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릭 마로(John Eric Marot)
[이 글에서 마로(Marot)는 SWP(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권위있는 지도자인 토니 클리프(Tony Cliff)의 분석이 지닌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트로츠키와 그가 이끌던 러시아 볼셰비키 당 내의 좌익반대파(Left Opposition)가 1920년대에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 건설’과 억압에 맞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저항했다는 대중적 신화를 무너뜨린다. 이 글의 필자인 존 에릭 마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며 현재는 한국의 계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서 이처럼 관련된 글을 지속적으로 다룰 계획이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분량상 이 글은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그 첫 번째이다.]
출처:
http://libcom.org/library/trotsky-left-opposition-rise-stalinism-theory-practice-john-eric-marot
이 글의 저자는 아나키스트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反전위주의자나 反국가주의자도 아니다. 그의 관점은 다당제 민주주의가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지켰을 것이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벌이는 투쟁에 지도력을 제공해 주었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그는 그들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그러한 발전과는 직접적으로 반대 방향에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글쓴이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정치적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원래의 이른바 ‘혁명적 볼셰비즘’이 추구한 목표들은 패배했다고 본다.(비록 그가 트로츠키와 스탈린 두 사람이 추구한 경제적, 정치적 강령들이 거의 동일했으며, 더 나아가 레닌의 ‘사회주의 건설’ 개념과도 일관성이 있었음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주장이 담고 있는 함의는 트로츠키만이 스탈린주의로부터 노동계급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볼셰비키 모델에는 문제가 없고 오직 그 결과에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글쓴이의 볼셰비키 개념은 “지도하는 자와 지도받는 자의 비대칭적 역할과 양 측에게 불균등하게 지워져 있는 정치적 책임의 무게”라든가, “트로츠키의 그릇된 행동방침 그 자체는 분명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을 저하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닥쳐올 위험을 앞둔 그들을 오도했다”와 같은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노동자들은 당 엘리트에 의해 계급의식을 주입받고, 의식성은 당내 분파 투쟁에서 그들이 누구의 편에 서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스스로 러시아 노동계급이 스탈린주의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트로츠키주의자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으며, 노동계급이 이 같은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자행된 착취와 억압, 그리고 잔혹함에 실제로 맞서면서 자신들의 의식성을 드러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트로츠키와 그가 이끌던 러시아 볼셰비키 당 내의 좌익반대파(Left Opposition)가 1920년대에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 건설’과 억압에 반대해 노동계급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저항했다는 대중적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에 있어서 유용하다. 그는 이 글을 통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경제적, 정치적 강령을 공유했으며,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노동계급에게 종속적 역할을 강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글머리
필자는 이 글에서 토니 클리프의 <트로츠키, 1923~1927: 부상하는 스탈린 관료주의와의 투쟁(Trotsky, 1923~1927: Fighting the Rising Stalinist Bureaucracy)>과 <트로츠키, 1927~1940: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밝게 빛난다(Trotsky, 1927~1940: The Darker the Night the Brighter the Star)>, 즉, 그가 쓴 트로츠키 전기의 3편과 4편에 각각 해당하는 책들에 대한 상세한 평가를 통해 좌익반대파가 지닌 정치적 성격과 역사적 중요성을 재평가하고자 한다.
이어질 지면에서 필자는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가 스탈린의 강제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정책들에 맞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저항했을 때, 이들이 노동자와 농민들을 지원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사실 좌익반대파의 정치적 강령과 세계관은 1927~33년이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오히려 새로운 계급사회가 ‘위로부터’ 형성되고 공고화되는데 객관적으로 일조했다.
좌익반대파가 수행한 역사적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틀렸다고 선언할 만큼 뻔뻔스럽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아마도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본능적으로 그런 주장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클리프 자신이 트로츠키의 생애와 정치에 대해 포괄적이고 면밀하게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중요한 사실을 인정했다.
즉, 좌익반대파 지도부내의 압도적 다수는 ‘스탈린의 집단화와 급속한 산업화 정책이 사회주의 정책이며, 그러한 정책에 현실적으로 맞설 대안은 없다’고 믿었다는 점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랬는데) 어떻게 이 같은 불편한 사실이, 이러한 결정적인 시점에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가 ‘부상하는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와 그들이 펼친 정책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는 견해와 조화될 수 있을까?
클리프는 좌익반대파가 스탈린에게 ‘굴복’한 반면, 트로츠키는 계속 투쟁을 이어나갔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모순을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트로츠키는 좌익반대파의 부상 이전에 이미 스탈린주의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고, 그들이 몰락한 이후에도 투쟁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의 세계관(트로츠키주의)이 좌익반대파보다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의 정치와 관점을 포괄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트로츠키는 1927~33년 시기와 그 전후에 생산력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그리고 레닌의 신경제정책 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을 확고하게 지속시키기 위해 노동자국가는 농민과 어떤 관계를 확립해야 하는가하는 질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많은 견해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혁명이 벌어지기 훨씬 이전에 트로츠키가 그의 연속혁명론을 발전시켰다는 점과 나치즘이 부상하던 때, 즉 좌익반대파가 존재하던 바로 그 때와 대략적으로 동시대였던 때에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의 초좌익적 정책을 비판했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다.
