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 - 신화와 진실 2

존 에릭 마로(John Eric Marot)

 

  

[이 글에서 마로(Marot)는 SWP(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권위있는 지도자인 토니 클리프(Tony Cliff)의 분석이 지닌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트로츠키와 그가 이끌던 러시아 볼셰비키 당 내의 좌익반대파(Left Opposition)가 1920년대에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 건설과 억압에 맞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저항했다는 대중적 신화를 무너뜨린다이 글의 필자인 존 에릭 마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며 현재는 한국의 계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우리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서 이처럼 관련된 글을 지속적으로 다룰 계획이다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분량상 이 글은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이 글은 그 두 번째이다.]

  

출처:

http://libcom.org/library/trotsky-left-opposition-rise-stalinism-theory-practice-john-eric-marot 



[1편에서 이어짐] 


처음에는 좌익반대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프레오브라젠스키가 보여주는 친스탈린적 지향을 거부했다. 스탈린이 그 같은 노선을 유지하려는 결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프레오브라젠스키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그들도 스탈린이 취한 노선 방향에 대해 프레오브라젠스키가 평가한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분명 동의했다.

 

대부분은 프레오브라젠스키가 경솔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스탈린과 함께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정책이 장기적인 목표를 겨냥한 전략이라는 점이 점점 더 명확해짐에 따라, 보다 많은 좌익반대파 구성원들이 프레오브라젠스키의 편에 섰다.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친스탈린 입장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느낀 프레오브라젠스키는 그런 입장들을 한층 더 노골적으로 제기했다.

 

종말은 19297월에 다가왔는데, 그와 라데크(Radek), 그리고 스밀가(Smilga)를 비롯한 기타 400명의 좌익반대파 구성원들이 루비콘 강을 건너 스탈린과의 연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사실상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대변인이었던 트로츠키와의 결별을 정당화하면서, 이처럼 거대한 행렬을 이루며 투항한 좌익반대파 지도부는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5개년 계획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로 현실화된, 이 나라를 산업화하는 정책이 사회주의 건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지위 강화를 위한 강령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계획의 실행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볼셰비키로서의 우리의 임무라고 믿는다.”

 

트로츠키는 프레오브라젠스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스탈린의 정책들을 아무런 유보 없이 받아들인 것에 대해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Christian Rakovsky)를 통해 응수했는데, 망명지에 있던 라코프스키(Rakovsky)는 프레오브라젠스키를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썼다.

 

따라서 5개년 계획 하에서 추진된 산업화와 집단화가 일으킨 초기의 경기부양 시기가 종결되고 나서 6년이나 한 참 지난 1934년에 가서야 가장 마지막으로 스탈린 편으로 돌아선, 트로츠키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비타협적인 사람이 쓴 이 비판 글을 먼저 자세히 살펴보자.

 

1928822일에 라코프스키(Rakovsky)가 쓴 선언은 공식적으로는 중앙위원회, 즉 스탈린을 향해 말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좌익반대파의 동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라코프스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 건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당이 당면한 어려움들을 극복하도록 도움으로써, 사회주의 건설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지원을 당과 중앙위원회에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언급한 당면한 어려움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작업장과 지역을 둘러싼 관심과 내부지향적인 분위기로만 향하는 경향이 있어 다루기 어려운 노동계급이 있었다. 라코프스키는 이런 경향과 맞서기 위해 노동 규율을 강화하려는 스탈린의 투쟁을 지지했다.

 

정치적 규율의 결여는 라코프스키의 앞에 놓여 있었던 또 하나의 어려움이었다. 그가 보기에 당내 또는 당 외부에서의 분파적 활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순조롭고 질서 있는 진전을 방해할 것이기에 당연히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라코프스키는 그런 분파들이 어떤 정치적 활동에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분파들 중 최소한 하나 또는 그 이상이 앞에서 언급된 노동계급의 내향적인 분위기에 명시적으로 반스탈린주의적이면서, 외향적이며, 정치적으로 명확한 목소리를 부여할 수도 있다고 제시하는 것은 과연 비합리적일까?

 

클리프는 분파 정치 금지에 담긴 이런 함의를 눈치채지 못하는 척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분파적 활동은 분명히 당에 유해한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라코프스키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눈앞에서 당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소련 공산당에 의해 구현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초를 약화시키기때문이었다. 라코프스키는 이에 대해 논리적이었고 명석했다.

 

, 오직 공산당을 통해서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지켜질 수 있고 중앙위원회에 의해 설정된 당 노선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확보될 수 있기 때문에, 공산당의 단결은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코프스키에 따르면, 스탈린이 철저하게 시행한 (비스탈린주의) 분파들에 대한 금지 조치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더 높은 필요성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 당시에 아직 스탈린주의자들 쪽으로 넘어가지 않은 좌익반대파 구성원들 사이에서 표준적인 인물 - 에 대해 라코프스키가 동의하지 않았던 유일한 지점은 스탈린이 쿨락을 분쇄하고 집단화와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데 있어 정말로 단호한가를 둘러싼 것이었다. 이에 대해 라코프스키는 경고등을 켰다.

