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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진보정당의 분열 돌아보기 - 그동안 우리는 달라졌을까?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2. 24.

박상우

 


[이 글은 이 나라의 진보정당의 역사와 관련된 쟁점들을 돌아보면서 왜 지금같은 분열과 위기에 이르게 됐는지 고찰하고 있다. 꼼꼼하게 종북몰이, 패권주의, 분파주의 등의 문제를 살펴보며 새로운 진보의 진로를 고민하게 해주는 이 글을 기고해 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십수년 뼈빠지게 대중운동의 성장과 진보정당운동의 성장을 위해 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길래 당 안에 남은 사람들도 그렇고 당을 박차고 나간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잘된 꼴 없이 모조리 망해먹고 말았을까?"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68092

 

내가 한국의 진보진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 이후부터였다. 태어나서 처음 내 손으로 표를 던진 대통령 후보였고 그가 당선되던 날, 이제 우리나라에도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란 희망에 들떴던 기억도 난다. 어찌된 영문인지, 내 눈에는 좋은 사람같기만 하던 그가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자 저쪽에서뿐 아니라 이쪽에서도 욕을 먹었다. 답답했지만 아는 것이 없어서 항변도 못했다.

 

개인 일에만 빠져 지내다 어느날 타지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었다. 한국 뉴스도 챙겨보지 않던 나는 사고 이튿날에서야 가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세상이 잠시 고요해지더니 마음이 툭하고 떨어졌다. 컴퓨터 화면 너머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울부짖고 고통스럽게 슬퍼하고 있었다. 옆집 개가 죽어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고 댓글을 달던 사람들까지 그에게 헌화를 한 것 같았다.

 

내가 더이상 모르고 답답한 채로 남아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때였다. 생소한 용어가 많아 무슨 소리인지 세네번은 읽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던 정치, 경제, 사회 기사도 꾸역꾸역 읽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낱말 중 하나가 "진보"였다.


그런데 그 낱말은 사용하는 사람마다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표현에 대해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들간에 오해가 쌓이고 대화는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한국에서 과연 진보란 무엇인가. 진보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준 연구 과제였다.

 

"한국에서 진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사실이 '한국에서 진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죽어왔다'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살해되었다. 동학혁명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짧은 해방 국면, 한국 전쟁, 친일 지주 세력을 뒤에 업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독재정권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평등을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통일을 이야기하는 그리고 피억압 민중 편에 서는 사람들은 화학 약품에 세균이 박멸당하듯, 죄다 끌려가 갇히고 고문 당하고 총살 당하고 칼에 찔리고 두들겨 맞아 왔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에 견줄만한 잔혹한 진보 청소가 있었다. 학살 과정에서 많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남았고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저항 집단도 공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 진보는 늘 소수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국면에서의 진보 세력에 비해 확실히 덜 급진적이고 더 타협적이다. 진보적 의제의 선명성이나 주장하는 정책의 과감성이 분명히 그때보다 후퇴했다.

 

한국 사회의 진보를 주제로 공부를 하면 두번째로 가장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 개념이 "분열"이다. 진보세력이 정치를 하겠다고 모인 곳에 "분열"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공산당끼리도 찢어지고 싸우고, 민족주의 세력끼리도 갈라지고 싸우고, 사회주의자 그룹, 독립운동가 그룹 등등 예외는 없다. 정당이 있는 곳에 정파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한국의 수구 세력은 좀처럼 갈라지는 경우가 없었다.

 

진보진영의 분열은 모두 진보정치 세력의 패배로 결말이 났다. 그런 일이 반복됐던 이야기를 하도 읽다보니 이제는 어디에서 새 진보정당 논의를 하고, 어디 통합한 당은 갈라서기로 했고 하는 이야기들에서 기시감을 느낄 정도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진보를 특징하는 개념 중 하나는 "분열"이며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도 이에 대한 것이다.

 

내가 한국 사회의 진보세력을 관찰하기 시작한 이후, 한국 진보진영에서 발생한 분열의 첫 사례는 2012년에 있었던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였다. 당시 나는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이면서 민주당보다는 더 진보적인 세력이 한데 모여 건설적으로 통합한 것에 호감을 가지고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총선이 끝나자 민망하리만치 성급하게 무너져내렸고 이는 지켜보던 내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또 놀라웠던 것은, 총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과 한미 FTA 반대 등으로 한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통합진보당 분당 국면에 이르러서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한쪽은 다른 한쪽을 '반민주적인 세력'이라고 했고, 그 다른 한쪽은 상대 세력에 대해 "수구세력이나 다름없이 진보를 망치는 세력" 정도로 대응한 것 같다(이쪽 진영의 입장은 언론에서 많이 다뤄주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격렬함의 정도에만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뿐, 이후 일어난 이석기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사건 그리고 2015년 진보정당 재편 논의에까지 계속됐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끼리 둘로 나뉘어 서로를 때리느라 전력을 상실한 통에 국정원 대선 개입과 세월호 사건, 부당 해고와 비정규직 투쟁, 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부패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치 침몰한 배가 서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보 세력은 위축되었고 모두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찬바닥에 배를 끌고 비닐을 덮고 자며 외치는 소리들마저 잠식되어 가는 걸 지켜보자니 고통스러웠다. 전선을 어디쯤에 그어야할지 뻔히 보이는데도 진보세력은 결집하지 못했다. 뿌리깊은 혐오와 멸시같은 지극히 감정적인 요소가 광적으로 확산되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 뿌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더 깊이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었겠으나, 최근의 일들에서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뿌리가 되는 사건부터 알아보고자 했다. 바로 '민주노동당의 분열'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때는 나도 대학생이었을 때니,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다. 또한 대학생으로서 민주노동당에 대해 들어봤을 법도 한데, 불행하게도 당시 나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따라서 이제 와 민주노동당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책, 관련 기사, 당시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 등에 의존해야 했다.

 

이 작업의 목적은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 편을 들거나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민주노동당 분당을 곰곰히 되돌아봄으로써 한국 진보의 한 측면을 이해하고, 분열 이후 달라진 것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주장들 

 

내가 읽은 책은 조현연이 쓴 <한국진보정당운동사>와 정영태가 쓴 <파벌>이며, 기사는 너무 많아 열거할 수 없다. 하지만 관련 기사는 앞서 언급한 두 책의 참고문헌 목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바란다.

