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웬 동원된 숫자가 저리 많으냐고 놀랄 것 없다. 한 30년 줄기차게 선동하고 조직하다 보면 그만한 숫자는 너끈히 채우고도 남는다. … 문제는 전업(專業) '운동꾼'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 단단한 진지(陣地)를 구축하고 있는 현실이다. … 통진당 해산으로 그들 중 가장 독한 분자들은 걷어냈다. 그러나 … 여전히 야당가(街)와 운동권의 큰손으로 건재하다.”
(<조선일보> 2015. 12.15 류근일 칼럼)
12월 19일은 3차 총궐기이자, 통합진보당이 해산된지 1년된 날이었다. 1년 전 그 날은 결코 일부 정치경향의 동지들만이 기억하고 돌아볼 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에 가해진 중대한 공격으로, 저항운동이 다시 반복하지 말아야 오류와 패배, 그에 대한 교훈으로 기억돼야 한다.
하지만 위의 류근일 칼럼은, 저들이 결코 '진보당'으로 상징되는 저항운동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고 여전히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저들은 3차까지 이어지는 총궐기를 보면서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1년만에 다시 더 크게 부활한 유령’을 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특히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 이석기 의원에 이어서 박근혜 정권과 우파의 증오를 한 몸에 받게 된 사람은 바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다. 아마 박근혜는 12월 10일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에서 한 기자회견을 보면서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날 한상균 위원장은 당장 박근혜를 집어삼킬듯한 눈빛과 결기를 보이며 이런 말들을 쏟아냈다.
“저는 살인범도 파렴치범도, 강도범죄, 폭동을 일으킨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해고 노동자입니다.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해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아이들은 꿈을 포기해야 하고, 단란했던 가정은 파탄 났습니다. 불나방처럼 떠돌다 때로는 생과 사의 결단을 강요받고 실제 생을 포기한 동료가 많았습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살인 물 대포에 69세 백남기 농민이 병원에 사경을 헤매고 누워 계신데 왜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까? … 껍데기뿐이었던 민주주의마저 죽어가고 있는데 왜 아무도, 어떤 언론도 말하지 않습니까?
"민주노총은 노동재앙, 국민대재앙을 불러 올 노동개악을 막기 위해 이천만 노동자의 생존을 걸고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총파업에 나설 것입니다. … 승리할 수 있고 승리 해야만 하는 역사적인 투쟁입니다.”
물론, 민주노총 파업을 앞두고 한상균 위원장이 자진출두하게 된 것은 우리 편에게 매우 쓰라린 손실이었다. 이에 대해 가장 먼저 비난받아야 할 것은 폭력침탈 시도와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벌인 자들이다. 이들은 한상균 위원장에게 인간으로서 누구라도 견디기 힘든 물리적, 정신적 압박을 가했다.
조계종은 ‘자비와 화쟁’은커녕 위선과 굴복만 보여 줬고, 새민련은 공개적으로 ‘자진출두’를 압박했다. '진보' 정치인들마저 당장 달려 와 몸으로 막진 않고 먼 산 불구경하듯 했다. 이 속에서 ‘숨어든 주제에 약속까지 어기고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이는 파렴치범’으로 몰리는 사람의 가슴은 얼마나 숯덩이가 됐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실 ‘노동개악을 막겠다는 새민련의 약속을 믿고 자진출두하는 모양이 돼선 안 된다’는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상균 위원장 자신이 “제가 손을 놓는 것은 싸우는 장수가 백기를 드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분노와 결기로 가득 한상균 위원장의 기자회견은 ‘백기투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일보>도 “포효하듯 정부를 규탄하고 … 주먹을 쥐어 보이거나 구호를 함께 외치는 등 마치 출정식을 치르는 장군처럼 행동했다”며 혀를 찼다. 따라서 ‘이제 투쟁 위축과 전선 교란, 노조 지도자들의 투쟁 회피가 이어질 것’이라는 일부의 평가는 너무 나아간 것처럼 보였다. 어떤 전술이 더 나았을지는 앞으로 공동 투쟁 속에서 입증, 평가하며 책임질 문제일 것이다.
사실, 한상균 위원장이 말할 기회도 못 얻고 강제로 끌려나오거나, 스스로 나오는 대신 투쟁 호소할 기회를 얻거나 라는 외통수로 몰리게 된 데는 근본적 제약이 있었다. 민주노총 침탈시 수만 명의 조합원이 몰려올 것이라는, 위원장 연행 시 즉각 강력한 파업이 벌어질 것이라는 믿음만 있었다면 조계사로 피해갈 이유도, 자진출두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민주노총 선거 때 ‘현장은 분노 속에 싸울 준비가 돼 있고, 좌파 지도부 건설과 그 지도부의 총파업 호소가 해법’이라는 주장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지금 민주노총의 난점이 단지 지도부 교체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봤던 것이다.
