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국제사회주의 전통'을 돌아보기

데이빗 렌턴(David Renton)

  


[오늘날 국제적 차원에서 혁명적 좌파는 여러 어려움들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성찰과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제사회주의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의 대표적 조직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분열과 위기는, 오늘날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좌파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던져 왔다. 아래 글은 2013년에 SWP 내부 논쟁 과정에서 나온 글로서, SWP레닌주의모델을 택하면서 벌어진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지도부가 전술적 변화의 판단을 독점하며 이견에 개방적이고 관대하지 않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 변화된 현실에 대한 새롭고 혁신적인 접근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번역에 수고해 준 이상수 동지에게 감사한다.]

 

출처: https://livesrunning.wordpress.com/2013/06/16/reflections-on-the-is-tradition/

 


 

최근에 당이 위기에 빠져있을 때 논쟁의 양편에 속해 있는 여러 동지들이 국제사회주의(IS) 전통에 대해 말해왔다. 마치 SWP의 전체 역사와 그 전신들이 이론과 실천적 정치 모두에서 완전히 일치된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였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당이 급격한 방향 전환과 회원들의 교체를 겪어 왔고, 따라서 지금의 SWP도 많은 점에서 20년 혹은 50년 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현재의 SWP20여 년 전의 전신과 비교해 봐도 잘 알 수 있다. 1993년에 SWP는 당원이 만 명이라고 주장했었다. 당시 SWP의 지회는 도시만이 아니라 개별 거리와 공공주택단지들에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SWP 당원들은 십여 개의 각기 다른 운동에서 핵심을 구성했다. 예컨대, 이들은 형사정의법(Criminal Justice Act: 경찰의 자의적 권한을 강화한 악법)과 영국국민당에 맞섰으며, 노동조합에서도 활동했고, 공공 건강보험을 요구했으며, 민영화에도 대항했다.

 

따라서 이 당은 규모가 크고 뿌리도 튼튼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당의 발간물들을 보면, 우리 당을 흔히 역사적으로 비교하면서 1930년대의 영국과 프랑스의 공산당을 언급했는데, 이 당들은 당시 이전의 빠른 성장으로 인해 이미 정점에 올라 규모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1993년 당시의 SWP는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 SWP의 간행물들은 둔감했던 것이다. 직업적인 저널리스트들은 많았지만 <소셜리스트 워커> 신문에 직접 글을 쓰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당시 SWP의 이론지인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은 주로 러시아에서 진행 중인 위기와 토니 블레어의 부상, 맑시즘이 어느 정도까지 결정론적인지, 그리고 발칸 전쟁을 둘러싼 서방의 책임 등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논문들은 국가자본주의와 개혁주의, 제국주의 같은 더 오랜 맑스주의적 개념을 입증하려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 맑스주의의 오래된 사상이 지닌 진실성을 입증하며, 그것을 확장하기보다는 새로운 상황에 맞춰 정교하게 다듬는데 강조점이 가 있었다. 따라서 당은 신자유주의세계화같은 추상적 관념 뒤에 실재하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실제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당의 규모 탓에 당에 내재한 더 깊은 약점이 가려졌다.

 

이번엔 3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SWP의 전신인 국제사회주의자들(International Socialists)을 보자. 1963년 당시의 IS200명 남짓한 작은 조직이었다. 하지만 이 조촐한 단체에는 많은 인재들로 가득했는데, 예컨대 저명한 노동조합 투사인 짐 히긴스(Jim Higgins)와 제프 칼슨(Geoff Carlsson), 언론인인 폴 풋(Paul Foot), 철학자 알라스데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저술가인 나이젤 해리스(Nigel Harris)와 마이크 키드론(Mike Kidron), 피터 세드윅(Peter Sedgwick), 그리고 더 젊은 활동가 세대로는 이언 버철(Ian Birchall)과 콜린 바커(Colin Barker),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이 있었다. 당은 젊고 열정적이었으며 무척이나 지적이었다.