 

<파벌>은 지은이가 평등파 소속이었고, 내용이 정파적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파벌>이 자료에 근거한 연구서이고 상당히 공정한 시각으로 사건을 기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드러난다. 물론, 수집하고 인용한 인터뷰 자료가 평등파의 것이 더 많고, 지은이가 평등파의 일원으로서 사건을 경험했었음을 염두하면서 읽는 것이 행간의 의미까지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민주노동당 분당과 관련해 내놓는 이야기들 중에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 평등파가 만들어놓은 당에 자주파가 몰려들어와 민주노동당을 숙주로 이용하고 잠식하는 바람에 당이 망가졌다.


● 자주파는 패권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인 가해자이고, 소수인 평등파는 피해자이다.


● 평등파는 당권 경쟁에서 번번히 밀리자 자주파를 종북 세력으로 일방적 매도하였고, 자주파에 대한 보수우익의 공격을 방관하였을 뿐 아니라 당내에서 지분을 얻는데 이용했다.


● 종북 논란이 아니었더라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수구세력의 방해 공작은 있었을 것이며, 이런 공작들로 인해 어쨋거나 결국 분당됐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소문들을 접하면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직접 알아보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위 주장들과 관련해 내가 조사한 내용의 요약이며, 현재로서의 나의 판단이다.

 

첫째, "평등파가 만들어놓은 당에 자주파가 몰려들어와 민주노동당을 숙주로 이용하고 잠식하는 바람에 당이 망가졌다"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자주파는 단일한 모임이 아니라, 전국에 퍼져있는 크고 작은 모임들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주파는 서울연합, 울산연합, 광주전남연합, 경기동부연합 등이 모여서 '전국연합'을 구성하고 있었다. 각 연합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녔고 전국연합과는 별개로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실제로, 서울연합의 경우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기 전인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전신)시절부터 이미 합류해있었고, 울산연합과 경기동부연합의 경우에는 90년대 중반부터 진보정당 건설에 동참하고 선거에도 출마하면서 비교적 초기부터 민주노동당 건설에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지도부가 대부분 평등파 소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지도부 몇 사람이서 당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평등파가 만들어놓은 당'이라는 진술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자주파에게 입당을 호소한 것은 국민승리21 지도부였다. 참여 조직과 활동가가 적었던 국민승리 21은 조직의 확장과 발전을 위해 자주파에게 입당을 호소했고 그 결과로 자주파의 대거 입당이 이루어졌다. 자주파(전국연합)의 입당 후 활동가가 많아지면서, 민주노동당은 전국적 기반의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당의 성장에 기여한 자주파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커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만일 평등파로만 당이 구성됐다면, 민주노동당은 그만큼 성장할 수 없었다(불쾌하게 들릴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두번째, "자주파는 패권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인 가해자이고, 소수인 평등파는 피해자"라는 이야기 역시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일방적이다. 민주노동당 초기에는 평등파가 좀더 다수를 구성했는데, 당시 학생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던 당원들이 평등파의 패권주의로 인해 활동을 통제 당하는 경험을 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오히려 다수파가 자주파로 바뀌면서 통제나 제재가 줄어들었으며, 자주파는 투쟁에서 다른 파벌과의 연대에도 적극적이었다는 상반된 증언도 있다.

 

문제는 종파주의이다. 종파주의는 진보와 노동 운동 전체의 단결과 이익을 우선으로 두지 않고,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해를 앞세우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집단 내에서 다수파일 경우 패권주의로, 소수파일 경우에는 분파주의로 발현된다. 자주파와 평등파 모두에게서 종파주의적 행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주파가 패권주의라는 비난을 든는다면, 평등파는 분파주의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민주노동당 분당 국면에서 분당을 피하기 위해 자주파에서는 당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던 심상정에게 여러 제안과 양보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분당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당내에 조승수를 비롯한 탈당파가 형성돼 있었고 그들의 태도는 어떤 합의를 도출해내기에는 너무도 강경하고 비타협적이었다. 따라서 자주파는 가해자이고, 평등파는 피해자라는 시각은 일면적이고 왜곡됐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이후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를 구체적으로 다룰 때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세번째, "평등파는 당권 경쟁에서 번번히 밀리자 자주파를 종북 세력으로 일방적 매도했고, 자주파에 대한 보수우익의 공격을 방관했을 뿐 아니라 당내에서 지분을 얻는데 이용했다"는 말은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갈수록 문제가 커지고 있는 "종북"이라는 용어는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사회당에서 제일 먼저 사용했다고 한다. 사회당은 평등파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다고 볼 수 있는 세력인데 자주파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민주노동당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당을 만든 사람들이다.

 

이 표현을 2007년부터 민주노동당 내 평등파가 사용하기 시작해, 종북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우익의 공격을 자초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당내에서 지분을 얻는 데 이용하는 명백히 잘못된 행위를 저질렀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당시 당내 자주파를 '종북파'로 지칭한 조승수 전 의원을 "운동사적 범죄자"라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종북이라는 공안의 논리를 진보공동체 내부의 프레임으로 끌고왔다는 이유다. 당장의 당권 장악에 매몰돼 장기적으로 진보진영에 미칠 악영향은 생각지도 못하고 저지른 치명적 잘못이었다.

 

이즈음에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럼 걔네들이 종북이 아니야? 종북 맞으니까 종북이라는 거잖아.’

 

종북? 종북이 과연 무엇인가. 종북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김일성 사진 걸어놓고 절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김정일을 장군님으로 호칭하며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아 지하에서 은밀히 일을 꾸미는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당신이 이야기하는 종북의 실체는 무엇인가. 세상은 변하고 모든 것은 바뀌는데 왜 당신의 머릿 속에 있는 고정 관념은 변하질 않는 건가.

