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트럼프와 와인스타인 시대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번역: 두견 

 

 

[오늘날 폐미니즘 정치의 변화와 발전 양상을 분석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이 글의 필자인 수잔 퍼거슨은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연구하고 기여해 왔으며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출처:

http://newsocialist.org/socialist-feminism-in-the-era-of-trump-and-weinstein/

 



 

과거의 유물인 페미니즘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뉴스거리로 떠들던 것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었다. 중등교육에의 접근, 비전통적인 일자리, 기업 이사실, 보다 유연한 가구 구성 등 제 2 물결 페미니즘의 혜택을 거둔 젊은 여성들을 보면서 그들은 이제는 더 많은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포스트 페미니스트적 세계였다.(나는 이 단어를 따옴표 안에 넣었는데, 아래에서 설명하듯이, "포스트 페미니즘"은 비판적인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사실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논평가들은 완전히 틀렸다. 만약 그들이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들은 오늘날 확실히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불과 14개월 전에 어떻든 자격을 가진 미국 유권자의 26%는 자신이 아직 추파를 던지거나, 모욕하거나, 비하하거나, 더듬어보지 않은 여자는 만나보지 못한 남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다 2017년에 고위직의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져갔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일반적으로 상대적으로 힘 있는 위치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대담해지면서 그들의 성희롱과 성폭행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언론에는 훨씬 덜 보도되고 있지만, "포스트 페미니스트" 시대가 처음 선포된 1980년대와 마찬가지로 2017년에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가난, 폭력, 그리고/또는 차별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포스트 페미니즘의 시대라는 것은 항상 신화였다.


전문가들조차 더 이상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새로운 페미니스트인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를 발견했다. 그리고, 더욱 적절하게도, <타임>지는 얼마전 #MeToo 운동을 "올해의 인물"로 명명했다. 물론 우리 중 몇몇은 페미니스트적 분석과 정치의 필요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내내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옹호하면서 활동해 왔다.

 

내가 여기서 보고 싶은 것은 그 "다양한 방법들"이다. 아무리 하나의 페미니스트 정치가 공개 토론을 주도하는 경향이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끌어낼 수 있는 풍부하고 다양한 전통이 있다. 나는 근래 등장한 페미니스트 정치의 세 가지 얼굴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부른다.


1. "두려움 없는 소녀" 페미니즘

 

2. 피억압자들의 동맹 페미니즘

 

3. 아래로부터 반자본주의 페미니즘

 

이것들 사이에는 많은 겹치는 부분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뿌리를 뚜렷한 이론적, 정치적 전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여성을 위한 진보와 자유에 대해 서로 갈라지는 개념들을 지지하는지 본다.

 

내가 이와 함께 어디로 가려하는지 미리 신호를 보내자면: 페미니즘의 세 가지 "얼굴들"이 모두 여성의 삶에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변화를 야기시켰지만, 억압의 체계적 본질과 가장 직접적으로 붙잡고 싸우는 변혁적 정치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세 번째 접근법인 아래로부터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이다.

 

"두려움 없는 소녀" 페미니즘

 

이 명칭은 1987년의 주식시장 붕괴 이후 2년 만에 설치된, 월스트리트의 상징 '돌진하는 황소'상에 맞서고 있는 작은 소녀의 청동 조각상에서 비롯됐다. "두려움 없는 소녀"상은 세계적 자산운영사인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져’(SSGA)가 그해의 국제여성의 날을 맞이해 세운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 자립과 노동시장에서의 기회를 통해 여성에게 '권력부여'를 촉진하는 페미니즘을 상징한다.

 

SSGA25천억 달러의 자산을 관리하는 투자 회사다. 동상은 기업 이사회에 여성들을 임원으로 더 추가하기 위한 캠페인의 출발로서 공개되었다.(듣자하니, 설문조사는 기업이사회의 50%는 여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 강한 저항을 발견했는데, 조사 대상이 된 임원 중 53%가 여성이 이사회의 40% 이상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응답했다.)