또, 좌익반대파가 스탈린 편으로 투항한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적용된 인민전선 전략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켰다는 점과 1938년에 제4인터내셔널을 설립함으로써 생의 마지막까지 스탈린에 대한 투쟁을 이어갔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사실이다. 하지만 클리프가 제시된 해당 기간의 전략적, 정치적 지향과 경제 발전의 문제에 있어서 트로츠키를 좌익반대파와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사실관계에 비추어 봤을 때 근거가 거의 없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정책과 관련하여 소련 내 좌익반대파가 취해야 할 전반적인 정치적 관점을 가장 명확하게 정식화한 당사자였으며, 그 지도부도 트로츠키를 최고 지도자(primus inter pares)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정책 전환 방법이 제 아무리 반민주적이고 강제적이었다 해도, 좌익반대파는 전반적으로 스탈린의 정책에 내포된 反쿨락, 反자본주의적 방향을 환영했다. 그럼에도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가 각자 갈라섰다는 클리프의 생각이 겉으로 보기에 그럴싸해보였던 데는, 좌익반대파가 부하린과 우익반대파에 맞서서 스탈린이 ‘좌익’으로 완전하게 선회하도록 밀어붙이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냐 같은 전술적 문제를 놓고 분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스탈린의 선회가 ‘좌익’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것이 사회주의 정치와 대체 어떤 관련이 있기나 한 건지와 같은 전략적 문제를 놓고 분열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좌익반대파 내에서 이 같은 전략적 논쟁이 일어났었다면 목적과 수단의 관계나 노동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진영들 사이에 원칙상의 불일치로 발전할 수 있는 어떤 기초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사회주의를 향한 길이, 심지어 그 여정의 시작부터 비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위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는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좌익반대파 내에서 실제로 이런 논쟁이 벌어졌다면, 필자는 클리프가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의 주장에 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클리프가 과연 그렇게 했을 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심스럽다. 왜 그럴까?
헌신적인 사회주의 투사이자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인 클리프는 사회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정치적 연결 관계를 한 번도 단절시킨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트로츠키 역시 그렇게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클리프에 따르면, ‘최후의 순간까지 [트로츠키의] 삶과 투쟁에서 중심적인 테마는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클리프에게는 실례이겠지만, 이 같은 그의 주장은 틀렸다. 문제가 되는 이 시기에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이 테마를 자신들의 정치에서 중심에 놓지 않았고, 그들의 전반적인 관점은 이러한 테마에 영향 받지도 않았다.
클리프의 주장과는 반대로,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는커녕, 스탈린주의자들이 나타나기도 오래 전, 그러니까 빠르면 1921년부터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노동계급의 민주적·자주적 조직을 공산당의 정치적 독재로 대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트로츠키와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스탈린 그리고 1920년대와 그 이후에 당을 이끌었던 다른 지도적 정치가들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1937년에 출간된 <배반당한 혁명>에서는 분명 과거 그가 주장했던 대리주의를 소리 소문 없이 폐기했다. 거기서 마침내 그는, 약간 주저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실현할 유일한 수단으로서 불가피하게 다당제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대리주의 정치가 그 사이에 얼마나 해악적이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오판했다.
트로츠키가 이론적으로는 당과 국가의 관료화를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클리프가 칭찬 일색의 전기를 쓰느라 보여주지 않은 것들이 있기에, 그 부분을 제시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필자에게 지워진 몫이 되었다. 즉, 트로츠키의 대리주의 정치가 어떻게 전반적인 차원에서 관료주의, 특히 스탈린주의의 승리에 실제로 부지불식간에 일조했는지 말이다.
그런 후, 필자는 트로츠키가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그의 사상에서 일관되게 노동자 민주주의를 필수적인 부분으로 통합하지 못한 탓에 치러야 했던 커다란 정치적 비용, 즉 클리프가 제대로 산출하지 않은 그 비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것이다.
다른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에 대해 이미 상세하고 길게 쓴 바 있다. 하지만 이 논문의 초점은 클리프에 맞추어져 있는데, 이는 오직 클리프만이 트로츠키의 대리주의 정치에 대해, 비록 몹시 불완전하긴 하지만, 지속적으로 비판을 수행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이후에 정교화와 수정, 교정을 거쳐 완성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와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 혹은 막스 샤흐트만(Max Shachtman)의 저작에서는 그런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브루에의 저작은 칭찬 일색의 전기이다. 그에 따르면, 그의 ‘오래된 스승’은 그 어떤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그러니 브루에는 그 어떤 모든 비판으로부터도 트로츠키를 변호한다. 이런 점은 상당 부분 만델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트로츠키의 정치에 대해 의심하고 유보하는 부분을 자기가 부차적 중요성만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들로 한정한다.