 

평등파와 자주파의 뿌리는 8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주요 계열이었던 PDNL로 거슬러올라간다. 크게 봐서 PD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NL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파벌>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PD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이상향으로, NL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이상향으로 추종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들어보면 두 그룹 다 사고가 의존적이며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한국 사회는 군부 독재 세력이 민간인을 탱크와 총으로 학살하던 시대였다.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가 어느날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며칠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 일이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던 시대였다.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없던 때였다. 그리고 소련이 몰락하기 전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당시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소련과 북한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국가가 좋게 보였을 수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89~91년에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체제 내의 모순과 부정부패, 독재, 학살 등의 내용이 드러나면서 PD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정치적 위기를 겪는다. 지지하던 체제가 붕괴되고 온갖 숨겨져있던 문제가 드러나자 PD는 희망과 대안을 잃어버리고 정치적으로 거의 무너지게 된다. 마르크스-레닌 주의에 대한 회의에 빠진 PD9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개혁주의, 사민주의 등을 탐구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소련마저 붕괴한 마당에 북한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운 입장을 가지게 되면서, 반공주의적 입장에도 취약해지게 된다.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따라 PD가 변화한 것처럼, 자주파 역시 변화한다. 북한은 소련처럼 붕괴하지 않았지만, 점차 고립되었고 문제점 역시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90년대를 거치면서 이미 자주파에서도 관점의 변화가 생기는데, 이는 투쟁보다는 선거와 국회를 중요시하고, 자본주의 내에서의 점진적 변화를 꾀하기위해 의석을 얻는데 힘쓰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실제 자주파는 집권을 돕고 의회로 진출하기위해 민주당과의 협력에 애써왔다. 이와 같이, 비록 덜 분명하고 천천히 일어났지만, 자주파에서도 90년대를 거치면서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자주파에 대해, 그 옛날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해다. 자신들에게 변화가 발생했던 것처럼 자주파도 변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느라 교류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와 불신은 해소되지 못하고 더 커지기만 하였다. <파벌>에 인용된 한 NL의 인터뷰, 그리고 PD의 인터뷰에는 평등파의 자주파에 대한 편견에 찬 오해가 확증편향에 빠져갔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감옥에 면회 와서 그런 말을 했다니까요. 왜 숨기냐? 그러니까 안에 잡혀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화가 무지 난 거죠. 어떻게 검찰들하고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런데 당시에 O가 주장했던 건 이런 거였어요. '나는 재판정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떳떳이 밝히고 재판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억울하다고만 이야기하냐? 자기의 이념을 안 밝히냐?' 그 당시에 우리가 했던 얘기는……'우리는 우리가 밝힐 수 있는 걸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연방제 통일을 주장했고 그리고 반미에 대한 분명한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한 바 있고, 민주주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얘기했고, 뭘 또 더 얘기해야 되느냐? 그러면 우리가 얘기를 그거는 사상검증을 하겠다는 얘기냐?' (그러면서) 그때 그런 갈등이 벌어졌다는 거죠, 잡혀갔을 때." (NL-5 인터뷰)

 

"……과장이 아니라, 나중에는 안 하는데 당 초기, 2000, 2002년 정도까지는 장군님 사진 놓고 인사하고 그런 것까지 했어요. (중략) 그리고 그걸 안 한다 그래 가지고 때린다거나 이런 사건도 벌어졌어죠. 그런데 그게 당에 오고 나서는 숨기거나 흐지부지되죠. 그리고 간첩 사건도 나고 그러면서. 그런데 어쨋거나 그 조직들은 그러한 논리에 의해서 훈련받고 교육받은 사람인데 그거를 부정을 하면 그 조직이 무너집니다." (PD-4 인터뷰)

 

"그분들은 실제로 신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들은 종북주의자들이다. 이들이 당에 들어와서 당에 중심을 틀어쥐고 실제로 당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라는 신념을 가진 분들이란 생각이 들어요. (중략) 그러니까 당에서 벌어졌던 모든 패권이나 이런 문제들도……그래서 저 사람들은 계속 음모론에 빠져 있는" (NL-5 인터뷰)

 

얼마나 서로 불신이 깊으면, 아직도 장군님 사진을 놓고 인사를 한다는 생각, 실체도 모호한 종북주사파라는 핵심 세력이 당을 틀어쥔다는 생각에 빠지게 됐을까.(PD 말대로라면, 그 종북주사파 핵심 세력 몇이 당을 틀어쥘 때까지 그럼 PD는 대체 뭘 했는지?) "왜 네 이념을 솔직하게 밝히지 않느냐?"고 묻고 "뭘 또 더 얘기해야 되느냐?"라고 되물으며 평행선을 달리는 두 파벌간의 관계가 너무도 안타깝다.

 

종북주의에 대한 논란은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일단 진보진영이 이 문제에 접근할 때는 보수우익이 하는 비판과는 명백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진영은 반공주의/반북주의와 선을 그어야 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폐기를 주장하는 반공주의는 어느 면으로나 진보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주파를 대할 때, 비판적 지지와 비판적 방어의 입장으로 국가보안법 철폐나 한미 FTA 반대와 같이 함께 연대할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노선에 대해 비판하고 토론하는 방식이 돼야하지, 상종 못할 광신도 집단으로 매도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또한 자주파는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에서 권력도 없고 가진 재산도 별로 없는 억압받는 피지배계층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그들은 한국의 지배계층에 대항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투쟁하는 활동가들이고,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의 동료들이며 진보운동의 한 축이다.

 

그런 그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것은, 1) 근거가 없고 2) 진보진영의 역량을 스스로 감퇴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3) 부당한 탄압에 동조하는 비양심적 행위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분노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NL더러 공부를 안 한다며 꾸짖을만큼 많이 공부했다는 PD계열의 어리석음에 실망한 부분이기도 한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더욱더 안타까운 대목이다.

 

평등파가 정파의 이해를 앞세운 단시안적인 시각으로 뿌린 씨앗이 지금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얼마전 해산됐다. 이석기 전 의원은 내란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징역을 다 마치고 나오면 환갑이 넘는다). 정당한 법 적용이 아니다. 전체 진보 진영을 위축시키기 위한 본보기였고 전형적인 공안 정치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민주노동당을 깨고 나간 사람들은 진보신당을 만들었고 얼마 후에 통합진보당 합류파와 진보신당 잔류파로 분열되었으며, 통합진보당 합류파는 다시 통합진보당을 박차고 나와 참여계와 함께 정의당을 만들었고, 진보신당 잔류파는 노동당으로 개명하였다. 현재 정의당 지지율은 별로 높지 않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안다고 했다. 지금의 결과가 종북 논란을 일으키며 성급하게 분당을 고집한 사람들의 선택을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서로간의 진지한 반성과 스스로의 잘못을 시인하는 사과가 있지 않는한 현실적으로 두 파벌이 다시 협력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판단된다. '이러다 모두 완전히 망하겠구나'하는 때가 오기 전까지는.

 

이렇게 사과하지 말고...

