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트럼프는 전쟁 위협을 멈춰라
지난 주말에 뒤늦게 KBS의 ‘전쟁과 여성’ 3부작을 봤다. 전쟁이 가장 힘없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했는지... ‘절대 다시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트럼프의 “완전 파괴”, “산산조각”, “심판의 날” 발언에 욕지기를 참기 어렵다.
얼마 전엔 한국거주 미국인 철수작전 책임자가 방한했다 하고, 매티스 미국방은 ‘서울에는 안전한 군사옵션’을 언급했다. 지난주 또 핵폭격기가 우리 머리 위에서 북폭 연습을 했고, 강남 삼성타워팰리스에서는 입주민들에게 ‘전시 행동 요령’ 문서를 배포했다.
이 모든 게 ‘위험천만한 김정은’이란 논리로 뒷받침된다. 하지만 북한은 2007년 6자회담 때 핵시설 불능화를 약속했었고, 다음해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한 적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평화를 원치 않았다. 트럼프는 지난 8~9월에 한미일 통합MD 구축과 그 화룡정점으로서 사드 배치를 노리며 고삐를 당겼다. 베이징대 진징이 교수도 지적한다.
“미국은 북핵 게임에서 전략 이익을 챙길 대로 챙겼다.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을 유달리 강화했다....동북아에서 중국을 겨냥한 티엠디(TMD·전역미사일방어)와 한-미-일 삼각군사동맹 구축에 박차를 가하며 동북아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다. 이제 북핵은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긴고주(손오공 머리의 금테처럼 사람을 통제하는 물건)가 됐다.”
20년전, 전세계 국가들 외환보유고의 90%가 달러였지만, 이제는 60% 아래이고 갈수록 그 비중은 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는 주먹’이 등장할 차례라고 트럼프는 생각할 것이다.
문재인은 지난 7월 이 깡패를 만났을 때, 이미 사드 배치를 약속하고 돌아왔던 것 같다. 말이 안통하는 깡패 앞에서 “기는 것뿐 아니라, 짖으라고 하는 대로 짖어야”하는 걸 왜 이해못하냐지만, 정말 그게 깡패의 칼부림을 막을 수 있을까?
이제 문정부가 트럼프 압박대로 핵잠수함까지 도입하면, 한반도는 그야말로 24시간 긴장 상태가 될 것이다. 또 트럼프는 이지스 구축함 증강, 해상 요격체계 구축, 한미일은 정보공조 강화, 공동의 교전수칙 마련과 군사적 통합을 차근차근 강행할 것이다.
‘핵은 핵으로만 막을 수 있다’며, 탈핵에 반대하는 이유도 여기 있음을 숨기지 않는 자들이 바로 그 논리가 북한을 움직인다는 걸 모른척하는 건 정말 이해불가이고, 트럼프에게 전쟁 결정권이 있다는 것도 정말 끔찍한 일이다.
● 전교조가 기간제 교사와 비정규직들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
거대한 촛불을 거친 후, 새정부가 비정규직 정규직화까지 꺼내면서,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조직화의 가능성과 기회가 열리고 있다. 각종 노조에도 문의, 상담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민주노조들은 문을 활짝 열고, 기댈 곳 없던 노동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자동차판매노조가 금속노조 가입에 실패한 것이나, 기아차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1사1노조가 깨진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을 보여줬다.
울타리 안 조합원들의 권리와 요구에 눈이 머물면, 울타리 밖의 더 많고 힘든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게 어려울 수 있는 것같다. 여기에 최근 기간제 교사에 대한 전교조 중집과 대의원대회의 결정이 덧붙여졌다.