샤흐트만의 경우, 그는 언젠가 트로츠키가 다당제 정치를 요구하는데 실패한 탓에 스탈린에 맞선 그의 투쟁이 심각하게 저해됐다고 논평한 적은 있으나, 그 통찰을 끝까지 추적하지는 않았다. 샤흐트만은 스탈린이 ‘좌익’으로 선회하기 이전과 선회하던 시기에 대한 상세한 연구와 관련하여 트로츠키의 대리주의를 독립적 분석 대상으로 다룬 적이 한 번도 없다.
마지막으로 트로츠키의 생애와 사상을 추상적이고 칭찬 일색으로 다룬 도이처의 전기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스탈린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에 트로츠키가 저지른 실패에 대해 정치적으로 구체화된 논의를 하기 위한 기초로서 역할을 하기엔 부적절하다. 물론 부르주아 학자들이 트로츠키에 대해 쓴 글들도 많긴 하다. 다른 맥락과 목적에서는 그들도 보탬이 된다는 점을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 진영은 사회주의적 프로젝트를 일종의 유토피아 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둘러싼 그 어떤 진지한 논의도 그들로부터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실제로도 없다. 이들이 쓴 현존하는 것 가운데 수정과 교정, 정교화를 거쳐 완성할 만한 비판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자, 이러한 예비적 논의를 끝내고 이제는 클리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자.
당의 좌익, 중앙파, 그리고 우익에 대한 트로츠키의 사회학적 해석
<트로츠키, 1923~1027: 부상하는 스탈린 관료주의와의 투쟁>에서 클리프는 집권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관료화를 막고자 노력한 트로츠키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이 시기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그리고 스탈린 같은 저명한 당 지도자들이 트로츠키에 맞선 연합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트로츠키를 신속하게 패배시킨 이들 反트로츠키 삼두체제(troika)는 이후에 결국 사이가 틀어졌고, 그로인해 재차 세력 재편이 발생했다. 1925년 초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과 그의 새로운 동맹자인 부하린을 공격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926년 초에 이르렀을 때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반대파를 붕괴시켰다.
그러자 마침내 1926년 봄, 거의 18개월 동안 방관자적 위치에 있었던 트로츠키는 이제 조직적 측면에서는 만신창이 상태였던 지노비예프 반대파의 지도자들에 합류하여 부상 중인 스탈린 독재에 맞선 통합 반대파(United Opposition)를 형성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에 흔들리지 않고 1927년 말에 통합 반대파를 궤멸시켰고, 그 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의 마지막 잔존물마저 파괴했다.
한편 해외에서는 국제 노동계급 운동이 1923년 독일 혁명, 1926년 영국 총파업, 그리고 1925~7년 중국 혁명에서 연패를 겪었다.
트로츠키가 공산당의 상층에서 이 같은 사태 진행에 맞서 어떻게 투쟁을 전개했는지 이해하려면, 그가 싸우고자 했던 관료주의의 부상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 그리고 그의 분석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트로츠키가 선택했던 정치적 전략에 대한 평가를 핵심적으로 포함해야 한다.
트로츠키가 러시아 공산당과 제3인터내셔널이 ‘혁명의 목표들을 추구하기에는 이미 죽어 버렸다’는 것을 적기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클리프의 핵심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트로츠키 전기 서문에서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전반적인 입장과 함께 그것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인 평가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다.
트로츠키는 1920년대 [중반]이래로 집권당 내 분파적 분열이 그 바깥에 존재하는 계급들의 이해관계와 상호관련이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옹호하며, 민주적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지키는 데 객관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의 소유 말이다.
따라서 공산당 내에서 산업과 집단적 농업을 발전시키고자 하며 트로츠키가 ‘좌익’이라고 부른 분파가 ‘객관적으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자기 자신을 그 편으로 위치시켰다. 트로츠키가 사용하는 정치적 어휘에서 ‘우익’은 사적 개인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운영되는 경제를 조직하고자 하는 분파를 지칭했다.
부하린이 이끄는 이 진영은, 수백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의 소농들이 지닌 초기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와 이미 발전된 국외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압력을 받은 나머지, 자신은 설사 그 반대라고 맹세했을 지라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복원을 옹호하고 있었다.
부하린과 우익은 신경제정책(NEP)의 시장 메커니즘을 완전히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는 부유한 농민, 즉 쿨락들이 보다 가난한 이웃들을 희생시키고, 도시에 존재하는 맹아적 자본가들(proto-capitalist), 즉 네프맨들(Nepmen)에게 자본을 축적하도록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부자가 되’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장 과정이 표면상 친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부하린은 공산당이 정치를 독점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치에 대한 당의 독점은 트로츠키와 스탈린 역시 옹호한 것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 ‘중앙파’는 두 개의 대립하는 분파들 사이에서 흔들렸는데, 어떤 때는 비프롤레타리아 계급들과 공산당 내 우익의 압력 때문에 오른쪽으로, 어떤 때는 노동계급과 공산당 내 좌익의 압력 때문에 왼쪽으로 동요했지만, 국내 혹은 국외 문제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그 스스로 독립할 능력은 결코 없었다.
