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혁명정당의 지도부, 당원, 그리고 민주주의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

번역 서범진 이재빈

[주] 이 글은 닐 데이비슨이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WP)의 2008년 내부회보(<Internal Bulletin>)에 기고한 글을 번역한 것으로, 2009년 1월에 열렸던 SWP 연례 협의회의 사전토론을 촉발시킨 바 있다. 선거연합인 리스펙트의 붕괴를 계기로 드러난 SWP의 현 위치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내용이며, 주로 당내 민주주의와 전략의 부재를 지적한다. 이때는 아직 <카운터파이어> 그룹과의 분열이 일어나기 전이었고, 닐 데이비슨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존 리즈 양자에 모두 비판적이었다. 그러므로 이 글에 대해서 존 리즈와 알렉스 캘리니코스, 린지 저먼이 모두 저마다의 답글을 배포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부회보에 실린 글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글 역시 특정한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당내 민주주의의 약화가 혁명정당에 끼치는 부정적인 효과에 대해 탁월하게 분석되어 있으므로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고가 될 일정한 보편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번역의 저본이 된 원문은 각주의 링크를 기준으로 했다.[각주:1] 해당 내부회보의 원본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래 개별 인용마다 주석이 달려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원문을 게재한 블로그 운영자가 HTML로 편집하는 과정에서든 다른 이유에서든, 주석 링크가 소멸된 채 후주로 처리되었다. 현재 역자가 해당 내부회보를 구하지 못한 탓에, 후주와 본문을 대조하여 본문에서 각주로 처리했다. 그러므로 원문에서 각주의 실제 위치가 이 글에 달린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붙인 주석은 [역주]로 구분하여 표시하였다.

 

프랭크 카프라의 1946년 작품인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견습생 수호천사가 등장한다. 수호천사는 작은 금융업체 ‘저축과 대출(Savings and Loans)’ 사장인 조지 베일리에게 그의 마을에 만약 그가 없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보여준다. 그 상황이란 아주 충격적이고 처참한 것이었다. 악몽 같은 미래를 피하는 데에 본인의 존재가 분명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지는 다시 활력을 찾고 자살할 생각을 버린다. 그리고 오랫동안 서로 도우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힘을 모아 마침내 악독한 부자 포터의 계획을 좌절시킨다. 은행 이자를 구실로 마을 전체를 삼키려던 구상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다. 최근 금융자본에 대한 분노를 감안하면, 이런 영화 내용은 지금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SWP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국 사회는 어떠했을까? 혁명정당의 수호천사가 1946년 이가엘 글룩스타인이 탄 배가 침몰하여 승객 전원이 사망한 이후의 영국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어떨까? 지금과 좀 다르긴 할까? 우리 덕분에 사건과 일반적인 정세가 [전적으로] 바뀐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다른 좌파 조직들을 비판하듯이, 자칫 과장과 자기과시라는 위험으로 빠지게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분별력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말한다면 우리는 분명 사태 전개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도해 운영해온 두 개의 훌륭한 캠페인 조직, 즉 반나치 동맹(ANL)과 전쟁저지연합(StWC)은 파시즘의 위협을 약화시키고 영국 사회에서 광범한 인종주의에 맞선 전투를 고무했다. 또 무슬림들을 정치적인 일상에 결합시킴으로써 실제로 사회적 · 정치적 상황을 호전시켰다. [저들의] 실질적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이 두 공동전선은 고(故) 던컨 핼러스가 공동전선 전술의 “정신”이라 부르곤 했던 것을 성공적으로 적용시킨 표본이 되어왔다. 또 이런 활동들은 종파주의자들이 우리를 향해 지속적으로 “경제주의”라고 부당하게 비판하던 것들에 대한 분명한 반박이기도 하다.

우리가 발휘한 주도력에 대한 증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폴 풋은 1992년 사망한 데이비드 위저리를 추모하기 위해 열린 집회를 취재하면서, 다커스 하우(Darcus Howe)[각주:2]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다커스는] 영국에서 다섯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였다. [그의] 넷째 아이까지는 그들 주변 도처에 널린 인종주의와 [일상적으로] 투쟁해야 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 속에서 커야만 했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는 ‘편안하게’ 흑인으로 자랄 수 있었다. 다커스는 다섯째가 누린 ‘여유’가 반나치 동맹의 덕, 특히 데이비드 위저리의 덕분이라고 말했다.”[각주:3]

최근에 인종관계기구(the Institute of Race Relations)가 발행하는 <인종과 계급>의 편집자는 최소한 정치화된 영국 무슬림들 중의 일부는 “이슬람 국가에 대한 공상적인 논쟁들”로부터 벗어났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를 이끌어낸 주요 원인에는 바로 “반전 운동에서 좌파와 함께 일하는 과정”이 있었다고도 말했다. 이런 경험은 [좌파와의 협력이] 코란에 반하는 것이라는 히즙 우트-타흐리르 같은 이슬람 조직 일각의 주장을 설득력 없게 만들었다.