 

당시 이 그룹은 지도자와 평회원 사이의 강한 신뢰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단체의 활동에 가능한 한 폭넓게 많은 회원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IS의 간행물들은 겸손하고 재치있는 자기 비판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비록 당의 작은 규모 탓에 이 당이 지닌 더 깊은 곳의 힘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바로 그 힘 덕분에 이어질 5년 동안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고, 그 이후에도 더 완만한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SWP가 지닌 핵심 사상의 상대적 연속성과 함께 역동적인 것, 그것을 행한 사람들, 그것이 놓였던 다소간 우호적이었던 환경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SWP 역사에서 벌어진 가장 날카로운 단절은 1975년에 발간된 토니 클리프의 책 <레닌> 1권으로 이어졌던 정치적 논쟁이었다. 여기서 클리프는 레닌을 당을 선두에서 이끌며 대부분의 경우 당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던 변화무쌍한 인물로 묘사했다. 레닌이 이런 저런 투표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클리프는 1917년 여름에 벌어진 볼세비키 당의 위기를 설명하면서 이 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역할도 강조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를 통해 레닌은 자신의 사상을 뿌리내릴 수 있었던 한 편, 더 고도의 전략적 감각을 가지고 191710월에 당이 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도록 지도했다는 것이다.

 

클리프의 책에서 핵심 키워드는 막대기 구부리기이다. 부연 설명하면, 이 책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마치 레닌이 일련의 몇 가지 부분적인 통찰 덕분에 성공했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를 둘러싼 진실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 어떤 역사가라도 10월 혁명 직전 몇 달간의 러시아를 지켜본다면, 당시 러시아에는 두 번째 혁명을 가능케 했던 요소와 아울러 그것을 저지하려는 과정이 공존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의 천재성은 전자의 요소들에 주목하며 그것을 강조한 것에 있다. 이를 통해 당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의 단결된 형태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진실했느냐는, 그것이 가져온 성공, , 191710월의 역사적인 승리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레닌주의 정당 형태를 모델로 채택하면서 IS의 정치적 문화는 개방적이고 관대했던 것에서 결과 지향적이고 반대의견에 관대하지 못한 쪽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피터 세드윅이 쓴 두 개의 논문이 이러한 변화 과정을 알려준다. 1959년 사회주의 평론에 발표한 기사인 왕위를 노리는 자에서 세드윅은 대중을 상대로 지도력을 선포하곤 했던 다른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의 문화를 다음과 같이 풍자하고 있다.

 

계급이 직면한 주된 문제가 지도력이 부족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회주의자가 바로 왕위를 노리는 자라 불릴 수 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노동 계급에 대한 지도력이라는 왕좌는 신뢰하기 어려운 종류의 쁘띠 부르주아 출신 강탈자가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명확함”, “과학적 사회주의”, “사회주의 휴머니즘혹은 그 밖에 뭐가 됐든, 이런 왕실의 태생적 특징을 갖춘 진짜 상속인이 그의 합법적인 지위를 차지하려 하면, 모두가 그 움직임에 동조할 것이다

이 때 왕위를 노리는 자가 벌이는 전형적인 행동은 (예를 들어, 코민테른 역사를 면밀히 조사한다든가, 아니면, 그럴듯한 추문을 유포하는 등의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자격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특히 그 자신과 키어 하디, 윌리엄 모리스, 로자 룩셈부르크, 존 맥클린, 레온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 사이의 혈통적 연결을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이것을 피터 세드윅이 1976년에 데이브 위저리가 쓴 영국 좌파라는 글에 붙인 서문과 비교해보자.

 

지금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다수가 되어야 할 시대다. 예컨대, 각 공장과 작업장, 그리고 사회-경제적 조직의 말단에까지 우리는 다수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사회주의 간부들은 자신의 지지자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야 한다. 최대로 앞서가도 두 세 걸음 정도다. 그리고 연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다음 고리라고 여겨지는 부분에서 슬로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이 다수가 되는 시대에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실제 풀뿌리 수준에서 벌이는 대중적인 활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최우선적으로 쏟아 부어야 한다.”

 

이걸 보면 피터 세드윅이 과거에 지닌 열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며, 스스로 지도를 자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것도 볼 수 있다(“잘하면 두 세 걸음”). 하지만 이 글에서 우리는 그의 언어가 이전에 비해 단조로워졌으며, 심지어 운동권 사투리(“간부들”...“일반 대중”...)들을 수용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이전의 세드윅이었다면 그가 가진 특유의 편집능력으로 삭제했을 것들 말이다.

