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세계의 노동자들과 투쟁의 미래

비버리 실버(Beverly J. Silver)

번역: 김민재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16/09/workers-of-the-world/

 

1920년대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는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 이유가 별로 없었다. 전쟁 이후의 소요 가운데에서 치솟았던 노동조합 조직률은 절정에 다다른 후 급락했다. 논평가들은, 기술적 그리고 문화적 변화로 인해 노동운동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노동자들은 냉담해졌다고 요란을 떨었다.

 

젊은 조합원들은 특히 노동조합을 시대에 뒤쳐졌다고 보고 있다.” 한 노동조합 관료는 1920년대 중반에 이렇게 한탄했다. 그러나 10년 후 나라 전체에 걸쳐 생산을 봉쇄하는 파업이 벌어졌고, 노동조합 조직률이 급등했다. 오래동안 노동운동이 침체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곧 비슷한 고양이 가능할 것인가?

 

저명한 노동문제 연구자 비버리 실버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사회학부의 학과장인 실버는 평생 동안 노동자들의 입장을 급진적으로 대변해 왔다. <노동의 힘(Forces of Labor)>을 포함한 그의 혁신적인 책들은 노동, 발전, 사회갈등, 그리고 전쟁이라는 심오한 쟁점들을 다룬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노동의 과거가 전지구적 노동계급 투쟁의 현재(그리고 미래)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지 설명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과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이 엄청나게 재구조화되었습니다. 그러한 재구조화 과정의 대략적인 윤곽은 어떻게 되고 그것을 추동하는 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생산 조직을 그리고 자본과 노동 간 힘의 균형을 변혁시킵니다. 즉 노동계급을 재구조화하고, 새롭게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가 보다 장기적인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중반, 1930, 40, 50년대로 돌아가 보면 이해가 됩니다. 이 시기는 미국에서, 가장 전형적으로는 자동차 산업에서 (산업화와 무역에 핵심적인 광업, 에너지, 교통 등의 부문에서도) 매우 강력한 대량생산 노동계급의 출현을 우리가 처음으로 목격하던 때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거의 당장 자본은 생산 조직, 노동 과정, 노동 공급의 원천, 그리고 생산의 지리적 배치를 변경하면서 재구조화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 재구조화는 상당 부분 제조업과 광업, 물류와 교통 부문에서의 강력한 노동운동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여기서 데이비드 하비의 공간적 조정’(spatial fix) 개념의 확장된 버전이 이러한 재구조화를 이해하는 데 유용합니다. 자본은 강력한 노동운동과 노동이 수익성에 드리운 위협을 일련의 조정들을 시행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기업들은 보다 임금이 낮은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공간적 조정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기술적 조정”(자동화를 가속화함으로써 노동자들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기)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윤을 위해, 우리가 금융적 조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자본을 무역과 생산으로부터 빼내서 금융과 투기에 투입하는 것)을 시행해 왔습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대량생산 노동계급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자본이 금융과 투기로 이렇게 이동하는 것의 시작은 이미 1970년대부터 나타났지만, 클린턴 정부 시기 글래스-스티걸 법안(Glass-Steagall Act: 역자 - 상업은행은 여·수신 업무만 하고, 투자은행은 증권 업무만 하도록 업무를 분리하는 법)의 폐지에 뒤이어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니까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에서 조직노동의 힘의 갑작스러운 붕괴처럼 보인 현상은 사실 192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이러한 여러 전선에서의 수십 년 간의 재구조화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물론 동전의 뒷면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본가계급의 이러한 조정은 자리를 잡고 있던 대량생산 노동계급을 파괴했지만 동시에 미국과 다른 곳에 새로운 노동계급을 생겨나게 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계급들은 오늘날 세계의 여러 곳에서 투쟁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노동조합이나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같은 전통적 형태의 노동계급 조직이 심각한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본은 어떻게 해서 이런 노동계급 이해관계의 조직된 표현을 잠식하고 길들이는 데 성공했나요?

