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세상읽기 - 베네수엘라/ 소녀상/ 한반도/ 성찰과 변화

전지윤

 

베네수엘라는 어디로

 

베네수엘라의 상황에 대해선 먼저 우익들의 폭력적 반혁명 시도와 제국주의 개입 시도에 반대한다는 점이 최우선이다. 특히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민중의 고통운운하며 군사옵션을 언급한 것은 참으로 역겹다. 어디나 멋대로 개입해 엉망진창을 만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제국주의자는 자신의 신나치 똘마니들이나 단속해야 한다.

 

하지만 2년전 총선에서 우파 야당이 크게 승리한 것을 단지 반혁명 우파와 미국 탓만으로 돌리긴 어렵다. 언론환경과 선거제도가 왜곡한 결과도 아니다. 같은 환경과 제도 속에 20년 동안 거듭 차베스당이 승리해왔기 때문이다. 상층 차비스타와 정책에 대한 기층의 불만이 야당의 승리를 낳았다고 봐야 한다.

 

경기불황과 물가 폭등, 심각한 식료품과 생필품난, 고위층 부패 등이 그 배경이었다. 특히 빈민층과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이 극심하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주로 석유와 고유가에 의존해 온 볼리바르 혁명의 약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차비스타 관료들의 대응도 적절하지 않았다.

 

천연자원과 미개발 지역에 대한 다국적기업의 투자 유도, 민영화 추진, 세제혜택 제공 등은 볼리바르 혁명의 대의와 어긋난 것이었다. 이런 대응이 과연 경제적으로 효과적이었는지도 의문이다. 2013년의 통화 평가절하는 실질임금도 하락시켰다고 한다.

 

단기적 정책만이 아니라, 장기적 방향에도 아쉬움이 있다. 에너지 외에는 사적영역을 잘 건들지 않아오면서 지난 20년 동안 경제에서 사기업의 비중은 오히려 더 늘었다는 것이다. 식품, 생필품 부족에 대한 대처가 어려운 것도 이와 관련있어 보인다. 우파야당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선거와 집회의 금지, 의회해산 등으로 대처하는 건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마두로 정부는 야권이 불참한 이번 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를 통해, 여소야대의 기존의회는 해산하고, 앞으로 반대파의 선거 출마를 제한해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려 한다.

 

또 군부를 앞세워 반대파를 재판, 구금하고 있다. 상명하달식의 통합사회주의당은 이 과정을 관료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이는 분명 반정부 움직임을 막는 신속하고, 효과적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익만이 아니라 좌익 반대파의 목소리도 막게 될 것이다.

 

당내의 이견과 토론, 비판이 가로막힌 통합사회주의당은 혁명의 지도부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군부는 효율적 기구이지만 결코 민주적 기구가 아니다. 현실의 고통이 여전하다면 민중의 불만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민중이 더 이상 혁명을 지지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차비스타 관료들이 혁명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커진 것에 있다. 마두로가 가야 할 길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권위주의 통치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목소리가 조직화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 방향을 주장하며 마두로를 비판하는 좌파는, 제국주의와 우파를 돕는 사람들이 아니다.

 

차베스는 1999년에 높은 투표율 속에 좌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한 국민투표를 통해 제헌의회를 구성했고 무상의료, 무상교육, 석유산업 국유화 등이 담긴 헌법을 만들었다. 99년의 혁명정신을 실현할 주체는 비판을 가로막는 상층 차비스타 관료들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기층 차비스타 민중들일 것이다.

 



소녀상의 확산이 우려스러운 일일까?

 

예술작품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기에 불만족하는 반응들을 탓하긴 어렵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왜 전쟁의 참상을 직감하지 못하게 추상적으로 표현했냐는 반응도 있을 수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에서는 여성과 아이들만 피해자로 형상화한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소녀상을 두고 나오는 다양한 불만의 목소리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곳곳에 세워지는 소녀상을 두고 소녀상 마켓팅, 민족주의의 상업화, 이승복 동상과 뭐가 다른가’ ... 이런 주장들을 보면 과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2015년에 터키 해변에서 숨진 쿠르디가 발견된 이후 사진, 이미지, 그것을 표현한 수많은 작품들이 전세계로 번져나간 적이 있다. 당시에 난민이 다 쿠르디같이 아이도 아니고 바닷가에서 죽은 것도 아니다란 반응은 없었다. 쿠르디로 상징되는 아랍 난민들의 처절한 상황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전시성폭력피해자를 너무 단순하고 수동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지적들도 부당한 점이 많다. 빈의자, 그림자, 어깨의 새, 꽉쥔 주먹, 맨발, 들린 발뒤꿈치 등은 다양한 의미를 담았고,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데 말이다.

 

특히 그 응시의 눈. 어떤 상황에선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으로 가해자를 당황하고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의 존재를 견딜 수 없어하는 아베 정부를 보자.