 

그는 스탈린의 정책들이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고 경고했다. , 스탈린의 정책들은 쿨락들의 힘을 충분히 약화시키지 못하거나, 산업화를 완전히 실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라코프스키는 일부 전적으로 형식적이고 흔해빠진 사회학적 논평도 덧붙였는데, 완성된 사회주의를 조직하는 것은 먼 미래에, 국제적인 규모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맑스주의의 ABC가 사회학적으로는 옳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무력했고, 어디에 있는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바로 지금 여기서 스탈린에 맞서 원칙적인 입장에 충실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클리프는 라코프스키의 입장이 좌익반대파가 직면한 진짜 딜레마를 드러냈다, 즉 스탈린에 투항하는 것은 반대했지만 그의 정책들과 상당히 유사한 주장들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클리프에겐 미안하게도, 여기서 딜레마같은 건 없었다.

 

라코프스키의 논평들은 스탈린에 대해 두고 보면서 기다리는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정치적으로 부차적인 유보사항들 몇 개를 빼고는 스탈린의 주장 그 자체였지, 그에 반대하는 주장이 아니었다. 여기서 스탈린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없었다. 클리프가 이것과 더불어 반대파의 다른 문서들과 관련해 되풀이해 열변을 토하던 바로 그 스탈린에 대한 정치적 반대말이다.

 

클리프의 열변은 그가 좌익반대파의 정치적 강령이 가진 실제의 정치적 의미를 받아들이길 거부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전 세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간직하고 있는 집단적인 역사적 기억, , 트로츠키주의가 단호하게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다는 기억을 아무런 손상 없이 보존하기 위해 기꺼이 그 의미를 왜곡하려는 것도 아울러 보여준다.

 

라코프스키의 비판 글은 트로츠키가 자신의 노선을 실행함에 있어서 부딪혔고, 극복해야 했던 반대가 스탈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로부터 비롯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소련의 좌익반대파는 스탈린의 노선이 올바른 길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건 올바른 노선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스탈린이 향후 사회주의를 건설함에 있어서 얼마나 멀리까지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였다. 그런데 스탈린은 그렇게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코프스키는 만약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정치적 독립성을 너무 빨리 포기하고 스탈린과 함께 할 경우, 그들은 동요하는 스탈린을 좌파 쪽으로 견인할 모든 정치적 지렛대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이를 통해서만 스탈린이 입장을 바꾸거나 심지어 뒤를 돌아보지조차 않고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토록 압력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트로츠키들 사이에서 벌어진 쟁점이었다. 라코프스키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쟁점에 대해 논한 것이다. 실제로 라코프스키는 스탈린이 그러한 위대한 대의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데 극도로 실패한 것을 비판했다.

 

그대신 라코프스키는 모든 좌익반대파들을 석방하고 트로츠키를 망명지에서 귀환시켜야 한다고 스탈린에게 호소했다. 좌익반대파가 당에 대한 충직한 봉사를 통해 산업을 건설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토대를 닦는데 있어 자신들의 충직한 헌신을 실천 속에서 증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도록 말이다.

 

트로츠키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스탈린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어떤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도 주지 않은 조건에서, 클리프가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이 스탈린 쪽으로 줄 선 것을 두고 도덕적 용기가 결여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모순이다.

 

좌익반대파 구성원들은 트로츠키의 관점에서 본 정치적 과제를 계속 따라가고 있었을 뿐 인데, 그런 좌익반대파 구성원들이 트로츠키에게 계속 충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로츠키는 라코프스키의 822일 선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는 거기에 서명했다. 클리프가 말한 대로, 트로츠키는 사실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갖고 서명을 했지만, 그는 트로츠키가 느낀 이 불편함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완전히 밝히지는 않는다. 트로츠키가 느낀 불편함은 실천적인 게 아니라 철저히 이론적인 것이었다.

 

그가 망설인 것은 무엇보다도 스탈린의 정책들로 인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서 달갑지 않은 정치적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감추고, 이와 동시에, 거기서 정치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한 체면 유지용 묘책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쓴 바에 따르면, [스탈린주의] 지도부가 그들의 현재 정책으로 도입한 극히 중요한 수많은 실천적 조치들이 트로츠키의 강령에 나온 슬로건과 정식들에 일치한다고 해서, [스탈린주의] 지도부와 반대파가 오늘날의 문제를 검토하면서 생겨난 이론적 원칙들에서의 불일치까지 전부 없애지는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스탈린주의]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트로츠키의 전술적 결론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것들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우익 중도주의 [부하린주의] 전술의 모태가 된 그 전략적 원칙들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말한 대로, 스탈린이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건설 혹은, 적어도 이른바 그 기초를 일국의 문제로 보았던 반면, 반대파는 국제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사회주의는 오직 국제적인 규모에서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이처럼 크게 다른 이론적 원칙은 단기적이고 중기적인 차원의 정치적 실천에 압도당해 부차화 되는 중이었다.

