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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노동자들과 소비에트 국가: 1920년대의 교훈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5. 6.

사이먼 피라니(Simon Pirani)

번역: 두견

 


[이 글에서 사이먼 피라니(Simon Pirani)는 내전의 종료와 레닌의 죽음 사이의 몇 년 동안 공산당, 국가기구, 그리고 노동계급 사이 관계의 변화를 논쟁적으로 고찰한다. 이 글은 러시아 혁명의 변질과 후퇴가 이미 레닌이 죽기 전에, 그것도 내전이 가한 외부적 압박이 감소한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외부적 압박이나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넘기는 기존의 설명과 통설이 타당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글은 원래 브뤼셀의 '마르셀 리브만'(Marcel Liebman) 연구소에서 강연하기 위한 노트로서 구상되었다. 사이먼 피라니는 러시아 혁명을 연구해 온 역사학자이며 <혁명의 후퇴 1920~24: 소비에트 노동자들과 신공산주의 엘리트>(Routlete, London)의 저자이다.]

 

출처: https://www.rs21.org.uk/2017/11/10/revolutionary-reflections-workers-and-the-soviet-state-lessons-from-the-1920s/

 




이 글은 1920~1924년 사이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 시기에 내전이 끝나고, 신경제정책이 채택되고, 경제회복이 시작되었다. 연구를 시작했을 때, 나는 내전 기간 동안 볼셰비키가 자신들의 그들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노동자들과 깊이 갈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모든 정치세력들의 선택은 상황에 의해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이제 그 제약들의 일부가 제거되면서 볼셰비키 정부와 노동자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이 때문에 이번 연구는 볼셰비키들이 눈앞의 패배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내전 이후의 시기에 처음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이 시기는 가장 낙관적인 혁명가들이 제기했듯이, 새로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즉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이 글은 2000년에 출판된 내 책의 몇 가지 요점을 요약하고 있다. 모스크바 문서고 연구에 기반을 둔 이 연구는 볼셰비키나 볼셰비키가 아닌 풀뿌리 전사들 모두에 초점을 맞췄다. 여기에는 4가지 주요 주제가 있다. (i) 내전에서 노동계급은 어떻게 등장했는가. (ii) 당 밖에서 노동계급의 정치, (iii) 대중적 동원의 캠페인 (iv) 경제 회복; 이것은 몇 가지 결론에 따라간다.

 

주제 1: 내전에서 노동계급은 어떻게 등장했는가.

 

노동계급 조직은 내전에서 약화되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도시 인구가 극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1917년과 1920년 사이에 모스크바 인구의 약 절반이 도시를 떠났고 많은 공장들이 작동을 멈췄다.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크게 승리했지만 프롤레타리아는 거의 사라졌다'는 유명한 글을 썼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사회사가들은 이 일면적인 그림을 수정했다. 그들은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로 가는 동안 숙련된 나이든 노동자들은 대개 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남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는 정치 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이 계속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이것은 특히 금속, 화학, 섬유 공장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실이었다.

 

1921년 봄, 내전 기간 동안 누적되었던 식량 공급과 수송의 문제는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 그리고 다른 마을들에서 공급 위기를 야기시켰다. 1월에 파업으로 시작해 2월에 대규모 집회와 시위로 이어지는 항의 물결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이 제기한 요구와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간의 조율은 없었고, 3월에 크론슈타트 반란이 시작될 무렵 이미 노동자들의 운동은 가라앉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운동은 공급 위기와 관련된 경제적 요구와 더 넓은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 경제적 요구들은 '전쟁 공산주의'와 관련된 정책들에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 곡물 징발의 폐지, 농촌에서의 자유로운 거래, 공장들 간에서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그것이다. 2월 초 모스크바에서 열린 금속노동자 대표단 - 즉 가장 잘 조직된 노동자의 대표자들 - 의 중요한 회의에서 곡물 징발을 현물세로 대체하라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 조치는 물론 한 달 뒤 공산당 회의에서 채택되었고, 신경제정책의 출발점이 됐다.

