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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자신들만이 정답을 독점하고 있다는 태도의 문제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7. 11.

 

사이먼 하디(Simon Hardy)는 이 글에서 볼셰비즘을 둘러싸고 오늘날의 좌파 내에서 마주치는 문제있는 해석들을 재검토하면서, 전후 좌파가 서로 싸우는 종파들로 무너진 것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있다. 이 글은 더 긴 글의 2부이며 1부는 http://anticapitalists.org/2012/12/28/building-a-revolutionary-organisation-i/에 있다. 볼셰비키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는 1부는, 이미 비슷한 취지의 글을 번역해서 올린 적이 있기에 따로 번역하지 않았다.(레닌주의를 넘어서 http://www.anotherworld.kr/391)

이 글의 필자인 사이먼 하디(Simon Hardy)는 영국의 사회주의자로서 루크 쿠퍼(Luke Cooper)와 함께 <자본주의를 넘어서: 급진 정치학의 미래> 등을 썼고, ‘반자본주의 경향’(Anticapitalist Initiative)에서 활동하며 좌파들이 분파적 과거와 단절해 힘을 모아 민주적 좌파 조직을 건설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서 러시아 혁명의 결과와 그것의 변질에 대한 돌아보기와 평가에 관한 글들을 계속해서 싣는다.

 

출처:

http://anticapitalists.org/2013/01/01/forgotten-legacies-part-ii-the-problem-of-monopoly-in-the-sphere-of-politics/

 



이 글의 1부에서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특히 그동안 망각된 볼셰비즘의 다원주의에 대해 검토한 바 있다. 이번 2부에서는 이 점이 노동계급 사이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소규모 혁명가 그룹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런 그룹들은 광범위한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대표하는 당이라고 자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세력 범위와 목표는 일반적으로 보다 겸손하다. 21세기에 들어서서 트로츠키주의-레닌주의 좌파는 대개 그 규모가 축소되어 이제는 으레 공산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보다 폭넓은 사회적 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데 주로 집중하고 있다.

 

외견상으로 이렇게 묘사한다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전쟁 전후로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해체되는 맥락 속에서 이들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들이 벌인 실제 실천과, 신앙적 종파(confessional sects)로 붕괴되는 그들의 두드러진 경향에 있다.

 

지난 세기에 노동자 운동의 좌익에서 스탈린주의가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그 정당들이 러시아, 중국, 동유럽과 스스로를 동일시함에 따라, 작지만, 고도로 동질적인 조직들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들 각각은 어떤 독트린을 정교화한 그들 나름의 이론적 산물들을 가지고 진실에 대한 독점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런 독트린을 소규모 조직에서 조직적으로 구체화하려고 했다. 트로츠키주의 운동 가운데 상당 부분도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를 모방하거나 스탈린주의에 적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은 조직적인 당 건설이라는 실천에서나, 혹은 유고슬라비아, 중국, 그리고 쿠바처럼 보다 급진적이라고 여겨지는 스탈린주의 정권들에 정치적으로 타협해 왔다.

 

그 결과, 종파라는 조직적 형태로 옹호되는 무수히 많은 새로운 교조들이 탄생했다. 트로츠키주의는 그러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으로서, 1930년대에 브란들러 지지자(Branderlerites)에서 시작해서 1960년대에는 마오주의와 평의회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른 조류들과 경쟁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종파-형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며, 급진 좌파가 보다 큰 다원성과 조직적 단결, 그러면서도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의 독점자들

 

자신의 종파를 나머지 좌파와 차별화시켜 규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지지자들을 자신의 전통이 성문화된 기본 원칙들로 교육시킬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맑스주의에 대해 맞거나 아니면 틀리거나식의 이분법적인 관념이 조장된다. 그 결과, 당의 지지자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방향으로 애를 쓰면서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하려는경향이 생기는데, 이는 비판적 사고의 촉진을 저해한다.

 

비판적 사고는 관점과 이론의 다양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서, 이는 다시 말해 맑스주의가 살아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1944년에 개최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협의회에서 미국 트로츠키주의자 모리스 스타인(Morris Stein)은 이러한 잘못된 관점을 잘 보여주었다.