클리프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취했던 접근법 전체는 재앙적일 정도로 오판한 것이었다. 이는 1929년부터 ‘중앙주의적’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예상과는 달리 국가 소유 산업을 발전시키고 농업을 집단화하는 이른바 좌익 정책을 채택했을 때부터 명백해졌다.
관료들의 이러한 계급적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은 1927년 말에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로 이루어진 ‘좌익’을 절멸시켰으며, 1929년 늦은 봄에는 친자본주의적인 부하린-톰스키가 이끄는 ‘우익’도 파괴함으로써, 그 자신이 이끌던 ‘중앙파’ 분파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강화했다.
한편 관료집단이 지배계급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면서 국제 문제의 측면에서도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 건설로 가장한 민족주의적 대외 정책에 전념하게 되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모든 흔적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1933년에 가서야 마침내 스탈린 관료주의는 ‘중앙주의’가 아니고 좌익으로 견인될 수 없으며, 오직 노동계급의 혁명적인 자주적 활동을 통해서만 전복될 수 있다는 새로운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때조차, 트로츠키는 여전히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그의 사회학적 분석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소련 국가를 엄격하게 관료화된 수단으로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화된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는 ‘노동자 국가’, 따라서 사회주의의 기초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클리프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관료주의가 노동계급과 농민 모두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자신만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데 열중하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음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관료주의는 그 자신만의 특수한 목표들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것의 고유한 사회적 위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중앙주의도, 동요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이 시기에도 계속해서 일당 국가를 주장하고, 당내 분파 금지를 수용했는데, 이는 러시아 공산당이 정치적으로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진정으로 수호하는 집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은 전략적 차원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는데, 이런 상태에서는 ‘스탈린에 반대하는 일관된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당] 지도부가 그의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할 때마다 트로츠키는 거듭 거듭 되풀이해서 후퇴해야만 했다.’
트로츠키의 화해주의(conciliationism)
클리프는 1923년 여름부터 발아하고 있던 초기의 관료주의에 대해 트로츠키가 전략적으로 잘못된 ‘화해주의’를 취한 것에 대해 연대순으로 기록했는데, 그 당시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같은 도시의 산업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과 실업, 장시간 노동과 작업장 민주주의의 결핍에 항의하기 위해 대규모 파업을 벌일 때였다. 당 지도자들은 파업 주도자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으며, 파업 노동자들이 자기 부문에 협소하게 매몰된 채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비난했다.
트로츠키가 이러한 노동자들의 불만에 대응한 방식은 평당원들에게는 비밀에 부친 채 동료 정치국원에게 사적인 편지를 쓴 것이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당 기구의 ‘유례없는’ 관료화와 당원들을 위한 민주주의가 결여된 것에 대해 항의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은 트로츠키가 비당원 노동자들에게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관점을 <새로운 경로(The New Course)>에서 명확히 밝혔는데, 이는 클리프가 ‘트로츠키주의’의 ‘전형적 특징’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1924년 1월에 출간된 <새로운 경로(The New Course)>는 소비에트 관료주의에 대한 철저한 사회학적 비판을 제공했다. 최근에 벌어진 산업 현장의 소요에 대해 언급하면서 트로츠키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극도로 병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이 당내에서는 ‘불법 집단’들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노동자 그룹(Workers’ Group)과 같이 ‘공산주의에 명백히 적대적인 요소들이 지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정치적 불만을 억압으로만 억누르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효과적이지 못한데, 그런 조치들로는 노동계급이 동요하는 근본적 원인들, 즉 ‘광범위한 대중 사이에서 문화가 결여’된 상태와 더불어 ‘사회의 이질성과 인민들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들이 지닌 일상적인 이해관계와 근본적인 이해관계 사이의 차이’ 속에 놓여있는 원인들을 발본색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클리프의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경로(The New Course)>는 트로츠키의 정치적 방식이 지닌 근본적인 결함, 그 아킬레스건을 드러내기도 했다. 즉,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당의 단결을 최고로 옹호하며, 당내 분파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로 선전함으로써, 트로츠키는 그의 반대자들에게 ...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를 자진해서 해산토록 만드는데 가장 유리한 논거를 제공해 준 것이다!