 

그러한 회의에서, 노동자들은 종종 '배급의 균등화'를 요구했는데, 그것은 신흥 정당과 국가 관료들이 자신들을 위한 특별한 식량 공급을 보증하는 부패한 관행의 종지부를 요구하였다. - 예를 들어, 3개 또는 4개의 직무에 대해 동시에 배급량을 할당하는 것. 힘든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축돼 있는 것으로 간주되던 더 높은 배급량을 공장 책임자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배치하는 것. 또는 완전한 절도.

 

그 정치적 요구들은 소비에트 통치를 더욱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 회복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종종 공장에 기반해 활동하지만 볼셰비키는 아닌 투사들을 체포하는 것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반란의 이러한 정치적 측면은 모스크바보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물론 크론슈타트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거기에서 주요 강령적 문서는 비밀투표에 의한 소비에트 선거, 공산당 특권의 종식, 그리고 그밖에 보다 심대한 정치 개혁들을 요구했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3의 혁명', 또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과 조율의 부족, 이러한 결의안들의 분위기, 그리고 항의하는 노동자들(크론슈타트 반란의 모든 참가자가 아니라면)이 당국과 기꺼이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갱신하기 위한 운동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주제 2: 당 밖에서 노동계급의 정치

 

1921년 반란 때, 그리고 NEP의 첫 몇 년 동안, 내 생각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정치적 경향은 소위 비당파적 집단이었다. 그들은 (모든 정치적 당파들의 밖에 있다는 의미에서) 비당파일 뿐 아니라 비당파주의였다(, 그들은 당의 형태를 거부하는 것을 원칙의 문제로 보았다). 당시 볼셰비키가 아닌 사회주의 정당들은 불법화돼 있었다.

 

회원 가입에 대한 법적 제한은 없었지만, 실제로는 그 회원들은 체포의 대상이었고, 그들의 신문은 폐간됐고, 그들의 모임은 체카(보안경찰)에 의해 공격당했다. 이로 인해 일부 역사가들은 비당파주의자들이 주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의 비밀당원이었다고 추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기와 활동에 대한 문서기록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중 일부는 볼셰비키가 아닌 사회주의당의 당원 출신이었지만, 다른 일부는 전직 볼셰비키 당원이었고, 다른 일부는 원칙적으로 당의 형태를 거부하는 신디칼리스트였고, 그리고 1917년에 활동했지만 여전히 어느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모스크바에는 1921년 봄에 당을 떠난 전직 볼셰비키들의 중요한 그룹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바실리 파누슈킨(Vasily Paniushkin)이 이끄는 노동자농민사회주의당에 잠시 참여했는데, 몇 달 후 탄압을 받았다.

 

1920년에 이 사람들은 민주집중파, 노동자 반대파, 다른 소그룹들로 구성된 당내 야당 연합에 참여했었다. 그들은 1920년에 몇 표만 더 있으면 모스크바 당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19214월에서 5월 사이에 그 도시에 대한 소비에트 선거가 있었다이것들은 내전과 1, 2월의 위기에 대해 선을 긋고, 경제 재건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으로 볼셰비키 지도자들에 의해 호소됐다


볼셰비키는 이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그것은 단지 대의원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도시에 기반을 둔 정부부처 관료들이 대부분 볼셰비키 대표들을 지지해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형 공장들, 즉 정부가 그들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비당파 대표들을 지지해줬다. 이는 전체 2115명 중 533명으로서 4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첫 소비에트 회의의 회의록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 준다. 비당파주의자들은 볼셰비키에게 경제 재건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호소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고, 그들의 다수파 지위를 이용해 비당파주의자들 중 어떤 사람도 소비에트 행정부에 선출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비당파주의자들이 소비에트의 일부로 활동하는 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1921년과 1922년 동안의 회의록은, 볼셰비키 위원회가 이미 취한 결정을 승인하는 고무도장처럼 이용되면서, 소비에트가 빠르게 의미없는 잡담장소가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내전에서 물려받은 불리한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볼셰비키들의 정치적 편협함 때문이었다.