전교조 활동가들의 고충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단일 정치조직이 아닌 다양한 생각의 조합원이 있는 대중조직으로서, 법외노조의 칼바람을 같이 맞던 일부가 탈퇴까지 말하는데 간단히 무시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최근 상황을 보고 실망해서 전교조를 ‘반노동 기득권 집단’인양 매도한다면 너무 과하다. 우파의 마녀사냥과 정권의 탄압을 온몸으로 받으며 싸워온 전교조다. 여러 사회운동이나 비정규직 투쟁에도 연대해 왔고, 학교비정규직의 조직화에도 여러 도움을 줬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근래 과정들의 문제점과 아쉬움을 없앨 순 없다. 일부 사람들은 ‘어차피 현실적으로 모든 기간제를 즉각 정규직화할 순 없는 상황에서 상시지속은 정규직화하고 나머지도 고용안정 처우개선을 하자는 입장이 뭐가 큰 문제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지금의 구체적 상황과 맥락에서 ‘기간제 교원의 일괄적이고 즉각적인 정규직 전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 채택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내고 있는지 말이다. 그것을 우파가 선전에 악용한 것은 부차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문구가 전교조 조합원 일부는 다독였겠지만, 희망을 찾으며 일어서던 비정규직들에게 큰 실망과 상처를 줬단 점이다. 더구나 노동유연화의 희생양인 기간제 교원의 대다수가 상시지속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규직화를 기본으로 언급하며 예외를 열어두는 게 더 타당한 접근이었다.
‘학교 현실을 잘 모르고 어설픈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탓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런 거친 해법에 담긴 합리적 핵심을 받아서 현실적이고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는 게 전교조 지도부와 활동가들의 몫이 아닌가.
물론 힘들게 임용을 준비해 온, 통과한 사람들은 뭔가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정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서, 현장 경험과 경력을 인정해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다른 부문에서도 있어온 일이다. 중요한 건 교사로서 자질과 능력이며, 형식적 시험보다 살아있는 경험이 더 좋은 잣대일 수 있다.
그런 해법을 못 찾으면 정규직, 교대생, 기간제간의 ‘을들의 싸움’을 벗어나기 어렵고, 득보는 건 사학재단과 교육관료들이라는 걸 전교조 지도부와 활동가들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이거야말로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정 힘들었다면, 섣부른 결정을 하기보다 시간을 두고 고민과 논의를 지속하는 게 나았다. 그 논의 속에 전교조의 자랑스러운 역사만이 아니라, 한계와 약점도 돌아봐야 했다. 그런 성찰 속에서 정규직 교사만이 아니라 교육 현장의 모든 노동자를 품는 더 큰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고민도 나눌 필요가 있다.
언제나 앞선 고민과 문제제기를 던져 온 전교조 활동가와 조합원들이라면, 지금 민주노조 운동이 부딪힌 문턱을 넘어설 용기와 지혜를 기대해 볼만 하다고 믿는다. 울타리 안의 조합원만이 아니라, 울타리 밖에서 힘겨워 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거라고.
지난 중집과 얼마전 대의원대회에서는 결국 매우 아쉬운 결과가 나왔고, 정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기간제 교사 등의 정규직화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감정적 대립과 불신이 아니라, 이런 해법을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면서도 동지적인 논의를 하고,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
●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혁신할 것인가
지난 5월 한국여성민우회의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토론회 자료집은 너무나 알찬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를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는(최근에는 거의 하루에 하나씩 글을 발표하고 있다.) 노동자연대 분들이 이상하게 쟁점을 왜곡하고 논의를 망쳐서 이 토론회와 자료집의 가치가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거 같아 너무 안타깝다.
여기 담긴, 반성폭력 운동의 개념들을 재검토하고 혁신하자는 문제의식은 매우 중요하고 타당한 것이다. 원래 류한수진 동지와 동료들도 앞장서 이런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온 바 있고(http://www.anotherworld.kr/261), 나도 덕분에 그런 토론에 같이 하면 배우고 생각을 정리해 본 적이 있다.(http://www.anotherworld.kr/257)
특히 자료집에서 ‘그런 개념들이 원래 운동과 투쟁의 맥락에서 등장했는데, 그것이 절차와 제도의 언어로 굳어지면서 그 의미가 흐려졌다’는 주장들은 인상적이었다. 반성폭력 운동은 피해자를 투쟁의 주체로 상정했고, 그런 개념들도 그 투쟁의 무기로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점들이 잊혀져 왔다.