   

네번째, "종북 논란이 아니었더라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수구세력의 방해 공작은 있었을 것이며, 이런 공작들로 인해 어쨋거나 결국 분당됐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의 혼란을 구성했던 요소들 중 어느 한 가지만을 과장해서 부풀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박정희식 자본주의와 미국식 자본주의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독재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더이상 한국의 지배계급이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완전히 막거나 봉쇄하기란 쉽지 않다. 노동자 정당이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측면도 있다. 체제 내로 저항을 끌어들여 통제 가능한 상태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정치적 공작을 받아 어쨌거나 분쇄됐을 것이라는 생각은 과장되고, 민주노동당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파악하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물론 한국의 지배계급도 이왕이면 미국처럼 진보좌파진영을 민주당으로 흡수해 양당체제로 나아가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현재 한국 정치체제에서 노동자 정당의 정치세력화 자체를 비밀 공작으로 저지하기는 어렵다.)

 

민주노동당 분열의 배경에는 엄연히 노동운동의 위기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의 위기가 시작됐고 당의 기반인 노동운동이 침체하자, 이는 곧 진보정당의 위기와 분열로 반영됐다.

 

또한 민주노동당 분열에는 '성공의 역설'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는데, 당이 대중적 지지를 얻고 커질수록 내부에서 당권 경쟁이 심화됐다는 뜻이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총 10명이 국회에 진출하는 결과를 얻었고, 정당지지율은 13.1%에 달했다. 그전까지의 빈곤하고 희생하던 생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고, 당이 성장할수록 획득할 수 있는 권한과 혜택도 늘어갔다. 따라서 당내주도권과 공천권 등을 놓고 두 파벌의 갈등이 격화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평등파와 자주파의 정치적 노선 차이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진보진영이 급격히 쇠퇴하고 모두의 입지가 좁아지자, '생존'을 위해 일단 하나의 정당으로 합쳐졌다. 그러나 한 집에서 동상이몽의 동거를 하였고, 오래된 정치적 차이는 곧 두 파벌간의 갈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의 분열은 이러한 복합적 요소들이 결합하고 서로 상호작용한 결과다. 지배계급의 정치적 공세에 민주노동당도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또한 외부의 공작보다 노동운동의 침체라는 배경과 내부적인 문제가 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따라서 분열을 불가피한 결과로 보는 시각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 분열과 관련해 흔히 접할 수 있는 논란과 오해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갈등을 격화시키고 결국 조직을 분열시킨 요인들에 대해 하나씩 짚어 정리하도록 하겠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들과 겹치는 부분들도 있을 것이나, 여기서는 각각의 주제를 실제 사례와 함께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종북주의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국 진보진영을 강타한 키워드는 '종북'이다. 2012년 총선 이후 통합진보당이 분열할 때 언론에 흔히 등장하던 '당권파, 패권주의'라는 용어는 점차 '종북'이라는 낱말로 대체됐다.

 

누가 들어도 참 구리고 거부감을 자아내는 이 용어는 통합진보당의 이미지를 음침한 지하에 모여 비밀스럽게 북한의 지령을 따라 움직이는 세력 쯤으로 가공했고,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거치면서 통합진보당은 진보 진영 내에서조차 기피 대상 1위로 낙인 찍혔다.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는 "국민은 헌법 밖의 진보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분명하게 선을 그었고, 민주당과 정의당은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안 처리에 당론으로 찬성하였다. 녹취록이 공개되자 진중권은 "녹취록 전문. 완전히 정신병동이네요. (중략) 사회적 고립에서 오는 현실적 무력감을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 집단으로 (중략)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피한다고 할까."라고 말하며 그들을 "빨치산 용사 놀이"를 하는 "발달장애"라고 평하였다. 한윤형은 <미디어스> 기사에서 이석기로 인해 "진보는 그 '흙탕물' 아니 '똥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장석준 전 노동당 부대표는 당시 <프레시안>'이석기를 위한 변명'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정작 글에서 변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당시 공개된 녹취록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질병', '광신' '사이비 종교 집회' 등과 모임을 등치시켰다. 국정원의 종북몰이에 대한 비판이나 마녀사냥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없었다


<당시 한겨레 신문 1면 하단에 실린 노동당 광고. "종북에 묶인 시대착오적 진보도...(중략) 우리를 절망스럽게만 합니다."라는 문구가 실려있다.>

 

녹취록은 후에 밝혀졌지만 심각한 조작이 있었다. "전쟁 반대 투쟁을 호소하고""전쟁에 관한 주제를 호소하고", "구체적으로 준비하자""전쟁을 준비하자", "준비 정도와 상관없이""정규전과 상관없이"로 바뀌어있었다. 또한 녹취록을 공개한 <한국일보> 기자가 이석기 의원의 발언 가운데 총기 언급은 없었으며, 총기를 준비하라는 언급도 없었다고 인정하였음에도 이런 사실을 들어 국정원을 비난하고 종북몰이에 대항해 통합진보당과 연대하는 진보 세력은 거의 없었다.

 

이석기를 필두로 통합진보당 전체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우익과 박근혜 정권은, 결국 헌법재판소를 통해 20141219일 통합진보당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진보진영은 사실상 암묵적으로 정당 해산에 동조하였고 방조했다.

 

이따금 '법을 이용해 강제 해산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어짜피 국민들의 외면을 받아 없어질 당이니, 그냥 두어라', '나는 통합진보당을 싫어하지만 강제 해산은 안 된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영향력은 없었다. 정당 해산이라는 초유의 비민주적인 폭압이 발생한 이후 조금이나마 자책감을 덜기 위한 심리적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통합진보당에게 '종북'이라는 낙인을 씌워 진보 내 불가촉천민 계층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자, '종북' 공세는 곧 야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문재인, 박원순 등에게로 옮겨갔다. 새누리당에서는 문재인 의원이 노무현 정권 시절, 법무부의 반대에도 이석기 가석방을 주도했다며 공격했고, 인터넷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와 손을 맞잡고 환히 웃는 사진을 퍼나르며 박원순 서울시장도 종북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외에도 '세월호의 실질적 소유자는 국정원'이라고 주장하는 이재명 성남시장과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원내 유일의 진보정당이 된 정의당에게까지 종북 공격이 계속됐다.

 

전형적인 정치 공세의 수단이 된 종북 몰이에 진보진영은 "나는 종북이 아니다"며 통합진보당과의 거리 두기로 대처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는 너야말로 진짜 종북이다"며 박정희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전력을 들거나, 박근혜가 2002년 북한에 방문해 김정일과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과 방문기를 인용했다. 종북 공세의 부당함과 이중 잣대를 폭로한 것이다. 그러나 종북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반복 각인시키는 역효과도 있었다.