 

역사 속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고조기를, 특히 사회주의 정당 및 노동계급 정당과 연결된 좌파 운동과 관련된 그런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이런 운동의 급진적 잠재력을 잠식하기 위해 되풀이되는 일련의 전략들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런 전략들은 재구조화, 포섭, 그리고 탄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서 언급한 재구조화나 조정의 유형들(지리적 재배치, 기술적 변화, 금융화)은 분명 이런 운동들을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노동조합과 노동계급 정당들에 대한 포섭(그들을 전국민적 헤게모니 프로젝트와 사회적 협약 내부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시키는 것)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탄압도 이 혼합적 전략의 지속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미국을 사례로 들자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십 년간 매카시즘(McCarthyism) 공격과 노동조합으로부터 좌파 및 공산주의 투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블랙팬더 당’(the Black Panther Party), ‘닷지(크라이슬러의 주요 사업부)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the Dodge Revolutionary Union Movement)과 같은 흑인 노동자들의 강력한 공장 및 지역 사회 기반 운동들이 철저한 탄압으로 인해 억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지역 경찰력의 군사화와 끊나지 않는 테러와의 전쟁이 이주노동자 및 흑인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적대적인 환경을 창출하는 가운데 강압은 여전히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큰 논쟁들 중 하나는 전지구적 노동계급을 형성하는 특징적인 동학이 착취(노동자들이 생산의 장소에서 쥐어짜는 것)인지 아니면 배제(노동자들을 안정적인 임금노동에서 근본적으로 배제하는 것)인지 여부입니다. 이 논쟁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저는 둘 다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생산의 장소에서의 착취에 맞선 투쟁의 변하지 않는 중요성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분명히 오류입니다. 실제로 공간적 조정 전략의 한 가지 결과는 자본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노동계급과 노동-자본 모순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산의 장소에서의 착취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자본의 전지구적 이동을 따라다녀 왔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노동자 투쟁의 물결을 통해 이 동학이 최근에 발현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저 저임금 지역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만으로는 노동 통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이 기업들에게 명확해지자, 자본은 자동화와 금융화에 더 강하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자동화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최근에 빠른 속도로 임금노동자들을 생산으로부터 추방하며 배제 동학의 가시성을 증대시켜 왔습니다. 최근의 확연한 사례는 폭스콘(FoxConn)이 어마어마한 수의 로봇들을 도입하겠다는 위협을 중국 공장에서 실제 실행에 옮겼다는 소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잉여자본이 금융과 투기로 이동하는 것 역시 배제가 점점 더 현저히 드러나는 데 주요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습니다. 금융(특히 무역과 생산에 대한 부속물이 아닌 금융적 활동들)은 임금노동을 상대적으로 적게 흡수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금융이 새로운 부의 창출을 통해서보다는 투기를 통한 부의 역진적 분배로부터 주로 이윤을 이끌어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점거하라’(Occupy) 운동에서 계급 불평등의 끔찍한 수준과 금융화 사이의 연결고리가 지적된 것입니다.

 

자동화와 금융화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기존에 자리 잡은 일자리를 없애는, 자본주의의 장기적 경향의 가속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항상 강탈이 임금노동의 흡수를 앞서는 경향이 있었던,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밖에 팔 것이 점점 없어지지만 그것을 실제로 팔 가능성 역시 거의 없는 남반구의 많은 부분에서 지배적 경향이었습니다.

 

이 경향은 전혀 새롭지는 않지만,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부정적 효과가 (그저 제3세계뿐만 아니라) 중심부 국가에서도 체감되고 있다는 사실들이 왜 배제 동학이 지금의 논쟁에서 표면화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같은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배제와 착취를 분리된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긴 한가요?

 

글쎄요, 맑스는 분명 그것들을 분리된 현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본론> 1권에서 그는 자본의 축적이 과잉인구의 축적과 발맞추어 진행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부는 착취를 통해 생산되지만 동시에 노동계급의 상당 부분이 배제되고, 자본의 필요라는 관점에선 불필요해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20세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배제 과정이 가장 첨예하게 느껴지는 곳의 지리적 배치는 불균등했습니다. 실제로 최근까지 자본이 중심부 국가들 내에서 정당성을 유지한 방법은 배제 과정의 무게를 제3세계와 중심부 노동계급의 주변화된 부분에 떠넘기는 것을 통해서였습니다.

 

세계 노동계급은 분열되었고 그 경계선은 상당 부분 시민권, 인종, 민족성, 그리고 젠더에 의해 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런 경계선들은 여전히 꽤 확연합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배제 과정의 무게는 중심부 국가에서 과거보다 더 강하게 체감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정치적 함의가 있습니다.