무엇보다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모순’에 ‘시달리게’ 된다. 즉, 클리프에 따르면, ‘한편으로 당은 관료주의에 의해 교살당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트로츠키는 당 밖의 사회적 세력에게 관료주의와 싸우자고 촉구하는 데서는 주저했다.’ 이 ‘모순’을 자신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둠으로써, 클리프가 쓴 트로츠키 전기는 분석적인 측면에서 도이처나 브루에, 만델, 그리고 샤흐트만이 제시한 설명들보다 분명히 더 우수한데, 그들은 이 모순을 특별히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점으로 봤을 때, 클리프는 이 설득력 있는 분석을 충분히 멀리 밀고 가지 않고 있다. 분파적 정치에 대한 트로츠키의 사회학적 분석이 지니는 함의는 클리프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관료집단을 그 자체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 세력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당 자체, 특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스탈린 분파가 관료집단의 대표자로 변신 중이었고, 1920년대 중반에는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 역시 보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자신들을 고압적인 태도로 대하는 관료집단을 향한 노동자들의 부정할 수 없는 적대감에 대해, 그것을 객관적인 계급 이해관계간의 충돌이 표현된 것으로 여기지 못했다. 그랬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경험 많은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증진시키는 비옥한 토양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그것을 반혁명 분자들(멘셰비키들, 사회혁명당원들, 기타 등등)이 자기들의 분파적이고 반노동계급적 목적을 위해 이용할 것이 분명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미성숙과 문화적 소양 부족의 징후로 여겼다.
요약하면 트로츠키는 ‘당-국가에 의해 노동계급의 총체적, 역사적 이해관계가 구현된다’는 형식주의를, 매일 매일의 사활적이고 물질적인 이해관계를 지닌 실제로 존재하는 노동계급과 대립시켰다. 한편에는 당과 국가, 다른 한편에는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관계에 대해 트로츠키가 지니고 있던 바로 그 개념 안에 실제의 노동계급을 위한 이상적인 대리자, 즉, 소련 공산당에 의해 수행되는 치명적인 대리주의의 정치가 존재하고 있었다.
스탈린 관료집단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그러한 대리자로 내세웠으며, 거짓으로 대리자인 척하는 모든 것들을 분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1927년에 스탈린은 단호하게 ‘중핵인 간부들은 오직 내전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관료집단이 자신만의 계급 이해에 입각해 행동하는 사회 세력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탈린의 대리주의 정치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그의 대리주의를 고수하는 한,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트로츠키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그가 정치적으로 항복하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협상하는 것만을 의미했다. 트로츠키의 ‘화해주의’는 당-국가를 두둔하는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편향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수행하는 정책이 객관적으로 반노동계급적인데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당-국가가 어떻든 노동계급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23년에 노동자 그룹(Workers’ Group)이 벌인 분파 활동에 대해 트로츠키가 정치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통일된 유일 정당의 지배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던 확고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내면화된 고집을 공공연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노동자 그룹은 1923년 봄에 구성되었는데, 이 그룹은 이전의 반대파들에 속해 활동했던 사람들과의 동맹을 추구했다.
이들은 신경제정책(NEP)이 관료적으로 임명된 공장 관리자들과 산업 감독관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롭게 착취(NEP: New Exploitation of the Proletariat)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당원과 비당원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지자들을 모으려 애썼다.
또, 이들은 1923년 8월과 9월에 산업 전반을 뒤흔들며 발생했던 거대한 파업 물결을 정치적으로 명확히 하고 그것에 방향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이들은 해외에서도 지지자를 규합하려 했는데, 마슬로프(A.Maslow)가 지도하는 독일 공산당의 좌익분자들과 호르터(Gorter)가 이끌던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들(Dutch Communists)이 그들이다.
트로츠키는 노동자 그룹에 반대했다. 클리프는 트로츠키가 ‘그들에 대한 박해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는 그들의 지지자들이 체포되는 것에 항의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노동쟁의를 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것도 지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트로츠키는 용기를 내어 노동자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그 후 당으로부터 축출된 200명이 넘는 당원들과 공개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거부했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고, 공개적인 행동은 더 중요한 법이다. 당시에 트로츠키는 노동자들에게 관료적 억압과 폭력에 맞서는 존경할 만한 투사로 비쳐지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에 트로츠키가 보인 애매한 행보에도 불구하고 클리프가 오늘날의 사회주의 투사들이 트로츠키는 ‘객관적으로’ 늘 그랬다고 믿기를 바라는 그런 모습과 달랐다.
공산당 밖에서 벌어지는 기층의 저항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정치적 지도를 제공하지 않은 반면, 트로츠키는 당 지도부의 이런저런 분자들이 정치적 협조를 요청할 때는 거의 항상 우호적으로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26년에 트로츠키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두 사람이 최근에 입장을 바꿨다는 점을 근거로 그들과의 동맹 - 통합반대파(the United Opposition) - 을 정당화했다. 스탈린과 그들이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와 친산업화 정책을 옹호한 것은 트로츠키의 말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 느끼는 정치적 불안이 관료적으로 왜곡되어 표현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두고 ‘새로운 좌파’를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산업 현장에 뿌리내리게 할 친노동계급적인 지도자로 분석했고, 클리프는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리프는 오히려 트로츠키의 계급 기반 분석을 약화시키는 경험적인 증거들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불안’은 스탈린이 1년 전에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두 사람이 거느리고 있던 관료적 세력기반을 파괴하고, 더 일반적으로는 스탈린 총서기가 당-국가 권력을 가차 없이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에 대응하고자 한 1926년에 가서야 비로소 발전된 것이었다. 그 이전에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지노비예프 반대파를 꾸준히 파괴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때는 이 갈등이 그저 ‘관료 내부의 다툼’에 불과하고 지노비예프는 ‘무원칙한 패거리’의 우두머리일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클리프는 이 반대파의 무원칙하고 비계급적인 성격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학자 니송어(T.E. Nisonger)의 말을 인용한다. 니송어는 스탈린주의자들과 지노비예프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음과 같은 유사점을 이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양쪽 다
“자신들이 기층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는다는 인상을 만들어내고자 했고, 양쪽 다 적대적인 신문 편집자들을 제거하는 일을 실행에 옮겼으며, 양쪽 다 상대편이 당의 단결을 해치고 있다고 주장했고, 양쪽 다 당 관료들을 임명하고 해임시키는 권력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
언제나 관찰력이 예리한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노비예프의 데마고그는 꽤 진심이 담긴 것이었는데, 그는 자기 패거리에 대한 레닌그라드 노동계급 대중의 따뜻한 지지에 대해 자기가 하는 모든 말들을 그대로 다 믿었다.’