“이슬람주의자들과 좌파들 사이에서 추구된 반전 운동 연합이 이런 역동성을 만드는 데에 있어 명백하게 중요한 구실을 했다. 또 이런 협력 과정은 광범한 무슬림 그룹들에게 시민권과 대외 정책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 자신들의 주장이 테러 세력을 돕자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각주:4]

우리는 프랑스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노동조건과 사회 복지를 겨냥한 신자유주의 공격에 저항해온 방식에서 배울 것이 매우 많다. [동시에] 영국의 반파시즘 운동과 반제국주의 투쟁들의 궤적을 본다면, 프랑스에 SWP와 같은 정당이 부재한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파시스트 지도자가 대선 후보로 출마할 정도로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무슬림과 좌파들이 반전 시위를 따로 벌이고 있다. 또,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규제들이 확산됨으로써 무슬림에 대한 법적인 제약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세에 영향을 미친 방식은 단지 공동전선 활동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우리는 경제 상황의 극적인 변화에 대해 우리가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9월에 금융 붕괴가 발생했을 때, SWP는 케인즈주의자들의 분석보다 정확하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좌파들에게 설명하는 조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추상적 비난을 넘어서서 운동의 슬로건을 제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직이었으며, 요구조건을 구체화해서 제시해 [운동을] 조직하는 단체였다. SWP만이 다수의 활동가들을 거리와 작업장과 대학들로 폭넓게 보내서 우리의 분석과 요구조건들을 제안할 수 있었다.

이는 SWP가 단지 영국에서 가장 큰 혁명정당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운동 건설이라는] 실천적인 측면에 서 봐도 유일한 혁명정당이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새롭게 제기되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우리의 책임과 역할은 더더욱 크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더 대접 받고 나아가 정세가 요구하는 정도로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한다면, 몇몇 불편한 진실들을 대면해야 한다. 내키지 않는 자기비판의 영역에 스스로를 내보내야만 한다. 1920년 중반에 게오르그 루카치가 적었듯이, 자기비판은

“어느 때건 주어진 상황에서 당의 활동이 객관적으로 가능했으리라고 기대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때 중요해진다. 분명한 객관적 가능성과 실제 활동 [결과] 사이의 불일치 원인을 평가하는 과정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 요인의 결과물로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객관주의는 … 기껏해야 숙명론으로 보일 뿐이다. 실수의 원인을 평가하는 작업은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각주:5]

성장의 한계?

SWP가 영국에서 혁명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혁명정당은 노동 계급의 조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또 혁명적 상황에서 정치적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적 상황은 자본가 계급의 위기(경제적 위기 뿐 아니라 전쟁, 환경 재앙 등 기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와 이에 대응하는 노동 계급의 대중 행동이라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가능성” 속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그 둘 모두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문제는 당의 성장이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IS그룹이 SWP로 전환한 직후인 1977년에 던컨 핼러스는 <The Socialist Register>에 “SWP는 소규모 정당에 가깝다. 그러나 소규모 성장은 대중 정당으로 성장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각주:6]라고 썼다. 핼러스에 따르면, 당시 우리 당은 3천에서 4천명 규모였다. 그 후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올해 발간된 첫 번째 협의회 사전 내부 회보에는 우리 당에 6,155명의 등록 당원(Registered members)[각주:7]이 있다고 되어 있다.[각주:8] 또 우리에게는 2천명의 미등록 당원(Unregistered members)도 있다. “미등록 당원”이란 ‘재등록 문서를 2년 동안 중앙에 제출하지 않은 동지들’을 뜻한다. “미등록 당원”이라는 이 오웰주의적 정의(The Orwellian concept)는 사실 자기 기만적이다. 우리는 한 번 가입했다가 떠나간 사람들을 재조직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떠난 사람들을 남아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벌써 그들을 [재]조직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최근 가공 자본에 의존해 온 자본가들이 어떤 재앙에 빠졌는지 지켜보았다. 하물며 혁명적 조직이 가공의 멤버들에 의존해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기껏해야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2~3천명의 당원들을 가입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퍼센트로 표현하면, 50~100% 의 성장이다. 상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균형감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1977년에도 그랬듯이 영국의 다른 혁명 정당들과, 심지어 모든 급진 좌파들을 다 합친 것과 비교해도 훨씬 더 세력이 크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가 대중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 정당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특히 지난 10년 간 부상한 운동과 여러 사건들[이 던져준 기회]에 비춰보자면 말이다. 사실 우리가 1만 명에 가깝게 성장할 정도로 성공을 거둔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었다.[각주:9] 이 시기는 신노동당의 선거와 대안 세계화 운동이 시애틀에서 벌어지기 전이었다.