 

(피해자가 너무나 괴로워하는 책을 내놓고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사람도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소녀상에 만족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통의 치유를 바라면서도, 잊혀지지는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소녀상과 반일민족주의가 다른 목소리들을 가려왔다는 말도 크게 와닿진 않는다.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갔다는 목소리?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다는 목소리? 그건 가려진 게 아니라 설득력이 없었던 것 아닐까?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의 고발은 베트남전 한국군성폭력, ‘미군위안부등이 공론화되는데도 도움이 됐지, 방해가 됐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미 75년에 나온 총련계 피해자의 증언이 15년 넘게 잊혀진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대협이 북한과 협력했다고 트집잡던 그런 시각으론 이런 금기를 벗겨내고 가려진 목소리를 듣기가 어려워 보인다.

 

일본군전시성폭력은 민족, 젠더, 계급이 중첩된 비극이기에 어느 하나를 삭제하면 구체성은 약해질 것이다. 여기서 혐일도 문제고 혐한도 문제라는 식이거나, 반제민족주의를 더 문제삼는 건 타당치 않다. 그것은 피해자 관점이기보다는 한미일 동맹의 관점에서 화해를 위한것이기 쉽다.

 

50년 넘게 억눌려온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처음 터져나왔던 게, 87년 이후 자유의 공간이 일부 열린 91년이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번에도 지난겨울의 촛불이 없었다면, 지금 소녀상이 전국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져가는 일이 가능했을까? 이 현상은 반길 일이지 눈살을 찌푸릴 일은 아니라고 본다.

 

 

한반도 - 짧은 소강 상태와 다시 오는 위기

 

한국이 거부할 경우에도 미국이 본토나 하와이, 괌 등의 미군 자산으로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 “일본과 호주 등 다른 동맹 파트너들 역시 한국 영토 밖에 있는 한 한국 정부의 승인 없이도 군사작전에 참여할 수있을 것”. “이런 가정적인 상황에서도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전 주한미군사령관 버웰 벨)

 

미국이 대북 군사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한국과 협의 없이, 혹은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취할 수 있다.”(주한미군 특수작전사령부 출신 데이비드 맥스웰)

 

근래 우파언론들이 중요하게 보도한 발언들이다. 요약하면 미국은 한국이 동의하지 않거나 반대해도 언제든 일본 등과 손잡고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 그럴 때 한국은 결국 미국편을 들고 도와라는 말이다. 미국의 한반도 군사전략을 가장 구체적으로 다뤄본 책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최근 소강 국면에도 안심이 안 됐던 이유다. ‘주한미군 철수운운도 그렇다. 세계패권 전략에서 핵심무대인 한반도에서 미군을 뺀다고? 결코 맘에도 없을 말을 들먹이는 이유는 한국지배자들에 대한 협박이 아닐까? ‘그런 꼴을 보기 싫으면 우리가 뭘하든 상관마라는. 이미 우파는 바로 그런 조건반사를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는 지난주 미국의 시리아 폭격으로 요사이 이틀 동안에만 민간인 100명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이런 미국이 인명살상이 걱정돼 군사적 옵션을 포기할까? 미국이 악마라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이 세상이 인간보다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직업병의 위험성을 뻔히 알면서 반도체 라인을 끌어 온 삼성도 보여주듯이.

 

북한핵에 대한 입장차를 넘어서, 서로 귀를 열고 이견을 존중하며 한발씩 물러서면서, 한반도 평화와 사드 반대를 위해 더욱 힘을 모아야 한다. 짧은 소강 상태는 끝나고 상황은 다시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인류학의 새로운 발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통설과 통념이 뒤집히는 일은 언제나 놀라우면서도 흥분되는 일이다. 인류가 농경을 하면서 생산력이 발전하고, 잉여생산물이 나오고, 그 잉여생산물을 관리하는 집단이 사적소유를 발전시키고, 결국 계급과 착취, 차별 등이 나타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발전했다는 게 기존 많은 인류학자들의 설명이었다. 이것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과도 크게 다르지 않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같은 통설을 뒤집는 주장들을 계속해서 접하게 된다. 오히려 사적소유와 계급, 성차별 등이 먼저 존재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우선했으며 농업혁명과 생산력 발전은 그것을 뒤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것 같다. 생산력보다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가 역사 발전에서 더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든 무엇이든 통설과 정답을 고집해서는 안되며 끝없는 의심과 토론,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이 더 뚜렷해진다.

 

최근의 한 기사(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07214.html)는 이같은 혁신적 가설을 대표하는 중요한 사례를 다루고 있다.