실제로 공무원연금 개악 등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의 줄어든 동력, 사회적 고립, 정파적 사분오열, 산업과 기업에 따른 부문주의는 거듭 드러났다. ‘노조 지도부가 국회 일정에 매달리며 계속 파업을 미루면서 동력이 사라졌다’는 좌파의 전통적 비판도 한상균 지도부의 1, 2차 선제파업을 거치면서 근거가 희미해졌다.
물론, 한상균 지도부는 아쉬운 점과 한계도 보였지만, 적어도 파업의 동력이 충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회피하며 그것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핵심은 아무리 좌파적·전투적인 지도부라도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줄어든 투쟁의 동력을 ‘지도부의 소명’만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좌파적·전투적 조합원들의 아래로부터 힘’이 뒷받침돼지 않는 이상, 좌파적·전투적 지도부는 허수아비일 수 있으며 투쟁 회피적 노조 지도자들의 목소리도 제어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금 모든 전술은, 이런 기층의 힘과 압력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느냐, 방해가 되느냐를 기준으로 평가돼야 한다.
사실 민주노총의 부족한 동력과 사회적 고립을 볼 때 이 투쟁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1, 2차 총궐기 등을 거치면서 상황은 약간 달라져 있다. 오랜만에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정파적 차이를 넘어서 단결하고, 차근차근 기층에서 운동을 건설하려고 한 노력이 성과를 보였다.
민주노총의 3차 파업은 2차 파업보다 규모와 위력이 커지는 변화를 보였다. 비록 4시간에 그쳤지만 완성차 3사가 7년만에 정치파업에 나서는 변화도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지난 한 달 이 나라는 완전히 멈춰 서지는 않았지만 '한상균'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물론 여전히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가진 난점들은 여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지난해 진보당 해산처럼 패배할 가능성도 여전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패배하느냐도 중요하다. 최선을 다하고 단결을 유지하며 교훈을 배우는 패배이냐,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고 분열로 이어지는 패배이냐는.
결과가 무엇이든, 지금 우리의 선택의 폭을 좁히고 있는 이런 제약이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계속 돌아보면서, 힘을 모으고 투쟁을 건설하며 함께 이런 제약을 벗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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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의 위기 속에 다시 공백이 생기고 있다
안철수 탈당으로 또 위기에 처한 민주당(새민련)은 IMF 위기부터 시작된 10년의 집권 기간을 거치며 기층민중의 불만과 저항을 무마시키는 지배계급의 방패 구실을 해 왔다. 그 1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앞장서 주도한 민주당에 대한 기층 민중의 불신은 뿌리가 깊어졌다.
반면 지배계급은 이제는 방패보다 칼이 더 필요해졌고, 이것이 이명박과 박근혜의 연속 집권 배경이었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2008 세계경제 위기가 그 바탕이었다. 기층 민중은 민주당을 불신하고, 지배계급은 민주당을 쓸모없어 하는 이 모순과 공백 속에 지난 대선 때 ‘안철수 현상’이 나타났다. 새누리는 싫고 민주당도 못 믿는 정서가 그에게 몰렸다.
안철수는 ‘반새누리·비민주당 개혁염원 대중의 희망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안철수 ‘현상’과 실제 안철수의 ‘본질’ 사이의 모순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그러면서 안철수는 문재인을 넘어서지 못했다. 단결한 지배계급과 우파는 박근혜라는 칼을 택했고, 거품이 빠진 안철수는 ‘민주당 안에서 반문재인 세력의 아이콘’으로 쪼그라들었다.
김한길, 박지원 등과 손잡은 안철수의 “새정치”는 이제 ‘낡은 진보 운동권과 친노세력 청산’의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친노’는 조중동과 종편에 의해서 ‘종북좌파’의 코드명으로 쓰였다. 실제 친노 세력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안팎의 압력에 굴복한 문재인과 민주당 주류 세력은 ‘유능한 경제, 안보 정당’을 말하며 또 우클릭했고, 이를 “혁신”이라 불렀다. 주류와 비주류가 서로 견제하며 당권을 나눠먹는 것은 “통합”이라 불렀다.
‘박근혜에게는 콘크리트 지지층과 함께 세월호, 민영화, 국정화, 노동개악, 뭘 해도 싸울 생각도 않는 콘크리트 야당이 있다’는 야유 속에 민주당 지지율은 바닥을 기었다. 다가오는 총선의 결과는 뻔해 보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민주당의 위기의식은 커갔다. 내용은 그대로여도, 간판을 바꾸고 화장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압력이 커졌다.