 

효과적으로 종북 공세에 대처하는 실질적인 대응은 찾기 어려웠다. 통합진보당을 왕따시키며 종북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던 기대와는 달리 진보 진영 전체가 위축됐다. 무능하게 공격을 당하고, 의제 설정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진보 진영은 전반적으로 역량을 상실해갔다. 이는 국정원 대선 개입과 간첩 조작 사건, 세월호 진상 규명 등에서 정부를 압박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종북의 실체는 무엇일까? '종북'은 과연 누구의 어떤 행위를 지칭하는 것일까?

 

민주노동당 분당 과정에서 종북 논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자 선도탈당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승수 전 의원은 훗날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그들을 친북세력(종북세력)이 아니라 '주체사상파'라고 불렀어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 진보진영에서 지칭한 '종북세력'이라는 개념은 원래 '주체사상'을 자신들의 이념과 실천이론으로 수용한 세력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에 와서는, '종북'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변질되어,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나 심지어 인권 향상을 위한 노력들까지도 모두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어 매도하고 있지만, 원래는 '주체사상파(주사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방인혁은 <한국의 변혁운동과 사상논쟁>에서, 주체사상의 형성과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주체사상이 수용되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다. 아마 많은 한국사람들은 '주체사상' 또는 '주사파'라는 낱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거나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한국에서 '주체사상'은 마치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 사람'과 같이 금기어가 됐다. 왜냐하면 북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공부하거나 관련 책자를 읽는 것은 대한민국 국가보안법 위반이며, 이로 인해 구속되고 실형을 살 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한국에서 주체사상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주체사상파를 종북이라고 비난하던 민중민주계열(PD) 사람들도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잘 몰랐을 것이며, 선배를 따라 민족해방계열(NL)에 속해 학생운동을 하였던 사람들 중에도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방인혁은 책에서, '주체사상'이라는 네 글자에 붙은 혐오감과 거부감, 공포 등의 감정적 먼지를 털어내고, 오로지 사상과 이론 차원에서 주체사상을 접근한다. 사실 주체사상은 자유방임주의나 신자유주의 또는 플라톤의 철인정치와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상과 이론 중 하나이다. 어떤 것이든 이론의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인정하되, 그 한계와 오류는 비판하는 건강한 이론 수용의 과정을 거치면 되는 것이지, 그 사상 자체가 죄악이고 그 사상을 수용한 무리는 광신도 집단이다는 식의 태도는 합리적이지 않다.

 

방인혁은 주체사상의 합리적인 측면과 한국의 진보 운동과 이론의 영역에서 주체사상이 (여전히)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민중민주계열(PD)이 수용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경제결정론적이고 구조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편향에 대해 인간의 자주성을 강조한 주체사상의 문제제기가 한국의 진보 운동에 객관성과 균형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과 비판, 이론과 실천, 필연과 자유, 구조와 주체의 대립은 마르크스 이론에 내재되어 긴장을 형성하는 주요한 두 축이다. 대립하는 두 요소 중 어느 쪽에 더 강조점을 둘 것인가는 시대적 요구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혁명에 대한 낙관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경제 결정론적 구조중심주의가 출현하는 경향이 있고, 혁명의 쇠퇴기 혹은 혁명이 실패한 후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주체중심적 입장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두 입장 모두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뻗은 가지이지, 결코 어느 것 하나만을 취하고 다른 하나를 폐기하는 입장은 마르크스의 생각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구조와 주체가 변증법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 주장의 핵심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진보 운동과 이론의 영역에서도 주체사상과 구조중심적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변증법적으로 결합하고 발전해야한다는 것이 방인혁의 생각이다.

 

또한 그는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발전과정 속 맥락에서 파악해야하며, 몇몇구절을 오독해서 편향적으로 비판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단일한 사상 체계가 아니라 마르크스 철학을 계승, 적용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들의 스펙트럼이다. 방인혁은 주체사상을 이 스펙트럼에 포함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본다. 즉 그의 책에서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라는 토양에서 자란 가지 중의 하나로 분류된다.

 

방인혁은 책에서, 주체사상의 교조적 수용에 대해서도 분명히 선을 긋는다. 이론의 교조적 수용뿐만 아니라, ‘영도체계와 조직의 문제에서 교조적인 수용은 더욱 위험한 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힌다.

 

정리하자면 실제로는 과거 진보 운동 일부에서 주체사상의 교조적 수용이 이루어졌고, 이를 비판했던 진영의 논리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해석이 자의적이었다는 뜻이다. 또한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한 진영은 구조편향적 입장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협소하게 이해하였음에도, 이에 대한 논쟁과 자기비판을 허용하기보다 주체사상파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오류를 범하였다.

 

방인혁의 설명을 통해 주체사상파를 다만 종북세력으로 매도하면서 그들을 진보진영에서 제거하려는 시도가 왜 타당하지 않은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주체사상파라고 하면 몹쓸 광신도 집단의 구성원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더이상 알아보지도 않지만, 과연 그런 판단이 타당하고 합리적인지 의심하고 확인해야 한다.

 

주체사상파가 단일한 성격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도 주지할만한 부분이다. 방인혁의 설명에 따르면, 김영환을 중심으로 하는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권의 주사파들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북한과 연계를 맺고 조직을 구축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기 현실사회주의체제의 붕괴, 북한의 한국 운동권의 현실과 요구에 대한 일방적 무시 및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입수되는 북한의 실상들로 인해 그들은 상당한 사상적 갈등을 겪었고, 이로 인해 그들 내부에서도 분열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한국의 NLPDR 내부에서 북한과 직접 연계를 맺고 활동한 세력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으며, 김영환이 1999104일에 작성한 반성문에서 범민련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의 해산과 새로운 대중적 통일운동 단체의 결성을 지원해 줄 것을 북에 요청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민혁당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NLPDR 세력이 한국에 다수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김영환, 홍진표, 구해우 등 과거 NL 주사파에서 활동하며 북한과 직접 연계를 맺기도 했던 사람들은 이후 전향하여 마르크스주의, 계급주의, 민족주의, 통일지상주의 등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적 이념으로 뉴라이트를 제안했다는 점이다. 주체사상을 교조적으로 수용하며 북한과 연계를 맺었던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과거를 은폐하고 한국 사회 주류에 편입하기 위해 강력한 반북운동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주체사상파는 김영환류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는 세력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진보 정당 운동에 동참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전과는 달라진 노선과 사상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내 자주파를 종북으로 비난하면서, 과거 김영환류가 저질렀던 행동을 그들이 한 것처럼 동일시하거나, 그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관련해서 또 생각할 부분은, 주체사상은 북한에서 지배이념이지만, 남한에서 주체사상을 수용한 세력은 이를 반제국주의와 반독재 투쟁을 위한 저항 이론으로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이론은 같았지만, 맥락이 달랐기에 해석이 달랐고 기능도 달랐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의 '자주성'은 중-소 분쟁에서 북한 관료들의 자주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는 사용될 수 있지만, 북한 일반 민중들의 자주성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한에서 자주파 활동가들이 '자주성'을 이야기할 때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저항의 의미를 담고있었다. 따라서 남한의 주체사상과 북한의 주체사상은 그 이해와 실천의 내용에서 서로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남한의 주체사상파를 북한의 지배계급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북에 대한 비판을 주체사상파에게 전가하거나, 또는 주체사상파에 대한 비판을 북에게 이입하는 것은 맞지 않다. '주체사상파=북한'이라는 도식적인 이해는 분명 그릇됐다.