 

우리는 정치 영역을 독점하고 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쟁도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경쟁자를 표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노동계급은 오로지 하나의 당과 하나의 강령을 통해서만 그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10월 혁명과 10월 혁명 이래로 발생한 모든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던가?

이 때문에 우리는 정치의 영역에서 마치 자신이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인 체하는 모든 당들을 분쇄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강령이 혁명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하게 올바른 강령이기 때문이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거짓이고 반역이다. 우리는 [올바른] 정치를 독점하고 있으며, 독점주의자들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정당이 심지어 수백만 명에 이르는 노동계급 대중 사이에서 8만 명에 이르는 당원을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이는 노동계급 운동 내의 정치적 담론에 대해 절망적일 정도로 권위주의적인 접근법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1000명이 될까 말까한 당원을 거느린 혁명 조직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로부터 나온 것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런 조직은 일단 자신들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거나, 심지어 자신이 노동계급을 조력하는 지도부라는 특수한 주장조차 정당화 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과 지적 자원, 그리고 광범위한 규모의 대중들과 맺고 있는 유기적인 관계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 이런 조직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스스로 자신들을 규정하는 깃발, 전통이나 강령밖에 없다.

 

트로츠키주의 좌파 중에 스타인이 한 말을 듣고는, “그렇다, 스타인은 소규모 혁명가 그룹이 보다 넓은 노동계급 운동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파악했다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칠고 걸러지지 않은 형태로 이루어진) 그의 언급은 실제로는 오늘날의 혁명적 좌파들 가운데 수많은 조직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본적 방법론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장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내재한 위험은, 자기들이 보기에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패배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진리의 영역에서 독점주의자가 되고자하는 권위주의적인 열망을 품는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들은 더 폭넓은 운동 내에서 자기 종파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좌파 운동 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분파투쟁에 익숙한데, 이것은 이러한 기본적인 심리적 가정, , 자기 분파와 더 폭넓은 범위의 좌파, 그리고 노동계급 운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종종 보다 넓은 범위의 운동에 걸린 이해관계보다 자신이 속한 당의 조직적 이익을 앞세우는 것으로 표현되곤 한다.

 

우리는 이것을 영국에서도 되풀이해서 목도하고 있는데, 급진좌파가 단결해서 긴축조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자는 요구가 거듭 거부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물론, 자기 정치에 대한 확신은 어떠한 비판적 논쟁에 있어서든 필수적인 토대이긴 하다. 누군가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해서 무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오늘날의 좌파들은 종종 자신들이 지닌 사상을 실제로 살아 있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 , 투쟁에서 실천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해야하는 것을 그저 수사로 대체하고 있다.

 

논쟁을 벌일만한 가치가 있고, 자신들이 지닌 사상이 실제 정치에도 적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상황을 분명히 인정하는 정도로까지도 나아가야 한다.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인가, 아니면 획일주의(monolith-ism)인가?

 

전후 급진적 좌파 조직들은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에 대한 비밀주의적인 관념과 관련된 사상에 있어서 획일화적으로까지 동질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의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에 대한 생각은 전략적 토론을 당원들에게만 국한시키고 노동계급에게는 닫아놓는 식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내용에서는 몰라도 형식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보다 가까운 실천을 구현했다.

 

이 모델은 이론적 쟁점들에 대해 개인이 입장을 밝히는 것에 대해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직을 이끄는 지도부의 사전 동의가 이루어진 뒤에야 대부분의 이론적, 분석적 쟁점들에 대한 입장을 공표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모델은 당 노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완벽한 만장일치를 강력히 요구하며, 동지적 입장에서 조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규율에 대한 위반으로 규정해 금지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좋은 조직화 방법일까?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최선의 조직화 방법일까? 나는 당 내부에서는 최대로 토론을 벌이고, 대중을 향해서는 최대로 단결하기내부에서 토론하고, 실천에서는 단결하기같은 입장이 혁명적 좌파의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 최고의 이상적인 목표로 여겨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보다 소규모의 혁명적 중핵 조직은 모든 내부적 토론과 당 생활을 대중에게는 비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주장은 그저 분열로 나아가는 경향을 악화시키는 나쁜 실천을 조장하고 있을 뿐이다.

