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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당신이 옳다>/ 영화<블랙클랜스맨>/ 연극<세자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 19.

전지윤 



<당신이 옳다> - 아픈 마음에 대한 공감과 치유

 

최근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사망 사건은 정말 슬프고 참담한 비극이었다. 큰 슬픔 속에서도 고인의 뜻을 헤아리는 유가족분들의 태도는 큰 위로가 됐다. 이를 보면서 최근 매우 인상깊게 본 정혜신님의 책 <당신이 옳다>를 되새기게 된다.

 

상처받은 마음들이 가득하지만 제대로 공감, 치유해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은 누군가가 죽고싶거나 죽이고 싶을 땐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며 존재 자체가 지워질 때, 소멸 직전의 존재는 폭발하고 만다는 것이다. 남은 모든 에너지로 주변을 불사르며 여기 나도 있었다고 비명을 지르듯이.

 

일부 정신장애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춥고 덥고, 흐리고 맑고, 눈오고 비오는 날씨처럼 사람의 감정도 끝없이 변화하고 변덕스러운 법이라 우울은 질병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게 정혜신의 말이다. 따라서 이를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다로 이분법적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모든 마음의 고통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이기에, 그것에 등급과 순위를 매기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따라서 이번같은 비극이 줄어들려면 차별, 편견, 낙인이 사라지고 누구도 부끄러움이나 어려움없이 쉽고 편하게 정신과적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하고, 국가가 그것을 보장, 책임져야 한다는 지금 나오는 지적들에 크게 공감간다.

 

정혜신은 한발 더 나간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병원과 전문가의 상담치료를 권하고, 신경과적 접근과 진단이 내려지고, 약물 처방이 이뤄지고... 이것이 또다른 대상화를 낳는 공감의 외주화일 수 있단 것이다. 그러면서 든 사례는 인상적이다. 자살 위험에 처한 아이를 부모는 병원과 전문가에 데려갔고, 곧 나아졌다.

 

그런데 아이를 치유한 것은 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흘린 부모의 눈물과 병원 앞에서 같이 먹은 떡복이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며 먹은 떡복이는 너무 맛있었고, 눈물 흘리는 부모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였구나깨달았단 것이다.

 

마음이 아픈 동지에게 곧잘 병원과 약물치료를 권하던 기억, 또 그런 권유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더 와닿는 지적이었다. 지금 당장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지에게 병원에 가봐라, 약을 챙겨먹어라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가 왜 얼마나 아픈지 눈에 포개고 듣고 또 들으며 먹먹히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고통에 쉽게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쏟아낸다. 존재에 대한 공감에 앞선 충조평판은 서로 벽만 세우며, 마치 얼어붙은 마음을 망치로 깨려는 것처럼 어리석다는 게 정혜신의 거듭된 강조다. 얼음은 따뜻한 봄이 와야 저절로 풀린다. 여기서도 충조평판을 하면서 상처에 비수를 꽂으며 그게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믿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월호 가판대에서 깽판을 치던 노인. 보통 같이 흥분하거나 삿대질을 하기 마련이지만 정혜신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었고, ‘거리에 버려진 장롱같은 삶과 아픈 과거를 이야기하던 노인은 결국 아까 그건 내가 부끄러운 행동이었지하고 인정하게 된다.

 

정혜신은 공감이 무엇이 아닌지도 분명히 한다. 감정적 반응이나 정서적 호들갑은 공감이 아니다. 무조건 듣고 끄덕여주는 것도 감정노동일 뿐이다. 존재에 대한 통합적이고 사려깊은 이해가 공감이고, 공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학습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공감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넘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일으키기 어렵고 공감은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치유되는 것이다.

 

또 심리적 갑을관계 속에 일방적 감정노동을 하기보다 관계를 끊는 게 서로를 보호하는 길일 때도 있다. 내가 아프고 힘든데도 상대에게 무조건 미안하고 잘못했다고 해야 한다면, 그 관계는 유지되기 어렵다. 그리고 가깝고 친할수록 그런 관계가 되기 쉽다. 그럴수록 상대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많아서 상처와 원망이 쌓인다.

 

결국,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 고통에 공감할 수 있으니 일단 지금 네 마음이 어떠니, 왜 얼마나 힘드니물어줘야 한다. 상처를 건드는 게 문제는 아니다. 정말 걱정하는 것은, 어렵게 꺼냈는데 무시할까봐, 거부당할까봐, 충조평판할까봐다. 소금이 뿌려지지 않을 것이고 안전하다고 느낄 때 상처는 꺼내진다.

 

그리고 내 존재 자체를 주목하고 지지해주는 사람 1명만 있어도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공감을 받고 상처를 털어내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반면에 치유받지 못한 상처는 결국 칼로 돌아온다. 편견과 차별로 뒤덮인 사회와 국가는 그걸 부추긴다.