 

쓰신 책에서 노동자들과 노동계급의 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노동자의 힘의 서로 다른 원천들을 구분하셨는데요. 그것에 대해 더 얘기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주요한 구별은 구조적 힘과 연합적 힘 사이의 구별입니다. 연합적 힘은 노동조합과 정당 조직을 통해 성과를 쟁취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구조적 힘은 생산 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의 전략적 위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노동조합 조직이 없어도 행사될 수 있고 종종 그렇게 행사되어 왔던 힘입니다.

 

그런 구별을 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유용한가요?

 

, 구조적 힘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구조적 힘에는 주로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작업장에서의 협상력과 시장에서의 협상력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시장에서의 협상력에 대해 생각하며 노동자들의 힘을 더 넓게 이해합니다. 실업률이 높으면 시장에서의 협상력이 낮고, 그 역도 또한 같다는 것입니다. 작업장에서의 협상력(상호 연결된 생산 과정을 지역적 조업중단을 통해 멈출 수 있는 능력)은 덜 강조되지만, 오늘날 노동자들의 힘의 원천을 이해하는 데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한 것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역사적 경향을 보면 생산의 장소에서 노동자들의 힘은,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의심의 여지없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놀랍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제조업에서 적기생산(just-in-time) 방식의 확산에서 이 증대된 작업장 협상력은 명확히 드러납니다. 보다 전통적인 대량생산 방식에서와 달리, 생산과정에서 그 어떤 완충장치도, 재고도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컨대 자동차 산업에서 적기생산의 확산과 함께,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노동자들이, 그저 전략적인 결절점(심지어 예컨대 자동차 창문 와이퍼 부품 제조)에서 생산을 멈추기만 해도 기업체 전체를 멈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자동차 산업에서 최근에 이런 사례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물류(교통과 통신) 노동자들은 그 부문에서의 조업중단이 가져올 연쇄적인 경제적 파급효과에 연결된 주요하고 점점 더 커지는 작업장 협상력을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 세계화 과정을 노동의 약화 과정으로 여기는 보편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업 중단의 파급효과가 낳는 잠재적 지리적 범위는 세계화와 함께 증대했습니다.

 

연합적 힘은 어떤가요?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정당이 없다면 그것은 그들의 구조적 협상력을 저하시키지 않나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사례를 보세요. 자율적인 노동조합은 불법이지만, 최근에 최저임금법, 노동법, 그리고 노동조건에서 몇몇 중요한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시장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작업장이라는 두 군데 모두에서 노동자들의 구조적 힘을 이용한 풀뿌리 저항의 성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또한 노동조합의 애매한 구조적 위치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노동조합이 너무 성공해서 기층에 너무 많은 것을 가져다주면, 자본은 극도로 적대적이 되어서 그들을 다루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보다 억압적 전략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자본은 가끔 노동조합과 협상을 하지만, 이는 오로지 노동조합이 노동의 전투성을 제한하고 노동통제를 보장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는 데 동의할 때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은 기층에 뭔가를 가져다 줘야 하고, 그러면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떤 상황이어야, 노동조합과 자본가들 사이의 이러한 모순적 역학이 노동자들에게 이로울 수 있을까요?

 

투쟁이 생산의 지점으로부터 거리나 지역공동체로 옮겨 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는 세계 노동계급 형성에서의 착취와 배제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체로서의 노동계급을 보면, 저는 투쟁이 대부분 거리로 옮겨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일상적 기업 활동에 심대하게 지장을 주는 그런 투쟁에 대해서라면 말입니다.

 

생산 지점에서의 투쟁은 여전히 세계 노동자 투쟁 전반에 있어서 중요한 구성요소입니다. 동시에 배제된 이들(실업자들과 약한 구조적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작업장에서의 직접행동보다는 거리에서의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착취와 배제가 동시에 존재하듯이, 작업장에서의 투쟁과 거리에서의 투쟁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적 자본주의의 특징이었습니다. 가끔 이 두 유형의 투쟁은 서로가 연대하면서 교차되지 않기도 합니다. 특히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의 존재가 주로 배제의 역학 또는 주로 착취의 역학에 의해 형성되는지의 정도가, 일국 내에서나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서로 다르고 그에 따라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의 주요한 성공적 물결들을 떠올려 본다면, 그것들은 두 가지 유형의 투쟁 모두를 명시적 혹은 암묵적 연대 속에 결합시킨 투쟁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미국 플린트 공장 점거와 그에 이어진 1936년과 1937년 파업 물결(생산의 지점에서의 노동자들의 힘을 지렛대로 사용한 데 근본적인 근거를 둔 운동)조차도 거리에서 실업 상태에 있던 노동자들과 지역사회 연대의 동시적 투쟁에 의해 더 강력해진 것입니다.