피터 세즈윅(Peter Sedgwick)은 유능한 동지였고 IS의 SWP의 전환을 반대하기도 했던 동지였다. 그는 한 번 가입한 당원들이 멤버십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음에 우리에게 찾아온 물결은 ‘모든 매력적인 청년들’이었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기회는 앨더마스턴(Aldermaston)[각주:10], 혹은 청년 사회주의자들(Young Socialist)[각주:11]의 행진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각각 매번 다양한 세대의 젊은이들이 들어온 일곱 번째나 아홉 번째 시기 쯤 가게 되자, 새로운 당원들의 가입에도 불구하고 당은 별로 젊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매우 분명해졌다.”[각주:12]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어온 문제다. 새로운 피를 수혈 받는 것으로 환자의 생명을 유지시킬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혈과 동시에 출혈이 진행되고 있다면, 단지 죽음을 연기할 뿐이지 건강을 회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대거 조직되는 물결이 한 번 지나가면 언제나 당에는 새로운 당원들이 생기곤 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조직에 가입했던 더 많은 사람들은 그저 우리 동지들을 유유히 지나쳐 사라져갔다. 만일 이렇게 나가버린 사회주의자들의 절반만이라도 우리 곁에 붙잡아둘 수 있었다면, 지난 30년 간 우리의 조직은 수 만 명 규모로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회전문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중대한 구조적 문제 때문일 것이다. 신문 정기구독료를 CMS로 납부하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탈퇴했다고 문제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제시할 수 있는 가설이 있다면 SWP 당원들이 [대중적] 혁명정당을 건설하기에는 너무도 사회부적응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괴짜들, 호사가들, 불평분자, 중간계급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노동 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과는 도저히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들, 즉 계급과 지역 사회에 뿌리가 없는 자들의 모임이다. 내가 이 가설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가설과는 정반대로 우리 당은 너무나도 재능 있는 동지들로 가득하고, 도리어 그 점이 우리의 실패를 더욱 더 쓰라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동지들이 너무나 독립적이고 제멋대로여서 중앙위원회(이하 CC)의 지침을 따를 것을 거부하거나 이를 실행하지 못했나? 아래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지도부가 모순되거나 횡설수설할 때조차 그들의 결정을 지나칠 정도로 잘 따라왔다.

두 번째 가설은 혁명정당 건설이라는 목적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다. 노동 계급은 절대로 혁명적 계급의식에 도달할 수 없다. 설령 일부가 그런 의식을 갖는다고 해도, 사회 변혁이 가능할 만큼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숫자에는 이를 수 없다. 기껏해야 혁명가들은 노동조합이나 개혁주의 정당이 더 왼쪽으로 가도록 압력을 넣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한 편으로 혁명가들은 여전히 궁극적인 목표를 고수하고 있지만, 사실 총체적 사회 변혁이라는 이런 목표는 성취 불가능한 것이다.

1968년 IS를 탈퇴하면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그가 “사회주의자 수확 체감의 법칙”[각주:13]이라고 부른 것을 주창했다.[각주:14] 그에 따르면, 모든 정치 집단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이 주창하는 것보다 오른쪽의 효과를 내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혁명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혁명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좌파적 개혁주의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하다.

정말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트로츠키가 그의 만년의 몇 개월 동안 심사숙고하며 준비했던 일들은 모두 헛된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각주:15] 그러나 나는 이런 논의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나아가 보안경찰[각주:16]에 고용된 사람이 이 글을 읽게 되더라도 그 역시 변혁 정당이 단지 좌파 개혁주의 정당일 뿐이라는 이런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좌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 가능성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점은 중요하다. 동시에, 그런 사람들은 바로 위에서 묘사한 그런 역할을 SWP가 수행하고 있다고 보면서 우리에게 호의어린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세기의 경험들은 사회주의의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분명 무너트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노동 계급이 미래에 [근본적 사회 변혁에 대해] 자신감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됐다. 이런 불확실성이야말로 많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이 언급해온 혁명에 대한 “도박”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혁명이 가능하다고, 우리의 행동이 이런 가능성을 늘리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만한 이유들을 알고 있다.

셋째로, 이제껏 보아온 이야기 중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검토해보자. 이 주장은 우리가 이제까지 일시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객관적인 조건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객관적인 조건’은 앞에서 검토한 가설들 같은 맥락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즉, 급격한 성장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차원이라기보다, 당의 성장을 특정한 수준에 머물게 하는 객관적 제약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 주장에는 분명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쇠퇴기’라고 규정한 1975년 이후의 기간을 돌아보자면 특히 그렇다. 우리가 숱한 내부 논쟁―이것이 우리 당의 역사에서 견해 일치에 도달하지 못한 마지막 논쟁이었다―을 겪은 후 내렸던 결론처럼, 그 시기는 혁명적 좌파들이 성장하기에는 아주 어려웠던 때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이래로 중앙위원회는 단 한 번도 어떤 객관적인 조건이 당의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어떤 요인이 당 건설 실패의 이유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지들은 ‘비관주의자’라고 비난당했다. 이 외에도 비개입주의적 태도,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먹구름 속에서 햇무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등등 비판의 명목은 정말 다양했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조건들이 모두 성장에 유리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장애물들이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도 아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벌어진 사태가 보여줬듯이, 나는 중앙위원회가 대부분의 경우에 옳았다고 생각한다. 중앙위원회는 우리에게 다가온 기회들에 대해 주목했고, 특히 반전과 대안 세계화 운동에 대해서는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관점이 옳았다.

그러나 이 점이 나의 논지를 희석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 가장 분명한 정치색을 띄고 있는 《줄리우스 시저》에서, 카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이따금[?] 그들의 운명의 주인이었지요. 브루투스여, 실수는 우리의 별자리에 아로새겨진 것이 아니라네. 그저 우리에 의한 것일 뿐이지.”[각주:17] 그 오류는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하는 것일까?


