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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논쟁

사회주의는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 그 자체이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5. 9.

-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시대정신: ‘소련 이후의 사회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에 대한 보충의견

 

김민재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시대정신: ‘소련 이후의 사회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이하 <시대정신>)은 모두 당연하다고는 말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자주 간과되어 온,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의미 있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시대정신>은 총론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글이기 때문에 맥락에 따라 어느 정도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글 자체를 충실하게 독해하면 해당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소련 등 이른바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변질된 것에는 단순히 객관적, 외부적 요인뿐만 아니라 주관적 요인이 분명 있었는데 (2)그 주관적 요인은 다수 대중이 주체가 되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민주주의라는 원칙을 경시한 오류였고 (3)현재 남한의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모두들 의례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이 원칙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고 있으며, 그러므로 (4)사회주의자들은 이 원칙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마찬가지의 위상을 갖는 핵심적 원칙으로 여기며 과거 사회주의 운동의 유산 중에서 이 원칙에 비추어 버릴 것과 계승할 것을 선별해야 하고, 이 원칙을 지금 여기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네 가지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는 맥락에서, 사회주의는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 그 자체임을 보임으로써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가 가져야 하는 의미를 재차 강조하고 <시대정신>의 문제의식을 보충할 것이다.


 

1. 사회주의와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해 대중이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성인 보통선거권, 삼권분립, 의회에 대한 국가기구의 책임성, 언론이나 야당이 집권여당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 등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나열된 일련의 제도 및 권리들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한하는 것이 부르주아 독재를 포장하기 위한 외피에 불과하고, 현실에서는 위의 제도 및 권리들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정치를 펼치기 어려우며, 이런 것들을 부수적으로 활용하더라도 결국은 작업장이나 거리에서의 투쟁으로 힘을 보여주는 것이 노동자민중의 정치임을 피부로 느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역사를 살펴보면,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본래 오늘날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니 부르주아 독재와는 매우 다른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논문 <근대 시민혁명과 민주주의: 프랑스 대혁명의 사례를 중심으로>(최갑수, 민주주의와 인권 제3권 제2, 2003)에 따르면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인민의 지배였다. 여기서 인민이란 여성, 외국인, 노예를 제외한 시민권을 지닌 성년남자를, ‘지배란 모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회가 최고의결기구일 뿐만 아니라 시민들 자신이 전문성을 요구하는 일부의 관직을 제외하고 모든 관직에 오를 수 있고, 또 모든 재판의 결정권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민회의 결정에 따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급진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이렇듯 민중의 직접적, 전면적 지배를 의미하는 혁명적 이념이었기에 계몽사상의 시기까지도 민주주의란 극히 일부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혼란, 불안정, 가난한 자들의 폭정, 내분, 내란 등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다.”(최갑수, 같은 글) 프랑스 혁명 초기에 민주파 인사들이 이해했던 민주주의 역시 당연히 민중의 직접적, 전면적 지배였으며, 그래서 선거를 통해 대표자들을 선출하더라도 대표자들에 대한 위임은 강제위임이었다. 대표자들은 선거권자들의 의사와 다른 의사를 표시할 수 없었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다. 인민은 최고의 입법자이자 재판관으로서 의회의 결정들을 검토하고 통제하고 불신임할 권한을, 필요한 경우에 개별 의원들에게 보고를 요구하고 충실하지 않은 위임자들을 언제고 소환하고 파면하고 벌주고 다른 의원으로 대체할 권리”(최갑수, 같은 글)를 가졌다.


그러나 민중의 힘으로 혁명이 진전하여 유산자들의 사적 소유권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로부터 계급적 내용을 제거하는, “민주주의 이념의 전면적인 재조정이자, 근대 민주주의관의 새로운 정립을 시도하였다.