 

트로츠키도 이 점을 완곡하게 인정했다. 그는 스탈린이 산업화를 통해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사회적 비중을 늘리고, 자본주의가 다시 복귀할 위험을 막아내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위해 확장된 물질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많은 좌익반대파들은 트로츠키로 하여금 그 자신이 완곡하게 인정한 것에 거듭해서 주의를 환기시켰는데, 이는 그가 거기서 옴짝달싹 못하게 못을 박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궁극적인 이론적 차이는 항상 나중에 해결될 수 있고, 지금은 스탈린과 거리를 둘 실천적 이유가 없으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교조주의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스탈린과 함께 하는 것이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책임 있는 행동방침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트로츠키처럼 실천보다 이론을 중시하고 당으로 결집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라고 주장했다. ‘역사는 그런 교조주의자들을 옆으로 밀어낼 것이라고 했다. 과거에 트로츠키주의자였다가 최근에 스탈린주의로 돌아선 라데크(Radek)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역사[, 산업화와 집단화를 이룬 역사]를 통해, 당 지도자들 가운데 우리가 과거에 언쟁을 벌인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이 옹호했던 입장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이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만족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클리프에 따르면, 결론은 이에 대해 트로츠키주의 지도부의 다수가 매우 만족해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탈린이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던 방법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집단화와 산업화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의 독재적 방법에 대한 비판이라는 부분도 혼란스럽다. 클리프는 민주적인 방법을 가능한 대안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좌익반대파가 원래 구상했던 대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농업을 집단화하는 것에 대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방법으로?

 

만약 그렇다면 클리프는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외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자국에서의 제도화된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형식적 요구조건들에만 종속되고, 또 그것을 존중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주장의 초석을 놓는 것이다.(그 스스로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

 

이 함의가 가진 문제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비록 비공식적이고 제도화되지 않은 방식이기는 했지만, 이미 민주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저항했고, 집회를 열었고, 사보타주를 했고, 파업을 했고, 스탈린주의자들을 저주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을 처벌하고, 투옥하고, 추방하고, 총을 쏘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자기들의 민주적인 방식대로 그대로 밀고 나갔다면, 그들은 집단화와 산업화 정책을 뒤집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경제발전이라는 것은 강화된 착취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때의 트로츠키를 포함한 많은 혁명가들이 한 때 정확하게 예측했다시피, 일국 내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계속 고집스레 추진될 경우 필연적으로 벌어질 일이었다.

 

하지만 좌익반대파는 이제 앞으로 전진 하여, 산업화와 집단화를 시행하며, 일국 내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계속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목표를 바라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수단도 원해야 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 민주주의와 다수결은 버려졌다. 라코프스키가 그토록 많은 말들 속에서 정작 얘기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는 프레오브라젠스키와 다른 수많은 좌익반대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트로츠키도 첫 5개년 계획이 수행되던 내내 그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이는 그가 말했듯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구현되는 사회 변혁의 무의식적 과정이 유일하게 의식적으로 표현된 것이 자신들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반대

 

스탈린의 5개년 계획으로 인해 도시에서는 식량 부족과 노동일의 연장, 그리고 노동 강도의 강화가 초래되었다. 몇몇 추산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절반가까이 떨어졌다. 신생 스탈린주의 국가는 농촌에서 부농이든 빈농이든, 쿨락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농민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지형에 대해서는 그동안 탐구가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이제는 속속들이 익숙하다.

 

하지만 이 당시의 정치적 지형, 구체적으로 좌익반대파가 스탈린의 정책에 대해 노동계급이 보인 반대행동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는 오늘날의 분석가들이 전통적으로 기록해 온 것과는 다르다. 즉 이들 전통적인 분석가들은 트로츠키주의 지도부가 노동자들(그리고 농민들의)이 벌인 반스탈린주의 활동에 꾸준한 연대와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나는 클리프가 정리해 놓은 사실들에 근거하여 이 같은 논쟁적인 해석을 아래에서 상술할 것이다.

 

강제 산업화와 강제 집단화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스탈린의 정책에 맞선 노동계급의 저항이 성장하는 과정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후, 클리프는 이것을 같은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이 증대한 것과 자동적으로 등치시킨다. 그럼에도 클리프의 경험적 상관관계는 분석적 차원에서는 자기가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이 부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의 트로츠키주의의 정치적 전위조직(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봤을 때의 노동계급과 관련하여)과 그것의 내부적 관계(이러한 트로츠키주의 정치적 전위조직 내에서 트로츠키주의 지도부와 평당원 사이에서 형성된)사이에 분석적인 차원에서 일정하게 중요한 구별이 가해져야 한다. 이제 트로츠키주의 지도부와 트로츠키주의 평당원들, 그리고 노동계급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검토해 보자.

 

스탈린의 정책에 대응하여 상당수가 비당원이었던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파업과 거리 집회, 폭동과 사보타주를 통해 집결했다. 클리프는 좌익반대파가 더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노-사간 단체협상 합의 존중을 위한 노동자 투쟁에 개입한 수많은 사례들을 들고 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렇게 개입할 때 그들이 어떤 주장을 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엄밀하지 않다. 클리프는 노동자들이 벌인 반대투쟁을 트로츠키주의 정치와 단순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을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질문해야 마땅하다.

 

, 이러한 개입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조합 서기로서 행동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순수하게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 투쟁으로 후퇴할 것을 요청했는가, 아니면, 그들은 인민의 호민관’(레닌)으로 행동하며 노동자들에게 혁명적이고 반스탈린주의적인 정치적 활동을 통해 그런 개혁들을 위해 싸울 것을 촉구했는가?