 

소련 최초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AMO 공장의 노동자 조직들의 기록도 드러나고 있다. 비당파주의자들은 1922년까지 공장위원회를 지배했다. 그리고 나서, 지리한 캠페인 끝에, 그들 대부분은 공장에 있는 공산당 세포에 의해 제거되었다. 공장위원회 회의록 및 나중에 구전 역사 프로젝트에 따른 인터뷰들에 의하면 많은 비당파주의자들이 나로드니즘과 신디칼리즘의 혼합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볼셰비키들은 왜 그런 노동자들을 그렇게 편협하게 대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있었던, 볼셰비키 당에서 노동자 반대파의 리더였던 알렉산드르 슐리아프니코프(Aleksandr Shliapnikov)와 레닌의 논쟁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은 공장 노동자들 사이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해 논평하면서, 불평했다: '공장에 있는 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무관심의 요소들이다.' 슐리아프니코프는 레닌 등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거짓 색깔로 칠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는 덧붙였다: '우리는 결코 다르거나 "더 나은" 노동계급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우리가 가진 노동계급에 만족해야 한다.'

 

주제 3: 대중적 동원의 캠페인

 

볼셰비키당은 1917년에 소비에트과 공장위원회를 움직였던 참여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좌절시키는 방식으로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제 당은 국가 권력을 갖게 되었기에 그런 열망은 그들 이데올로기의 전위주의적 측면에 압도되었다. 노동계급은, 실제로 존재한다면(슐리아프니코프가 레닌과 논쟁했던 지점) 수동적인 세력으로 보였다. 계급은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기보다는, 당에 의해 결정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대상이었다.

 

1922년 볼셰비키에 의해 시작된 두 가지 캠페인이 그 징후를 보여줬다. 첫 번째는 볼가(Volga)의 기근 피해자들을 구호하기 위해 교회의 귀중품을 압수하는 운동이었다. 그 동기는 꽤 냉소적이었다. 왜냐하면 기근이 현금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흉작과 운송 시스템의 붕괴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를 반()종교 선전의 기회로 보고, 노동자들에게 황금의 종교적 성상을 떼어내 기근 구호 자금을 마련하자고 촉구했다. 일부 공장에서는 멘셰비키와 비당파적 투사들이, 기근 피해지역을 돕기 위한 지원단을 구성하고, 귀중품 판매 수익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감시하는 등의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 노선에서 어긋나는 그러한 것은 볼셰비키 당원들에 의해 비난 받았다.

 

1918년 사마라(Samara)에서 만들어진 반볼셰비키 정부에 참여했던 사회혁명당(SR) 당원들의 재판 과정에서 두 번째 캠페인이 조직됐다. 주요 슬로건은 사형제도를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1917년에 사형제 폐지가 중요한 민주주의적 요구였기에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평일에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공장 경영진에게는 노동자들을 거리로 불러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정치적 내용과 형태 모두에서 이러한 시위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러면서 내전에서 살아남은 작업장과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형태들이 침식되고 있었다. 작업장에서 볼셰비키는, 1921년의 '노동조합 논쟁' 이후 최종적으로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이 산업 경영에 관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노동조합에게는 '노동자의 이익을 방어하는' 임무가 주어지긴 했지만, 실제로 보안기구와 시위 주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기본적 대처였던 공장 경영진에 의해 파업의 권리는 제한되었다. 게다가 파업 참가자들은 종종 노동조합에서 제명되었다.