 

혹은 2011년 이집트와 같이 전적으로 거리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여겨졌던 최근의 대중운동을 떠올려 보세요. 무바라크가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수에즈 운하 노동자들이 거리에서의 대중운동을 지지하는 파업을 통해 자신들의 작업장 협상력을 지렛대로 이용했을 때였습니다. 타흐리르 광장 점거를 시작한 46일 청년운동이 2008년에 산업 노동자들의 중요한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라는 점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좌파가 직면한 근본적이면서 새롭지 않은 문제는, 작업장 협상력과 거리의 힘을 결합시키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 실업자 등 배제된 이들과 착취당하는 임금노동자 사이의 연결 매듭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배제된 이들과 착취당하는 이들이 같은 가구 또는 같은 지역공동체의 구성원일 때 확실히 더 쉬워집니다.

 

미국에서 우리는 2015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운동을 지지하며 캘리포니아 항만노동자들이 했던 파업에서,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지역공동체 투쟁과 작업장 투쟁이 교차되는 방식에서 이런 교차의 어렴풋한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노동자 조직과 실천 행동의 주요 초점이 서비스 부문의 저임금 노동자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이 지점이 우리가 에너지를 쏟아야 할 지점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다른 산업이나 다른 부문의 다른 유형의 노동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할까요?

 

그런 노동자들에게 크게 강조점을 두는 것은 오류가 아닙니다. 인구의 대다수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그런 노동자들의 상황을 개선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내재된 의심은 부분적으로, 이 전략이 이제까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데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작업장 협상력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여기서 유용합니다. 예컨대 월마트에서는 소매 쪽을 공략하는 것은 별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유통 쪽을 공략해야 합니다.

 

패스트푸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통 쪽을 공략하면 작업장 협상력을 지렛대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리에 국한된 투쟁밖에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또한 강력한 작업장 협상력을 가진 노동자들이 그 힘을 어떻게, 언제, 보다 넓은 변혁적 목표를 지지하기 위해 행사할 수 있을지의 문제로 다시 귀결됩니다.

 

지오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와 함께, 선생님께서는 미국에서의 노동운동의 궤적과 미국 전체의 다른 상황들이 세계정치, 전쟁, 그리고 국제적 갈등 속에서의 더 넓은 운동과의 관계에 의해 심대하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신 바 있습니다. 최근의 지정학적 전환이 미국 내 노동의 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나요?

 

이는 매우 크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노동운동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그리고 앞으로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의 전망과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정학적 측면도, 더 중요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동등하게 중요합니다.

 

15년 전, 9.11 테러 직전에 미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을 강력한 진원지로 하는 노동자 투쟁의 대중적 고조가 목전에 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주요한 파업이 계획되고 있거나 진전되는 중이었는데, 그러다가 동역학이 전환되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그저 노동조합에 대한 고용주의 적대적 태도의 측면, 작업장에서뿐만 아니라 더 넓게, 상시적 전쟁 상황이 조직화의 전망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현상 유지를 위한 강압과 탄압을 중대하게 강화시켰습니다.

 

강압과 탄압은 자본주의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자들, 노동운동, 그리고 지정학에 있어서 오늘날 달라진 점은 어떤 것이 있나요?

 

글쎄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시적 전쟁 상황을 미국의 세계적 권력과 헤게모니의 쇠퇴라는 더 넓은 위기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전쟁을 하기 위해 국가가 노동계급에 의존하는 것 사이의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관계를 보아야 합니다. 후자를 먼저 논의해 봅시다.

 

잘 알려져 있지만 널리 논의되지는 않는, 노동의 힘(혹은 최소한 미국과 서유럽에서의, 어느 정도는 세계적인 노동조합의 제도화와 민주적 권리의 심화)의 근원은 전쟁 수단의 산업화와 대규모 징집을 포함한, 20세기 전쟁의 특정한 성격이었습니다.