 

클리프가 길게 인용하는 역사학자 마이클 라이만(Michael Reiman)에 따르면, 5개년 계획의 시작부터


이에 반대하는 활동이 강물이 범람하듯 확산되었다. 반대파는 산업 노동자들의 대중 집회를 조직했다. 모스크바의 한 화학 공장에서는 이런 외침이 들렸다: ‘스탈린 독재 타도! 정치국 타도!’”

 

그런데 누가 이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슬로건을 외쳤다는 것이가? 비당원 노동자들? 매우 가능성 있다. 트로츠키주의 평당원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보았듯이, 트로츠키를 위시해서 트로츠키주의 지도부가 스탈린 정권 분쇄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이처럼 혁명적 요구에 정치적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며, 투쟁의 선명한 전망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트로츠키는 이에 대해 명확했다.

 

트로츠키는 (앞에서 논의된) 라코프스키의 선언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당을 개혁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당이 시체와도 같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성급하게 결론내렸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우리로부터 이런 의견이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수도 없이 제기됐지만, 우리는 그런 의견과 아무 공통점이 없다고도 말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분명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런 기층 저항의 책임을 트로츠키주의 지도부에 돌렸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평당원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지도부가 지닌 진짜 의견이라거나, 진짜 의견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클리프는 라이만에게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한다.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당과 유사한 조직을 만들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좌익반대파는, 당 지도부를 반대하는 조직적 활동에 직면하자, 일부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 조직이 만들어지도록 내버려두자. 그러면 우리는 어떤 당이 진짜 노동계급의 편에 서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당은 우리와 다른 정책을 갖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끄라스나야 쁘레스냐(Krasnaia Presnia)[1905년 혁명 이전부터 유래한 길고 전투적인 계급투쟁의 역사를 가진 모스크바의 산업화된 노동자 지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좌익반대파의 비판이 옳았다고 말했다.”

 

클리프는 별개의 당을 조직하겠다는 위협에 담긴 깊은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정치조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지도부가 두 번째 정당을 만들자는 요구를 거부한 좌익반대파의 일원이 아니었거나, 혹은 그 일원이었다 해도 지도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서고에 기반을 둔 알렉세이 구세프(Alexei Gusev)의 연구는 트로츠키주의 지도부가 스탈린에 맞선 노동계급의 모든 정치 투쟁 - 그러한 투쟁을 통해 두 번째 정당을 창당하라는 요구가 제기되거나, 그런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 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다는 점을 완전히 확증하고 있다.

 

그래서 19289, 라데크(Radek)는 동료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회람용 편지를 보냈는데, 그는 그 편지에서 트로츠키주의 평당원들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자들과 청년들은 대체 지도부가 왜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방어하기 위해 기존의 당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한다고 불평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일부는 공산당으로부터의 전면적인 조직적, 정치적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라데크가 보기에는, 트로츠키주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또 다른 반대파 집단, 즉 민주집중파(the Democratic Centralists; Decists)를 향한 급격한 좌익적 일탈의 위험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미르노프(V. Smirnov)와 사프로노프(T. Sapronov)가 이끌었던 민주집중파는 이미 공산당이 새로운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더 이상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공산당에 맞선 독립적인 정치적 행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이런 생각들에 상당수의 기층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동조했다.

 

실제로 어떤 트로츠키주의자는 그들 가운데 민주집중파 유행병이 돌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자 트로츠키주의 지도부는 민주집중파를 초좌익적이고, 분파주의적이며, 모험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지도부는 노동자 정부라고 여겨지는 정부에 대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파업을 명시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좌익반대파에 촉구했다.

 

라코프스키와 다른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은 반대파의 의무는 노동계급의 요구를 노동조합과 당이라는 적법성 안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며, “산업과 국가, 그리고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해로운 파업과 같은 투쟁 방식에 반대하라고 호소했다.

 

구세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성장하는 노동운동에서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거부함에 따라,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유효성이 심대하게 약화되었고, 잠재적인 지지자들도 방향성을 잃게 됐다.’고 결론 내린다.

 

스탈린주의자들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주의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면서도 - 소련 공산당과 - 분리된 정당의 창립을 나란히 반대함으로써, 실천적으로는 스탈린주의 지도부와 동맹을 맺었다.

 