 

SSGA가 왜 이것을 신경쓸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젠더 다양성은 "회사 실적을 개선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것은 물론 오늘날 페미니즘의 지배적 얼굴이다. 저스틴 트뤼도가 내각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우면서 자랑했던 말이기도 하다.(당신은 "왜냐하면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는 그의 가벼우면서도 반박하기 어려운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이방카 트럼프와 함께 이른바 여성 경제계 리더들과의 원탁회의에 앉아서도 그랬다. 또는,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에서 쌍방이 성평등 조항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강조했다. 우리중 많은 사람들이 트뤼도식 페미니즘의 얄팍함에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그가 이러한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다소 곤란하고 복잡한 문제다. 여성들을 수용하게 만들기 위해 기업과 정치권의 통로를 넓히면서 성취한 소위 '여성의 권한 강화'는 페미니스트들이 수십 년 동안 동일임금과 평등임금법 제정을 통해서 불평등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많고, 많은 여성들의 삶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이게 우릴 어디로 데려갔던가? 트뤼도/트럼프의 공동작업이 증명하듯이, 이러한 페미니스트적 주도권들은 기업의 다양성 관리에 따른 얄팍한 연습에 의해 쉽게 흡수돼 버린다. 그리고 부유층과 평균소득층 여성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격차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없는 소녀" 페미니즘의 도입이 낳는 광범위한 사회적 영향을 보고 있다.


 

 전업 노동자들 속에서 하위층에 대한 상위층의 주간소득 비율 1970년부터 2010년까지.

- 표: 레슬리 맥콜, 남자 대 여자: 또는 상위 20% 대 하위 80%, 201367일 현대가족협의회(https://contemporaryfamilies.org/top-20-percent-against-bottom-80/)

 

 

노스웨스턴 대학의 사회학자인 레슬리 맥콜(Leslie McCall)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여성의 임금을 추적해왔다. 그녀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 대학 학위를 가진 여성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자들보다 더 적게 벌었다. 그러나 그 후, 미국에서 1963년에 도입된 평등임금법 제정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여성들은 여전히 상위 1%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위치를 심각하게 손상시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최고 연봉 소득자들 속에서 훨씬 더 자주 발견된다. 상위 85~95번째 백분위수(연봉 약 15만 달러)인 여성의 소득은 1970년대 이후 10년마다 같은 범주에 있는 남성의 소득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금세기 첫 10년 동안 평균 임금을 받는 사람들의 임금이 8.3퍼센트 인상된 것에 비교해 14퍼센트의 성장을 보였다.

 

맥콜에 따르면 "이 엘리트 그룹의 여성들에게 있어 강력한 절대적 이득"이 존재했다. 한편, 2001년과 2010년 사이에 모든 전업 노동자(남녀)의 중간 소득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고소득 여성들과 다른 한편으로 중저소득 여성들 사이의 격차는 꾸준히 커져 왔다. 그래서 1년에 약 15만 달러를 버는 여성들이 그들의 봉급이 계속해서 탄탄한 비율로 증가하는 것을 겪은 반면에, 1년에 약 37,000 달러 이하를 버는 여성들(그리고 남성들)은 한동안 그 수입이 정체했다.

 

확실히 하자면, 우리는 여기서 진짜로 "권한이 강화"된 아주 적은 비율의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JP모건 체이스의 연구원에 따르면 2013년에 미국의 여성 봉급 소득자 중 오직 3.25%만이 연간 10만 달러 이상을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 같은 해 미국 사회보장국에 따르면, 미국의 봉급 소득자 중에서 절반 이상이 3만 달러 이하를 벌었다. 그리고 그 집단에서 여성, 흑인, 라틴계, 트랜스젠더, 퀴어, 이민자들이 지나치게 많이 대표되고 있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 나는 "두려움없는 소녀"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평등의 가치와 동등한 임금을 옹호한다. 위의 수치들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또는 사실상 말할 수 없는 한 가지는, 페미니스트들이 경제적 평등과 독립을 위해 내내 싸우지 않았더라면 모든 여성의 임금이 얼마나 많이 낮아졌을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정책들은 개인의 삶을 향상시켰지만, 그들은 애초에 불평등한 임금으로 향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는 조건들에는 도전하지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저스틴 트뤼도, 이반카 트럼프, 힐러리 클린턴, 월스트리트의 투자회사들은 이런 정책들을 수용하고 홍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두려움없는 소녀" 페미니즘은 트뤼도와 기업주들이 대표하고 옹호하는 자본주의 세계질서와 전적으로 부합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젠더와 인종적 평등을 수용하며 나아갈 수는 있지만 그 핵심적 논리는 포기할 수 없는 자본주의 세계질서와 같다: 거대하고 성장하는 저임금의 풀, 무임금 노동 착취,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것들을 공급하게 보장해주는 억압적인 관계들.