스탈린이 1926년 초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궤멸시키고 나서야, 즉 지노비예프가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의장직에서 쫓겨나고, 카메네프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직에서 쫓겨났을 때에야 비로소 패배한 그 둘은 트로츠키와의 정치적 동맹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보존하려는 이해관계에서 평화협상을 타진하자, 트로츠키는 과거는 과거라고 치부하면서 과거에 그의 적이었던 자들에 대해 보다 우호적인 정치적 규정을 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트로츠키는 더 이상 그들을 무원칙한 음모자들이라고 일축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노동자들과 사회주의 건설의 올곧은 옹호자들로 묘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물밑협상이 결국 1926년 4월에 트로츠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사이에 공식적으로 스탈린과 부하린에 맞선 동맹을 체결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그저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참들 - 당원들 - 은 통합반대파의 탄생을 그저 트로츠키까지 포함한 당 지도자들이 벌이는 또 하나의 권력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트로츠키가 이전에 자신의 적수였던 자들과 화해하는 것에 대해, 정치적 원칙이라는 고급스러운 겉포장을 씌우기 위해 그토록 공들여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비당원 대중들은, 이제껏 늘 그랬듯이, 이런 일들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의 단결을 유지하려는 이해관계에 따라, 트로츠키는 국제적 이슈에서도 그들을 달래려 애썼다고 클리프는 전한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는 당면한 문제들과 연속혁명이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해외에서의 통일전선 전술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이제 정치적으로 편리하다고 판단할 경우에 거래할 수 있는 협상 카드가 됐을 뿐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영-러 노동조합 위원회(Anglo-Russian Committee)의 해산과 국민당으로부터의 중국 공산당 철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영국 공산주의자들이 자국 노동계급에 대해 큰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졌고, 다른 한편, 중국에서는 혁명이 완전히 파괴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그리고 두 나라의 패배 모두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는데 엄청나게 일조했다. 클리프가 제대로 인식했듯이, 궁극적으로 러시아 혁명이 구원을 받으려면 해외에서의 혁명 확산이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운동이 패배하는데 일조할 것임을 자기도 익히 알고 있는 그 정책들을 묵인함으로써, 의심의 여지없이 자국의 스탈린주의적 반동에 맞서 벌이던 자신의 싸움도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만다.
18개월 동안 존재하는 동안, 통합반대파는 비당원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려는 어느 정도의 단결된 노력을 딱 한 번(오직 한 번만) 보여주었다. 그 지도자들은 모습을 드러낼 장소로 1927년 11월 7일에 붉은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10월 혁명 10주년 기념식 퍼레이드를 선택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이 가슴 아픈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퍼레이드 행령이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서 있는 붉은 광장의 연단에 도착했을 때
“...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연단 앞을 지날 때 그 장소에서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음으로써 침묵의 제스처를 취했고, 수천 개의 손이 손수건이나 모자를 흔들었다. 헛되지만 그래도 압도적인 무언의 환호였다... ‘대중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그날 밤 계속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감정을 억제할 정도로 그토록 수동적인 대중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었을까? 사실 군중 속에 있었던 모두는 아주 약간의 제스처만 취해도 자신과 자신의 생계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클리프가 이 사건에 대해 그저 ‘노동자 대중의 수동성과 그들이 반대파를 지지하며 싸울 의지의 부족을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그가 정신적- 정치학적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 좌익 반대파의 지도부는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차원에서 비당원 대중을 너무나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그들의 등장은 난데없는 일로 다가왔다.
붉은 광장 사건이 있은 지 몇 주 후, 게페우(GPU)는 트로츠키를 반혁명 활동 혐의로 체포했고, 그를 중국 국경 근처 머나먼 알마-아타(Alma-Ata)로 유배 보냈다. 트로츠키에 대한 클리프의 정치적 평전 4권인 <트로츠키, 1927~1940: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난다>에서는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스탈린이 추진한 농업 집단화와 강제적 산업화가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추방된 트로츠키가 이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응한 방식을 검토한 후, 소련 내에서 트로츠키와 생각을 같이 했던 이들이 보인 대응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클리프는 소련 공산당 내의 트로츠키주의 ‘좌익’과 부하린주의 ‘우익’을 누르고 종국적으로 ‘중도주의자’ 스탈린이 승리한 과정에 대한 분석을 확대하고선 글을 끝맺고 있다.