 

인민의 직접적인 정치적 참여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민주혁명이라는 미국혁명에서 최초로 제도화되었다. 1776년의 독립선언10여년 후 헌법의 제정과 비준을 둘러싼 논쟁에서 민주파는 대의제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인민의 의지를 구현하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단원제를 선호하고, 관직의 잦은 교체, 매년 선거, 인민의 비준 등을 요구했지만 결국 어렵지 않게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은 휘그적인 건국의 아버지들이었다. 심지어 그 가운데 상대적으로 급진적이라는 제퍼슨조차 제한적인 인민관을 지녔고, 이를테면 모든 권력을 입법주에 집중한 버지니아 주헌법이 전제주의에 이를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민주주의, 민중적인 정부가 아니라, 제한정부, 당시의 표현으로는 공화정또는 대의제 공화정이었던 것이다

노골적인 엘리트주의자인 해밀턴은 대의민주주의에서 순수한’(simple) 민주주의에 명백히 내재해 있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방책을 발견하였다. 권력의 분립, 인민이 직접 선출한 의회에 대한 견제장치, 대의제 정부, 이것들은 민주주의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고안되었다. ... 이것은 사회를 다양하고 심지어는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총합으로 보는 다원주의적인 사회관에 입각해 있으며, 따라서 여기에서 계급과 불평등은 불가피하고 영속적이며 근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최갑수, 같은 글)

 

인민의 직접적, 전면적 자기통치를 통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하나로 되어야 한다는 이념은 어느새, 인민은 주권을 보유하지만 통치권은 선출된 대표가 행사하고 국가는 시민사회와 분리되어, 시민사회 속 유산자들의 사적 소유권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이념으로 대체되었다. 민주주의 개념의 이러한 변화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프랑스의 사상가 벤자민 콩스탕(Benjamin Constant), 주권적 의지의 집단적 행사는 고대인의 자유일 뿐이고 근대인의 자유는 사적 개인의 행복의 보장인데, 근대의 인민이 고대인들이 누렸던 집단적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혁명가들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공포정치가 초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혁명 초기에 거의 모든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직접 민주주의였고 만약 그것의 실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그 이상은 인민주권론으로 구체화하였다. 정치적 참여는 인격완성의 결정적인 계기였고, 인민은 의지의 표현인 법을 통해 삶의 조건을 바꿔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고대인의 자유라고 하여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독재와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콩스탕은 근대인의 자유의 보장책인 대의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19세기 말에 나타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구조를 제시하였다. 국민주권이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한적이며, 오직 대의체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시민의 주 관심사는 공적 삶에의 참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적 이익의 추구에 있는 것이다. 국가의 주 임무란 그런 시민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지 일반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를테면 법을 통해 소유권의 변화를 꾀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을 해치는 것이었다. (최갑수, 같은 글)

 

요약하면,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삼권분립,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들을 통한 간접적 통치보다는 맑스가 <프랑스 내전>에서 그려냈던 파리 코뮌의 모습과 훨씬 더 닮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나누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군림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1)선출된 대표기구가 코뮌처럼 행정과 입법의 업무를 겸하는 행동 기구역할을 하고 사법공무원들 역시 다른 공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선출되고 소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더 부합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그저 몇 년에 한 번 투표를 하는 것도 아니고, 국회의원들이 자기들끼리 공방을 주고받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아니며 (2)당연히 생산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공동체적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조직한 기구를 통해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생산의 영역까지 민주적 의사결정의 대상이라는 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폐지되어야 하고, 민주적 계획에 의한 생산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이들과의 토론을 통한 의사결정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며 그 속에서 더 나은 정치적 주체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회구성원을 전제로 한다.


결국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자본가계급이 한데 모아진 인민의 의지를 두려워하여 견제와 균형이라는 명분으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군림을 정당화하는 것, 정치와 경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분리하여 전자의 영역에 대해서만 주권을 이야기하고 후자의 영역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본가계급 독재 하에 남겨두는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이념이다. 그리고 자본가계급 독재를 무너뜨리고 위와 같은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는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계급의 목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부르주아 독재를 철폐하고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인 노동자계급독재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강령 중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내지 사회화도 있고 민주주의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애초에 사회주의 혁명 단계에서 생산수단이 국유화되어야 한다는 구호 자체가, 노동자 출신 아무나가 아니라 노동자평의회 등과 같이 민주적으로 조직된 노동자계급이 기존 국가기구 파괴 후 새로운 국가기구를 구성하고 생산수단을 장악한다는 의미이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아직 협의의 사회주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노동자국가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노동자계급독재 하에서 시행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아래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자민주주의와 분리할 수 없다.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은 단선적이고, 순탄한 과정이 아니라, 모순적이고 의식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그 특징 상 노동자 계급의 의식적 실천이 중요해지고, 특히 노동자국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만약 노동자민주주의가 약화되어 노동자 계급이 사회운영의 주체, 정치의 주체로서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능력이 약화된다면, 노동자국가의 운영이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인 것으로 변질된다면, 이는 단순히 상부구조의 변질 수준을 넘어서, 조성되고 있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지배, 억압 관계를 낳게 된다. 결국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노동자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노동자국가가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노동자민주주의라는 형태를 띠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황정규,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국가자본주의론의 오류>, 2009.8.16. http://programto.net/wordpress/?p=680)