“‘보호받아야 할 성’으로서의 피해자에 대한 인식이 공동체 내에서 팽배해지면 피해자는 자신의 ‘순수한 피해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서사는 끔찍한 고통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이는... 피해자를 약한 존재, 고통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게 하여 성폭력 사건의 해결에 있어서 피해자를 소외시키게 되는 것이고...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성폭력 개념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더 문제인 이유는 성폭력의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이 흐려지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데 있다.
“성폭력 피해는 개인의 고통과 치유의 문제로 병리화되고, 피해자는 ‘환자’로 환원된다. 정신과 상담의 공간에서 성폭력의 피해 경험/ 피해자의 정체성은 저항하고 싸워야 할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의 ‘무의식’적 기제를 탐구하는, 또한 약을 통해 분노를 절제시키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전유되고 타자화된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은 결코 개인적 문제가 아니며, 피해자의 고통도 개인의 탓이 아니다. “피해자가 해결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이유는 사건의 의미가 제대로 소통되거나, 토대의 변화 조짐이 보이지 않을 때이다.” 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의 대의는 여전히 타당하며, 그것은 새롭게 혁신, 강화돼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만들고 싶었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특정 상황에서 피해자가 된 여성들이... 새로운 해석틀과 언어를 얻고, 싸우는 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무엇보다 다음에는 더 대응력이 높아지고 더 잘 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싸우려면 목표가 있어야 하고, 동지를 규합해야 하고, 상황을 판단하고, 전략을 짜고 수정해가며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기존의 개념을 재검토하면서 성폭력의 (확장된)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고, 피해자를 투쟁의 주체로 설정하며, 더욱 더 강력한 연대를 건설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봐도 노동자연대 분들의 주장은 철저한 아전인수와 엄청난 곡해가 아닐 수 없다.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폐기하고, 개인적 문제로 접근하며, 피해자가 주체로 나설 여지를 차단하는 타자화와 대상화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피해자와 연대한다는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 연대를 파괴하려는 집요한 의도만이 남았다.
이 자료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한 성폭력 사건 생존자의 글이었다. 이 글은 성폭력 피해자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기여를 한 것이며, 피해자와 연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가 잘 담겨 있다.
“동지들이 자기 성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했던 운동이 바닥은 아니었구나 싶어 숨통이 조금 트였다.... 성찰하며 변화하는 모습 자체도 보기 좋았고, 나에게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힘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조금씩 자존감이 회복된 것 같다...
“피해자는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사건화할 때 피해자는 이미 온 몸으로 운동에 메시지를 던지는 투사이다. 피해자의... 울부짖음은 어떤 훌륭한 여성학 책보다 동지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남기고, 피해자가 매일 밤 흘리는 눈물은 운동을 정화시킨다...
“피해 경험을 통해 알아차린 진실을 통해 그녀는 누구보다도 조직의 썩은 부위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댈 수 있고 건강하고 선진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피해자는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뿌린 씨앗이 싹트고 꽃 피우도록 물과 거름을 주는 것은 동지들의 몫이다. 피해자가 가진 분노의 에너지가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동지들에게 달려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성찰을 촉구하는 아래 대목의 울림은 엄청 크다. 이 부분을 읽으면 정말 돌아보며 생각하게 된다. 내가 운동사회에 오래 남아있게 된 것은 계속해서 뭔가를 못 본척하고 침묵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나로 인해 누군가는 상처입고 운동을 떠난 게 아닐까? 노동자연대 분들도 부디 성찰해보길 바란다.
“권력에 맞서고자 운동을 시작한 내가 또 다른 권력으로 내 옆의 동지를, 가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수십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도 신념을 지켜 온 동지라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혹시 곪고 썩은 부위를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 성찰이 없는 운동, 또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운동은 행복할 수 없다... 당신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고 지금 용기를 내어 피해자에게 손을 내밀 때, 우리 운동은 한 걸음 전진할 것이다.”
(기사 등록 2017.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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