“특별한 유형의” 공동전선 : 상상과 현실

당 건설에 대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당이 형성되는 최초의 상태, 즉 회원 수가 100명도 되지 않았던 상황(1950년대 Socialist Review Group과 같은 상태)에서라면 트로츠키가 과거 “간부의 원시적 축적”이라 불렀던 것 이외에는 성장을 위한 대안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 수십 년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마치 당이 단순히 개인들을 산술적으로 하나하나 가입시켜 가다보면 [결국 대중 정당으로] 건설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움직여왔다. 그 어떤 대중정당도 이런 방식으로는 건설된 적이 없을 뿐더러, 특히 혁명적 시기에 코민테른 소속 정당들도 그렇게 성장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우리는 우리 실천이 레닌주의 정설에 위배될 때 보통 그래온 것처럼, 이런 성장 전략이 실패했다고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있지 않다. 이를 중앙위원회도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위한 방법, 즉 한두 명씩 가입시켜 나가는 것 이외의 다른 성장 전략이 있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당이 거대한 성장을 할 때는 네 가지 정도의 경우가 있어왔다. 물론 이 경우들은 서로 결합될 수도 있다. 또 이와 다소간 다른 방식도 물론 상상해볼 수 있겠다.

1) 비슷한 규모의 몇 개의 조직들이 통합하는 경우

2) 개혁주의적인 대중 조직으로부터 탈퇴한 사람들이 혁명 정당으로 유입되는 경우

3) 조합 단위를 초월하여 평조합원들 안에 있는 투사들이 제휴하는 경우

4) 사회운동이나 캠페인이 벌어질 때, 이들로부터 집단적인 지지를 받는 경우

사회 일반의 급진화 없이는 이들 중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대규모로 유입된 사람들은 반드시 기존의 혁명 조직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기하급수적인 성장은 그저 양적인 성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는 본래의 혁명정당이 새롭다시피 한 조직의 중핵이 되어 활동하는 것을 뜻하기 마련이다. 영국사회당이 영국공산당으로 발전하고 스파르타쿠스단이 독일공산당으로 발전했을 때, 그것은 혁명정당이 단지 커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 안으로 한정지어 보자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현실화 가능성이 높은 성장 경로는 캠페인이나 사회운동과 연관을 맺는 것이다. 아직 우리는 대중들이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혁명정당에 가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역사적 상황에 있어본 적은 없다. 전쟁저지연합이 보여준 가능성을 고려할 때, 전쟁저지연합이 동원한 역량을 바탕으로 리스펙트를 건설했던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좌파적인 선거 대안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사회당(Scottish Socialist Party, SSP)이나 사회주의 연맹(Socialist Alliance, SA)처럼 기존 좌파 조직들을 재편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은 아주 중요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바로 이 점 때문에 시기 상 선후관계만을 제외하면 어떤 이유에서도 사회주의 연맹은 리스펙트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없다. 리스펙트는 기존 [좌파] 조직들의 바깥에서 새로운 지지자들을 끌어당겼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선거 연합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리스펙트의 위기가 불거졌을 때, (개인적인 견해로는 축출 과정[갤러웨이 사태]까지도 포함하여) 그 상황에서 우리가 지킬 수 있었던 일들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우리 행동은 옳았다. 문제는 리스펙트의 건설과 위기 사이에 벌어진 일에 있다. 리스펙트의 실패는 단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 즉 조지 갤러웨이의 자기중심주의와 점점 더 심해지는 그의 노동계급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위기는] 리스펙트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혁명이라는 궁극적 목표와 리스펙트 활동이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명료하지 않았던 것에서 비롯했다.

리스펙트를 “특별한 유형의 공동전선”이라 규정한 데에서 이런 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본래 “특별한 유형의 공동전선”은 2001년에 존 리즈가 사회주의 연맹을 규정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개념인데, <International Socialism> 최신호에 기고한 알렉스 캘리니코스에 따르면 리스펙트에도 이 정의가 적용될 수 있다.[각주:18] 오늘날, “특별한 유형의 공동전선”이라는 범주 자체[를 계발한 것]는 아주 유의미하다. 이를테면 1933년 이전의 독일공산당과 우리 조직의 규모를 비교할 때, 우리가 거의 필연적으로 “특별한 유형의 공동전선”을 추구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며, 이미 반나치동맹과 전쟁저지연합이라는 훌륭한 사례들도 있다.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등장한 공동전선에 대한 정의(혁명정당은 [자신보다] 더욱 커다란 개혁주의 정당이 공동행동 등에 참여하도록 끌어들인다)를 자구 그대로 해석하는 조야함을 범하지 않는다면, 공동전선에는 두 가지 주된 특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혁명가와 개혁주의자들이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거나 한정된 부문의 성과물을 얻어내기 위해 함께 합의해 행동하는 연합체라는 점이다. 연합 안에 있는 혁명가들과 개혁주의자들 사이에는 [동맹의 이유인] 특정한 목표를 제외하고는 숱한 불일치가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사회주의의 개념 일부에는 공감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영국 무슬림 연합(Muslim Association of Britain)처럼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서 조직된 집단들의 경우 사회주의적 개념에 대해서조차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혁주의자”들은 단순히 “사회민주주의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가는 아니지만 예컨대 파시스트 조직이나 특정한 전쟁에 맞서 헌신적으로 싸우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한다. 공동전선의 목적지향적인 성격은 곧 공동전선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목표를 성취했느냐에 따라 한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목표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전쟁저지연합이 이라크 전쟁을 저지하려고 만들어졌지만, 전쟁 발발 후에는 전쟁 종식을 위해 싸웠던 것이 그 예다. 반나치동맹은 몇 년간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휴면 상태였다가 “필요할 때 깨어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영구적인 공동전선은 용어의 정의 상 모순이다.