 

사회주의 하에서 비로소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만 말하는 것은 부족하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극복되어 인민이 공동체의 전 영역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는 사회로서의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 사회이다.


 

2. 이른바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성격 규정: 소련에 관한 논쟁을 중심으로

 

그런데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회주의를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규정할 경우 과거의 이른바 현실사회주의 국가들, 예컨대 소련 체제를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하는지가 문제된다. 소련은 명실상부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노동자국가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후반부터 붕괴 전까지 노동자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 왔는데, 사회주의가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 그 자체라면 노동자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았던 때의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며 노동자국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소련 방어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였다. 비록 퇴보하였고 기형적이지만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유지되고 있으므로 분명히 노동자국가이며,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도 노동자국가도 아니라는 주장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노동자국가의 모습과, 노동자국가의 요건을 혼동하는 오류이고, 결국 제국주의 앞에서도 소련을 방어하지 않는 기회주의로 이어진다고 트로츠키는 주장하였다. 반면 토니 클리프 등은 노동자민주주의가 없으면 법제도상 생산수단이 국유화되어 있다고 해도 노동자계급이 국가를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고, 노동자국가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는 타당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그러므로 소련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이며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반동적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이론으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이 글과 같이 사회주의를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혹여 국가자본주의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음을 밝히고 국가자본주의론이 타당하지 않음을 논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이 여전히 노동자국가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주장 역시 문제가 있다. 소련의 진보적 성격을 방어하는 실천, 예컨대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주하는 사유화에 맞서 법제도상으로나마 남아 있는 국유화를 방어하는 것 등은 굳이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규정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렇게 규정하기 위해 노동자국가의 필수 요건에서 노동자민주주의를 삭제해버린다면 이는 사회주의 사상이 대중을 결정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버리는 것이다.


결국 소련 체제를 노동자국가, 부르주아국가 둘 중 하나로 규정하기보다는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노동해방실천연대() 당건설사업추진단, <(가칭)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창간준비호, 2009)정도로 파악하되 소련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보다 진보적인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제국주의에 의해 진보적인 부분이 위협받는 경우에조차 방어를 거부하는 실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하는 것이 타당하다.


<시대정신>에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바람직하다는 정당한 문제의식은 효과적으로 강조되어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견해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 글에서 말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사회주의 개념 자체에 아래로부터가 당연히 들어가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노동자민주주의가 작동을 멈추면 사회주의로 규정될 수 없다는 입장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사회주의 개념 자체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중심으로 구성하되 아래로부터의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사회주의에 노동자민주주의 개념을 추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전자일 경우 이 글과 동일한 입장이고, 후자인 경우 트로츠키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에 가까운 입장일 것이다)이 이후에 별도의 글을 통해 제시된다면, 더 깊이 있는 토론의 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2.1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주장의 타당성 검토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토니 클리프, 정성진 옮김, 책갈피, 2011)1948년에 처음 배포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토니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제기하며 (1)사회주의란 개념상 노동자민주주의와 분리 불가능한 것이므로 소련은 그 어떤 사회주의 체제로도 볼 수 없고 (2)소련에서 관료집단은 노동자민중을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지배계급이었으며, 비록 일국적 관점에서는 소련 경제에 가치법칙이 적용되지 않지만(223~229) 세계 경제의 흐름 속에서 보면 소련은 마치 다른 기업들과 시장에서 경쟁하는 하나의 기업과 마찬가지였다는 의미에서 가치법칙의 적용을 받았으므로(230) 자본주의 체제였고 (3)그렇게 볼 때 한국전쟁은 한 자본주의 국가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제국주의 경쟁일 뿐이고 소련 공산당이 지원하여 수립된 북한의 노동자정권 역시 소련과 다를 바 없는 체제일 것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이 소련을 방어하거나 지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국가자본주의론의 합리적 핵심이 있다면 바로 (1)의 문제의식일 것이다. 법제도상 국가가 생산수단의 주인이며 계획경제를 실시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진보지만, 그것을 사회주의나 노동자국가라고 부르려면 국가가 노동자계급의 것이어야 한다는 요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1)이 옳다고 해서 (2)(3)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는 없으며, 소련 내부에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무리하게 자본주의로 규정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개념 정의를 바꿔 버릴 이유 역시 없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기 때문에 생산수단 소유자들의 판단에 기초하여 무정부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해 사후 승인되며,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전환시켜 생산수단 소유자들에게 판매하는 사회여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생산의 목적은 잉여가치의 착취를 통한 자본의 가치증식이다.