과거 조상들의 수렵, 사냥 생활에 대한 향수와 기억에 바탕을 둔 종교적 제례가 농경에 따른 생산력 증가와 연관되지 않고 평등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신념체계로서 훨씬 이전부터존재했고,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본드’(유대)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도 보여 준다. 8000년 전에 인류는 흙수저·금수저도, 성차별도 없었, 그런 가족도 계급도 없는 공동체에서 공동노동, 공동육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로 다시 새롭게 돌아가자는 희망도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의 말을 믿지 않고 입을 막으려는 사회

 

방한중인 레베카 솔닛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들춰봤다. 다시봐도 남자로서, 자칭 좌파로서 계속 뭔가 가르치려 했던 기억들이 부끄럽게 떠오른다.

 

특히 성폭력 피해를 고발했던 여성들은 가장 극단적으로 이런 걸 느꼈을 것 같다. 그런 여성들은 가명의 뒤로 숨어야 하고, 진실을 의심받고, 고발에 나선 것을 후회하도록 내몰린다. 이처럼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 있겠는가.

 

성폭력 피해자의 고발을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여기며 자살하려던 사람,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상습적 거짓말쟁이라고 모는 분들이 아래 대목들을 보고 뭔가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좋겠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그 사건들은 내가 이야기한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벌어졌으며 주관적이고 망상적이고 과격하고 부정직한 쪽은 너라고 말했다. 요컨대 너는 여자라는 소리였다...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직한 증인이 못 된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며,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에도 영영 진실은 그들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발언할 권리는 우리의 생존과 존엄과 자유에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성찰과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연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운동사회 안의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계속 발언하는 것은 정말 달갑지 않은 일이다. 또 어떤 비난이 돌아올지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분들이 계속 가해를 지속하므로 나도 멈추기 어렵다.(https://wspaper.org/article/19152) 혼자서 소나기를 맞는 피해자의 편에서 누군가는 같이 비를 맞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 중에는 매우 극소수이지만 허위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복잡한 현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즉 피해자가 거짓말쟁이란 것이다. 피해자가 성폭력과 가해를 겪은 것은 터무니없는 일방적 주장일뿐이고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바로 이 글에서 무너진다. “1분 미만의 야한 동영상을 보여 준 사건으로서 성폭력 사건도 아니고 노동자연대사건은 더더욱 아니다란 문구를 보자. 1분이든 10초든 1초든 왜 거부하는 여성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는가? 그건 성폭력이 아니라 성희롱일 뿐이라고? 야동을 보여 준 것은 노동자연대의 공식행사 자리도 아니었다고? 이게 그동안 이 분들의 논리였다.

 

좋다. 성희롱과 성폭력을 칼같이 구분하는 이 분들의 개념까지도 이해해 줄 수 있다. 피해자가 처음 공론화할 때 사용한 표현들이 좀 정제되지 않게 들렸을 수도 있다.(어떤 피해자가 처음부터 정제된 언어로 잘 정리된 문제제기를 하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그 이후의 가해들을 정당화해줄 순 없다.

 

개념을 자신들과 다르게 쓴 여성에 대해서는 자살한다고 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 사람, 원래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 연애결별의 앙갚음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 경계선 성격장애라고 온갖 편견을 담아 공격하고 낙인찍어도 되는가? 고통을 호소하면서 정제된 표현을 쓰지 않은 여성은 연애관계, 사생활, 성이력 등까지 아웃팅하고 책까지 출판해서 공격해도 되는가?

 

그런 글과 책의 전문까지 홈페이지와 기관지에 버젓이 올려놓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 여성을 가해했다는 건 사실무근이라고? 단지 정치적 이견에 대해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운동 내 민주주의가 강화될 수 있도록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처음 “[차별금지법 연대체] 가입 때는 문제되지 않던 일인데 이제 와 새삼스럽게 이 사건을 들고 나온 것이 수상하다는 주장도 놀랍다. 정말 몰라서 묻는가? 올해 5월달에 여성민우회 토론회장 앞에 와서 피해자의 사생활 침해와 인격모독의 책을 팔았던 게 누구인가? 그 책을 폐기하라는 요구에 오히려 7월에 정식출판을 강행해 모든 서점에 깔아 버렸다.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이번엔 아예 전문을 온라인으로 공개해 버렸다.

 

이런 구체적 상황에서 차별금지법 연대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가 차제연의 활동 목적과 관련없는 사안이고 반차별 운동의 대의와 무관하다는 주장이야말로 커다란 억지다.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인 연대기구에서, 한 조직에 의해 일방적이고 집요하게 짓밟히는 여성의 인권에 관심을 갖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반차별 운동의 대의와 전적으로 부합하는 일이다.

 

이 문제에서 성찰과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은 결코 연대를 가로막는 종파적 행위가 아니다. 끝까지 성찰과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연대를 가로막는 것이고, 연대의 가능성을 찾고싶은 사람들의 기대를 져버리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요구하며 단결해 싸우기 위해서도 우리 내부의 부정의를 바로잡고 성찰하자는 움직임과 목소리가 커지는 것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큰 지지를 보내고 싶다.



(기사 등록 20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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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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