둘째, 공동전선에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개혁주의적인 개인이나 집단들과 함께 하면서 혁명가들은 그들보다 우리의 사상, 논쟁, 방법 등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이를 통해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혁명가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기도 하는 것을 포함한다. 공동전선 전술에 있어서 전지전능한 혁명가들이 무지몽매한 개혁주의자들을 계몽한다는 것만큼 기괴하고 몽상적인 발상도 없을 것이다.

나의 이런 정의에서 보자면, 공동전선의 “정신”은 우리 활동의 대부분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 지부에서 결의안을 내는 것부터 집회의 전술에 합의하는 것, 캠페인의 목표를 결정하는 것까지 모두 포괄해서 그렇다. 종파주의자들이 차이점을 발견하려 할 때 우리는 공통점을 찾아내려 한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합의안을 이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며, 혁명가들이 원칙에 기초해서 홀로 서야만 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마치 우리 동지들이 공무원 전국 대의원 대회에서 행정부 소속 공무원노조의 11월 10일 파업일자 연기 안건에 대해 취했던 태도처럼 말이다. 다만 이런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립을 불사하는] 사례가 적어도 최근 국면에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적 접근법으로서 공동전선 정신을 갖자는 말이 곧 우리가 수행하는 조직적 차원의 연합 활동 모두를 공동전선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윤이 아닌 인간 헌장(People Not Profit Charter)’의 10가지 요구에서 각각의 항목[을 성취하기 위한 조직적 연합 활동]이 공동전선이 될 수는 있다. 예컨대 주택 압류와 공공주택 항목을 다룬 4조를 보자. 주택 압류 시도에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 우리는 공동전선을 조직하는 것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현장에서 주택을 압류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반대하는 운동을 체계적으로 건설하기 위해서 말이다. ([90년대 초에 벌어진 인두세 반대 운동에서] 반 인두세 연합이 압류 주택 경매에 반대했던 사례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겠다.) 물론 정부가 압류 위기에 몰린 집들을 모두 인수해서 원래 거주자에게 다시 임대하라는 정치적 캠페인도 진행해야 할 것이고, 주택 건설 위원회도 재개하라고 동시에 요구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헌장 그 자체는 청원이지 공동전선은 아니며, 만일 이를 공동전선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곧 “개념의 자의적 확장”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그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International Bulletin> 2호에 기고된 중앙위원회의 글에 따르면 우리는 노동조합, 노동자 평의회, 심지어 파리 꼬뮌을 공동전선으로 묘사하는 데 트로츠키의 권위를 빌리고 있다.[각주:19] 그러나 이런 모든 시도는 레프 다비도비치(트로츠키의 본명)도 마치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완전한 헛소리를 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좀 더 진지하게 보면, (비록 나는 여기서 이 점을 상세하게 다룰 여력이 없지만) 이런 주장들의 대다수는 공동전선 전술의 타당성에 회의를 품은 동지들을 트로츠키가 설득하려고 애쓰는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는 청중들이 이미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역사적 계급 기관으로부터 공동전선을 유추하게끔 하고자 했다. 또 역사적인 전환점의 중요 사례를 드는 것을 통해, 공동전선이 특별하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라고 설득했다.[각주:20]

[공동전선이라는] 전략을 어떤 방법으로 설명했느냐와 무관하게 오늘날 이런 주장[을 자구 그대로 진지한 정의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를 알게 될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나 소비에트를 예로 들어보자. 이 조직들은 정확하게 공동전선과는 반대되는 성격을 갖는다. 공동전선 안에서 혁명가들과 개혁가들은 그들의 차이점을 일단 제쳐두기로 합의하고는 공통점에 뿌리를 두고 한두 개 핵심 쟁점들을 성취하기 위해 단결한다.

[단지 계급투쟁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계급 지배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점을 유념해야하는] 노동자 평의회에서는 개혁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계급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 서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표자들이 지지하도록 만들고자 차이점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한다. 공동전선은 행동에 앞서 제한된 [한 두 가지] 주제들에 대해 계급 안에서 이뤄지는 일반적인 합의를 상정한다. 반면 노동자 평의회는 모든 주제들에 대해 계급 전체가 하나의 합의된 입장에 도달하려 한다.

여기서 트로츠키의 권위에 희미하게 기대는 것은 설 자리가 없다. 구체적으로 [공동전선에 대한] 그의 저술들을 살펴보면, 그는 어떤 전술이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거의 항상 1917년 9월 코르닐로프에 맞서 케렌스키와 동맹했던 볼셰비키의 단호함에 입각해 특수하고 제한된 사례들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그리고 트로츠키 자신이 문맥 속에서 지적했듯, “관건은 인용이 아니라 올바른 수단과 방법”이다. 비록 나 자신이 그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 말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공동전선 전략의 특수성은 정확하게 공동전선이 리스펙트에 적용될 수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리스펙트는 위에서 제시한 [공동전선의] 특징들 중에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첫째, 리스펙트가 제대로 된 공동전선이었다면, 리스펙트는 전쟁저지연합의 세 가지 핵심 요구안인 전쟁 반대, 이슬람혐오증 반대, 시민적 자유권 옹호에 배타적인 강조점을 둬야했을 것이다. 실제로 선거운동에서 제기된 “다양한 쟁점들”에 따라 움직였던 것과는 달리 말이다.