하지만 토니 클리프는 소련에서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그래서 가치법칙도 적용되지 않고, 노동력도 상품화되지 않았음을 인정하였다. 이런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개념 정의에 대한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1981<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빈즈와 헤인즈에 대한 응답>(번역본은 풀무질 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에 실려 있다)에서 클리프의 주장을 수정하여, 임금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필수적 요건임을 인정하고 소련에 임금노동이 존재함을 보이고자 하였다. 데렉 하울도 1990<가치법칙과 소련>(이 글의 번역본도 같은 책에 실려 있다)에서 소련에서도 임금노동이 지배적이어야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유지된다.”고 하며 캘리니코스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그 근거는 (1)강제노동은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점 (2)결근에 대한 가혹한 형벌, 근무기록부 제도 등 노동에 대한 엄격한 법적인 통제가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작업장 선택 등의 자유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점 (3)위험한 일을 하거나 거주에 부적합한 지역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일반 노동자들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았는데 이는 노동자들에게 그곳에 가서 일할지 말지에 대해 선택권이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점 등이었다. 캘리니코스는 소련 사회의 현실에 눈을 돌리면, 노동력이 거기서 상품이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업들은 노동자를 놓고 경쟁하며, 자기 기업에서 일하도록 설득하려고 온갖 종류의 불법 상여금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은 상당한 선택 폭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특정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소련 자본주의와 서방 자본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실질적 차이도 없다.”(알렉스 캘리니코스, 위의 글, 위의 책, 254)라고 요약한다.


하지만 캘리니코스 스스로도 이 중 그 어느 것도 노동력의 유일한 고용주는 국가라는 사실을 변경시키지 않는다고 빈즈-헤인즈는 주장할지도 모른다.”(알렉스 캘리니코스, 위의 글, 위의 책, 251)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클리프가 과거에 말한 바를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음을 은연중에 인정한다. 이 점 외에도, 노동에 대한 엄격한 법적 통제 자체가 선택권을 크게 제한하는 역할을 하는데 거기서 선택권이 있었다는 결론만을 이끌어낸다든가, 상여금이나 차별임금의 경우 노동자들의 불만이 정치적으로 표출될 것이 두려워 이를 무마하기 위한 수단 등 다른 식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데 굳이 선택권이 존재했다는 한 가지 해석만 강조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그리고 클리프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캘리니코스와 하울은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국가자본주의 이론 자체에 정합성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소련이 전체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다른 기업들과 경쟁하는 하나의 기업과 같으며, 세계 경제의 관점에서 소련을 자본주의로 규정해야 한다는 클리프의 주장에 대해 하울은 토니 클리프는 소련을 따로 떼어 내서 본다면 자본주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소련을 국제적 맥락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소련과 그 경쟁국 사이의 노동경쟁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노동이 진정한 임금노동이라면 러시아 내부에 노동력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데렉 하울, 위의 글, 위의 책, 136)고 말했다.