스탈린주의와 맺은 이 같은 인민전선으로 인해, 노동 대중은 트로츠키주의 반대파 지도부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노동계급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인지를 선뜻 알 수 없었다. 많은 노동자들에게 트로츠키주의 지도부와 스탈린주의 지도부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미미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것과 그들을 착취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좌익반대파는 결국 스탈린 편 쪽으로 합류하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무기력을 견딜 수 없다. 나는 건설하고 싶다!” 그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앙위원회는 그 나름의 야만적이고, 가끔은 어리석은 방식이긴 해도, 미래를 위한 건설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새로운 산업 건설이라는 과제 앞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의 기존 생각이 공중제비 하듯 한 바퀴 뒤집힌 것인데, 스탈린이 진정으로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그런 과제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될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가 흔들리게 되었고, 그 결과 압도적 다수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미래를 위해사회주의를 건설하겠노라며 스탈린과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하지만, 클리프는 이처럼 끔찍하고 불편한 사실에 내포된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드러내질 않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노동자, 농민들은 처음에 1920년대 말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투쟁성과 의식성을 발전시켰는데, 이로 인해 스탈린에 맞서는 반대파의 정치적 사상이 노동계급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커질 수 있었던 실천적 기반이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클리프는 이로 인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오는 노동계급의 전투성에 지도력을 제공할 책임을 지게 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이 같은 객관적인 발전을 - 레이먼의 연구에 힘입어 - 연대순으로 기록할 뿐이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지도부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스탈린주의 정책에 맞서 비당원 대중이 벌인 초기의 투쟁이 발전되도록 도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스탈린주의 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좌익반대파가 기층 노동계급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반스탈린주의적 정치 지향에 반대했던 데는 이유가 있는데, 노동자들의 반대는 공산당과는 다른 제2 정당의 창당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는 필연적으로 공산당의 단결을 위협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약화시키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클리프는 현실을 직시하길 거부한다. , 대중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을 옆에 서서 수동적으로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1929년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저항을 계속했다. 이전의 역사학자들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 방식으로 케빈 머피(Kevin Murphy)- 클리프가 단언했던 것과는 반대이긴 하나 - 스탈린주의에 맞선 노동계급의 저항이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생산현장에서 광범위하고도 활발하게 벌어졌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수동성은 날조된 신화다. 오히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동안 스탈린주의에 반대해왔던 자신의 정체성을 거리낌 없이 묻어 버리고, 이내 자신을 탈바꿈시켜 의식적으로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급이 무엇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대중을 지키지 못한 것은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다.

 

앞의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클리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분석에서 도출되는 그들의 정치가 그러한 객관적인 상호관계의 형성, 다시 말해 스탈린의 승리에 일조했던 것으로 인식하는 대신, 트로츠키주의 반대파의 정치를 스탈린이 승리하는데 유리했던 계급 세력들의 객관적인상호관계와 그릇되게 대립시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맞선 노동계급의 저항을 조직했다는 점을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불편한 결론은 클리프와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당시의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들을 경건하게 옹호하는 것과는 잘 맞지는 않지만, 사실관계와는 잘 맞는다. 필자가 여기서 발전시켜 온 주장의 목적에 비추어 보자면, 소련의 좌익반대파는 스탈린주의에 맞선 노동계급(과 농민)의 저항에 일관된 정치적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지도부는 자신을 따르던 평당원들의 다수를 스탈린에게 거저 넘겨줬던 것이다.

 

해외의 트로츠키주의 반대파(1928~33)

 

1928년과 1933년 사이에 국제적 차원의 좌익반대파가 벌인 활동에 대한 클리프의 논의는 대단히 취약한데, 그가 당시 해외의 공산당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트로츠키주의 분파들이 당시에 어떤 일국적 기반 위에서 조직했어야 하는지 제시하는 바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러시아 문제들과 유의미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독일의 고유한 문제들을 다룰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는가? 예시적인 사례를 하나 인용해 보겠다.

 

독일 공산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터져 나온 혁명적 고양으로부터 탄생한 공산당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당이었다. 독일 공산당 내부에서는 정치적 지도력의 방향을 둘러싸고 반대파적 경향이 발전했는데, 192310월에 혁명을 위한 (소요) 시도가 실패한 이후에 특히 그랬다. 비록 클리프는 당시에 독일 정치에 영향을 주는 쟁점들에 대해 독일 분파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려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독일 공산당 내의 각 분파들은 러시아 공산당 내의 이런저런 분파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아무튼 1928년에 독일 공산당 지도부는 러시아 공산당의 부하린을 따르는 독일인 지지자들’(이것이 독일의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했든 간에)의 지도자인 하인리히 브란들러(Heinrich Brandler)를 추방했다. 그러자 브란들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6천 명의 당원을 보유한 독일 공산당 반대파(KPO)를 만들었다.

 

클리프에 따르면, ‘부하린주의 (Bukharinist)[원문 그대로] KPO와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는 정치적으로 깊은 간극이 있었던 관계로, 국제 문제에서 브란들러는 트로츠키와 거리가 멀었던 반면, 스탈린과는 가까웠다. 하지만 독일 문제에서 브란들러는 KPD의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초좌익적 노선을 공격했는데, 그로 인해 결국 나치즘이 순조롭게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독일 정치에서 제기된 이같이 결정적인 국내적 문제를 둘러싸고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브란들러주의자들이 공동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반은 없었던 것일까? 보아하니 그런 기반은 없었던 것 같다. 클리프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벌어진 내부 갈등에서 스탈린 편을 들었다고 브란들러를 강력히 비난했기 때문이다.

 

재차, 이것이 독일 문제나 기타 쟁점들에서 브란들러 지지자들과 협력하는데서 장애물이 되어야 했을까? 보아하니 그랬던 것 같다. 클리프의 설명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브란들러가 스탈린 정권에게 (잠시) 면죄부를 준 것에 대해서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올바른 요구, , 브란들러가 나치에 맞서 KPDSPD (독일 사회민주당)간의 통일 전선을 주장한 것보다, 브란들러가 국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표면적으로) 틀린 입장을 표명한 것에 더 무게를 둔 트로츠키의 입장은 옳았는가?

