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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좌파, 성폭력, 정신장애, 피해와 가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7. 15.

전지윤



미국 좌파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나는 얼마전 미국의 중요한 급진좌파 단체인 국제사회주의조직(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 ISO)이 성폭력 사건을 지도부가 은폐했던 것이 드러나면서 겪게 된 위기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면서 같은 국제사회주의 경향(IST)으로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던 이 곳의 노동자연대 분들이 이를 통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뭔가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헛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미국의 ISO 동지들은 피해자에 대한 사과뿐 아니라 그동안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총투표를 통해 조직을 스스로 해산하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쇄신의 과정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ISO 회원들이 보여 준 것은 조직보존주의에 대한 전면적 거부였다. 이런 잘못을 덮으려고 한 조직은 보존할 가치가 없다는 태도였다.

 

이것은 국제사회주의 경향(IST)의 몇몇 나라 조직들이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고 반성과 사과를 거부하면서, 오로지 조직보존주의에만 매달리던 모습과 극명히 대조되는 정말로 명예롭고 가치있는 태도였다. 또 소위 미국 최대의 극좌파 조직이 한순간에 해산된 것은 미투운동이 만들어낸 커다란 힘도 보여줬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노동자연대 분들의 근래 평가는 실망을 넘어 놀라울 정도다. “[성폭력 사건의] 진상을 알기 어렵다고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ISO 스스로가 성폭력 사건이 있었고 자신들의 지도부가 그것을 은폐해서 피해자에게 큰 상처를 줬다는 것을 인정했는데, 오히려 한국에 있는 좌파가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자신들이 책임있는 성폭력 사건마저 진상은 신만이 알 것이라며 계속 부정하며 피해자를 괴롭히며 고통을 가해오더니, 이제 미국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마저, 그것도 해당 조직이 스스로 인정한 사건마저 부정하며 국제적 가해자 연대에 동참하는 셈이다. 그것도 은폐에 함께하다가 그 잘못과 책임으로 쫓겨난 리더의 증언을 빌어서 말이다.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눈으로 보는 관점이 이처럼 노골적일 수는 없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가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고수인 것이다. 이 정도면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믿을 수 있는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과연 누구일까 싶다. 이처럼 성폭력 사건의 진상은 알 수 없으니 판단을 유보하자면서, ISO 해산에 대한 엉뚱한 평가와 판단에는 아주 거침이 없다.

 

ISO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타협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절충을 하려한 것이 분열과 파편화 경향을 부추기는 셈이 됐다는 것이다. 또 성폭력 사건은 정적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이용되는데, 그 상황에서 버니 샌더스같은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 건설 프로젝트에 희망을 품게 된 사람들의 눈에 ISO는 큰 걸림돌로 비쳐졌을 것이란다.

 

, ‘페미니즘에 타협해서 취약해진 상황에서 개량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아서 조직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한 것이 무슨 페미니즘과 타협을 보여준단 말인가? 더구나 개량주의자들이 극좌파를 싫어하고 앙심을 품어서 성폭력의 누명을 씌운다는 자신들의 변호 논리를 이제 국제적으로까지 확대하다니 너무 심하다. ‘내가 서울시장 출마하는 것을 막으려는 세력의 공격이다라던 정봉주의 음모론과 뭐가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지도부를 인종별로 할당하는 제도를 받아들인 게 문제였다고도 주장한다. ISO는 해산하기 전에 사회주의 조직임에도 여전히 백인 주도적인 조직문화가 있었고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며 소수인종 회원들에게 사과하는 글을 발표한 바가 있다. 지도부 인종 할당과 민주적 선출은 그런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였다.

 