 

피억압자들의 동맹 페미니즘

 

여성 임금에서의 변화를 살펴본 같은 기간(1970년대~2017)에 폭력과 괴롭힘에 대한 여성의 경험을 따져보면, 우리는 훨씬 덜 신뢰할만한 통계적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이 피해를 신고하는 수준의 변화가 요동치기 때문이다.(민간 영역들에서 두차례 주목받은 고발들이 어떻게 최근의 급격한 신고 증가로 이어졌는지 기억해봐라.) 그것은 또한 젠더폭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우리는 최근 캐나다통계청(StatsCan)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배운다.

 

* 신체적 폭력을 당한 여성이 경찰에 신고하는 정도는 일부 하락했으며, 그동안에 성폭행에 대한 신고는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 15세 이상 여성의 폭력 피해 자진 신고율(일반 사회 조사)1999년부터 2009년 사이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젠더폭력과 괴롭힘이 오늘날 용인할 수 없는 수준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캐나다여성재단의 한 보고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캐나다 전체 여성의 절반이 16세 이후 적어도 한 건의 신체적 또는 성적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

 

* 캐나다의 여성은 거의 6일에 한명씩, 그녀의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고 있다.

 

* 캐나다에는 4,000명 이상의 살해되거나 실종된 원주민 여성들이 있다.

 

* 젊은 여성(18~24)은 스토킹, 성희롱, 신체적 위협을 포함한 가장 심각한 형태의 온라인 괴롭힘을 경험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동안 분명히 실수도 있었고,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젠더폭력에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자원을 요구했고 획득해 왔다. 그들은 또한 여성, 트랜스젠더, 퀴어의 삶에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드는 정책과 관행들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위험하고 학대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법적 제도를 더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며, 학교와 길거리와 직장에서 더 안전함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일의 대부분은 내가 ‘(피억압자들의) 동맹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알려져 왔다.(비록 다른 형태의 페미니즘들도 이러한 측면의 진보에 있어서 확실히 공을 인정받을 만 하지만) 동맹 페미니즘을 통해서 나는 서로 교차하는 억압의 체제에 대한 비판에 기반을 둔 정치를 정체화하고자 한다.

 

'아래로부터의 반자본주의 페미니즘'과 유사하게, 이러한 페미니스트적 관점은 학교, 법원, 법률, 기업, 보건의료 등 우리 사회의 강력한 제도 및 관행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이성애주의, 트랜스와 퀴어포비아, 장애인차별, 정착민 식민주의, 경제적 착취 등을 유지시키는 것과 관련돼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많은 페미니스트 동맹자들이 사회에 대한 급진적이고 심지어 흔히 반자본주의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적 활동은 대체로 그들이 비판하는 체계적인 권력에 도전하기에는 부족하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그 이유는 동맹의 원칙에 대한 그들의 헌신과 그것에 영향을 미친 "특권"의 정신과도 관련이 있다.

 

동맹 페미니즘은 이 다중적이고 복잡한 매트릭스인 "상호 맞물린" 억압들(페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가 사용한 개념)속에서 직접적으로 힘을 빼앗긴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듣기는 동맹관계를 맺고자 하는 그러한 페미니스트들이 신뢰와 책임감있는 관계를 쌓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일단 그 관계가 단단한 바탕에 놓이게 되면, 페미니스트 동맹자들은 그들의 재정적, 조직적 또는 다른 형태의 자원들을 이용하여, 힘을 빼앗긴 사람들을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방법과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돕는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소외된 사람들을 피해자나 의뢰인으로 취급하면서 이들을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통합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주류적 페미니즘에 대치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맹 페미니즘의 목표는 사람들을 "구하거나"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화된 사람들이 스스로 규정한 조건에서 그들과 협력하면서 "더 큰 억압적인 권력 구조를 타파"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남성우월주의적으로 보이는) 사회주의적 좌파와도 대치되는 것이다.

 

좌파들은 소외된 공동체가 스스로 정의하는 요구들을 직시하기 보다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체계적 비판을 "부과"하고 정치적 대립과 사회적 변화를 우선시한다(비록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한 일부 좌파 전통은 이 사례로 선택될 수 있다). 반면 이와 달리 동맹 페미니스트들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목표는 함께 동맹이 되는 것에 비해 부차적이라고 강조한다.