캘리니코스 역시 비슷한 취지로 그러나 소련이 하나의 거대 공장이라는 가정은 우리가 임금노동의 문제를 논의하게 될 때 무너진다. 왜냐하면 소련은 공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민 경제, 즉 상이한 생산활동들의 접합된(articulated) 체제이며, 따라서 각종 생산부문들 사이에 노동력을 분배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원리상 그것은 이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으로서 강제 단순히 노동자들에게 각각 일자리들을 제시하는 것-를 채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방법이 소련에서 노동분배의 체계적인 기초 ... 가 된다면, 노동자들은 정말이지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국가노예일 것이다. 소련 지배계급의 문제는 그렇다면 노예주의 문제일 것이다. 미국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노동생산성 증대는 오직 노예들의 자기 이익을 끌어들임으로써만 더 높은 생산성을 소비의 증대에 연결시킴으로써만-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알렉스 캘리니코스, 위의 글, 위의 책, 252)라고 논평했다.


이는 클리프가 처음에 설정했던 논리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은연중에 고백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계 자본주의 시장 속에 있더라도 해당 국가 경제 체제 내적 동학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세계적 경쟁 역시 그저 그 국가의 노예주가 노예들의 생산성을 높이려고 고민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클리프는 이 논리에서 한 단계 더 비약을 하여, 그 대외관계조차도 경제적 무역관계가 아니라 군사적 경쟁의 관계임을 인정하고, 결국 소련은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생산을 하지만 이것이 가치법칙이 소련에서 적용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소련 경제가 모종의 사용가치 생산을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 경제가 사회주의 경제라는 말은 아니다. 물론 사회주의 경제는 사용가치(매우 다양한) 생산을 지향하는 경제다. 그러나 소련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는 완전히 대립된다. 지금 소련에서 버터가 아니라 총을 대량 생산한 데서 비롯한 착취율 증가,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예속 심화는 인민에 대한 억압을 줄이기는커녕 더욱 강화하고 있다.”(토니 클리프, 위의 책, 233~234)고 덧붙인다.


이 대목에서의 클리프가 해야 할 논증은 대체 어떻게 해서 사용가치 생산을 지향하는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로 규정될 수 있는지의 문제인데,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는 대신 갑자기 소련 경제가 사회주의 경제가 아니라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가자본주의론은 노동자계급이 국가를 소유해야 비로소 사회주의적 의미의 생산수단 국유화라고 할 수 있다는 타당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지만, 소련 체제의 억압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무리하게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끌어들였고 맑스주의적인 자본주의 개념에서 현저히 벗어났다. 소련 체제는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다.

 

2.2 소련이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주장의 타당성 검토

 