사실 그 전까지 ISO는 지도부에 대해서 사실상 민주적 선출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수십 년간 교체되지 않는 지도자들이 있었던 것이고 그들이 바로 성폭력 사건 은폐를 주도했던 것이다. 제도 개선을 통해서 이 지도부의 교체가 실현되고 나서야 6년간의 은폐를 고발하는 내부고발자가 용기를 내서 증언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이런 개선과 민주주의 확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레닌주의 정치에 충실하지 않고 거기서 멀어지는 일이었고 이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는 논리다. 이쯤되면 또다시 레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레닌주의때문에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지금, 두 달 넘게 사생활과 프라이버시, 심지어 상담기밀까지 공개하며 성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기사를 대문에 걸어두고 꿈쩍도 않고 있는 것인가? 미국 ISO의 사례를 보면서 교훈을 배우긴커녕, 피해자를 완전히 짓밟아서 싹을 잘라야 한다는 각오만 다진 것인가?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는 운동사회 내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심지어 문제제기하는 나에게 그만 좀 하라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아가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들을 더 문제삼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런 사람들은 피해자가 이제 그만 이 일을 잊어버리고 입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게 평온하고 조용할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 것을 볼 때면 피해자들이 왜 환멸과 냉소를 키우게 되는지, 결국 운동적 방식의 해결을 포기하게 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운동사회 내에서 문제의 해결과 자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신질환/장애에 대한 낙인과 혐오를 멈춰야 


우울증, 공황발작, 대인공포, 자살충동, 성격장애, 외상후스트레스... 이런 단어와 증상이 익숙하고 가깝게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 소수자일 가능성이 높다. 따돌림, 멸시, 학대, 성폭력 등의 피해자였을 가능성도 높다.

 

내가 정신질환/장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데는 한때 내가 속해 있던 단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단체는 성폭력 피해 호소를 한 사람을 자살하려고 해서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몰았고 나중에는 심지어 인격장애인으로 낙인찍었다.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낳은 이런 비극이 나같은 사람에게는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만든 계기가 된 셈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성폭력 피해 호소를 정신장애와 연결시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고, 피해자의 입을 막는 악의적 방법일 수밖에 없다. ‘자살하려고...’ 운운은 사실상 자살하라고 부추기는 비정한 말일 수밖에 없다.

 

정신장애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들 중의 하나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감정과 증상을 좀 더 심하게 갖고있는 사람일 뿐이다. 누구나처럼 그 목소리가 경청, 신뢰받을 권리가 있고, 멸시와 학대에 항의할 권리가 있다. 추방되거나 격리돼도 되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정신장애에 대한 낙인과 혐오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는 인권, 성평등, 장애인권, 좌파적 가치를 말하던 사람들도 이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내부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우려고 시도하는 것과, 외부적으로 강제 공개해서 공격하는 것의 차이점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정신장애인이라고해서 타해를 통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런데 정신장애인은 타해를 한다는 생각부터가 편견이다. 특히 정신장애가 있는 여성이 항상 마녀화된다. 하지만 가장 많이 자주 분노를 타해로 분출하는 것은 대개 남성들이고 정신장애의 문제가 별로 없는 이들이다. 나도 살면서 그런 이들에게 더 많이 공격을 당해 왔다.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특히 원인과 결과를 뒤섞어버린다. 정신장애 자체가 개인의 기질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억압의 결과라는 것을 놓친다.(사회심리적 장애) 성폭력 피해여성의 정신상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괴롭힘과 가해가 정신적 내상을 키워왔다는 것을 못 본다.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를 보면 실제 살인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주인공이 정말 미친것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빈곤과 이민, 아버지의 학대, 성적 유린과 위험한 낙태시술 속에 죽은 친구, 정신병원에서 감금과 학대 끝에 제 정신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던 여성의 삶을 보여 준다.

 

정신장애의 발현은 이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인 사회와 체제에 대한 가장 인간적이고 정상적인 반응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무조건 억누르거나 없어져야 할 증상이 아니다. 최근에 환청과 망상에 대해서도 그것을 무조건 억누르고 벗어나야 할 것처럼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접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이해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청과 망상은 꼭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 볼 수 있단 말이었다. 그러면서 엘리노어 롱든의 TED 강연을 소개했는데 내 안의 목소리와 벗이 되어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택한 롱든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됐다. 롱든은 차베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광기에 자부심을 나타내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당당하지만 존중하는 태도로 그 목소리에 반응하려 노력했어요. 소통과 협력의 관계를 서서히 수립하고, 함께 일하고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였죠... 가장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목소리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았던 상처를 대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차베스 대통령의 말을 옮기자면, 사회의 변화가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을 모욕할 수는 없어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억압할 수는 없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syjEN3peCJw&fbclid=IwAR3_ZCV6zOqom_YFQHMc9kwErNqhF-88XANX5KmN_FFWJGNsexQdbrDkZRE

 

 

성폭력과 공동체적 해결에 대한 토론

 

최근에 다른세상을향한연대에서 동지들과 상반기 인권교육과 토론을 했는데 의미있고 큰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인권에 대한 다양한 많은 쟁점들이 다뤄졌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성폭력과 공동체적 해결에 대한 토론 중 몇 가지 인상적 토론들을 정리해보고 싶다.