 

IS의 향후 민주적 구조에 대해 클리프가 밑그림을 그린 제안이 담긴 최초의 문서는 19686월에 쓰여진 민주적 집중주의에 관한 메모였다. 연방주의 구조에서 집중주의 구조로의 전환에 대한 클리프의 구상에 따르면, 최근에 당이 보여준 모습과는 달리 전당대회(party conference)가 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으로 상정되어 있다.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정책(조직의 원칙과 전략)이 결정된다.”

 

, 그는 당내 분파, 즉 미묘하게 다른 정치적 강조점으로 구분되며 장기간 지속되는 집단들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집행부, 정치 위원회 등은 전당대회에서 개인 또는 집단 후보로 선출된다.” 이어서 그는 "분파 그룹이 있는 곳에서 각각의 그룹에 속한 대의원은 당 대회에서 그들이 차지한 몫에 비례한 만큼의 사람을 위원회에 선출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http://www.marxists.org/archive/cliff/works/1968/06/democent.htm

 

그렇다면 그는 레닌주의를 채택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 짜르가 지배하는 러시아의 비밀스런 조건에서 조직 활동을 해야했던 볼세비키 조직과 전후 영국의 합법적인 사회주의 조직 사이에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핵심적인 참여자들이 과거 다른 많은 면에서 옳았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그들의 생각은 존중받을 만하다. IS는 불법 조건이 낯설지 않았던 트로츠키주의 전통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클리프도 불법 조건에서 활동 했었고, 던컨 핼러스 같은 IS/SWP 내의 몇 명은 군대 내에서 비밀스런 방식으로 조직 활동을 벌였다.

 

좀 더 정확히는, 민주 집중주의에 관한 사상의 핵심은 그것이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 대부분의 회원들이 서로를 잘 아는 소규모 정당이라는 상황에서 자원을 집중하고 규율 있고 단결된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생각은 매력적이었다. 민주 집중적 방식으로 활동한다고 자임하는 다른 정당에서 겪은 부정적 경험들은 (많은 동지들은 이에 관한 극단적인 사례로 아마 게리 힐리가 이끌었던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떠올릴 것이다.) 폭력적인 불량배가 지닌 개인적 약점 탓인 것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었다. ‘민주 집중주의공식은 바로 그 특성상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질문을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 대체 얼마만큼의 민주주의와 얼마만큼의 집중주의가 필요한가?

 

클리프의 비평가들이 지적하듯이, 막대기 구부리기가 지닌 한 가지 문제점은 그것이 전술적 변화를 만드는 데 있어 당의 지도부에 독점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당원 다수의 역할은 방기하는 이론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공산당이 일반 대중도 없고 관료주의도 없는 역사상 첫 번째 당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는 옛 코민테른의 주장에서 나온 산물이다.

 

지금은 SWP가 거쳐 온 수많은 중요 단계에서 클리프 자신이 동지들의 동의를 얻어 행동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 나아가, 많은 경우에서 그의 실천적인 지도가 실제로 민주적 실천의 사례였다는 점을 보여줄 수도 있다. 영국 노동자 운동, 그리고 사회계약과 소득정책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썼던 동일한 기간을 살펴보면, 클리프는 당의 대다수를 동원하여 이런 책들을 쓰고 작업장 투사들을 인터뷰했으며, 책을 팔아 텍스트와 청중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책은 클리프의 것인만큼 당의 것이기도 했다. 사례가 이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리더십이 민주주의적이고 합의적인 방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전술이 충분한 숙고 없이 일시적 기분으로 채택된다면, 그 땐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말해 그것들이 실패한다면 어쩔 것인가?