 

물론 주체사상이건 스탈린식 구조중심적 마르크스-레닌주의건 한국의 실정을 무시한 교조적 수용은 비판받고 지양돼야 마땅하다. 불행하게도 한국 진보 진영의 양대 파벌에서는 과거 북한과 소련의 지배 이념에 대한 교조적 수용이 있었고, 각 이념에 대한 엄격한 이론적 검토와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 같다. 대립되는 두 입장 간의 건강한 논쟁과 자기비판도 부족했다.

 

서로 벽을 쌓으며 대화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편견과 오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감정적 골은 깊어졌다. 이때문에 민주노동당이 분당할 때에는 평등파와 마찬가지로 자주파 내에서도 이미 변화가 발생한 후였는데도, 그저 자주파는 '종북세력'이라고 매도됐다.

 

자주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단일하지 않고 다양했다. 주체사상파가 있었고, 그 중에는 교조적 수용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사파가 아닌 사람들도 있었고 북한과 선을 긋는 사람들도 있었다. 90년대 이후 북한이 시장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면서, 주체사상파들도 시장을 활용하고 선거와 국회를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 변화를 만들어가자는 입장으로 변화했다.

 

국정원에 의해 왜곡 및 공개된 이석기 녹취록을 살펴봐도 이런 변화를 일부 느낄 수 있다. 전형적인 자주파의 입장이었던 반제, 통일, 전민항쟁 노선으로부터 옮겨와 선거와 의회를 통해 변화를 만들어야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90년대를 거치면서 교조적 주체사상 수용자들은 더 줄어들었고,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상층지도부에서 주요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체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비주사 계열의 자주파 구성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좌파 민족주의자들로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에서 민족 통일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자주파에 있다가 후에 정의당으로 옮겨간 사람들(현재 정의당에서 대변인을 맡고있는 이정미 부대표가 그 대표적 예이며, 그녀는 오랫동안 자주파 일부였던 인천연합 소속이다.)도 있는 것을 보면, 자주파 내에 북한에 대한 관점이 다양하게 존재했고, 시대의 흐름과 정세에 따라 변화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종북주의 논란이 격화된 사건으로는 '일심회' 사건과 '코리아 연방공화국' 대선 슬로건 논란을 들 수 있다. 일심회 사건은 민주노동당 소속 최기영 사무부총장이 당직자의 신상을 북측에 넘겼다는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건이었다. 당시 최기영 본인은 혐의를 부인하였으며, 핵심 혐의였던 북측에 당직자들의 신상을 넘겼다는 부분은 정작 구속 단계에서 검찰의 공소장에서 삭제됐고 판결문에도 내용이 없었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일심회라는 이적 단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결이 났으나, 최기영은 다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을 때는,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갈등이 심각하고 이미 분열의 움직임이 구체화되던 시기였다. 당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심상정을 비롯한 평등파는 민주노동당이 '종북정당', 대안이 없는 '데모당', '민주노총당'이라는 오명을 떨쳐내야한다고 주장하며 개혁안을 제출하였다. 여기에는 일심회 관련자들을 당에서 제명하는 안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주파 지도부는 분당을 막기 위해 평등파와 접촉하고 협상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대의원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기층 당원들의 반발 속에 개혁안은 부결된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동당 내 평등파는 당을 떠나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이미 탈당파는 당을 떠나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2004, 2005년부터 지속된 양대 파벌간 대화의 부재가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던 상태였다. 갈등은 당의 입장을 북한을 지지하느냐 아니면 반대하느냐, 또는 반미냐 아니면 반북이냐의 극단적인 양자택일 구도로 몰아갔다


일심회 사건은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지, 분당의 원인은 아니었다. 대선에서 실패하고, 당 지지율이 급속도로 하락하던 시점에 평등파는 민주노동당이 '종북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려고 제명안을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지속적인 혐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충실히 하기보다 아직 판결이 나기도 전에 제명안을 상정한 것은 옳지 않았다.

 

'코리아 연방공화국'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내세운 슬로건 중의 하나였는데, 자주파 측에서 주장한 내용이었다. 이 공약은 대선 슬로건으로 적절하지 못하고,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당내에서 많은 반발을 샀다. 대선 후보였던 권영길조차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대본부장이었던 김선동은 이 슬로건이 들어간 포스터 제작을 강행하였다. 결국 문제가 제기되고 포스터 폐기 결정이 내려졌는데, 이에 김선동 당시 선대본부장은 당무를 거부하고 다음날 예정되어있던 생방송 인터뷰에도 불참한 사건이다.

 

'코리아 연방공화국' 공약의 강행은 당내 종북주의 논란을 가중시켰다. 이름만 들어서는 내용을 떠올리기 어려운 '코리아 연방공화국'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이유가, 과거 김일성이 제안한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진위는 <파벌>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코리아 연방공화국'이 적절한 대선 슬로건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코리아'라는 영어를 쓰는 것도 이상하고, 연방공화국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와닿지도 않아서 매우 모호하게 들린다. 그래서 다만 구호에 불과할 뿐, 실제적인 내용은 없는 이야기라는 인상이 든다.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유도하는 슬로건으로 채택하기에는 효과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무리하게 대선 슬로건으로 강행하는 과정에서, 자주파 지도부가 당내 다른 구성원들과 논의와 협의를 거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붙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주의를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협소한 민주주의관이 가져오는 부작용이 고스란히 당내 소수파였던 평등파에게 상당한 기간동안 누적됐을 것이다.