 

먼저 뭔가 사건이 생기면 우리는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니 권위있는 어디에 넘기자 이런 태도에 대한 돌아보기가 있었다. 실제로 권위있는 어딘가에서 책임있게 대신 해결해주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 스스로 사건을 직시하고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게 맞고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특히 생존자에게 큰 도움과 위안이 된다는 말이다.

 

생존자들의 고통을 비교하고 상대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생존자의 고통과 가해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현상에도 적용해보는 토론도 있었다. 가해자로 지목되고 비판받는 사람도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고통에 공감하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일 수는 없다는 고민이 이어졌다.

 

그 고통이 무엇에 의한 고통인지에 따라서, 당사자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출할 것인지, 주변에서도 어떻게 공감하고 말을 얹을 것이지가 중요하다는 거였다. 이런 것이 생략되면 선택적 공감이 얼마든지 반인권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가리는 것을 전부로 보는 일면적 태도의 위험성도 제기됐다. 그 순간부터 초점은 진실게임으로 변질되면서 또다른 가해와 새로운 상처와 트라우마가 만들어지기 쉽다는 경험이었다. 왜 당사자가 그것에 고통을 느끼고 피해를 호소하게 됐는지 듣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피해 호소와 생존자를 정신장애의 문제로 몰고가는 것이 왜 심각한 문제인지도 이야기됐다. 이런 낙인찍기와 혐오는 너무나 심각한데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공개적으로 정신이 이상하고 자살하려고 했고..’ 이런 식으로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문제는 극도로 악화된다.

 

더구나 실제로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피해 자체가 거짓이나 망상이라는 생각은 순전히 잘못된 편견일 뿐이다. 양쪽의 진술을 들어보면 겹치는 부분이 있고, 그렇게 서로 인정하는 공통된 사실과 정황 등을 바탕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단을 내려야 하는 점은 다를 게 없다.

 

단지 가해자를 제거하고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은 전혀 대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됐다. 사회적으로도 처벌과 응징만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실명과 신상, 얼굴 공개 등이 무비판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사형제 폐지나 감옥 인권같은 문제는 잘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생존자가 요구한 것이 반성과 사과가 아니라 가해자가 공동체를 떠나는 것일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해야 하는가 토론됐다. 생존자가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있다. 반성과 사과도 안하는 가해자를 계속 마주해야 하는 부담과 어려움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요구가 나오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어차피 저 사람은 반성도 사과도 안할 거라는 엄청난 불신에서 그런 과도한 요구가 나오고, 결국 그 불신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공동체는 생존자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최선은 아니고 같이 고민할 의무가 있다.

 

받아들이지 못할 요구라도 생존자가 했으니 받아들인다는 단순하고 편리한 방식이 아니라 함께 토론하고 협의해야 한다. 결국 공동체의 결정을 못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공동체뿐 아니라 생존자도 함께 책임져야 할 몫이 될 것이다.

 

더 문제는 고민과 토론을 회피하고, 원하는 대로 다 해 줬는데 엉망이 됐다고 하면서 결국은 모두가 생존자를 원망하고 탓하게 되는 상황이다. 그것이야말로 생존자를 훨씬 더 고립되게 만들고, 생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일 것이다.

 

우리가 성폭력 절대 불관용을 원칙으로 한다는 어떤 조직처럼, 성폭력이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안전한 공간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 피해도 가해도 겪어보면서 함께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며 공존해 왔다는 것, 힘들고 어렵기만 했던 시간과 경험들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조금씩 전진해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2차가해와 괴롭힘, 인신공격, 욕설과 폭언을 중단해야 한다

 

이모 작가와 그 주변분들이 저와 다른세상을향한연대,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고 괴롭히는 홈페이지를 만든지 벌써 두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미리 본 적도 없고, ‘다른세상을향한연대가 보낸 적도 없는 공문을 빌미로 만들어진 저 페이지는 그동안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사실왜곡과 모순된 주장들을 펼쳐 왔습니다.

