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1. 지금의 사회는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사회가 정해준 지정성별을 기준으로 노동을 분배한다. 그것은 남성에게 상품과 재화의 생산노동에 대한, 여성에게 돌봄 등 재생산노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부과한다. 이처럼 재생산노동을 개별 가정과 특히 여성에게 떠넘김으로써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적인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상태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인간 관계에 필요한 노동(관계노동)과 성적 교류에 관한 노동(성적노동)을 조직한다. 즉 남성을 욕망의 담지자, 지배하는 자, 독립된 자로, 여성을 타인의 욕망에 대한 봉사자, 돌보는 자, 관계에 매인 자로 규정하고, 이러한 역할 분담에 기반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각기 다른 관계노동과 성적 노동을 할당한다.
이것은 지금의 사회가 사회적 평등과 개인의 개성 발현보다 상품생산의 효율성과 착취와 억압을 통한 체제 유지의 용이성을 우선하는 방식으로 노동을 조직하는 데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 분배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하려면 이를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서 만들어졌으며 앞으로 변화될 수 있는 사회구성 방식이 아니라 영원한 자연적 본질로 나타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만이 필요하다.
여성-남성의 성별이 정해져 있고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젠더이분법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2. 직접적인 물리력과 강제력에 의해 누군가를 복종하게 하는 것은 가장 원시적인 지배의 형태이다. 지배는 피지배자 자신의 욕망을 지배 체제의 동력으로 삼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완성된다.
여성주의자인 벨 훅스는 그래서 카섹시스(carthexis)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카섹시스(carthexis)는 연애감정의 특성이라고 하는 설렘, 매혹, 욕망 등을 뜻하며 벨 훅스는 사랑은 여기에 책임과 배려와 이해 같은 여러 가지가 갖추어져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카섹시스(carthexis)는 흔히 연정, 연심, 연애감정, 로맨틱 끌림이라고 더 많이 일컬어지지만 사실은 근대적 양식의 연애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며 근대적 연애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는 감정이다.
카섹시스 일반을 근대적 연애에 대한 일반적 시나리오(각본)와 동일시하는 데서 발생하는 사회적 효과는 사람들이 카섹시스를 긍정하고 충족하기 위해서 그 각본을 자발적으로, 열의를 바쳐 수행하게 되며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를 이상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각본이 포함하는 젠더이분법 및 그것이 함축하는 노동분담(생산노동, 재생산노동, 관계노동, 성적 노동을 포괄하여)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긍정하고 스스로 재생산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특히 데이트폭력 문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내면적인 동기에 의해 그러한 폭력적 관계에 들어가고 머무르게 되는 근본적, 구조적인 원인이 된다.
보통 생각하는 바와 달리, 데이트폭력은 상대를 합리적으로 잘 선택함으로써, 감정적으로 상대로부터 자립함으로써, 주체적인 가치관을 가짐으로써, 대응을 똑똑하게 잘 함으로써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근대적인 연애 각본에 내재한 성별 권력관계가 나타나는 것이며 그 관계에서 더 낮은 위치에 있는 그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가정폭력, 성폭력, 기타 관계 내의 여성폭력들도 대체로 다 마찬가지다.
요컨대, 근대적 연애 각본은 성별화된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의 완성이다.
3. 다른 모든 감정들이 그렇듯 카섹시스 역시 원래부터 개인, 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감정이다. 따라서, 근대적 연애 각본을 통해서만 카섹시스가 충족된다고 보는 것은, (사실 이런 식으로 인생의 맥락에서 한 가지 욕망만을 분리해내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지만 편의상 도식화해 보았을 때) 오로지 그 욕망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도 걸림돌이 된다.
4. 다시금. 불평등하고 획일적인 연애는 상대를 합리적으로 잘 선택함으로써, 감정적으로 자립함으로써, 주체적인 가치관을 가짐으로써, 대응을 똑똑하게 잘 함으로써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카섹시스를 만들어내는 현재의 인간관계 구성 방식 자체를 버릴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
근대적 연애가 현재의 지배 체제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라는 것은 거꾸로 말해서 그것을 바꾸는 것이 현재의 지배 체제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근대적 연애 각본에 내재한 성별 권력관계가 관계 내 젠더폭력을 낳는다는 것은 거꾸로 젠더폭력에 맞서는 투쟁은 이 각본을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연애관을 해체하자고 주장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5. 이것은 근대적 연애 각본을 우리가 따르도록 만드는 사회 전반적 구조를 바꾸는 변화의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몇 가지의 대안적인 방향들이 제시되어 왔다.
1)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경쟁과 타산보다 협력과 연대로 특징지어지도록 사회를 변혁하는 과정에서 ‘적대적이고 무심한 세계 속에서 서로에게 유일하게 의미있는 두 사람’의 서사를 ‘(어떤 부분에 대한, 어떤 방식의 애정이든) 세계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는 둘 이상의 사람(반드시 둘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의 서사로 바꾸는 것.
2) 지정성별이 아니라 개인의 개성과 자유의지에 입각해 노동을 분배하고 조직하는 사회로 변혁하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면서 천상 여자, 천상 남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서사를 ‘이러저러한 범주들로 환원되지 않는 자신과 상대의 개인성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되는’ 서사로 바꾸는 것.
3) 소유와 축적에 집착하지 않아도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향유하는 데에 보다 집중할 수 있으며 사회가 개인과 적대하고 개인을 착취하는 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발전의 조건이자 결과가 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 개개인을 고립된 원자로 바라보는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관계망 속에 있는 일부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세계관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전적인 소유와 독점의 욕망’ 대신 ‘상대를 구성하는 관계들을 사랑하고 발전시키는 낭만적 사랑’의 상을 형성할 수 있다.
4) 물질적 생존과 특히 아이의 양육을 위해 어떻게든 가족을 유지할 필요가 더 이상 없게 되는, 재생산 노동의 대부분이 사회적이고 공적인 책임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랑의 이상은 ‘그 상태로 변치 않는 영원한 결합’ 대신 ‘성장하고 나아가는 인생의 흐름 속에서의 조우’로 바뀔 수 있다.
5) 가족과 성적 파트너십을 재생산 노동이라는 어마어마한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것이 더 이상 특권적이지 않을 수 있는 하부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구조 위에서 카섹시스가 개입된 관계는 일차적으로 카섹시스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는 관념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카섹시스가 관계를 규정짓는 정도나 방식은 개인에 따라, 관계에 따라 다양할 수 있으며, 이것을 인지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연애에 불필요하게 부과되는 무게를 대폭 덜어주고 개인의 상황과 욕망에 맞는 다양한 양상의 관계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쉽게 말해, ‘설레면 좋아하는 거지’ ‘좋아하면 사귀는 거지’라는 도식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될 것이다.
6) 무엇보다, 일종의 표준계약으로서의 연애라는 형태 자체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계약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의 독특한 문화이며 혼인 계약의 예행연습이자 모방으로, 여성과 아이들의 생존을 위해 이러한 계약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더 이상 이러한 계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의 감정과 상호교류가 어떤 암묵적인 계약의 조항에 따라 흘러가야 한다는 기대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기사 등록 20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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