 

이에 대해 클리프는 물론이라고 답한다. 그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었고 그것은 좁혀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간극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을 만든 것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것을 좁히는 것을 거부한 것은 누구였는가?

 

KPO와 같은 입장에 서 있었던 조직으로는 레닌분트(Leninbund)와 사회주의 노동자당(Sozialistische Arbeiterpartei; SAP)이 있었다. 후자도 히틀러의 위협에 맞선 KPDSPD의 통일전선을 옹호했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 및 KPO와 유사한 입장들을 옹호한 셈이었다.

 

이렇듯 서로 관점이 유사했던 탓에 특히 독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데 더 애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6천 명의 당원을 보유한 강력한 조직인 KPO는 트로츠키주의자들보다 규모가 10배는 더 컸고, SAP는 그보다도 규모가 더 커서, 최소한 35천 당원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클리프는 무엇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들 다른 정치조직들로부터 거부당했는지를 파고들었어야 했다.

 

따라서 우리는 독일 노동운동이 직면한 화급한 정치적 쟁점(나치의 위협 앞에서 통일전선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합의만으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KPO나 레닌분트, 그리고 사회주의 노동자당(SAP)과 건설적으로 협력하는데 충분치 않았던 것이라고 결론 내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것이 방해물이 되었단 얘기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 본인들의 분파주의적 정치 때문이었을까? 그 저주받은 러시아 문제?

 

독일에 있는 자기 조직을 KPD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지렛대로 사용하고자 했던 트로츠키의 시도는, 다른 나라들의 공산당에도 마찬가지의 영향을 미치려고 애썼던 것이 종종 그랬듯이,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33년에 히틀러가 중대한 승리를 거둔 이후, 마침내 트로츠키는 오직 스탈린 정권을 전복하는 정치 혁명만이 소련에서 노동계급을 사회주의로 향하게 할 수 있으며, 소련 밖에서 기존 공산당들과 경쟁할 새로운 볼셰비키 정당들을 조직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노동계급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한 목표를 위해 트로츠키는 좌절하지도, 지치지도 않은 채 앞으로 밀고 나아가, 마침내 1938년에는 제4인터내셔널을 창립했다. 그러면서 그는 10년 내에, , 1948년쯤에는 제4인터내셔널이 지구에서 결정적인 혁명 세력이 될 것이라고까지 예측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트로츠키의 예언은 빗나가게 된 것일까?

 

트로츠키의 오판

 

클리프에 따르면, 4인터내셔널이 승리할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예상은 그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 , 스탈린 정권이 이룬 안정성으로 인해 빛이 바랬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공산당들은 막강한 소련이라는 후광을 누리고, 여전히 10월 혁명을 이끌었던 역할과 책임을 내세우며성장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에 혁명의 무덤을 파는 사람으로서 행동했다. 러시아 독재자가 내려준 지령에 따라, 각국의 공산당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터져 나온 대중의 혁명적 고양을 개량주의적인 길로 분산시키며, 해당 시기 전체에 걸쳐 사회주의 혁명을 무기한 지연시켰다.

 

클리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는 사태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트로츠키의 무력함을,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이러한 경과를 예언하는 트로츠키의 명민한 분석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 밤이 더 깊을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난다는 것이다.

 

논쟁의 여지없이 트로츠키는 1930년대 자본주의 세계를 난파시키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세력들에 대해 대가답게 잘 파악하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나치즘의 부상과 그것에 맞서 싸울 방법을 다룬 그의 저작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의 인민전선 전략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마찬가지로 빼어나다.

 

이런 저작들은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교육시키는데도 쾌히 추천할 만한데, 그 이유는 트로츠키는 여기서 현대 노동운동이 직면한 화급한 쟁점들에 한 결 같이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적 맑스주의 정치의 알파와 오메가로서, 노동계급의 세계적-역사적 해방은 오직 국제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노동계급의 혁명적인 자주적 활동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모든 투사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트로츠키는 그의 권위 있는 저작인 <러시아 혁명사>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러시아 혁명의 모범적인 경험들과 아울러 19171025일에 벌어진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을 20세기 역사에서 중요한 날로 만든 볼셰비즘의 계급투쟁 정치를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클리프가 지적하지 못하는 가장 큰 역설은, 트로츠키가 러시아 공산당이 어떻게 해서 노동계급과 민주적 사회주의 기획에 끊임없이 적대적인 계급을 대변하게 되었는지를 제 때에 인식하지 못한 관계로, 스탈린주의에 맞서서 제 때에 볼셰비키 정치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탈린주의에 맞선 계급투쟁 대신에, 트로츠키는 너무나 성공적으로, 그리고 너무나 오랫동안 스탈린주의와의 계급 화해를 옹호했다.