 

자원 제공과 함께 페미니스트 동맹자들은 그들 자신과 주변화된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재조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이것은 우선, 억압의 광범위한 사회적 동역학 속에서 자신의 공모관계를 확인하고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 자신의 "특권"에 대해서, 예를 들어 가난하게 살고 있는 원주민 여성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백인이면서 비장애인이고 시스젠더인 학생처럼 말이다.

 

"특권을 확인하는 것"은 동맹 페미니즘의 선택적이거나 일회적인 특성이 아니다. 반억압 네트워크(Anti-Oppression Network)에 따르면, 동맹은 특권과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소외된 집단과 연대하여 움직이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일관되며 고된, 고쳐 배우기와 재평가의 실천이다.”

 

취약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자기의식, 배려, 존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더욱이 페미니스트 동맹자들의 노력들이 많은 여성, 퀴어, 그리고 트랜스젠더 등 성폭행과 괴롭힘에 취약한 사람들에게 대학 캠퍼스, 작업장, 가정과 거리들을 더 안전하게 만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성별화된 폭력에 대한 지역사회 센터를 위한 기금, 안전한 공간 및 교육 자료들을 설립하고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성폭력을 신고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과 절차들을 개선시켰고, 종종 유해한 공적 토론에서 성별화되지 않은 언어로 강력한 방어를 제공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동맹 페미니즘을 평가하는 일이 약간 곤란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일임금과 평등임금법 제정을 위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이 접근방식은 충분하지 않았고, 충분할 수가 없다. 동맹 페미니즘은 그 자신의 전제가 낳은 한계에 다가가게 된다.

 

첫째, 보다 소외된 사람들의 목표를 지원하기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페미니스트 동맹자들을 자원의 불평등을 영속화시키는 바로 그 권력구조에 묶는 일을 할 수 있고 종종 해 왔다. 그것이 애초에 그들을 "더 소외된"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닌 "동맹자들"로 만든 것이다.

 

페미니스트 동맹자들은 권력에 맞서기보다는, 자신들의 의제를 위해 권한이 있는 위치를 얻어내는 측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작업을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상급자들이나 정치 엘리트들(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에 대한 순진한 신뢰를 보내거나, 또는 보다 급진적인 요구를 추구함으로써 상급자들의 지지를 소원하게 만들 것을 염려하는 위험을 배양한다.

 

둘째, 개인적 특권을 주목하는 정치는 불평등과 억압의 조건을 지탱하는 광범위한 세력으로부터 관심을 분산시킬 위험이 있다. 페미니스트 동맹자들은 "누군가가 특권을 돌아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 ''를 고백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에 대한 비판자들이 지적하듯이, 여기서 초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에게 있다. 정치 활동의 중심이 되는 것은 그들의 "자기 변화"이기 때문에, 비판가들은 지배적인 문화에서 온 (보통 백인이고 학자인)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을 (다시 한번) 반억압 정치의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비록 의도적이거나, 혹은 "2 물결" 페미니스트들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놓치기 어려운 아이러니다.

 

어떤 면에서 '특권의 정치'는 또 다른 제2 물결 페미니즘의 아이디어, 즉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라난다. 이 격언은, 우리의 가장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도 더 넓은 권력의 동역학에 의해 조건지어진다는 주장으로 이해되며 분명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맹 페미니즘이 정치적 행동주의의 장소로서 개인적 특권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뭔가 다른 것을 뜻하게 된다.

 

그것은 권력이 어디에나 있다는, 프랑스 정치철학자 미셸 푸코(1926 ~ 1984)와 가장 관련깊은 생각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한편으로 억압의 시스템에 사로잡힌 개인이 휘두르는 "권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더 넓은 정치적, 경제적 동학에 의해 생성되거나 유지되는 권력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혹은, 만약 페미니스트 동맹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유형의 권력을 구별하려고 숙고하더라도, '특권의 정치'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시스템적 변화에 대한 주요한 쟁점들은 해결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상호관계에서 관습과 언어에 대한 도전은 더 넓고, 더 체계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정확히 어떻게? 동맹 페미니즘의 한계는 이와 같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정치들에 이끌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한계들은 더 넓은 좌파의 일반적인 약점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맹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더 광범위한 권력구조에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크게 잃어버린 좌파를 반영한다. 내 요점은 우리가 사회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종류의 작업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일부 전략들에는 도전해야 하지만, 그들은 더 넓은 좌파를 위해 제도 안에서 사회적 변화를 위해 작업하고, 힘을 빼앗긴 공동체들과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있어 중요한 교훈들을 증진시키고 있다. 핵심 과제는 그러한 작업이 어떻게 복합적인 억압들의 체계적 재생산에 대한 광범한 도전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이 오늘날 우리 자신을 찾는 범위를 넘어서며 사회적 능력, 자신감, 연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래로부터의 반자본주의 페미니즘