 

소규모 공산주의 그룹의 소수파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할 권리를 아예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종종 모종의 온실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는데, 이런 곳에서는 분쟁이 통제를 벗어나고 서로간의 차이들도 보통 실제보다 더 침소봉대되어 나타난다. 그러면 이로 인해 실제로 분열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종파적 고립(즉 소규모)으로 향하는 경향이 악화된다.

 

따라서 매우 폐쇄적인 공산주의 조직, 즉 토론을 하면서 일정한 정도의 다원성이나 차이를 허용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진정한맑스주의 강령을 구현한다고 고집하는 공산주의 조직들일수록 분열할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소수파들은 다수파 입장과 자신의 노선 차이를 그저 표현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분열해 나오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종 정통 레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전적 모델로 여겨지지만, 필자가 1부에서 주장했듯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논쟁들이나 그들이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나 룩셈부르크, 카우츠키 같은 맑스주의자들과 사이에서 벌인 의견 교환은 전적으로 공개적이었다.

 

이처럼 노동계급의 눈앞에서 논쟁들이 펼쳐졌기 때문에, 살아 있는 투쟁이라는 실제 경험에 비추어 각 입장들을 시험해 볼 수 있었고, 자유롭고 공개적인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 집단주의적, 사회주의적 정치문화를 발전시켜갈 수 있었다. 심지어 비합법적 상황에 놓인 러시아에서조차 맑스주의자들의 망명 공동체는 전체 운동이 다 보는 앞에서 생생한 논쟁과 토론을 이어갔다.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의 소위 고전적모델, 즉 자신이 벌이는 모든 논쟁을 그 내부에서만 비밀스레 진행하고, 노동계급에는 그런 토론의 결론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관점은 사실 운동이 종파라는 조건으로 후퇴한 시기에 발전된 것이다. 이는 20세기 초기 맑스주의가 이룬 가장 훌륭한 전통들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이런 소위 정통적인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종종 언급하는 사례로는 영국의 국제 맑시스트 그룹(International Marxist Group; IMG)이 있는데, 이들은 한때 제4인터내셔널의 영국 지부였고, 1970년대에 타리크 알리(Tariq Ali)와 알렌 쏘넛(Alan Thornett), 그리고 피터 고원(Peter Gowan)이 이끌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IMG상시 분파를 허용한 나머지 협의회가 끝난 이후에도 각 분파들은 해산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런 상시분파들이 벌이는 내부 논쟁으로 조직이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IMG의 사례는 조직에 일정하게 다원성을 허용할 경우, 이는 언제나 혁명가 그룹에게는 재앙, 즉 공통의 전략에 합의할 수 없는 파벌들 사이의 상시적 논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러나 역사는 이와는 약간 다른 것을 보여준다. IMG는 조직 내에 상시 분파가 존재했는데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상당히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그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논쟁으로 인해 그들이 투쟁에 개입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들을 분열시킨 것은 정치, 단순히 말하자면, 지도부내의 서로 다른 진영들이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어떤 이들은 카스트로주의적 방향, 다른 이들은 전략적인 노동당 입당주의 (이들은 후일에 Socialist Action이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이들은 후일에 International Socialist Group/Socialist Resistance가 되었다)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분파를 금지했다면 이런 현상을 방지할 수 있었을까? 지연시켰을 수야 있겠지만, 어쨌든 당시에 대부분의 급진좌파를 관통하며 그들을 갈라놓았던 것은 세계 정치가 미치는 객관적 파급효과와 당시에 변화하고 있던 국제질서였다. 4인터내셔널의 경우도 그랬던 것이고, 이 복잡한 과정을 상시 분파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이에 대한 그 어떤 일반적 분석도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더 나아가, 이 경우에 분파나 경향을 금지하거나, 강령 및 방법에 대해 절대적 동의를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지도부에 충직한 중핵이 당내의 나쁜 요소들을 골라내어 그들을 표적으로 삼아 추방하는 일종의 마녀사냥을 야기할 뿐이다. 분명 우리는 이런 문화를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원성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세상의 현실 - 우리는 그것과 대면해야 한다

 

다원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대중 앞에서 하나의 단일한 당 노선만을 견지해야만 한다고 규정한 당 규약 가운데 일부를 완화해야 한다. 소수파는 다수파의 지지를 받는 정치적 주장을 시행하기 위해 대중 앞에서 침묵해야 하며, 이러한 공동실천을 통해 소수파의 진실성이 실천에서 입증될 수 있다는 주장은 비판적으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볼셰비키들에게 있어서 실천상의 최대의 단결이란 정확히 말해, 공통으로 합의한 정책들을 둘러싼 실천에서의 단결을 의미했다. 하지만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내에서는 이런 실천들을 방해하지 않는 한 이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허용되었고, 그러한 비판이 당을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았다.