 

정신장애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보이는 미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참 매력적 캐릭터인 크레이지 아이수잰이나 롤리의 사연들이 그토록 가슴 아팠던 것도 그 때문이다. 환청과 망상에 시달리는 롤리와 수잰은 그래도 그들을 이해해주는 친구나 교도관 힐리같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나를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다시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감사하게 된다.

 



영화 <블랙클랜스맨> - 혐오와 차별에 맞선 저항

 

새해가 밝았지만, 희망과 기대보단 절망과 낙담 속에 있는 분들이 여전히 많을 것이다. 얼마전에 입원한 난민 친구를 찾아가 봤는데, 난민 신청은 기각 당하고 몸은 아프고 지하방은 추위와 곰팡이로 얼룩져 돌아가고 싶지 않아 보였다. 그런 하소연을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삼성 해고자 동지들도 10년 가까이 여전히 추운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지만 삼성과 이재용은 들은 척도 않고 있다. 역시 매주 목요 집회에 함께하고 그런 울분을 듣는 것 말고는 별 힘을 드리지 못한다. 억울함을 안고 몸부림치는 수많은 분들이 여기저기 있고, 차별과 혐오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전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당장 11일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브라질의 극우 보우소나르 아래서 소수자와 활동가들이 얼마나 막막하고 쓰라린 기분일지 짐작간다. 브라질에서 LGBTQ 사람들은 혐오범죄에 대비해 자위대까지 구성하고 있단다.

 

물론 같은 남미의 멕시코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좌파인 오브라도르가 얼마전 취임했고 시민에게 개방된 대통령궁의 잔디밭에 누워 사람들이 영화 로마를 보고 있는 사진은 인상적이었다. 원주민 여성 가사노동자의 돌봄노동과 사랑을 통해서 차별과 폭력으로 얼룩진 멕시코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같이 아픈 과거를 돌아봤을 것 같다.

 

그래도 이번 연말연휴에 본 영화 중에 (몇몇 아쉬움에도) 가장 인상적인 건 스파이크 리의 블랙클랜스맨이었다. 영화는 70년대 미국이 배경이지만, 트럼프 시대에 대한 직설적 비판으로 넘친다. 영화 내내 아메리카 퍼스트’, ‘미국을 위대하게를 말하던 자가, 바로 얼마전 샬러츠빌 우익 테러난동의 실제주역으로 재등장하는 자료화면들은 소름끼치게 만든다.

 

블랙클랜스맨에서 최고의 장면은 흑인해방운동의 저명한 지도자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열정적 연설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스파이크 리는 뭔가를 고민하고 결심하는 듯한 흑인 청중들 개개인의 서로다른 얼굴들을 교차해서 부각한다. 그것이 지금이 아니면 언제이고 당신이 아니면 누구인가라는 연설의 결말과 만나면서 절정을 이룬다.

 

깊어지는 삶의 위기와 비참함이 분노와 불만의 불쏘시개가 되고, 그것을 타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돌리려는 움직임은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는 게 지금의 세계다. 하지만 그래도 새해에 다시 희망과 기대를 다잡는 것은 우리가 서로 차이와 상처를 넘어서 대화하고 함께 손잡고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연극 <세자매> - 여성주의와 장애인권적 재해석

 

지난 연말 장애인 동지의 초대로 연극 <세자매>를 봤다. 체홉 원작을 여성주의적이고 장애인권적 재해석한 작품이었다. 여러 여건상 아무래도 다소 단순화해야 했고 대사 전달에 불가피한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장애인 배우분들의 열연이 돋보인 탈시설장애여성극이었다.

 

러시아 지방 소도시에서 모스크바로 탈출을 꿈꾸는 내용은, 왕인 아버지와 집사의 감금과 기만에 맞서 성 밖으로 탈출을 꿈꾸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왕은 성밖은 전쟁중이라고 세자매를 속이지만, ‘나가야 한다는 꿈은 꺾이지 않는다.

 

초반에는 유머러스한 장면도 많아서, 탈시설의 해피엔딩을 예측했는데, 죽음과 비극의 결말은 냉정하게 현실을 보여줬다. 모두 최선을 다한 게 느껴졌지만, 특히 집사역을 맡은 분과 첫째 올가역을 맡은 분의 인상적인 표정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휠체어를 타고 춤추는 장면도 신선했고, 배재현 동지의 차분하고 침착한 연기도 멋졌다.

 

악조건 속에서 오래동안 준비한 공연을 마친 배우들은 끝나고 대부분 눈물을 흘리셨고, 그건 탈시설과 장애해방에 대한 열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극중에서 올가가 계속 읽고있던 책 안티고네도 그런 신념과 저항의 의미였을 것이다.

 

이 지옥에서 나는 죽어가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올가의 마지막 독백을 들으며, 전날 광화문 집회에서 고 김용균님의 어머님의 발언 장면이 기억났다. 문정부는 세자매를 속이며 궁전에 가두려 한 왕이 될 것인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줄 것인가. 연말연휴에 이런 좋은 공연 관람 기회를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기사 등록 201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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