 

그 결과, 그는 혁명적이고 볼셰비키적인 노선이 아니라 개량주의적이고 사회 민주주의적인 노선을 주장했다. 그 결과, 트로츠키는 공산당에 호소함으로써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한 반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철저히 굴종적이고 출세주의적이며 시류에 편승하던 평당원들은 스탈린주의 당 지도부가 지니고 있던, 향후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게 될 치명적인 기풍을 완전히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저지른 커다란 정치적 오류는, 자기 자신과 지지자들을 혁명적, 맑스주의적 판단이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이고 스탈린주의적인 편견에 내맡겨 버린 것이다. 1933년에 트로츠키가 마침내 생각을 바꾸고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맞선 정치혁명을 요청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 스탈린주의는 국내외적으로 완전히 공고화된 상태였던 것이다.

 

1928년 이후의 시기에 대한 트로츠키의 그릇된 세계-역사적 정치 관점은, 클리프가 강조하는 대로, 국제적인 차원에서 스탈린 정권이 지닌 견고함에 대해 그가 저지른 중대한 오판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클리프는 1933년부터 1938년 사이, 즉 제4인터내셔널이 결성되기 바로 직전의 시기에 국제적인 트로츠키주의 정치 경향들의 운명이 상당 부분 러시아에서 이미 결정되었다는 점을 충분히 논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가장 대놓고 얘기하자면, 트로츠키는 자기 자신이 1920년대에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이 패배하는데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193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쓰디쓴 패배의 열매를 수확한 셈이다.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근본적으로 틀린 분석으로 인해,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축적된 정치적 자산을 어느 정도는 거저 스탈린에게 넘겨주었다.

 

스탈린은 그것을 국제적으로 엄청난 정치적 보상을 수확하는데 사용했는데, 이는 만신창이가 된 해외의 사회주의 혁명이 남긴 폐허 속에서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트로츠키도 이러한 패배에 대해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후에 다른 수백만 명도 마찬가지였다.

 

결론: 트로츠키의 잘못된 역사적 방법론

 

소련 내 좌익반대파가 궤멸하고 해외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그룹들이 사산(死産)했던 이유는 트로츠키가 제시한 정치적 분석이 엄청나게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트로츠키는 이후 자신들의 패배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좌익반대파를 자화자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자화자찬은 정치적 지도력을 자기실현적 예언과 혼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이 같은 암울한 결과를 막기 위해 그 자신이 행동하지 않은 것이 그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온전히 인식하지 않음으로써, 스탈린주의가 부상한 것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슬쩍 방기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의 잘못된 리더십으로 인해 누적된 정치적 결과는 재앙이었고, 클리프도 이 점을 인정한다.

 

스탈린과의 투쟁에서의 트로츠키가 보인 오락가락 행보는 트로츠키 자신의 지지자들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행동을 삼가야 한다면, 간부들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파 평당원들은 바로 지금 투쟁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생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전반적인 정치적 전략과 방향성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논지를 상당히 약화시키는데, 반복해서 그 이유를 말하자면, 그가 트로츠키의 잘못된 분석에서 나오는 트로츠키의 잘못된 정치가 러시아에서의 관료주의의 부상에 유리했던 계급 세력들 간의 객관적인상호관계가 형성되는데 일조했던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정치적 실패를 그러한 상호관계에 대치시키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클리프는 트로츠키가 스스로 내린 정치적 평가를 기본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탈린이 승리한 원인에 대해 트로츠키가 제시한 근거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관료적 타락과 스탈린의 부상은 러시아의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과 고립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내전은 계급으로서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체를 초래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재결집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패배하면서 한층 더 약화되었다.”

 

하지만, 클리프가 인정하다시피, 트로츠키의 잘못된 실천 노선 그 자체가 명백히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을 저하시켰으며, 향후 그들 앞에 닥칠 위험 앞에서 그들을 잘못 이끄는 경향이 있었다.

 

클리프가 그것을 일부 인정했던 것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자주 손상되는데, 그 이유는 클리프가 트로츠키주의 반대파가 패배했던 것은 그들의 정치가 아니라 객관적 조건에 기인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클리프의 생각대로라면, 트로츠키의 정치와 그것을 정당화한 분석은 결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클리프의 설명에 따르면, 트로츠키의 진짜 딜레마는 평당원들의 범위를 넘어서는 투쟁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집단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투쟁에 간부들을 참여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간부들을 결집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것이 이론적으로 트로츠키에게 얼마나 큰 딜레마였든 상관없이, 실천에서 트로츠키는 이것을 매우 명확한 방식으로 해결했다. 1933년에 이르는 바로 그 순간까지 트로츠키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관료집단을 쳐다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트로츠키는 자신의 판단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클리프는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서, 앞에서 말한 객관적인 조건들, 즉 계급세력들 사이의 균형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클리프가 보기에, 이것이 당시에 트로츠키가 내린 판단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클리프는 결정론적 환원주의에 빠지는데, 이로 인해 그는 트로츠키의 오류를 눈감아 주고, 결국엔 트로츠키에게 정치적으로 면죄부를 주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당시에 트로츠키의 노선 이외의 다른 노선이 불가능했다면, 스탈린주의의 부상은 이미 운명 지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클리프의 또 다른 입장과 상충되는데, 다른 곳에서 그는 그런 과정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의 정치는 분명 중요했다고 언급한 바 있기 때문이다.