그래서, 근래 문재인과 주류가 꺼내든 “혁신”은 주로 이벤트식 인적 물갈이를 뜻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공천을 위협하니 비주류는 다시 “새정치”를 무기로 주류를 공격했다. 이 ‘목적 없는 혁신’과 ‘알맹이 없는 새정치’의 무의미한 공방은 갈수록 사람들에게 짜증만 일으켰다. 반복될수록 그것은 당권, 공천권 다툼이 되면서 파괴적이 돼 갔다.
특히 안철수는 스스로 만들었지만 자신도 답을 모르는 ‘새정치’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지금 ‘새정치’는 한국정치의 최대 불가사의가 돼 있다. 문재인은 호남 토호세력, 집권 10년간 형성된 정치꾼과 관료, 신자유주의로 돌아선 486 등 민주당의 핵심문제를 여전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무엇을 위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민주당 내 다툼은 계속될 것이다. 지역주의 굴레 속의 천정배, 토담집에서 재기를 노리는 손학규는 이 복잡한 실타래를 더 얽히고설키게 만들 것 같다.
진보진영은 이런 민주당, 친노세력과 전략적 연대나 통합을 하겠다며 자중지란을 자초하고, 결국 종북몰이 속에 사분오열하며 ‘안철수 현상’의 변두리로 밀려났던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정의당이 메우지 못하는 진보당 강제해산의 공백 속에 새로운 진보정당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등 상황은 여전히 역동적이고 가변적이다.
따라서, 서로 정파적 이익을 앞세우며 민주노총이 그나마 도모하기 시작한 ‘노동진보 진영의 선거연합’ 추진조차 실패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없어야 한다. 투쟁과 연대를 통해서 세월호, 국정화, 노동개악 등에서 박근혜에 반대하고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분명한 구심점을 만들어야 한다.
● 세월호 1차 청문회가 제기한 사실과 의혹들
언론은 철저한 외면으로 일관했고 해경은 집단기억상실증을 보였지만 지난주 3일간의 세월호 1차 청문회는 그래도 몇 가지 사실들을 밝혀내고 제기했다. 해경이 제출한 TRS 녹취록이 조작이었다는 것, 그 급박한 구조 상황에서 해경이 세월호와 직접 교신조차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 드러났다. 사고 당시 구조활동을 한 것이 아닌 CN235 고정익기 2대는 누구의 지시로 무엇을 확인해서 어디에 전달했는가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제 시작일 뿐이고 무수히 많은 것들이 남았다. 최근 한두달 사이에 방송된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김지영 감독이 제기한 것들 만해도 굵직하다. 세월호 엔진 두 개의 프로펠러중 하나만 가동되었다는 증거는 무얼 뜻하는가? 사고나기 전부터 세월호가 침수되기 시작했다는 증언과 증거들은 무엇인가?
세월호의 CCTV는 왜 중요한 장면만 다 삭제돼 있는가? 왜 선원만 구조했으며, 구조 과정에서 한 선원과 해경이 구명조끼를 바꿔입은 이유는 무엇일까? 뒤늦게 찾아 낸 영상에서 해경이 조타실에서 옮기는 검은 물체는 무엇인가?
청문회를 전후해서 일부 언론도 몇 가지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123정장이 그 급박한 상황에서 휴대폰으로 어딘가와 몇 차례 통화했고, 특히 신분도 몰랐다는 선원들 집으로 전화한 기록이 드러났다.
조타가 아니라 외부의 충격과 힘에 의해 세월호가 급선회했다는 데이터 분석자료가 법원과 특조위에 제출됐다. 국정원 직원이 몇 번이나 와서 세월호를 검열했다는 세월호 직원의 증언도 나왔다. 핵심 증거물인 닻(앵커)이 인양작업 초반에 몰래 제거된 것도 드러났다.
이 모든 것들이 밝혀져야 “단순한 사고에 그칠 수 있었던 세월호 참사가 참사로 변화된 배경”(4.16연대)이 드러날 것이다. 청문회를 보면서, 정권이 기소권과 수사권을 한사코 막은 이유가 무엇인지 더 분명해졌지만, 동시에 세월호 가족들과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누구도 꺾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세월호 집회 참석과 주동’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체포, 구속된 주요 이유중 하나라는 게 너무나 자랑스럽다. 한상균 위원장은 영장심사 진술에서 “민주노총에게 힘이 있었다면 유족들에게 더 많은 힘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송했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희망과 연대가 살아있는 한, 박근혜와 거짓은 진실을 이기거나 침몰시킬 수 없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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