 

특히 만들어진지 6년밖에 안된 다른세상을향한연대가 7년 동안 이모 작가를 괴롭혔고, 8년넘게 투쟁해온 성폭력 피해자를 가스라이팅해서 조종했다는 앞뒤도 안 맞는 주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타임머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잘못을 했어도 사람은 누구나 비판을 받으면 괴롭고 힘들 수 있고, 주변의 지인들로서는 그런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에 공감, 위로를 보내거나 방어해주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 페이지를 관리하고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각자의 계정에서 같은 논리를 반복하며 확대재생산하는 분들의 주장은 그것을 한참 넘어서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전형적 2차가해와 괴롭힘, 인신공격, 사적정보 공개와 사생활 침해, 무관한 사건의 강제 공론화, 욕설과 폭언, 혐오성 발언들로 뒤덮여서 들어가 보기 괴로울 정도입니다.

 

처음에 말하던 이모 작가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가해를 한 적이 없는데 억울하다는 논리와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저 페이지와 관련자들의 계정에서 2차가해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논리도 안희정 사건 등에서 계속 반복돼 온 가장 전형적인 것입니다. ‘상대 남성을 좋아하고 연애하고 싶어하다가 거절당하자 성폭력이라고 누명을 씌운 여성.’ 심지어 연쇄조작마”, “상습피해조작인이라는 꽃뱀론의 새로운 신조어까지 등장한 상황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제가 어떤 동지를 데이트폭력 피해자로 만들어서 누군가를 가해자로 몰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등장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전혀 무관한 또 다른 사건을 강제공론화하는 것임과 동시에 어떤 근거도 없는 전혀 사실무근의 주장입니다. 그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따로 있는 사건이며 사건 공개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정신장애 낙인과 혐오를 동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정 정신장애는 타인을 죽이고 다치게 하니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성폭력 피해자를 공격하면서 만들어진 논리들입니다. 성폭력 사건을 강제 공론화하고 피해자의 또다른 피해경험을 멋대로 공개하면서 괴롭힌 것도 바로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쓴 방법입니다. 이모 작가와 주변분들은 자신들이 노동자연대 지도부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노동자연대 지도부조차 회원 개개인이 온라인을 이용해서 무차별적으로 폭언, 욕설, 막말, 조롱을 쏟아내는 것은 통제해 왔습니다. 누군가를 실명으로 언급하며 막말, 욕설, 폭언을 퍼붓고 악마화하면서 인격살해하는 것은 심지어 그가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라고 해도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핵심은 개개인이 아니라 구조와 사회에 있고, 개개인에게는 너무 큰 고통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한 사람들에게 이런 수모가 아주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고 서글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는 너는 고소하지 않을테니 나는 계속 욕설과 막말을 할거다라는 기막힌 태도를 언제까지 두고봐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저런 잘못된 논리와 주장들이 여전히 먹히고 운동사회에서 그것이 방치되거나 심지어 동조하거나 힘을 보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더욱 절망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일일이 반박하기보다 저런 논리와 주장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공동체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게 더욱 중요하다는 피해자의 주장에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저는 이모 작가나 저 페이지 주변에 모여있는 분들도 나름의 고통과 상처, 풀리지 않은 울분들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들어주고 대화할 용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도저히 정당화하기 어려운 지금의 잘못된 행동들을 중단해야만 합니다. 이 사건에 관심있는 다른 분들도 그런 변화가 가능하도록 힘을 보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공문 내용과 보낸 단체들(https://bit.ly/2VXekiR)

* 공문 발송과 문제제기에 다연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언들(https://bit.ly/2VFqGqv, https://bit.ly/2YIA4vz, https://bit.ly/2W36oYi)

* 내가 쓴 해명들(https://bit.ly/2WezpoN, https://bit.ly/2QxOLyR, https://bit.ly/2QEcfSY, https://bit.ly/2EQcSE8, https://bit.ly/2WPWpWS, https://bit.ly/2KpXgvs, https://bit.ly/2LVzZ4L, https://bit.ly/2xSg66p)

* 피해자는 책 절판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증거(https://bit.ly/2HO77sJ)

* 사건의 내용에 대한 설명과 증거들(https://bit.ly/2JLLf3i, https://bit.ly/2EIp6yC, http://reurl.kr/21134EA5HT)

 


(기사 등록 2019.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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