 

소수의 의견이라도 합리적이고 올바른 주장이면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다수파를 차지했던 자주파 지도부에게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안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당내 의사결정방식도 문제의 원인이고, 기계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지켰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 억울하면 너희들도 사람을 더 데리고 오라' 식의 태도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 '패권주의와 분파주의' 요인을 설명할 때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북핵을 어떻게 볼 것인가도 종북주의 논란을 심화시킨 주제였다. 개인적으로 북핵을 비판할 때는, 북의 핵 보유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그 배경과 상황을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적대적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이 없이 북한의 핵만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진보는 반핵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논리는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분석한 결과라고 본다.

 

제국주의 모순은 엄밀히 존재하며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 지난 10년간 중동에서 미국은 여러차례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다시 군사대국화 준비에 들어갔다. 한반도 주변에서는 미군과 한국군이 전세계 최대규모의 군사훈련을 매년 벌이고 있으며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통해 북한에 대한 지원을 끊고 경제적 제재를 가한다. 당장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자주파의 한반도 전쟁 위기에 대한 분석을 황당하다고만 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이를 비하하는 쪽이 제국주의 모순을 간과하는 설득력 없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을 때 자신들이 박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자주파 사람들의 생각은 나름 일리가 있다. 전쟁이 발생했을 때 사회 혼란을 일으키거나 이적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반체제 인사들부터 잡아가는 게 자본주의 국가가 하는 일이다. 자주파 사람들은 전쟁이 발발하지도 않은 때부터 국가보안법의 탄압에 노출되어 숱하게 구속되고 실형을 살았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나면 잡혀갈 거라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망상이니 정신병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해 거칠게 조롱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으로 지속적인 탄압을 받고 있는 자주파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평등파는 이런 탄압에서 상대적으로 비껴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국가 탄압에 안일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해야 하며, 자주파의 한반도 전쟁 위기 분석에 대해 비아냥보다는 합리적 비판을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나는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본래 평등, 자유, 해방과 동의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에 평등과 자유와 인간 해방이 있는가? 북한은 소수 관료가 권력을 소유한 계급사회이다. 노동자와 농민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다.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들처럼 억압을 받고 착취도 당한다. 개성공단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 노동자들을 노출시키고 제대로 된 처우를 하지 않는다. 또한 해외에 노동자들을 파견하여 그들의 임금을 가져가면서 변변한 지원도 하지 않는다. 북한의 지배계급에게 미국의 전쟁 위협은 피지배계층의 자유를 억압하고 불평등한 지배 구조를 유지하는 논리로 이용된다.

 

나는 자주파가 (더 정확히는 자주파 중에서 아직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북한이 사회주의라는 인식을 버리고, 북한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분리해서 사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지배계급에 공감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정치 세력으로서 모순된 사고와 행동이다.

 

민주노동당 분당 국면에서, ‘종북주의 청산을 주장한 평등파의 태도는 다양한 이념과 의견의 존중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었다. <파벌>에서도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이고 오류였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진보 진영은 종북 몰이에 동참하고 수구의 종북 공세를 방조할 것이 아니라, 남한 노동자 민중 운동의 일부인 자주파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를 가져야한다. 그것이 과거의 치명적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한국 진보 운동이 힘과 활력을 되찾기 위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패권주의와 분파주의 

 

마지막으로 민주노동당 내에서 갈등이 격화되고 조직이 분열되었던 요인 중 패권주의와 분파주의 논란에 대해 다루겠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는 '종파주의'의 양면이다. 전체 진보 운동의 이해보다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종파주의이다. 종파주의는 한 집단 내에서 다수파일 경우 패권주의로 나타나고, 소수파일 경우 분파주의로 나타난다.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를 본질적으로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 둘이 하나의 몸통을 공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파벌>에 보면 노회찬이 자주파의 패권주의를 들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수를 만든 부정 행위 또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하였다고 지적한 부분이 나온다. 구체적 예로는 쪽지에 표로 찍을 후보의 기호나 이름을 적어 당원들이나 조합원들에게 돌리는 정파 셋팅 선거, 당비 대납, 주소지 이전, 아이를 입당시키는 행위, 한 집에 10명 이상 주소지를 등록해놓은 행위 등이 거론돼 있다.

 

사실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알아보면 지적된 사례들을 부정 행위로만 해석할 수 없는 정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철거민의 경우 실제 한 집에 10명 이상 주소지를 등록해놓은 경우가 있기도 했다. 따라서, 얼마나 빈번하게 그런 사례가 발견되었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한 집에 10명 이상 주소지를 등록했다고 무조건 부정행위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자주파와 평등파 간의 불통과 불신은 문제를 과장하고 오해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이를 입당시키는 행위와 관련해서는 당시 상황을 고려해서 볼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중반 민주노동당은 '10만 당원의 대중정당'이라는 목표로 활동하였는데, 이 무렵에 가족을 당원으로 가입시키는 사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분위기로는 아마 가족을 당원으로 설득한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웠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만 당원이라는 이유로 아이도 투표권을 행사하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당규에 어긋나는 행동은 마땅히 부정행위이다. 그러나 아이를 입당시킨 행위가 선거에서 부정행위로 연결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정파 셋팅 선거와 주소지 이전 등은 실제 있었던 일이고 <파벌>에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두 행위를 당 차원에서 금지시키지 못한 이유는 이것이 당규를 어긴 부정행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법은 아니었더라도 자발적으로 판단하고 선거에 참여하는 성숙한 민주의식과는 거리가 먼 행위들이었던 것 같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부적절한 행위가 자주파와 평등파 측 모두에게서 발견됐다는 점이다. 자주파를 패권주의라 비판했지만, 평등파도 종파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주파의 부적절한 행위들이 더 두드러져 보였던 것은 자주파에 속한 당원의 수가 더 많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자주파는 지역 사업을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평등파에 비해 지지자가 훨씬 더 많았는데, 만일 대중 집회를 열어 당원들을 동원한다고 하면 자주파는 전국적으로 당원 만 명 이상을 모을 수 있었지만 평등파는 많아야 천 명을 넘기기 힘들었다고 한다.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으니 그만큼 부적절한 일탈도 더 자주 나타났을 것이다.