 

이런 유형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중심부의 권력, 제국주의 권력은 노동계급의 협조를 필요로 했습니다.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로서 그리고 또한 공장을 계속 돌리는 노동자로서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기부터 군화까지 모든 것을 산업적 생산에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양차 세계대전에서의 상식은 어느 쪽이든 공장을 계속 돌리는 쪽이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들의 협조는 결정적인 요소였고, 전쟁의 발발과 국내적 저항 사이의 관계는 명백했습니다. 이제까지 20세기에 세계적 노동자 투쟁이 가장 높게 고조되었던 두 번의 정점은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 직후 시기였습니다. 노동자 투쟁의 저점은 바로 전쟁 중간에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 제2차 대전과 한국전쟁의 여파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블랙 파워(Black Power) 운동의 최고점이 베트남 전쟁 진행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국가는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적 정서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협조를 보장하고자 했지만 이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손에 잡힐 정도로 진전되지 않고는 지속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지국가의 확장은 20세기 전쟁국가의 확장과 일맥상통했던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노동계급 민족주의는 오직 국가가 전쟁에서 이기면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권리가 확장될 것임을 보여 줄 때에만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외견상으론 상시적인 전쟁 상태의 맥락에서도 여전히 그렇다고 보시나요?

 

전쟁의 본질은 오늘날 많은 점에서 변화했습니다. 자본이 노동의 힘에 대항하여 생산을 재조직했듯이, 국가도 전쟁을 일으킬 때 노동자들과 시민들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기 위해서 군대를 재구조화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맞선 대중운동, 그리고 베트남 전선에서 군인들이 싸우러 나가기를 거부했던 것이 전쟁 수행의 조직과 본질의 근본적 재구조화를 촉발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재구조화의 결과는 대량 징집의 종언과 전쟁 수행의 증대되는 자동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드론과 다른 하이테크 무기에 대한 의존성이 커지면서, 미국 군인들은 직접적 위험으로부터 차단되고 있습니다.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훨씬 그렇죠.

 

이는 20세기에 노동운동과 전쟁 수행을 연결했던 그런 상황과는 다른 것입니다. 21세기에는 복지국가와 전쟁국가가 분리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조건들 하에서 노동계급 국제주의가 노동계급 민족주의를 이길 수 있을지 여부는 결정적이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저는 이 논의에서 미국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서 본질적 변화는 더 광범위한 파급 효과들을 일으켰습니다. 20세기 중반에는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전쟁 동원을 위한 군사력·자원의 공급자로서 제국의 전쟁 과정에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역시 유사하게, 노동계급의 강화와 전투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은 미국의 전쟁 수행이 하이테크 무기로 벌어지는 남반구 벨트에 위치한 모든 나라에서 잇따라 노동계급의 대량 해체와 파괴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현재의 이민 위기, 그 뿌리와 영향 모두가 이 새로운 전쟁의 시대로 인한, 매우 불편한 역류인 것입니다.

 

이전 시기에는 고조되는 전투성과 조직화의 물결이 새롭고 강력한 조직 형태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19세기에는 직능별 노동조합이었고, 20세기에는 산업별 노동조합이었습니다. 이런 형태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인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것들을 대체하게 될까요?

 

그것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은 확실히 아닙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오늘날 (신규 조합원 모집과 전투성의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노동조합들 중 몇몇은 옛 AFL, 수공업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노동조합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직적으로 통합된 기업들과 연결된 산업별 조합들보다는 오히려 옛날의 조직화 방식의 요소들이 오늘날의 작업장의 수평적 성격에 더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산업별 조합의 죽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전적인 CIO 노동조합에서 특징적이었던 성공의 유형(플린트 엔진 공장에서의 연좌 파업과 그 이후의 파업들)은 생산의 지점에서 노동자들의 전략적 협상력에 의존했습니다. 저는 이런 성공에서 여전히 배울 교훈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이 형태들 중 어떤 것도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미 언급했듯이 노동조합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효과적일 경우 자본과 국가가 그들과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노동조합들이 노동자들의 삶과 생계에 있어서 진지한 변혁을 가져오지 못하는 한(그리고 이는 많이 일어났던 일인데), 그들은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신뢰와 정당성을 잃어버립니다. 저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 모순의 양면을 둘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조합은 해결책의 일부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맑스가 옹호했던 주장들 중 하나는 노동조합이 하나의 조직 속에서 실업자들과 연결을 맺도록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같은 곳에서 그것이 선택지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분명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노동운동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의 관점에서 <공산당 선언>에서 이야기하던 바였죠.