 

볼셰비키들은 보다 넓은 당 내에 있는 하나의 분파였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동질성을 요구했지만, 우리가 1부에서 보았다시피, 분파에 소속된 모든 구성원은 하나의 노선을 주장해야 하고, 그로부터 이탈할 경우에 축출이라는 징계를 받았다는 생각은 역사적 기록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든, 우리는 정치적 논쟁을 보다 더 공개적으로 펼칠 필요가 있다는 확실한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비판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실제로는 어떤 조직이 자신의 주장을 정교화하고,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과 차이가 있는 부분을 명확히 하며, 차후에 취하기로 선택한 실천에 훨씬 더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구체적인 행동이 그렇듯이 사상도 공개적 논쟁을 통해 나중에 검증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원칙이나 이론, 관점과 분석을 둘러싼 토론은 해당 조직이 다 함께 착수한 실천적 행동을 두고 벌어진 각기 다른 해석들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수파의 관점을 테스트하기 위해소수파를 침묵시키겠다는 주장 속에는 무언가 결점이 있다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소규모 사회주의 조직은 자신이 제시한 슬로건이나 관점을 실천의 과정에서 입증할 수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총파업을 주장하는 슬로건은 하나의 선전 그룹이 선동을 한다고 해서 입증될 수 없다.

 

일부 그러한 슬로건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을 획득해서 조직의 영향력과 규모를 키우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러한 슬로건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온갖 종류의 생각들을 모두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항상 도전받고, 경험적 검증 뿐 만 아니라 이론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며, 어떤 경우든, 논쟁이 경합하는 종파들 사이에서만 제한되어 공개적으로 벌어지거나, 해당 종파 내부에서만 비밀리에 일어날 때보다는 논쟁을 벌이는 공통된 조직적 틀이 있을 때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을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관점과 계급 대중의 분위기를 둘러싼 논쟁은 언제나 해당 조직이 계급 대중 사이에 뿌리박지 못했다는 점(implantation), 정확한 대중의 분위기를 도식으로 대체하기, 입증되지 않은 일화적인 에피소드들을 좀 더 넓은 노동계급을 관통하는 일반적 추세로 오인하는 경향 등에 영향을 받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혁명적 낙관주의의 프리즘을 통해 자기들의 경험을 독해하곤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보다 일반적으로 위치해 있는 지점에 대해 상당히 부정확한 평가를 초래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이 내세우는 슬로건들이 노동자들의 의식수준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어렵다. 이런 모든 측면에서 자신들이 견지하는 관점을 시험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트로츠키주의 전통에서는 이런 종류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이 종종 첨예한 내부 투쟁이나 분열 사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방법론이 있느냐 여부여야 한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에 자신의 주장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 필요한 것을 쟁취하고자 실질적인 행동들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합의 같은 것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 내가 하자는 대로 하든가 아니면 떠나든가와 같은 표준적인 레닌주의적 사고방식을 완화하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지점에 대해 어느 정도 겸허하게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분열로 인해 나타난 견딜 수 없이 어두운 면

 

정치 영역을 독점하려는 자들로 행동한 종파야 말로 기회주의와 종파주의의 문제와는 차별되는 전후 트로츠키주의 전통에서 발생한 수차례의 분열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는 일반적인 문제이자, 정치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련의 지배적인 실천들과 사고방식의 문제이기도 했다.

 

21세기에 트로츠키주의가 더 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이 바뀌어야 한다. 선택지는 간단하다. , 폐쇄적이고 고립된 상태로 남든가, 아니면, 비판을 받아들이고, 더 한 층의 다원성과 차이에 자신을 개방하여 자신의 이념이 대중의 생각 속에서 제대로 구체화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 말이다.