소련이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그 근거는 193712월에 간행된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내부회보 3호에 트로츠키가 기고한 <노동자 국가도 아니고, 부르주아 국가도 아니라고?>(IBT홈페이지 http://www.bolshevik.org/hangul/INDEX.htm에 실린 한국어 번역본을 참고하였다. 이하 2.2의 인용문은 별도의 표시가 없으면 모두 트로츠키의 이 글이다.)에 가장 잘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트로츠키는 제임스 버넘과 조셉 카터의 주장(소련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 국가는 아니지만, 관료가 노동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았기 때문에 노동자국가도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1)노동자계급독재의 의미는 생산수단 국유화이고 정치적 형태는 상관이 없고 (2)마치 타락한 관료가 지도부로 있는 노동조합이라고 해서 노동조합이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스탈린 등이 지도부로 있는 노동자국가라 할지라도 여전히 노동자국가이며, (3)결론적으로 제국주의에 맞서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해야 하고 스탈린 일당은 제국주의로부터 노동자국가를 지킬 역량이 되지 않음을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트로츠키의 주장의 합리적 핵심을 찾는다면 (3)제국주의 앞에서는 소련을 방어해야 하며 이것은 관료독재에 대한 비판과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1)처럼 정치형태를 떠나서 자본가들로부터 소유권을 몰수하고 국유화하기만 하면 노동자국가로 인정될 수 있고, 노동자민주주의는 강령적 이상이자 규범이라는 주장은 사회주의 혁명의 기본 정신 및 취지와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2)에서처럼 노동조합의 요건을 노동자국가에 유추하는 것 역시 부적절해 보인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스탈린 일당을 축출하고 노동자민주주의를 되살리는 것이 정치혁명이고 사회혁명은 아니라는 취지의 주장도 이루어지는데, 이런 사안에서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이 과연 얼마나 명확히 구별될 수 있을지, 구별하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트로츠키는 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의 사례를 들어, 어떤 기관의 강령적 이상과 그 기관의 요건을 구별한다. 노동조합의 강령적 이상은 계급투쟁의 기관이어야 한다.” 그런데 AFL의 경우 지도부에는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이 앉아 있고, 이들은 모든 사안에서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반대되는 실천을 하려 한다. 하지만 그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은 지도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국민소득에서 그들 몫의 증가를 위해서 혹은 적어도 감소에 반대하여 투쟁을 지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AFL이 노동조합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노동조합 기관의 강령적 이상과 구별되는 성립요건은 국민소득에서 노동자의 몫을 증가시키거나 적어도 유지하고자 한다.”이다. AFL은 이 요건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기관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경우에 대해서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한다. 노동자국가의 강령적 이상은 과도기 단계라는 취지에 맞게 사회주의 단계로 나아가며 노동자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 스탈린과 그 일당이 관료 독재를 하고 있다. 우리의 강령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은 노동자국가의 규범에 조응하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이를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이 존속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하지만 소련에는 국유화된 소유와 계획 경제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소련은 노동자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앞의 사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노동자국가의 강령적 이상과 구별되는 요건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국유화된 소유와 계획 경제이다. 이에 따르면 노동자민주주의는 강령적 이상이지, 노동자국가의 요건은 아니다.


트로츠키는 이를 토대로, 소련이 노동자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현실과 강령적 규범을 구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타락한 관료가 있는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노동조합이 아니라고 할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위의 두 사례는 노동조합의 성립 요건과 (트로츠키가 생각하는) 노동자국가의 성립 요건을 각각 확인한 것일 뿐이다. 노동자국가의 유일한 성립 요건이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 경제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앞의 노동조합의 사례에서 트로츠키의 결론에 동의하더라도 뒤의 노동자국가의 사례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논점은 노동자민주주의가 강령적 이상이자 규범이어서 있으면 강령적 규범에 부합하는노동자국가, 없으면 퇴보한노동자국가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노동자국가의 요건에 포함되는지 여부이다.


노동자민주주의를 노동자국가의 요건에 포함시키지 않을 경우 나타나는 첫 번째 문제점은 개념적인 혼란이다. 예컨대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 “정치적 범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정치는 단지 집중화된 경제일 뿐이다. 국가와 소비에트의 사회민주주의의 지배(독일 1918-1919)는 그것이 부르주아적 소유를 신성불가침으로 남겨두는 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제국주의로부터 소유권을 몰수하고 국유화된 소유를 지키고 있는 정권은, 정치적 형태를 떠나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다.“라고 트로츠키가 말할 때, 경제가 계획되고 집중화되기만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 의해 계획되는지, 누구의 손에 집중화되어 있는지는 상관이 없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더 나아가면, 과연 노동자 출신의 소수 집단의 지시에 기초하여 계획되는 경제도 집중화된 경제의 일종이므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고 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그냥 법제도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계획된 중앙집중경제를 지향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도 제기된다.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에 대한 구별도 마찬가지의 의문을 야기한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가 말하는 대로 소비에트 권력이 스탈린 관료집단을 축출하였다고 가정한다면, 그 축출하는 과정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그 과정 속에는 노동자평의회를 가장 작은 작업장 단위에서부터 전국 단위까지 회복시켜서 실효적으로 운영하고, 평의회를 대신하여 생산량을 결정하고 노동강도를 결정하던 관료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거나 혹은 그 직책 자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결정권을 평의회가 다시 빼앗아오는 등의 과정이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그 제도들이 법전에는 적혀 있을 것이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아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는 트로츠키의 주장처럼 여전히 국유화된 생산수단과 계획경제의 기본적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천의 관점에서 그것이 지배자를 교체하는 정치혁명에 불과하며 생산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므로 사회혁명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그러한 축출 이전과 이후 소련에서 생산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분명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1에서 설명하였듯이, 자본주의 체제를 깨고 노동자국가,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과정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정치와 경제를 통일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로츠키가 생산수단 국유화의 우선적인 중요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그 국유화가 노동자계급 독재로서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민주주의는 필수적인 요건으로 요구되는 것인데 트로츠키가 은연중에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마치 양자가 별개의 요건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기에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부르주아 정치혁명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생시키는 게 아니라 봉건사회의 해체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 이와는 달리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높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며, 이 정치적 지배를 이용,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실현하여 ...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기본조건을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발생하게 된다. ... 노동자국가는 자본가계급과 지주계급을 몰수하여 생산수단을 국유화, 사회화하고 이렇게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토대로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 공산주의적 생산관계가 스스로의 토대 위에서 발전해가기 전까지 노동자국가는 이행의 중심고리 역할을 하고 계급의 폐지와 함께 그 역할을 다하여 비로소 소멸해가기 시작한다. (성두현, <부르주아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차이>, http://programto.net/wordpress/?p=601, 2009)