 

페미니즘의 세 가지 얼굴 중에서 이것은 확실히 가장 친숙하지 않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지난 50년 동안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일관된 존재로서 좌파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정치가 지배적인 조직들 안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조와 노동위원회는 많은 것을 흡수했지만 보건의료, 교육, 빈곤을 중심으로 움직여온 활동가 단체들도 있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신사회주의자들(New Socialists) 같은 작은 좌파 그룹 안에서나, 물론 학계에서, 머물고 있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을 여전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관된 존재"란 나에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페미니스트 정치 행동에 기여하고 때로는 길을 제시했던 반자본주의, 아래로부터의 원칙을 의미한다.

 

확실히 토론토에서, 토론토대학의 보육센터 설립을 요구하고, 단체협상에서 출산휴가 조항을 얻어내고, 낙태에 대한 접근권을 요구하고, 게이사우나(Bathhouse)에 대한 경찰 습격에 반대한 투쟁들은 그 좋은 사례들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대규모 동원을 통해 권력자들에게 요구하고 맞서야 할 필요성에 대한 주장을 지지했고 승리했다.

 

나는 이것을 낭만적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이러한 성과들은 모든 다른 페미니즘의 성과들과 마찬가지로 깨지기 쉽다. 또한, 복합적이거나 때로는 모순된 형태의 억압을 진지하게 다루는데서 보이는 뚜렷한 무능력(그리고 덜 흔하게는, 거부)을 포함해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 결함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조직들의 해체, 그리고 억압으로부터 해방의 더 넓은 전망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흔들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지난 5년여 동안 우리는 새로운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아이디어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타오르는 것을 보아왔다. 새롭게 갱신된다는 것은 단순히 앞선 시대의 통찰력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점들에서 배우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뜻한다. , 억압의 복잡성에 대해 진지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갱신은 단지 제한된 정치적 표현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지역사회와 노동 단체에서 일하는 많은 아래로부터 반자본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스트, 반인종주의, 퀴어, 트랜스젠더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연대를 구축함으로써 이러한 페미니즘의 면모를 실천에서 새롭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어떤 종류의 일관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정치의 묶음을 통해 그들의 작업을 이끄는 원칙들을 뚜렷이 하지는 않았다. 그 과제는 주로 우리 중에서 학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조직된 좌파의 일부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리는 지금 리즈 보겔(Lise Vogel)이 그녀의 저서인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에서 처음에 정식화한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설명에 대해서 토론하고 논쟁하고 있다. 잠시 후에 그것에 대해 더 알아보자.

 

힐러리 클린턴과 그녀의 '두려움없는 소녀 페미니즘'을 거부하고 대신 버니 샌더스의 캠페인에 몰려든 미국 여성의 수는 그러한 페미니즘을 위한 시대가 무르익었다는 징조라고 누군가는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북아메리카에서 아래로부터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표현은 201738일에 국제여성파업의 요구와 함께 나타났다.

 

북아메리카에서 그러한 파업의 조직가들은 2016년 세 차례의 대규모 동원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들의 나라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입법안을 중단시킨 폴란드 여성 파업. 아르헨티나에서 남성 폭력에 반대한 #NiUnoMenos(단 한명도 안된다) 운동이 호소한 검은 수요일의 파업. 그리고 국제 여성의 날에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제거를 위해 30만 명을 동원한 이탈리아 여성들과 지지자들.