 

소규모 그룹들은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획일적으로 단일화해야 하는 한, 이후에도 분열하는 경향을 띌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이견이 표출되거나, 더 넓은 범위의 운동과 건강한 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공간도 차단되기 때문이다.

 

만약 조직의 강령이나 전략이 거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 사고되고, 관점들이 그러한 강령을 정교화하는 데 있어서도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런 쟁점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둘러싸고 등장하는 그 어떤 이견이라도 중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찰과상으로 취급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조직의 강령과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자, “중도주의로의 필연적 타락인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차이에 비해 너무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게 중도주의청산주의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로부터의 배신적 이탈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인해, 이 경향은 악화될 것이고, 상대의 혁명가로서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단정적 진술을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합리적 토론은 어렵게 될 것이다.

 

여기에 동반되는 유사한 현상으로 인신 공격적인 비난이 있는데, 이견을 내는 사람들을 두고 경찰의 스파이나 다른 그룹의 첩자, 혹은 타락한 사람이라고 하거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방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일인데, 역사적으로, 특히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에서 좌익반대파 활동가들이 파시스트들이나 친제국주의자들”, “파괴공작원등등의 딱지가 붙여지면서 어떻게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잘 알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관리자들 편에 서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작업장의 투사들을 고립시키고 내쫓기 위해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욕설에 가까운 말을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도 한번 생각해보라.

 

이것도 비슷한 접근방법에서 도출된 것이다. 격렬한 분파투쟁 과정에서 나타나는 당원들에 대한 인신공격은 종종 그들이 평소에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지칭하던 방식의 투영일 뿐이라는 점에서 애석한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사례로, 나는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표명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미쳤다거나 정신이 나갔다라고 일축하는 것을 수없이 많이 들어왔다.

 

[논쟁의 과정에서] 당 중핵은 모든 것을 침소봉대할 수 있고(“우리는 우리만이 가진 이 혁명적 강령의 정수를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이 지닌 사상의 진위 여부를 노동계급 속에서 검증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소수파는 종종 조직을 탈퇴하고 자기 자신의 그룹을 만들게 된다.(“여기는 집어치워야겠어, 이 사람들은 미쳤어!”).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새롭게 형성되는 그룹은 타락하고, 소부르주아화되었거나, 기타 등등으로 변질된 이전의 그룹에 비해 자신의 그룹이 모든 면에서 어떻게 앞으로 전진 할 것인지, 또 어떻게 그들보다 더 향상될 것인지에 대해 수많은 자기정당화 담론을 만들어낸다. (반면, 남아 있는 다수는 분열해 나간 사람들이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고이며,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각 그룹들은 공히 회원 수와 영향력의 감소를 겪을 뿐 만 아니라, 심지어 그 결과로서 조직의 붕괴 가능성에도 직면한다. 종종 이 같은 경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노동계급에게서 신뢰를 잃는다는 것이다.

 

정치영역에서 독점을 추구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의 담지자라고 믿도록 교육받은 탓에, 두 가지의 진실이 충돌할 경우, 그 결과는 대개 붕괴나 분열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는 어떠한 의견의 다원성도 불가능한데, 같은 공간에서 진실과 거짓이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몰아내야만 한다. 전술적 차이는 용납될 수 있지만, 해당 조직의 내적 논리가 전술을 좀 더 일반적인 관점 및 전략과 섞게 되면서, 이견이 눈덩이처럼 커져 급기야 해결 불가능한 논쟁으로 번지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조직의 정치가 역사와 이론, 관점 그리고 기타 등등과 궁극적으로 연결되고 교직된 하나의 총체적 노선으로 여겨질 때, 이차적 전술을 원칙의 문제로 격상시키는 경향이 생겨난다. 예컨대, 이런 문제들 말이다. 우리가 노동당에 투표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노동당이 제출한 발의안을 지지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종종 마치 원칙의 문제인 것처럼 논쟁이 되곤 하는데, 이는 마땅히 원칙의 문제가 아니고 전술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런 나의 주장을 두고 사람들이 상대주의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내 주장이 그런 게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다.