 

소비에트에서는, 내가 언급했던 진정한 정치 토론의 추방과 더불어, 관료적 구조의 확산이 있었다. 모스크바 볼셰비키당의 비서인 아이작 젤렌스키(Isaak Zelensky)는 그 당을 '당원들을 빨아들여 소비에트 기관으로 밀어넣고 있는 펌프'라고 묘사했다. 그래서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공장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주제 4: 경제 회복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NEP의 첫 해에 시작된 경제 회복의 맥락 속에서 후퇴하고 질식하고 있었다. 산업은 위탁경영으로 재편성되었고, 시장 메커니즘이 경영에 도입되었다. 한편, 이것은 실업률의 증가를 초래했는데, 특히 군대에서 돌아온 남성 노동자들을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해고된 여성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반면 산업생산은 회복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 중반에는 1913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혁명에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적 요소의 진보 또는 후퇴의 관점에서 이러한 과정을 고려한다면, 경제가 회복되면서 낡은 계급체계와 소외의 형태가 스스로를 재천명하는 위력에 의해 사람들은 타격을 받았다. 작업장에서의 위계적 관계의 재설립과 더불어, 국가 및 산업 경영의 엘리트들에 대한 물질적 특권의 급속한 축적이 있었다. 1922년과 1923년에, 당 관료들이 소비에트와 산업의 직책에 위로부터 임명되는 것이 체계화되었다.

 

이들 당 관료들뿐만 아니라 위탁 경영자들도 내전 중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개인 재산을 모았다. 이 재산은 다른 나라의 기성 자산 계급들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가장 보수가 좋은 노동자조차 도달 불가능하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정도였다. 1923년 조사에서는 공무원의 14%8배 이상 소득을 얻었고, 일부는 - 8배가 법적 최고치였지만 - 최저 임금의 30배 이상 소득을 얻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물론, 그 조사는 반합법적 또는 불법적 소득은 반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22년까지 그 정당은 공식적으로 당 간부들에 대한 물질적 특권을 허용했다. 당대회 결의안은 고위 경영진에게 실적에 따라 급료+50%를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주택, 의료지원, 교육 등에서 값비싼 혜택을 보장했다. 따라서 그 정당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곳에서도 사회적 엘리트가 재형성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결론들

 

이 네 가지 주제의 발표로부터 나는 세 가지 결론을 도출하고 싶다.

 

첫째: 위계질서와 소외가 빠른 속도와 힘으로 새로운 사회에서 다시 나타났다. 볼셰비키와 노동자들 모두 그것에 부지불식간에 사로잡혔다. 1917년이 그들에게 준 위대한 주체 의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등 뒤에서 움직이는 역사적 힘의 고전적인 사례가 여기에 있었다.

 

둘째: 이 시기의 노동계급에 대한 볼셰비키 접근 방식은 '사회적 계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당은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생활 수준이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공업화된 나라들과 유사한 복지 혜택과 여성의 권리를 제공할 것이다. 그 대가로, 당신은 노동 규율을 준수해야 한다. 공장 차원의 문제에 대해 불만을 말할 수는 있지만, 볼셰비키당 밖에서나 반대편에서 정치 활동을 한다면 당신은 고립되고 억압받을 것이다. 이러한 고립과 억압은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내전 이후 환멸을 느끼며 당을 떠난 수많은 전직 볼셰비키들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셋째: 혁명의 사회주의적 측면의 쇠락과 스탈린주의의 발전은 볼셰비키들이 통제할 수 없는 많은 강력한 요인에 의해 조건화되었다. 1920년대 초반의 다른 선택들이 소련 역사를 실질적으로 변화시켰을 것 같지는 않다. 비록 그것들이 착취적인 계급관계와 독재체제의 재부상에 대한 다른 유형의 저항을 가능하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결국, 볼셰비즘은 국제적으로 지난 세기에 걸쳐 노동운동에 영향력이 있고 해로운 권위주의, 전위주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유산 또한 남겼다. 그러한 유산들을 극복하고, 1917년의 위대한 진보적 유산으로부터 그것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사회 해방을 향한 지속적 과정의 일부분이다.


 

 (기사 등록 20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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