. 푸틴의 전쟁들 역시 궁극적으로 푸틴의 권력 기반을 공고화시키는 데에 기여해도 러시아의 발전을 차라리 저해시키는 측면들이 더 많습니다. 민주주의 압살은 그 측면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입니다. 결국 현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투쟁과 반전평화 투쟁은,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사회에서 둘이 아닌 하나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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