또, 클리프는 1928년부터 계속해서 미국 뿐 만 아니라 여러 유럽 국가에서 반대파 그룹을 만들려고 한 트로츠키의 노력도 추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일에서의 나치즘의 승리와 프랑스에서의 인민전선의 실패, 그리고 스페인 혁명의 패배 등, 1930년대에 벌어진 결정적인 사건들에 개입했던 다양한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의 활동을 살핀다.
그리고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의 실패한 출범으로 자신의 설명을 마무리한다. 결론에서 그는 트로츠키의 정치적 유산을 평가하고 있다.
이미 지적했다시피, 트로츠키는 ‘중도주의자’ 스탈린이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에 기초를 두고 러시아를 산업화하는 것, 즉, ‘좌익’ 반대파가 옹호했던 바로 그 정책을 절대 실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국가 소유 산업을 체계적으로 발달시키고 소농 농업을 집단화함으로써 트로츠키의 분석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렸다.
트로츠키가 말했다시피, 결단력 없는 스탈린, 그 ‘회색의 흐리멍텅한 사람’이 해낼 거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바로 그것을 스탈린이 해냈던 것이다. 즉, 보상 없이 농업 잉여를 몰수함으로써 농촌의 자본가 쿨락들을 파괴하고 - ‘사회주의적 원시축적’ - 그 잉여를 도시의 거대한 산업체들을 건설하는 데 투자했다.
이를 통해 농촌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천만 개의 소농 토지들이 수천 에이커에 이르는 거대한 농장들로 합쳐져 새로이 형성되고 있던 당시의 콜호즈[kolkhozy, 집단농장]에 트랙터와 콤바인을 공급했다. 클리프에 따르면, 산업화와 집단화를 통해, 스탈린은 관료집단에 의해 운영되는 새로운 ‘국가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지배계급을 공고히 했다.
클리프가 이 새로운 생산양식을 사회학적으로 어떻게 성격 규정짓는지는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했다. 이보다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이 관료집단이 그 자체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진, 독립적인 사회 세력, 즉, 하나의 계급이었으며, 강압적 국가라는 수단을 통해 직접생산자들로부터 잉여를 추출해냈다는 것이다.
클리프에 따르면, 트로츠키의 사회학에 대해 스탈린이 실천의 차원에서 보여준 전혀 뜻밖의 반박은 트로츠키를 따르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초토화시켰다. 좌익반대파는 어떤 원칙과 전략, 그리고 장기적 기반 위에서 스탈린의 정책에 맞선 혁명적 반대를 개시할 수 있을까? 클리프는 트로츠키를 따르는 사람들이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기반을 찾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들 가운데 압도 다수는 두 손을 들었고, ‘스탈린의 강제집단화와 신속한 산업화 정책은 사회주의 정책이고, 그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것이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강화된 착취를 의미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위기’로 말미암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 앞에서 정치적으로 무장해제 되어 버렸다.
스탈린에 대한 투항인가, 아니면 그를 지지한 것인가?
수천 명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매우 신속하게 스탈린에게 ‘투항했다.’ 혹은, 그들은 그를 중심으로 단결했던 것일까? 왜냐하면, 클리프가 지적한대로, 이 때 벌어진 ‘투항’은 단순히 경찰의 박해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확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클리프가 숙고한 관점에 따르면, 스탈린은 좌익반대파가 안에서 스스로 무너질 정도로 소련의 좌익반대파를 외부에서 그렇게 많이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적의 본질, 정말이지 적이 누군지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지니고 있던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정들의 무게를 그들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다.
클리프는 스탈린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이전에 벌어진 좌익반대파의 이데올로기적 위기가 정치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이 이데올로기적 위기의 또 다른 측면, 즉 노동계급과 농민이 최종적으로 패배하기 이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보인 정치적 태도를 온전히 검토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렇다. 즉, 클리프의 설명대로, 만약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마땅히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일들을 스탈린주의자들이 해냈기 때문에 소련 좌익반대파의 지도부가 진지한 투쟁 없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사실상 항복한 것이라면, 이들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은 스탈린이 추진한 산업화와 집단화라는 살인적이고 착취적인 정책들에 대해 단호하게 저항했던 노동자들과 농민들에 대해 대체 어떤 태도를 취했다는 것인가? 좌익반대파의 지도부는 스탈린과 그의 정책에 맞선 투쟁을 망설임 없이 지지할 수 있었을까?