 

따라서 지도부가 내린 결정에 내포한 각기 다른 질적 수준에 대한 고려 없이 단지 민주 집중주의의 형태에만 집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전술적 변화를 일으키는 핵심 역할을 지도부에게 일임하는 구조는 불가피하게 최고 지도부의 자질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머감각이나 전술 감각, 겸손함, 글을 잘 쓰고 깊이 생각하는 능력 같은 일반적 자질보다는 현재 목전에 닥친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당을 지도하고 행동을 취하며 성과를 가져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에 특별히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SWP 역사가 가진 한 가지 특징은 중요한 순간에 당이 지도를 꽤 잘 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60년과 1963년 사이, 또는 1968년과 1972년 사이의 시기가 그렇다. 그러나 이 당시는 수많은 파업과 항의 시위가 발생하던 때였던지라 당이 상대적으로 지도하기 쉬운 때이기도 했는데, 당에 가입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인 젊은 노동자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 어떤 맑스주의자가 설명을 한다 해도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다른 좌파들이 침체해있던 1990년에서 1995년에 특히 당은 현격한 성장을 경험했다. 당시는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적 차원에서도 많은 좌파적 전통들이 공산주의 몰락으로 흔들렸다. 이전에 아무리 날카롭게 동구권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하더라도, 당시에 회고적 볼세비즘(retrospective Brezhnevism)’이라고 불리는 경향이 존재했는데, 이것은 미국이 진정한 적이며 소련의 존재 덕분에 동구가 아니라 서구에서 반체제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이 가능했다는 정서였다. 반면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런 질환에서 대체로 자유로웠는데, 이는 크게 칭찬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다른 시기에는 SWP의 지도가 형편없었다. 예를 들어 1974~1975, 1995~1999, 2005~2009년 그리고 지난해가 바로 그랬다. 이 기간들은 각기 달랐는데, 첫째 시기에는 우경화한 영국 노동당 정부와 급격한 경기 침체, 탈공업화, 그리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진 사회 운동의 패배가 결합되었다. 따라서 몇몇 정당들에서 발생한 위기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다. 설사 그것이 꼭 히긴스가 벌인 분파 투쟁의 규모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1990년대 중반은 이보단 더 유리했었어야 했다. , 토니 블레어가 등장하면서 노동당이 대중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고 의회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항을 흡수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SWP는 활동과 회원수면에서 당 역사상 가장 급격한 침체를 겪었다.

 

왜 한 때는 자신 앞에 열려있는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데 있어 지도부가 성공적이었던 반면, 거의 같은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나중에는 실패하는 걸까? 나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대한 해답이 당이 지닌 사고의 개방성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고라는 것은 전술적 지도력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걸 의미한다. , 당 출판물들과 관련하여 활동하는 사람들의 범위와 장기적 전략 이론의 질적 수준, 그리고 다른 정당이 유사한 청중을 끌어당기기 전에 세계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포착하는 능력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SWP 역사에서 영웅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는 의심할 바 없이 토니 클리프가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정식화했을 때인데, 이 이론 덕분에 당은 회원들에게 러시아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완전히 적대적인 사회 형태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이 정책의 결과, SWP 당원들은 러시아 관료제가 겪은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무장할 수 있었다. 이는 단지 1989년과 1991년만이 아니라, 1956년과 196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가진 특성상, 그런 개방성은 해당 정치적 사건을 정의하는 와중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 시기에 모습을 드러낼 개연성이 크다. 또 다른 사례는 전후 호황이 지닌 장기적 특성에 대한 마이크 키드론의 분석을 들 수 있다. 그의 분석이 호황이라는 사실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러한 호황이 낳은 결과들보다는 먼저 이루어졌다. 25년 동안 지속된 풍요로 인해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다른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이 더는 타당성이 없게 되었다.

 

세 번째 사례는 클리프가 1970년대 후반에 영국의 좌파(후에는 전 세계 좌파로 확대)가 정치적 패배기로 들어서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이론으로 인해 그로부터 십 년 후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인두세 반대 캠페인 같이 명백한 기회의 순간에서조차 SWP가 수혜를 거둘 수 없기도 했지만, 대체로 당이 사태에 대한 기대를 낮추면서 앞으로 있을 진정한 손실(특히 포클랜드 전쟁과 1984~5년의 충격적인 광부파업 패배)에 대해 설명하는데도 역할을 했다.