그러나 리스펙트는 정의 상 정치정당이었으며,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집단들이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쟁점들, 이를테면 낙태부터 범죄와의 전쟁 등에 폭넓게 개입하는 일을 해야 했다. 리스펙트가 직면한 이런 다양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합의는 [내부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리스펙트의 불안정성과 분열 위험은 예측할 수 있는 결과였다.

둘째, 만일 우리가 SWP 당원이 아닌 리스펙트 구성원들을 혁명적 입장으로 끌어당기려고 시도라도 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일은 지속적인 방식으로는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면 프레스턴이나 레스터에서는 좋은 사례도 있었지만, 전국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우리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했고, 특히 무슬림 구성원들에 대해서 더욱 그랬다. 상호 도전과 논쟁이 없는 가운데, 리스펙트 결성 후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피차 언급하지 말자는 지속성 없는 합의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리스펙트를 공동전선으로 볼 수 있다는 선례를 미국 노동농민당(US Farmer-Labour Party)에서 찾았다고 주장한다.[각주:21] 다만 알렉스 자신도 각주에서 얼핏 내비치듯이 이런 유추는 유용하지도 않을뿐더러, 노동농민당의 결과가 어땠는지를 고려하면 고무적이지도 않다.[각주:22] 그 몇 가지 이유를 보자.

첫째, 이 정당에 대한 전술은 1923년 독일 혁명 실패 이후 코민테른이 결정한 전반적인 초좌익적 전술 전환 속에서 벌어진 기회주의적 “우익” 책략의 초기 사례였다. 그리고 이 것은 1924년 7월에 열린 코민테른 5차 대회에서도 정식 기록으로 남겨졌다. 미국 안에서는 이 당이 “노동자-소농(또는 노동자-농민) 정부”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기반이라 선전되었지만, [이것은 사실] 코민테른이 향후 10년 동안 강제했던 재앙적인 중도주의 입장의 맹아적인 형태를 나타냈을 뿐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영국의 노동조합 관료들이나 중국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동력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둘째, 설사 [이 당을] 코민테른이 만든 공동전선의 사례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미국 노동농민당은 심지어 리스펙트만도 못했다. (당시에는 CPUSA[미국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미국 노동자당은 1919년 시카고 노동 연맹이 설립한 [이] 개혁주의 정당에 [어떤 유의미한 비판이나 좌파적 견인 없이] 그저 입당했다. 그리고 아주 일시적이긴 했지만 1923년 연례 협의회에서 지도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는 이 당의 기존 멤버들의 대규모 탈당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새로 건립된 연방 농민-노동자당(Federated Farmer-Labour Party)은 공산당이 지도부였음에도, 본질적으로 시카고에 뿌리를 둔 구 농민-노동자당과 정치적 측면의 핵심은 다를 바가 없었다.

셋째, 혁명가들이 자신들의 본래 조직원들을 제외하고는 이 새로 출범한 당에 세력 기반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반공주의자였던 로버트 라 폴렛이 당 내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자, 혁명가들이 아닌 당원들은 그를 지지했고 혁명가들은 낭패를 겪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핼러스가 “환상”에 바탕을 둔 “웃기는 막간극”이라고 묘사한 이 사례는 부정적인 측면에서라면 혹시 또 모르겠지만 오늘날 우리와는 어떤 연관성도 있다고 보기 힘들다.

결국 중앙위원회가 <International Bulletin> 2호에서 트로츠키에 기댄 것은, 새로운 발상을 요구하는 전술 전환 국면에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써 역사적 사례를 끌어다 붙인 또 하나의 사례였을 뿐이다.

“급진 좌파” 조직 혹은 프랑스 모델과 같은 반자본주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계획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일관된 새로운 좌파 흐름을 만드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SWP는 그런 조직 안에서 조직적으로 별개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우리보다 오른쪽에 있는 다른 세력들과 힘을 모을 것이다.[각주:23]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당의 성격에 대해 고민을 시작해야한다. 다시 말해, 그 당의 구성과 현실적인 형성 과정, 그리고 그 당의 혁명적 부문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다음의 중요한 기회가 오기 전까지 그런 조직을 즉흥적인 지도에 방치해둬서도 안 될 것이고, 어설픈 공동전선에 대한 이론으로 이를 치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새로운 당은 우리의 참여 없이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현재의 접근법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는 한, 우리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그런 새로운 당의 흐름은 형성되지 못할 위험성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요컨대, 우리는 리스펙트를 공동전선으로 존재하도록 제한하고 싶어 한다. 반면에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형성체를 건설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리스펙트의] 많은 비당원 참여자들은 우리가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 문제는 이렇다. 최소한 우리 지도부의 일부는 자신이 다른 세력들을 통제할 수 없거나 그 당이 정치적 타협을 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리스팩트 내] 다른 세력들과 어떻게 협력해야할 지에 대한 방향성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외부 세력과 관계 맺는 [미숙한] 방식에 이르게 된 것은 SWP가 내부적으로 이제껏 너무 오랫동안 “안내판을 따라가는 민주주의”[각주:24]로 운영되어 온 결과다.