 

내 말은, 세상에 옳고 그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것들은 그냥 옳고 어떤 것들은 그냥 틀리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몇십억 명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체제이므로, 보다 민주적이며 평등주의적이며 정의로운 체제로 대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국가는 본질적으로 계급 지배의 기구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이 사장들을 타도하는데 있어서, 국가를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좌파의 재구성을 위한 필수적인 일부로서, 관점의 다양성과 논쟁을 수용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오히려 변증법을 대화의 기술이라고 규정한 고전 그리스적 변증법 개념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고,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최대로 강력한 변론을 시도하고 발전시키며, 그것을 자신의 입장으로 포섭하거나 혹은 더 강한 반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혁명적 견해와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운동과 그 조직적 형태에서 나타나는 획일주의는 노동자 운동에서 민주적 실천을 지지한다고 자임하면서도 위와 같은 실천을 간단하게 배제하는 방향으로 심하게 경도되었다.

 

우리가 더 유연해질 수 있을까?

 

모든 그룹들이 당 노선또는 정책을 발전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한에서는 올바르다 - 가끔은 그것을 해석하거나,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적용할 것인지에 관해 폭넓은 관용을 허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원 모임을 열고, 정책과 슬로건, 그리고 활동의 우선순위에 대해 투표하는 것이 그 어떤 민주적 조직에서든 필수적이고, 조직을 동원하여 이런 것들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정치 생활에서 필수적이긴 하다. 중요한 점은 지나친 "레닌주의적" 사고는 그 태도에 있어서 과도하게 유연하고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정치에서 노선은 특정 수준의 일반성에서만 종종 작동하게 된다. 이는 상당히 구체적인 무언가를 지칭할 수도 있고, (예컨대, 선거에서의 투표) 분석이나 이론적 논거를 둘러싼 보다 일반적인 논점일 수도 있다 (제국주의, 개량주의의 본질, 기타 등등).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사례에서 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러시아의 사례로 눈을 돌려보자.

 

슬로건과 전술에 대한 레닌의 이해에는 종종 그것과 전략적 목표 사이에 일정 수준의 타협이 존재했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외 망명지에서 글을 쓰면서, 그는 러시아에서의 전략적 목표로 혁명적 패배주의(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켜서 종국적으로는 혁명으로 귀결시키는 것)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 현지에서 선보일 선동 슬로건으로 러시아에게 패배이라는 입장을 옹호하고 있지는 않았다. 장 폴 주베르 (Jean-Paul Joubert)는 레닌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따라서 레닌의 당시 입장을 패배주의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다. 그는 혁명적 패배주의를 하나의 전략 노선, 즉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노선으로 인한 결과로 여겼는데, 그 혼자만 이런 노선을 옹호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저작들을 세심하게 연구하다보면, 평론가들이 그의 뒤를 이어 패배주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 관계로 우리가 그러리라고 예상하는 것보다 레닌이 이 단어를 훨씬 덜 빈번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종적 분석에서 레닌은 혁명적 패배주의를 공동행동을 위한 전제조건, 심지어 예비단계로도 간주하지 않았다. , 그러한 공식은 1915년에 그가 나셰 슬로보(Nashe Slovo) 그룹에 보낸 통합 제안서나, ‘짐머발트 좌파의 결의안 초안과 성명서 등,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부하린과 같은 지도자들은 노동계급 내의 보다 광범위한 반전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더 일반적인 반전 슬로건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레닌은 혁명적 패배주의가 왜 옳은지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넓은 의미에서 내전이기도 했던 1917년 혁명은 그의 핵심적 관점이 타당했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군 연대(聯隊)에 소속된 볼셰비키 소속 병사들이 러시아군 (스스로와 그 동지들까지)이 적군인 독일군에게 패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전을 활발히 벌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보단, 레닌의 글은 군대의 끔찍한 조건과 아울러 장군들과 정부 각료들의 무정하고 냉혹한 태도, 그리고 전쟁의 팽창주의적 본질 같은 것들에 좀 더 맞춰져 있었다.

 

독일과 러시아 제국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전략적 개념이 유지되는 한, 현장에서 사용할 슬로건에 대해서는 유연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표면상 이것은 멘셰비키의 국제주의 (전쟁에 반대할 뿐 제국주의에 대해선 반대하지 않는)타협하는 것처럼 (잘못) 보인다.