 

나는 1883년 맑스의 죽음 이래로 두 가지 핵심적인 개념, 전통맑시즘과 이단적인맑시즘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좌파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그려보고자 했다. 전자의 전형적인 사례는 1차 세계대전 전의 독일 사회민주당이다. 이 당은 카우츠키에 의해 대중화된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정식화, 심지어 경직화된 이론 형태로 계승했다


이 때문에 모든 의문들은 이전에 이미 해결되었고, 정치적 실천 혹은 실천에 대한 반성보다는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읽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맑시즘을 순수한 의회 전략과 화해시켰던 탓에 1914년과 1918, 1919, 그리고 1923년의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자 이 당은 맑스주의가 가진 고유의 혁명적 내용을 복원할 의지도 능력도 상실하게 되었다.

 

이단적인 맑시즘은 여러 다른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조지 헤네인(Georges Henein)의 반전 정치와 데이비드 위저리(David Widgery)의 저널리즘, 공연 프로젝트인 Rock Against Racism의 행동주의, 에드워드 톰슨(Edward Thompson)의 역사 저술, 월터 로드니(Walter Rodney)의 반식민주의 활동, 그리고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그것이다. 나는 이런 에피소드들이 역사적인 요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와 뒤이은 스탈린주의의 쇠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둘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혁명적 정치를 발전시킬 시급한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 모델은 맑스주의가 전통과 이단의 두 요소 모두를 항상 흡수해왔다는 생각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단지 시기나 보다 높은 차원의 정치(high politics) 뿐만 아니라, 실천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전통 맑시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캠페인을 건설하고 조직하는 등, 주로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 이단적 맑스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러한 캠페인의 주변부에 있기 마련이다. , 이들은 운동 안에 존재하지만, 운동을 이끄는 지도부의 결정에 종종 비판적이며 대안적인 실천 전략을 주장한다. SWP의 역사에 이런 모델을 적용해본다면, 이 당은 이단적 맑스주의로부터 전통적 맑스주의로 가는 지속적인 장기적 추세 변동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한 쪽으로 쏠리는 것보다는 전통이단도 아닌 것이 더 낫다. 당이 이단적일수록 그만큼 노동조합과 평화운동에 잘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다. 당이 전통적이라면 노동조합 운동의 주류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은 덜 이단적이었던 덕분에 SWP2003~2005년에 벌어진 거대한 반전 운동을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SWP가 점점 더 규범적인 것에 의존하고 기본 가정에 도전하지 않으며, 새롭게 생각하기보다는 방어적으로생각해왔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일반적으로 덜 개방적인 당일수록 세계가 변화하는 순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이와 관련한 최근의 사례가 있다. , 1990년대 말에 새롭게 태동한 주요 정치운동으로서 1999년 런던의 J18 시위(G8 정상회담에 항의해 99618일에 벌인 시위)나 몇 달 후 시애틀에서 모습을 드러낸 반자본주의 운동이 그것이다


SWP는 새롭게 등장한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받아 안아 시애틀 시위에 화답했는데, 급기야 국제사회주의 경향에서 두 번째로 큰 자매단체인 미국 ISO가 자신과 똑같은 정도의 적극성을 가지고 시애틀 시위를 지지하지 않자 IS 경향에서 그들을 축출할 정도였다. 하지만 SWP가 내보인 이런 과잉열정은 불과 바로 몇 주 전 J18 시위에서 SWP가 내보였던 상대적 적대감과 모순된다. 당시 SWP 회원들은 J18에 개인으로서 참가했을 뿐, 전단을 배포하거나 기관지인 <사회주의 노동자>를 판매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닫힌 사고가 개입을 어렵게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늘 그런 건 아니다. 1999년 여름에 SWP가 굼떴던 모습을 보인 것과 2년 후인 9/11 직후와 대조해보라. 3일 만에 당은 이 사태를 둘러싼 우리의 대응방법을 논의하기 위한 내부 회합을 열었다. 9/11이 벌어지고 나서 불과 한 주 뒤에 런던의 프렌즈 미팅 하우스(Friends Meeting House)에서 열린 대규모 대중토론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처럼 당시 당이 신속히 행동한 덕분에 SWP 당원들은 전쟁저지연합을 발동할 수 있었고, 그 후엔 이 운동에서 연이어 주요한 지도적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용기 있게 행동한 덕분에 SWP는 스스로 운동의 바로 최전선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는 미국의 위협이 어느 정도로까지 확산될지, 그리고 그에 맞서 조직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 영국 내 최초의 조직화된 그룹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혹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도 그러한 그룹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이러한 사고를 당이 수많은 거대 정치쟁점을 기꺼이 제기하지 않으려는 것과 비교해볼 수 있다. 예컨대, 세계화, 비공식 노동, 생산이 이전보다 덜 중요한 것처럼 보여지는 경제에서 노동계급이 가지는 역할 같은 것들 말이다. 이론지인 국제사회주의 잡지의 논문들은 반응도 굼떴고, 응답할 때조차 이런 과정들은 순전히 과장되어 있으며, 그 사회적 중요성도 무시해도 될 정도일 뿐이라고만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당에는 기묘하고 양립 불가능한 입장이 등장했다.