 

민족 해방과 노동 해방이라는 가치를 위해 하나의 좌파 정치 세력으로 뭉쳤지만 현실에서는 당권을 놓고 서로 경쟁했다. 경쟁이 과열되면서 자본주의 체제 내 기성 정당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관습과 관행을 답습하고 타락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1인 다표제'가 자주파의 독식을 위한 제도로 악용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2000년대 중반 당내 소수파였던 평등파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투표권을 갖는 것이 나쁠 게 없다는 생각으로 1인 다표제에 합의했다고 한다. 11표제를 하면 오히려 수적 우위에 있는 자주파가 표를 장악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1인 다표제에서도 많은 표가 자주파에게로 쏠렸고 최고위원을 자주파가 독식하게 된다.

 

후보를 세우는 경우에도, 전체 진보와 노동 운동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정파 이해를 앞세우면서 자질이 떨어지는 인물을 지도위원과 최고위원으로 세우는 경우들이 있었다고 한다. 추문, 성희롱, 횡령 등의 흠이 있더라도 자기 정파 후보의 경우에는 간과하고, 상대 정파 후보의 경우라면 지적하는 이중잣대가 자주파와 평등파 모두에게서 나타났다.

 

<파벌>을 읽어보면 자주파와 평등파는 서로에게 협력할 마음이 적었고, 다수파가 소수파를 배려하는 태도도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대표나 국회의원 자리 등과 관련해서 평등파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주파 쪽에 그런 명망과 인지도를 갖춘 인물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의 민주노동당 인사들이 평등파 계열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배려는 갈수록 적어졌다.

 

하나의 당에서 당권과 공천권을 쥐는 당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격화될 수록, 오로지 다수결이라는 기준 하나에 정당성을 두고 다수는 독식을 원하였다. 당에 대한 기여도가 낮은 소수에게 왜 당권을 줘야하는가라는 생각도 있었고, 자신들은 다수결대로 하였으니 정당하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다수결이 곧 민주주의라는 생각은 협소한 민주주의관이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해도 합리적이고 올바르면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따라서 토론의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서는 갈수록 토론을 회피하고 표결로 사안을 처리해버리는 일이 빈번해졌다.(토론을 달가워하지 않는 경향은 오히려 평등파에서 더 심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소수파였던 평등파의 소외감과 불만은 해소되지 못한채 누적되어 결국 갈등이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격화됐다.

 

두 파벌간의 대화와 토론을 단절시킨 요소 중 하나로 책에서는 조직 문화의 차이를 언급한다. 자주파는 집단주의 문화가 있어서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데 반해, 평등파는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선거 운동을 해보면 이런 문화 차이가 가시적으로 나타나 극명한 대조를 이룰 정도로 분명한 차이였다고 한다.

 

구성원 성격에도 대조적인 측면이 있었다. 당시 평등파에는 명망가, 이름이 알려진 진보 운동가들이 있었고 구성원들의 학벌이 대체로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진보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교수, 변호사, 언론인 등은 대체로 평등파 소속이었다. 반면 자주파에는 묵묵히 현장에서 일해온 활동가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진보적 명망가나 지식인도 자주파에는 많지 않았다. 두 파벌간의 조직 문화의 차이는 일상적인 소통을 어렵게 하였고, 이런 차이들은 서로에 대해 이질감과 편견을 굳히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는 민주노동당 내 파벌간 소통을 단절하고 갈등을 악화시킨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당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분당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파벌간 양보와 타협이 제시되었음에도, 분당으로 치닫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평등파(내 신당파)'종북주의' 청산을 고집한 것이라고 <파벌>의 저자인 정영태는 설명한다. ‘종북주의 청산은 평등파와 구별되는 자주파의 정체성인 반미, 민족주의 노선과 북한에 대한 관점을 부정한 행위였고, 이는 결국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이들이 서로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을 부정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가졌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려 한다. 나는 한국 진보 진영이 분열하고 역량을 상실한 원인을 살펴보려고 했다. 구체적으로 최근 한국 사회에 만연한 종북 공세에 진보 진영 전체가 위축되고 혼란스러운 대처를 보여주는 까닭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따라서 21세기 한국의 진보 운동과 노동 운동이 분열하였던 계기인 민주노동당 분당에 대해 주로 살펴본 것이다.

 

내가 얻은 결론은 한국의 진보 진영이 2008년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던 때 가지고 있던 입장과 태도에서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씁쓸한 사실이다. 정영태가 지적한 그 결정적인 실수와 오류로부터 진보 진영이 반성이나 교훈을 찾기란 너무 어려웠던 걸까? 당시 '종북주의' 청산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최근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판결에서도 적극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통합진보당을 방어하는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 탄압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종북주의 논란에 대한 비판은 앞서 충분히 하였다. 문제는 친북노선이 아니었다. 종북은 실체가 모호한 낙인이었다. 주사파는 악이 아니다. 나아가 북한에서는 주로 지배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이 한국에서는 저항 이데올로기로 수용되면서 진보운동에 기여한 역할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이들이 서로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는 진보 진영에서조차 요원한 이데올로기인가?

 

정권의 종북 몰이는 또한 철저히 계급적이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면담하고 호감을 표시한 박근혜 대통령이나 평양의 김일성 생가를 방문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형오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의 친북적 행위는 비판받지도 않고 탄압받지도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들은 이 사회의 지배 권력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이 종북으로 몰려 탄압받은 것은 그들이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저항 세력이기 때문이다. 만일 통합진보당이 노동계급 정당이 아니고 저항 세력도 아니면서 다만 친북노선을 지닌 당이었으면 지금과 같은 정치적 탄압은 없었을 것이다.

 

탄압이 계급적인데 진보 진영의 대응은 왜 계급적이지 못할까? '모든 억압에 맞서 저항하라'는 좌파 정신은 어디로 갔을까? 국가보안법의 탄압과 근거도 없이 정당을 해산시키는 행위가 억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공안 탄압에 저항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계급의식으로 연대하는 것을 거부한 진보 세력이 (그 꼴을 당하고도) 여전히 종파주의적인 입장에 매몰되어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해산된 통합진보당 세력을 진보 진영에서 도려내겠다는 비민주적인 태도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할 뿐이다. 종북주의 문제는 계급적으로 접근할 때 핵심이 명확해진다. 자주파 세력과의 공존을 인정할 때 종북주의는 비로소 청산될 수 있다. 민주노동당 분열의 요인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글을 쓰며 정리할수록 나의 입장은 뚜렷해졌다. 나는 구 통합진보당 세력이 한국 진보와 노동 운동의 매우 중요한 구성원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배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탄압받고 소외될 때, 주저없이 그들 편에 서서 방어하고 단호하게 권력을 비판할 것이다.

 

'종북의 청산'이 아니라 종북몰이에 맞서 탄압받는 세력과 연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진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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