 

하지만 당원들과 지역 지도자들이 어떤 전략을 실천적으로 실행해 볼 수 있는 재량의 여지를 어느 정도 주는 것은 조직 건설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레닌은 1914년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당 지부들이 당 중앙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만의 발간물이나 기타 등등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비록 많은 좌파 그룹들이 자신을 당 이전의 조직 또는 당 없는 분파들로 자칭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마치 자기들이 훨씬 더 큰 당인 것처럼 실천한다. 이것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들이 대중 정당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과시적인 요소들, 예컨대, 당원구조와 지부, 전국위원회, 정치위원회, 편집국, 예비 청년 조직 등등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신문을 발간하고, 거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명확한 강령을 갖고 있다. 그들은 당처럼 조직하고 당처럼 행동한다. 사실은 그저 아주 작은 당일 뿐 인데 말이다. 사실 당 이전 조직에서 빠져있는 유일한 대중정당의 과시적 요소는 외부적인 차이를 표명할 권리뿐이다. 왜 이것만 당 이전 단계에서 꼭 없어야만 하는 한 가지 요소로 선택되는가?

 

정말이지, 대중 앞에 있을 때는 거의 모든 정치적 쟁점에서 단결된 노선을 내보여야 한다는 종류의 그런 맹목적인 집착은 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추정컨대, ‘당 이전 조직은 당이 없는 분파고, 분파는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만약 분파 내 일부가 이견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그 이견이 상당히 근본적인 것이라면 어찌 되는 것일까? 그리되면, 그 분파는 분열할 것이고, 그 결과로 규모에서 보다 작은, 당 없는 분파 두 개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전후 좌파 내에서 나타난 획일주의의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과적 개입을 위해서는 대중 앞에서 단결이 꼭 필요하다며 이런 주장들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지만, 대중에 대한 개입에 있어서 분열보다 더 큰 방해물이 있을까 생각하기 어렵다. 보다 건강한 혁명적 좌파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유연성과 상식을 발휘해야 한다.

 

결론

 

이 모든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 어떤 혁명적 조직이든 그 안에는 서로 경합하는 경향들과 노선들이 있는 법이고, 따라서 우리는 보다 유연한 조직들을 건설하는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직들 안에서 우리는 이런 차이들을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런 차이들을 장점으로 이용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러 조직들이 이런 현실을 잘 다루지 못해 왔다는 사실이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일부이다. 따라서 스스로를 혁명정당이나 혁명정당의 맹아라고 여기는 어떤 조직이라도 다원성과 개방성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직면해야 한다.

 

이런 차이들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고, 논쟁을 봉쇄하며, 민주적 참여보다 중앙집중주의를 선동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더 이상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다가올 수년간 우리의 목표는 영국에서 혁명적 조직의 단결에 기초를 놓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불가피하게 기존의 각기 다른 정치 경향과 개인들을 결합시킴과 동시에, 이제까지 혁명조직이란 곳에 한 번도 몸담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조직을 확장해야 한다. 이는 (시리자와 유사한) 새로운 급진 좌파 연합의 일부를 이룰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본가에 맞선 보다 강력한 혁명적 도전은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과거의 포로로 전락하지 않으면서도, 과거로부터 얻은 중요한 교훈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롭고 상당한 규모를 갖춘 혁명적 조직은 그 자신만의 전통을 만들 것이며, 그저 1920년대와 30년대 (혹은 60년대와 70년대)의 전통에 만족해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1917년 이후의 볼셰비즘에 대한 고정된 해석에서 자신들의 모델을 도출해 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정당이 오랜 시간에 걸친 지속적인 논쟁과 그 사상의 진화 속에서 어떻게 건설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 보았듯이, 볼셰비키 당에 대한 해석 역시도 그 정당을 과도하게 동질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전후 트로츠키주의, 레닌주의 조직들의 획일주의를 뒷받침했다 (애석하게도 이는 스탈린주의가 혁명적 좌파에 끼친 영향의 결과다).