레닌주의의 수많은 형태들

IS가 고심 끝에 레닌주의 당 모델로의 전환을 결정한 것은 1968년 5~6월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혁명적 좌파들이 공산당에 뒤쳐지면서 무능력함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그 때 피터 세즈윅은 [IS의 조직 전환에 대해] 이런 경고를 보냈다:

“‘책임 있는 중앙과 지역 위원회들, 안정적인 구성’ (즉, 같은 사람들이 계속 선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 노선에 대한 그들의 [일관된] 태도’ (이는 곧 그들 자신의 생각이 계속 바뀌지 않는 체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는 (코민테른에서나 볼 수 있는) 일종의 종교적 맹신의 전통이다. 이 시기는 국제 노동 계급의 쇠퇴와 패배의 냄새로 얼룩져있다. 이 시대는 우리의 시대와 다르다.”[각주:25]

세즈윅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거나 최소한 시인하지 않는 불변의 지도부가 세워질 위험성을 경고했다는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이것이 코민테른의, 최소한 코민테른이 혁명적이던 시기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틀렸다. 영국노동당의 1945년 구호를 변용하자면, SWP는 레닌주의 정당이고 또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종류의 레닌주의 정당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SWP가 1920년 이후 코민테른 정당들의 전통에 입각한 볼셰비키 모델을 따른다고 들어왔다. 그런데 사실 이 모델은 하나의 전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볼셰비키는 몇 가지 다른 조직적인 형태를 상황 변화에 맞춰 적용해 왔다. 레닌이 1906년에 쓴 잘 알려진 내용처럼, 당에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모든 동지들이 독립적이고 창조적으로 함께 노력을 기울여 조직의 새로운 형태를 고안해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어떤 이미 결정되어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상황에 대한 지식과 무엇보다 모든 당원들의 주도력이 이 일을 위해 모아져야 한다. 노동자 당의 조직적 세포의 새로운 형태는 과거의 서클보다는 분명히 훨씬 더 폭넓은 형태여야 한다. 이와 별개로, 새로운 세포는 과거보다 훨씬 덜 경직되어있어야 하고 더 “자유롭고” 더 “느슨한” 조직이어야 한다.’[각주:26]

이 문단과 그 외 비슷한 다른 부분들에 대해 헬 드레이퍼는 이렇게 논평했다. “시간과 장소와 분리된 하나의 ‘원칙’으로서 당에 대한 개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27] 당 조직에 대한 레닌의 사상은,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상황에 맞게 다양화되어 있다. 특히 전제정 시대 지하에서 활동하던 상황과 1905~7년의 러시아처럼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고 공개된 조직을 건설할 기회가 있는 상황 사이의 차이처럼 거대한 격차가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또 코민테른이 설립됐을 때도, 언제 어느 때나 통용될 수 있는 전형적 방식으로 건설된 혁명 정당의 조직적 형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즉석 수프 같은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볼셰비키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대부분 경험이 미숙한 공산당들이 조직과 전술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도록 만들어야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급히 마련된 정치적 시험대(21개 조항)를 각 공산당에 부과하는 일과 함께 이뤄졌다. 또 코민테른은 이들에게 혁명정당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개략적인 스케치도 제시했다.

피에르 브루외에 따르면, 독일공산당은 1922년 3분기에 약 22만명의 당권자를 가지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지부의 보고에 따른 수치는 십만명 정도 당원들이 더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치 SWP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일공산당도 당권자의 숫자가 더 신뢰할만한 수치일 것이다.) 정확한 숫자가 얼마든 간에, 그 당은 분명히 대중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었을까? 큰 지역의 경우는 작업장 지구와 구역별로 세분화된 지부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분화된 지부는 무엇보다 10인조(실제로는 열에서 스무 명 사이로 조직됐다)로 나뉘어 있었다. 당원들은 각자 십인조와 산업 지구라는 두 기초 단위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의 고위 리더들은 선거에 의해 선출됐다. 이 선거는 위 두 기초 단위에서 치러졌다. 작업장에 소속된 당의 평의회 운동 활동가들은 자신의 구역의 대표들을 선출했다. 지역 조직의 집행위원회의 절반의 멤버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선출했다. 나머지 절반은 십인 그룹의 모든 활동가들을 포함하는 지역 활동가 전체 모임에서 직접 선출됐다.

이렇게 지명된 지역의 집행위원회는 그들의 회의에 사람들을 초대하거나 주위의 자문을 구하기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에는 다양한 지구, 즉 작업장 지구와 공산주의자 청년회나 공산주의자 여성회, 그 외 제휴 조직들 등 여러 대중 조직의 리더들이 참여했다.

(…) 모든 수준에서 간부들-그들이 어떤 상황을 대표하든, 얼마나 되는 시간 동안 책임을 지든-은 선출됐다. 또 그들을 선출한 단위에서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처지였다. 그 단위가 위원회든 전체 회의든, 협의회든, 의회든 말이다. 볼셰비키의 민주집중제 전통과 마찬가지로, 당의 최고 지도부는 최소 1년에 한번은 열리는 당 대회였다.