 

만약 트로츠키가 관료집단이 1920년대 중반쯤에는 상당 부분 당-국가에 대한 통제를 확보한 독립적 사회 세력임을 인식했더라면, 그는 이 당-국가로 하여금 국내외에서 혁명적 정책을 채택하도록 유도해봤자 헛수고이며, 그것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회 세력, 즉 노동계급에 호소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만약 트로츠키가 관료집단의 정치 이면에 관료집단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려는 것이 은폐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했더라면, 그는 공산당 내에서 분파 투쟁을 이끌뿐 아니라, 나아가 필요하다면 공산당과 분리하여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한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도 했을 것이다.

 

클리프는 이점을 완벽하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클리프는 거듭 되풀이하여 앞서 언급한 객관적 조건들을 불러내서는, 트로츠키가 범한 그릇된 정치적 판단과 그가 그러한 판단에 기초하여 채택한 그릇된 정책들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다. 무엇보다도, 클리프가 쓴 바에 따르면- 방어적으로 - ‘노동계급의 낮은 의식 수준으로 인해 스탈린주의 반동에 저항하려는 [트로츠키의] 능력이 심각하게 제한됐다고 한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노동자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성숙했느냐에 따라 그들이 가지게 될 지도력의 종류도 좌우된다는 주장을 비웃은 바가 있다는 점을 여기서 바로 지적해야만 한다. 또한 경험적으로는 다르지만 분석적으로는 동일한 맥락에서, 트로츠키는 정치적 지도력의 문제를 무시한 사람들을 비난했다.

 

“‘대중의 그릇된 정책대중의 미성숙함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대체 대중의 미성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그들이 그릇된 정책으로 향하는 성향을 말한다. 하지만 이 정책이 일단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제창자들은 누구인지, 즉 그들이 대중인지 아니면, 그들의 지도자들인지에 대해 저자는 침묵하고 넘어간다. 이런 동어반복을 통해 그는 책임을 대중에게 떠넘긴다. 노동자들의 행진 대열은 언제나 지도부의 노선을 따라간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들에서는 이 각도가 180도 바뀌는 것이다.”

 

불행히도 트로츠키는 이런 추론을 부상하는 스탈린 관료주의에 대한 자기 자신의 정치적 지도력에는 적용하지 않은 듯하다. 클리프 역시 침묵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 그에 따르면, ‘반대파가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었는지를 결정한 것은 그런 객관적 조건이었다.’

 

트로츠키의 화해주의가 단순히 전술적이며, 노동계급이 보여주는 (이른바) 낮은 수준의 활동성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잘못 생각한 나머지, 클리프는 실제로 원칙적인 전략이 그런 정치적 행동에 얼마나 많이 내포되어 표현됐는지에 대해 온전히 인식하지 않고 있다. 트로츠키의 그런 정치적 행동들은 일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대중의 한 결 같이 낮은 수준의 정치적 성숙 정도가 아니라, 관료집단의 성격에 대해 (계급임을 부정하는) 트로츠키의 전략적으로 (잘못된) 이해(오해)와 조응하는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만약 트로츠키가 관료집단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농민이든 노동자든, 생산자들의 이해관계와 모순된다는 것을 일찍, 예컨대 1923년이나 1924년에 충분히 깨달았다면, 그는 그 시기에 펼쳐질 관료집단의 반동적인 대내외 정책을 예측했을 것이고, 당시 부상하고 있던 관료국가에 맞서 공산당과 러시아 노동계급 내에 남아 있는 혁명적 분자들이 이끌고 있던 현존하는 투쟁 속에 함축된 계급투쟁 정치를 지지하고, 그것을 완전하게 발전시킴으로써 그것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지닌 국제적 위상 덕분에, 트로츠키는 동방과 서방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투쟁으로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보완하거나, 그런 투쟁들을 상호 조정함으로써, 이 세 가지 투쟁들을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트로츠키가 노동계급의 국제적 이해에 기초한 이런 전략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러시아와 해외에서 일어난 사태 전개를 뒤집을 수 있었을까? 객관적 조건이 우호적이지 않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이 제 아무리 비우호적이었을지라도, 노동자들의 계급적 이해에 호소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따라서 그런 전략에 반대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와 다른 행동 방침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너무나 오랫동안, 트로츠키는 자신이 관료집단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면,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쳐서, 국제주의와 혁명,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향해 자신의 정치적 방식을 개혁하고 노선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지도자들이 혁명의 수단이지 반혁명적인 방해물이 아님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는 사회학적 논문들을 쓰고, 역사를 연구해서 그것을 가지고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그리고 부하린에게 그것에 담긴 교훈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칠판 사회주의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물질적 이해관계로 인해 트로츠키가 가르치려 하는 심오한 교훈들을 못 보는 이들에게는 무의미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축적된 정치적 밑천을 그렇게 낭비함으로써, 트로츠키는 자신의 반대를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사회학주의로 축소시켰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진짜 적들과 언쟁을 벌이면서, 트로츠키는 노동자들 사이에 있는 그의 진짜 동지들을 소외시켰다. 따라서 트로츠키가 자신의 최종적 패배를 어느 정도까지 준비했느냐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탁상공론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걸 준비했다는 점이다.  



(기사 등록 2017.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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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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