 

크리스 하먼은 ISJ 독자들에게 세계화는 대단히 과장되었고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중 다수가 자본주의가 아니라 세계화를 반대하며 참여한 반자본주의 운동에 SWP가 개입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반세계화였고 우리는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는 노동운동과 반파시즘 정치학 등등에 내재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반영하는 듯이 우리가 하나의 입장에서 다른 입장으로 지적인 갈지자 행보를 해왔다는 뜻이다.

 

SWP 역사를 이해하려면 특별히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라는 사상이 끼친 결과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언 버철이 쓴 전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흔히 1948년에 토니 클리프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이론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것처럼 알려졌다. 이 이론에서 클리프는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다. 클리프의 이론은 한편에선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이 사회들은 사회주의자가 방어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 이론은 분석적인 것이기도 했는데, 러시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론들(전체주의, 새로운 계급 이론, 관료적 집산주의)과 달리 클리프의 주장은 러시아를 경제적·사회적 분석에 기초해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서방의 지배자와 똑같고, 러시아의 노동자들도 또한 서방 노동자들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클리프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러시아의 폭정은 무한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십중팔구 내부에서 전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리프가 이 이론을 발명했다는 주장과 달리, 사실 이 사상은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 무정부주의 비평가들이 이미 소연방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바 있었고, 일부 의회주의 좌파 정당들과 연계를 가진 몇몇 사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도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예컨대, 프랑스의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Socialism ou Barbarie)’그룹과 미국의 C.L.R 제임스(C.L.R James), 라야 두나예프스카야(Raya Dunayevskaya)가 그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 반대파 그룹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이 사상을 둘러싸고 토론을 벌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클리프가 이 용어를 사용한 방식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 C.L.R 제임스의 사고 방식이나 유럽 트로츠키주의의 공식 모임들이 사용한 것과는 상이했다. , 클리프는 국가자본주를 러시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헝가리, 폴란드 등등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 분석했던 것이다. 국가자본주의라는 생각은 소연방에 대한 초기의 정식화를 비판하기 위해 등장한 것인데, 그 이론에서는 러시아가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클리프의 주장에 따르면, 이같은 이론을 동구권에 적용할 경우, 이 이론이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루마니아와 알바니아 어디에서 노동자 혁명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러시아와 그 위성국들을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비교해보면 즉각적인 의문이 떠오른다. , 이 국가들은 서로 어느 정도나 비슷한가? 지도부 수준이나 그 형태에서 이 국가들은 단지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러시아에 1917년 노동자들의 승리로 인해 거둔 중요한 유산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가? 클리프의 애초의 분석에서는, 이 문제를 혁명이 있었던 곳과 없었던 곳의 국가자본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다지 대단치 않은 작은 차이인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농의 희생으로 도시화와 산업화를 강조했던 성장 모델에 이끌려 나중에 러시아를 모방하려 했던 사회들은 어떠한가? 중국은 명백한 국가자본주의이다. 모잠비크부터 이집트나 알제리에 이르기까지 다른 많은 제 3세계 사회도 유사해 보인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빗나간 영구 혁명이라는 생각과 연결되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식민지를 청산한 민족주의 혁명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틈을 비집고 등장한 사회는 또 다른 국가 자본주의 모델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국가자본주의가 노동자 혁명(과 뒤이은 패배로 만들어진) 사회와 탱크로 만들어진 사회, 도시화된 유럽 사회와 농업사회인 중국, 그리고 많은 제 3세계를 포함할 수 있다면, 개념이 단절 없이 계속 확장될 위험이 있다. 아니면 그 개념이 아직도 충분히 확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 다른 위험이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2013년 시각에서 20세기 중반을 뒤돌아보았을 때 정말로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국가가 급속한 정부 지출 증가를 가능케 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한 세대에 이르는 생산적 산업을 어느 정도나 사회의 군사화와 결합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케인즈주의, 군사적 케인즈주의, 파시즘과 전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세계를 상징하는데 쓰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초과 이윤을 향유하고 있으며, 식민지 영토와 귀족 전통을 가지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인 영국의 전시 정부조차 토지 국유화로 인한 이익과 손실을 둘러싸고 차분히 앉아 이성적으로 토론할 수 있었다. 기업들도 비슷한 과정의 주의 깊은 계획을 시도했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는 특정한 형태의 생산과 특정 규모의 기업에 투자하는 데 강력한 인센티브가 있었던 시대를 의미했다.