 

우리가 종점 (1917~21)에서 시작해 그것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살아 있는 반대파 세력으로서 볼셰비즘이 성공하게 된 실제의 점진적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레닌주의로 알려진 것에 그토록 필수적이었던 것, 즉 노동계급 정당에서 위와 같은 종류의 유기적 발전을 재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두 가지 인용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앨런 월드(Alan Wald)의 주장으로, 그는 1995년에 <시류에 맞서서(Against the Current)>에 글을 쓰며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실패를 검토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 바 있다.

 

사회주의 정치 중핵의 목표는 광범위하고 민주적으로 기능하는 집단적 지도력을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는 복수의 경향들과 다원주의를 제도화하는 조직에 기초하며, 공시적으로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도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의 균형을 잘 맞추는 조직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제4인터내셔널의 머레이 스미스(Murray Smith)2002년에 SWP의 존 리즈(John Rees)와 앨릭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에 맞서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주어진 시점에 살아 있는 혁명정당들은 모든 종류의 조류들, 경향들, 흐름들을 다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 중 모두가 혁명적이지도 않으며, 일부는 초좌익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볼셰비키 당도,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새로운 당 건설에 임하면서 다양한 세력들과 기꺼이 함께 일하려는 마음과 공통의 경험에 기초한 논쟁을 통해 스스로 명료하게 납득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임해야 한다. 현 시기의 과제에 대해 혁명 정당이나 가질 법한 종류의 기준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무익한 일인데, 이는 사실 기존 극좌파 조직들의 보다 규모가 큰 버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건설할 미래의 대중적 혁명정당들은 분명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WP)이나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 혹은 노동자 투쟁(Lutte Ouvrière)이 좀 더 규모가 커진 것일 순 없다. 오히려 그런 조직은 개방적이고 다원적이며, 비위계적이어야 한다.”

 

비위계적(non-hierarchical)”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논쟁을 할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 레닌주의자들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기풍에 따라 무언가를 수행하고자 할 때 일종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인간의 자기해방과 다가올 공산주의적 해방이라는 원칙에 따라, 나는 좌파가 가능한 한 위계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이곳에서 자본주의에 맞선 효과적인 행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은 채 말이다.

 

하지만 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새로운 급진적 기획에서든 핵심적인 구성요소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 공공연하게 위계를 거부하는 좌파와도 이런 문제를 둘러싸고 충분히 토론해야 한다. 그 어떤 새로운 조직이라 해도 해당 조직이 기능하려면, 모종의 민주적인 위계는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실천에서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는 논쟁과 서로 힘을 합쳐 그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에 따라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혁명적 전통과 정치를 새롭게 재개해야하는데, 이는 우리에 앞서서 존재했던 혁명가들이 남겨놓은 것들 가운데 최상의 것들은 받아들이되, 그로부터 재차 독립하여 새로운 길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한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옛 공산주의 운동의 분파 투쟁은 로드맵이 아니라, 가이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용한 스미스(Smith)의 글에서 마지막 부분은 끊임없이 그의 말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점이나, 오늘날 급진 좌파가 처한 현실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의 손등에 새기고 다닐 만한 가치가 있다. [, 스미스가 말한 종류의 노력을 기울지 않는다면,] 이러저러한 이념적 분파들과 볼셰비키를 자임하는 여러 그룹들 가운데 그 어떤 곳도 미래의 혁명정당의 기반을 형성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당의 중추를 아주 잘 형성할 수도 있다. , 그들이 협소하게 이해된 자신들의 조직적 이해관계보다 새로운 당/조직을 우선에 둘 경우에만 말이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Socialist Alliance에서 그렇게 하지 못했듯이) 그런 조직들은 얼마 안 가 쪼개질 것이고, 그저 옛날과 똑같은 악순환을 반복하며, 혁명적 좌파는 신뢰감을 주거나 지속가능한 그 무엇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노동당 좌파의 비난만 확증시켜 줄 것이다.

 

요점은 간단하다. , 영국의 혁명가들이 재편성되어 더 강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다 넓은 범위의 노동계급과 급진세력에게 우리가 신뢰감을 주는 조직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 부분에서 철저히 실패해 왔다.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가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단결되어 있으며, 보다 신뢰감을 주는 혁명적 조직의 일부가 아니라, 지금처럼 고립된 소규모 그룹만을 계속 건설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빠져들었던 비참한 상황을 탐닉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 자신이 자초한 지옥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은 계속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기사 등록 201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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