클리프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이 같은 탐사 방침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은 채, 그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결론을 감추고 있다. 하지만 진실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탐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스탈린이 산업화 강령을 실행했기 때문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대한 정치적 반대와 그에 이어 스탈린 체제에 맞선 대중 행동을 조직할 만한 확고한 기반이 없어졌다는 점은 클리프의 주장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그 이후의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사실상 좌익반대파의 모든 구성원들이 결국엔 당내 민주주의와 국제주의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거기에 종속시키게 될 좌익 반대파의 강령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산업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만약 트로츠키주의 상층 지도부가 스탈린 정권에 맞서서 조직을 할 수 있는 강령적 기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트로츠키의 관점에 대한 기층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충실함을 고려했을 때, 그들이 아래로부터 그런 기반을 찾을 것이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서로 관련된 세 가지 논점들이 제시된다.
첫 번째로, 좌익반대파는 관료집단이 그 자체로 지배계급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 관료집단에 대한 투쟁을 조직할 수 없었다. 표적으로 삼을 만한 사회적 반대파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스탈린의 강령이 산업화를 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좌익반대파는 그의 강령에 맞서 조직을 할 수 없었다.
세 번째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여전히 공산당을 노동계급의 전위로 인정했기 때문에 공산당의 정치권력 독점의 문제에 맞서 자신을 조직할 수 없었다. 이전에 클리프가 트로츠키 평전 3권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트로츠키는 당내 분파 형성과 복수 정당이 참여하는 자유로운 선거에 명시적으로 반대한 바 있다. 트로츠키는 1933년까지 ‘비분파주의(분파금지, 즉, 노동계급 유일 당)’ 정치를 폐기하지 않았고, 1937년 <배반당한 혁명>을 쓰기 이전까지는 다당제 노동자 민주주의도 옹호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내용에 비춰볼 때, 좌익반대파는 스탈린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을 조직하기에는 너무나 형편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도하는 그 어떤 반대파라도 두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그것은 이른바 시초축적 과정을 저해하는데 영향을 미쳐야 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려는 노동자들은 축적률을 낮추고자 투쟁할 것이고, 이는 사실상 국가의 산업화를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그것은 민주적 형태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좌익반대파는 둘 중 어떤 요소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클리프 본인이 제시했던 논쟁의 여지없는 사실들에 기반해서 좌익반대파의 정치를 더 정교하고 철저하게 분석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 된다. 즉, 좌익반대파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노동계급의 반대를 지지할 수도 없었고, 지지하지도 않았다는 점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 더 날카롭게 말하자면, 그 지도자들은 스탈린 독재에 맞서 ‘실제로 존재하는’ 노동계급(과 농민)을 이끌 수도 있었던 사람들, 다시 말해 작업장과 사무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기층 평당원들을 일관되게 지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온전히 발전시켜 보자.
클리프는 집단화와 산업화에 대해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이 보인 반응을 주로 클리프가 지닌 시야이기도 한 트로츠키의 눈을 통해 검토하고 있다. 클리프도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스탈린 정권에 대한 트로츠키주의 ‘투항자들’의 연이은 물결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약 5년간에 걸쳐 벌어진 일로서, 그 시작은 1929년 7월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와 기타 400명으로 시작하여, 1934년 3월에 소련 내에 남아 있던 권위있는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로서는 마지막 인물이었던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Christian Rakovsky)가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
그런데, 트로츠키와 클리프에 따르면, 그들이 투항하는 시점을 통해 그들 각자가 지닌 ‘도덕적 용기’를 측정할 수 있다. 더 빨리 투항할수록 덜 ‘굳건한’ 것이고, 더 나중에 투항할수록 더 ‘비타협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는 ‘그의 도덕적 용기와 비타협성에는 한계가 없었기 때문에’ 절대 투항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리프의 도덕적인 비판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오도할 여지도 있는데, 이는 트로츠키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다가 마침내 스탈린을 지지하게 된 과거의 트로츠키주의자들 스스로가 명확하게 언급한 정치적 설명과는 그것이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익반대파 구성원들은 도덕적 용기가 부족해서 스탈린의 정책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정치적 확신에서 나오는 용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이는 비록 내켜하지 않은 채 거의 부차적인 것이나 나중에 생각난 것처럼 말하기는 하지만, 클리프 자신도 이따금 적절하게 언급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그런 ‘확신’이 함의하고 있는 정치적으로 반민주적이고 경제적으로 착취적인 성격이 명확히 드러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투항’한 구체적인 날짜는 특정한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이 스탈린의 집단화와 산업화 정책이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 시점을 나타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스탈린 쪽으로 더 빨리 줄을 선 지도자들일수록 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찍이 1928년 5월에 프레오브라젠스키는 마치 앞을 내다보는듯한 내용으로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썼다.
거기서 그는 스탈린과 당내 다수파가 ‘레닌주의 정치로 되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고, 당내 부하린주의 우익에 대항한 단호한 투쟁을 착수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강철 같은 결단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농촌의 ‘친자본주의’ 쿨락과 단호히 투쟁할 것이라고 썼다.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스탈린은 단순히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을 위해 술수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에 완전히 전념하고 있었다.
(기사 등록 2017.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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