 

군수 산업은 대량 생산을 필요로 했고, 기술 발전은 아직 부분적이었으며 소형화로 인한 생산절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들이 상당한 정치적 잠재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이와 같은 이유 탓에 국가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강하게 이루어지는 경향이 동반되었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 사회는 흔히 독재 형태를 띠었다. 이들 사회가 민주화되었을 때 노동자들이 가진 경제적 힘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 모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노동 해방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맑스가 예측한 대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예외적인 모순이 있었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소비에트형 사회들에 맞섰다는 것이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SWP는 이런 모순의 양 측면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 중앙 집중화된 생산으로 향하는 경향과 1917년 혁명의 유산을 배반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말이다.

 

둘째,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1989년 이래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많은 점에서 달라졌기 때문이다. 국가자본주의 시대는 사적 자본주의 가운데 하나의 형태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이 추세는 최소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소련의 붕괴로 이어진 사건들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 결과, 거대한 규모의 군수 산업들은 그보다 작은 규모의 컴퓨터화된 산업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관리되던 고용은 훨씬 더 많은 수의 실업이나 불완전 취업, 그리고 임시 고용으로 대체되었다. 덧붙여, 억압이 흔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던 체제가 이제는 경제적인 억압이 전형적인 체제로 바뀌었다.

 

,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초과 노동을 해야 하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학습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억압한다. 이 시기에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부자들이 펼친 공세로 인해 부가 상향 이동했다. 또 이전 시대에 거둔 핵심적인 사회적 성과들이 민영화로 대체되었는데, 그 결과 의료체계와 사회 서비스, 그리고 주거체계가 민영화되었다. 공적 영역은 최소한으로 삭감되었다. 이윤을 위해 투자를 줄이고 대규모 산업은 폐쇄되었으며, 자회사들은 매각되었다. 그리고 생산 단위의 수준은 이전보다 더 줄었다.

 

이제까지는 차이를 강조했지만 당연히 현재 세계 체제와 20년 전 사이에는 주요한 공통점도 있다. 결국 둘 모두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자들과 그들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생산관계에 자신의 기초를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 1989년 이래로 맑스주의자들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들이 지닌 힘이 감소해왔던 이유를 새롭게 설명해야할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는 점 말이다.

 

, 이것은 부분적 손실에 불과할까? 아니면 중대한 패배일까? 현재 희망적인 비전을 가리키는 징조는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한 올바른 답변은 전술적이기보다는 전략적이어야 한다. , 그동안 무엇이 변해왔으며,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설명은 한 권의 책이나 문건, 혹은 어떤 정당이나 신문에서만 나올 순 없다.

 

우리 당이 지닌 사상은 시대를 초월한 연속성을 강조해 온 경향이 있고, 유연 노동과 다중 혹은 신빈곤 이론, 그리고 새로운 혁명 계급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 등 부분적인 성격의 수많은 논의들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우리 동지들이 다음과 같이 말해왔다. ,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이전과 정확히 똑같은 체제라고 말이다.

 

따라서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맑스주의 정설을 방어하겠다는 과제 탓에 열린 사고에서 폐쇄된 사고로 가는 일탈이 벌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상을 새롭게 하는 것을 포기한 맑스주의 정당은 자신의 미래에 더 한층의 위기를 축적할 뿐이다


(기사 등록 20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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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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