 

이렇듯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과정 자체가, 아니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체제를 철폐하는 과정 자체가 노동자계급이 생산을 포함한 사회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혁명기가 왔을 때 대중이 그저 생산이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계획경제가 공황의 가능성도 적고 더 나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출발점은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생존권,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 야간노동에 시달리지 않을 권리였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자본가계급 대신 이 사회를 운영하고 싶고 작업장이든 어디든 자신의 삶의 현장에 대한 통제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해야 혁명기에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투쟁에 동참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노동자국가가 세워졌다는 것 자체가 대중이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로 나섰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문제는 그것이 후퇴하지 않고 안정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민주주의를 노동자국가의 요건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다. 이 사안에서도, 소련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임을 내세워, 혹은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소련이 하는 진보적 실천이 위협받고 있음을 내세워 소련을 방어할 수는 있을지언정, 노동자민주주의가 형해화된 1920년대 후반 이후의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규정할 수는 없다.

 

2.3 소결

 

이제까지 소련을 노동자국가로도, 모종의 자본주의 국가로도 규정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두 가지 규정 모두 소련 방어라는 목적 또는 소련의 억압성 비판이라는 목적을 위해 소련 사회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사실 두 가지 목적 모두 그러한 방식의 규정 없이도 달성될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민주주의가 형해화된 가운데에서도 소련 체제는 사회복지 제도의 안정적 유지, 나치즘의 격퇴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 등의 진보적 성격을 분명히 가졌다. 이러한 진보적 성격을 드러내는 실천이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위협받을 경우 당연히 방어가 필요하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불가침조약과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동부 폴란드 점령 등은 위와 같은 진보적 성격과 별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소련 체제 자체의 수호를 위해서 타국 민중을 희생시킨 실천이므로 방어를 논할 여지가 없다. (이상진, <소련 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 2009.8.16. http://programto.net/wordpress/?p=677)다만 소련이 나치즘과 맞설 때조차, 과거에 폴란드 점령 등의 반동적 실천을 했다는 이유로, 혹은 억압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소련 편을 들지 말자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양비론이다.


노동자민주주의를 노동자국가의 요건에 포함시켜야 하며 사회주의를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과연 얼마나민주적이어야 노동자국가이고 사회주의 체제인지 그 정확한 기준이 문제된다. 단순히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노동자들이 관료들을 감시할 역량이 다소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혹은 교육 사업이 목표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노동자국가가 아니다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노동자국가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들을 열거해 볼 수는 있다. 민주적 절차 및 제도가 당내에 그리고 국가 전체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절차 및 제도가 최소한 시행이 되어야(예컨대 회의가 규정된 주기마다 정상적으로 열려야) 하고, 하위기구에서 비판이 자주 제기되지는 않더라도 제기된 비판이 중간에 봉쇄되지 않고 상위기구까지 올라가서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는 조건이어야 하고, 구성원들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기 위한 교육 및 선전 작업에 자원이 투자되고 있어야 한다.