 

이는 또한 착취 과정과 배제 과정 사이의 관계와 생산의 지점에서의 투쟁과 거리에서의 투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도 다시금 이어집니다.

 

맑스의 지시를 따르고자 하는 노동조합에게, 이는 안정적 임금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실업자 투쟁에 함께하고, 그로 인해 불안정하게 고용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혹은 그 역으로 되는 조건에 대해 전략적으로 생각하며 급진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에서 노동이 다시 활성화될 전망은 무엇일까요? 근미래에 전투성과 조직화가 고조될 것이라고 예측하시나요?

 

한편으로는, 이론적인 근거에서만 보면 미국에서, 미국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노동의 전투성의 고조가 예측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경험적 차원에서는 2008년 이래로 우리는 계급에 기반을 둔 사회적 투쟁에 있어서 세계적 고조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더 장기적인 활성화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평가는 지배적인 정서와 상충되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던 것과 오늘날의 비관주의를 비교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그때 그들은 수공업 노동자들이 대량생산의 확산으로 인해 약화되는 방식에 주목했고, 노동운동이 치명적으로 약해졌으며 영구적으로 죽었다고 주장했습니다. 1930년대 중반의 노동자 투쟁의 대중적 물결의 바로 전야까지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수공업 조합들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새로운 노동계급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20세기 대량생산 노동계급이 약화되고 있지만 제조업을 포함한 곳에서 또한 새로운 노동계급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계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제조업을 그냥 생각 속에서 지워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노동자 투쟁의 물결이 분출할 때마다, 노동계급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일 것이고, 전략과 동원 역시 다시금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지금 정도의 시기에는 누가 이 분출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것은 말하기 어렵습니다. 보다 명백한 것은 오늘날의 노동이 직면한 결정적 쟁점들이고, 이 쟁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변혁적인 다음 분출을 위해 요구되는 기층 대중과 지도력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자본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일자리들을 파괴하고 있는 상황에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중심부 국가들과 미국을 포함한 세계적 규모로 과잉인구의 확장을, 특히 맑스가 <자본론>에서 정체적 과잉인구(안정적인 임금노동으로 정말로 결코 통합되지 못할 사람들)라고 부른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파견 노동자, 시직 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 그리고 장기적 실업 상태에 놓인 사람, 이 집단 전체가 확장되고 있으며 우리를 빈곤 상태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에 대해 만들어 내고 있는 심각한 정당성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내에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경향이 전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 방향은 자본 자체로부터 나오는 무언가보다는 대중적 정치운동에서 나와야 합니다.

 

고려해야 할 다른 두 가지 중요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이윤율이 역사를 통틀어 노동의 재생산 비용뿐만 아니라 자연의 재생산 비용에 대한 외부화에 어느 정도 의존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외부화는 점점 더 존립 불가능하고 지속 불가능해지고 있지만, 자본 내부에는 이것의 방향을 돌릴 내재적인 경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자연을 공짜상품 취급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대량소비라는 약속에 대량생산을 묶는 전후 사회적 협약을 떠받치는 기둥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케인스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이른바 황금기가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위기를 확장적, 군국주의적 정책과 전쟁으로써 해결하는 자본주의 내부의 역사적 경향은 특히 미국의 헤게모니적 위기와 쇠퇴라는 현 시기에는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점입니다.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자원들을 빼앗고, 남중국해에서 항로를 놓고 싸우는 이런 격투는 인류 전체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재개된, 새로워진 노동자 국제주의가 다시 되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 나타나는 노동자 민족주의로 향하는 경향들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진지한 분석을 시작하고 끝내든 간에 지정학적 고려(즉 군국주의, 국내적 갈등, 그리고 노동운동 사이의 연결고리를 검토하는 것)는 필요합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오래된 질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에 더 유효합니다.

 

(기사 등록 20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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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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