 

조직가들은 또 지난 1'여성들의 행진'에서 분홍고양이 모자(pussy hats:여성 성기를 상징)를 쓴 사람들의 파도가 단지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 대신 백악관에 있다는 사실에만 화가 난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다. 그들의 구호나 플래카드는 파괴적인 신자유주의가 삶에 들이닥친 여성, 트랜스젠더, 원주민, 흑인, 퀴어, 이민자, 이주자 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을 토대로, 미국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국제 여성 파업에 대한 호소(첫번째 발표는 폴란드 파업의 조직자들이 시작했다)를 시작했다. "파업"을 호소하는 것은 심사숙고한 것이었다. 이 행동의 조직자 중 하나인 신시아 아루자(Cinzia Arruza)에 따르면, 이것은 "여성들이 작업장에서뿐만 아니라 그 외부인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에서도 수행하는 일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 그것은 자본주의에 필요한 핵심적인 것인 이윤과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청소, 요리, 육아가 무급 또는 저임금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아래로부터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은 그러한 통찰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특히 리즈 보겔에 의해 잘 정식화된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통찰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본주의는 절대적으로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만, 사장들은 노동력의 생산(, 매일매일과 세대에 걸친 노동력의 갱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고 보겔은 주장한다. 그런 갱신은 주로 가정에서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적, 인종적인 방법으로 조직되지만, 병원과 학교에서도, 예를 들어, 이민 제도를 통해서도 조직된다.

 

더욱이 임금(그리고 세금에도)에 가해지는 끊임없는 조건 악화 압력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만, 그러한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돕기보단 훼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괴롭히는 것은 이처럼 가치의 생산과 삶의 생산 사이의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며, 이것은 억압을 그 존재 자체의 체계적 특징으로 만든다.

 

2017년 국제 여성 파업은, 자본주의에서 여성 노동의 중심성을 인식하면서 여성들에게 작업장에서만이 아니라 무보수로 일하는 사회적 재생산의 현장에서도 노동을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전 세계 여성들이 응답했다. 50개국의 활동가들이 여기에 동참했다.

 

대부분 하루 동안의 시위처럼 상징적이긴 했지만, 전략으로서의 파업은 페미니즘이 억압의 체계적 본질을 제기하는 반란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핵심으로 찌른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진정한 생존의 필요를 충족시킬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단지 일터만이 아니라 우리의 지역사회와 가정에서도 필요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것이다. 그 체제와 맞서는 것은 또한 삶에 맞서서 자본주의와 협력 속에 작동하는 인종차별, 성차별, 그리고 모든 압제에 맞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들 간의 더 큰 경제적 평등을 위해 일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안전한 공간과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요구를, 인간의 욕구 충족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자본주의적 통치에 내재된 억압에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조직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그것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투쟁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자신감과 역량을 구축해서 우리 일터뿐만 아니라 공동체들(우리의 병원, 학교, 거리, 그리고 가정)을 되찾는 것이다.

 

이것은 소외된 집단에게 특정한 사상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과 사회적 힘의 본질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자원들을 되찾을 수 있는 집단적 자신감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전략화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집단과 연대하여 일하는 것과 그들과 동맹관계를 모색하는 것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연대 구축에는 분명히 서로 다른 집단의 자기 결정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지원과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어떤 지식을 바탕으로 공유된 목표와 전략을 뚜렷이 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 지식이란 1) 우리의 모든 삶은 더 넓은 구별되는 일련의 묶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권력관계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조직된다. 2) 그러한 관계를 조직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의 (물질적, 문화적, 정신적, 물리적 - 결국 인간적)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방식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를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자원들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통제를 가로막는다.

 

그렇다면 연대는 일상적인 권력의 흐름을 위에서 아래까지 방해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더이상은 안 돼'(캐나다 원주민 투쟁), 퀘벡 학생 파업 - 이것들은 모두 운동 건설을 통해서 사회적 재생산의 공간과 자원(우리의 공동체들과 학교들)을 되찾으려 노력한 최근의 사례들이다.

 

우리는 권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가해 더 나은 서비스들과 교육, 더 높은 임금과 복지들에 대해 뭔가를 하도록 만들어서 삶을 개선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투쟁을, 우리 위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다른 사람들의 투쟁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주 많은 여성, 흑인, 이주민, 원주민과 장애인들의 힘을 빼앗고, 가난과 공포 속에서 살게 한 지난 50년간의 불평등과 억압의 패턴은, 다음 50년 동안에도 여전히 더 분명해질 것이다. 트럼프와 와인스타인 시대에 우리에게는 반란적이고 변혁적으로 나아가는 페미니즘의 얼굴이 필요하다



(기사 등록 201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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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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