혹은, 노동자국가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변질되었는지 여부를 의심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의 기준을 세울 수도 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에게 부담을 지우는(예컨대 노동강도 강화) 정책을 의결하였는데 그 의결 과정에서 이견 제시나 토론이 활발하지 않았다든가, 특정 인물들이 너무 오래 특정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든가 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면 경계선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대중의 입장에서 활동가들의 책임 회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지적 역시 깊이 새겨야 한다. 이렇게 규정하고 선전하는 것이 결코 활동가들이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었으므로 현재의 사회주의자들이 소련의 실천에 대해 책임질 것도 없고 답할 것도 없다.’는 태도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소련은 분명히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노동자국가로 출발했기 때문에 왜 그렇게까지 변질되었는지, 왜 노동자민주주의가 후퇴했는지,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답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한다. 과거 역사적 사건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필요하고, 더 나아가 일상 활동을 할 때도 우리는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니까 우리 조직은 그렇게 될 일이 없다.’는 안이한 생각에 빠지지 않고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3. 오늘날의 사회주의자에게 민주주의가 가져야 하는 의미: 대중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제까지 사회주의가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인 근거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정신>에서 날카롭게 지적하였듯이 현실의 사회주의 운동은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시대정신>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의미가 깊다.

 

우리는 모든 관습과 문화와 조직 운영의 방식들을 재점검하고, 우리가 지향해왔던 모든 이상들을 냉정한 눈으로 다시 평가해야 한다. 자신들이 이끈 혁명에서 민주주의가 질식되는 것을 보고도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그 과정을 적극 주도했다는 점에서, 레닌이나 트로츠키, 스탈린 등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서 영웅으로 추앙되어온 많은 선배들조차 비판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다. /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은 또한 민주주의, 대중의 주체화, 자기 통치라는 개념들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대중을 만나고 어떤 방식으로 운동을 건설하며 어떤 제도를 입안해야 이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숱하게 고민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실천적 노력을 쏟아 붓는다는 뜻이다실제로 일상적인 활동의 과정에서 이런 고민들은 사장되기 일쑤다. / 당장의 역관계가, 사업의 성사가, 동원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눈앞을 가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소탐대실이나 과욕을 지적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건강한 활동가라면 그런 당장의 문제에 치이면서도 원칙이라는 중심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을,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정말로 운동의 원칙이라면 민주주의 또한 그런 구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은 것이고, 현재의 운동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고언하고 싶은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이 노동조합이나 학생회 등 대중단위 활동, 사회주의 조직 내부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고, 현 상황의 문제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더 많은 토론과 논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토론과 논쟁에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사회주의자의 대중관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회주의가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임을 이해하는 사회주의자는 대중을 신뢰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대중을 신뢰한다는 것은 대중의 현 상태를 긍정하는 대중추수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현 상태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언젠가는 권력을 움켜쥘, 그래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역사를 진보시킬 잠재력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대중의 잠재력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보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한다면 엘리트주의자일 것이고, 현 상태를 긍정하고 그에 타협한다면 대중추수주의자일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현실 앞에서, 더 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 더 신뢰를 주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하고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이러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사실 사회는 대의에 적합한 극히 많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지만, 우리에게는 이들을 모두 활용할 만한 능력이 없다. ...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많다. 사람은 많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도, 그리고 더 많은 다양한 사회 계층도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불만을 느끼며, 저항하고 싶어하고, 절대주의에 맞선 투쟁을 강력히 지원할 태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없고 정치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람에게, 아무리 사소한 역량을 지닌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을 제공하는 광범위한 동시에 통일적이고 정연한, 그러한 작업을 일정에 올릴 수 있는 뛰어난 조직가들이 없기 때문이다.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166)

 

레닌이 지도자, 정치 지도자를 강조하는 것은 대중이 깨이지 못했기에 깨우친 사회주의자들이 이끌어야 한다는 맥락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지도자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도록 사회주의자들이 노력할 책무가 있고, 현실의 대중이 깨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맥락이다. 결국 전위개념은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전위가 될 것이라는 믿음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그 자체가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본주의 체제의 선전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회주의에 거부감 및 적대감을 갖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본가계급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권력을 잡아 사회를 운영할 줄 아는 사람들로 변화할 것임을 진심으로 믿어야만 사회주의 운동의 가능성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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