당 대회를 위한 대표는 사전 협의회 토론에서 선출됐다. 이 토론 과정에서 상이한 경향이 충돌할 수 있었고 그들의 주장과 후보들이 사람들에게 선보여질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차이를 표현하는 데 광범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이는 그들의 지지자들이 하나도 없는 지역 위원회 회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 대회와 당 대회 사이에 당의 공식 권위는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이하 CC)에 있었다. CC는 두 종류의 방법으로 선출된 사람들도 구성됐다. 일부는 당 대회에서 직접 선출됐는데, 이들은 지도부가 거주하던 곳에서 살아야만 했다. (…) 다른 사람들 역시 당 대회에서 선출됐는데, 그러나 이들은 각 지구에서 지명된 사람들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지구를 대변하는 동시에 당 전체를 대변했다.

이런 방법으로 CC는 스파르타쿠스단의 특징이었던 연방적인 조직 구조를 가졌다. 당 간부들과 대표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을 선출했고 소환할 수도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구적인 당 상근자는 CC 바깥의 집행 기구에서 결코 다수를 차지하지 않았다.”[각주:28]

우리가 부르에의 설명에 착안하여 분명히 이해할 수 있듯이 앞서 언급된 주요 공산당 조직들은 SWP와 비슷한 점들이 있다. 그러나 이 공산당 조직들은 꽤 유연하게 조직했을 뿐 아니라 개방적이었다. 내전이 발생해서 혁명적 기회가 임박했다는 사실이 예상된 상황에서도 그랬다. 물론 어떤 점에서 보면 1980년대 초 이후의 SWP의 조직 방식도 여러모로 변모해 왔다. 각 지회별 규모와 지회의 개수, 선거 연합 참여에 대한 태도, 노조 간부 선거에 출마할 의사 등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물론 중앙위원회가 당원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의 중심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지도부가 여러 논점들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논쟁해야 한다는 것, 그런 뒤에는 그들이 행동 지침을 결정해야 하며, 오직 그리고 나서야 당원에게 결정사항과 지침을 알려준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물론 우리는 연례 협의회에서 중앙위원회의 결정사항들을 비준할 권리를 부여받긴 한다.

이런 태도는 전국 단위와 지역단위로 내려가면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에서 SSP(스코틀랜드사회주의당)의 분열 이후에 솔리더리티(분열후 생겨난 새로운 좌파 단체)에 가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논점이 생겼는데, 스코틀랜드 SWP 지도부는 폐쇄적으로 자기들끼리만 토론했다. 물론 이런 식의 잘못된 태도는 나도 한 번 저지른 바 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지도부 못지않은 책임이 나에게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조직하려는] 충동은 항상 토론을 제약한다. 심지어 논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지도부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당원들이 이미 “옳은” 결정을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한다.

1970년대 후반 경기침체 와중에 중앙위원회 안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당 역사에서 공개적인 분열로서는 마지막 사건이었다. 당시 논쟁에선 오직 클리프만이 소수파였고, 이 때문에 클리프는 전체 당원들을 대상으로 논쟁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클리프는 행동과 논쟁에서 모두 옳은 입장을 취했다. [그의 논쟁은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사건 만이 지난 삼십 년 동안 우리가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해준 유일한 논쟁 사례는 아니다. 문제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논쟁을 촉발시키는 일이 몇몇 중앙위원만의 역할이어야 할까?

이런 리더십 모델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불가피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더 이상의 성장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1999년 이후에 더 심각한 문제가 됐다. 많은 활동가들이 노동조합주의나 단일쟁점 좇기, 지역 운동의 한계를 넘어 자신들을 조직해 줄 정당을 찾고 있다. 과연 그들이 과거에 몸담았던 그룹들보다도 덜 민주적인 SWP의 내부 구조에 자신을 옭아매야 할 이유가 있을까? SWP는 작고 혁명적인 그룹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작고 혁명적인 그룹 그 이상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와 조직방식을 여전히 간직한 채 남아 있다.

[IS의] 레닌주의적 조직 구조로의 전환이 완료되기 전에도 이미 잠재적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1975년 4월에 존 몰리뉴는 바로 이 내부 회보에서 이렇게 문제제기했다. 당원들이 “높은 곳에서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특정한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는 “불화와 분노, 분열”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조직 내의 모든 정치 토론에서 빠져 있다. 물론 각 지부는 정치 토론을 한다. 그러나 중앙의 전략과 체계적으로 관련된 문제들에 개입하고 이를 통해 중요한 결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토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부는 충분히 지도부의 전략 문제에 대해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 또는 더 중요하게는 지도부 내에 존재하는 의견 차이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각주:29]

물론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최초의 정당은 아니다. 루카치는 러시아 혁명의 선례를 따라 대중적 혁명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던 와중에, [SWP] CC도 아마 읽었으리라 짐작되는 책에서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만일 당이 수동적인 방관자 취급을 받는 평당원들 다수로부터 분리되어 당 관료들의 위계질서를 구성하게 된다면, 또 만약 그 당이 오직 예외적인 경우에나 하나로서 행동한다면, 지도부의 매일의 결정과 행동은 당원들 사이에서 백지 위임장과 같은 무관심과 무덤덤함만 낳을 것이다. 그들의 비판은 당 대회에서든 어디에서든 기껏해야 미래의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는, 다양한 의미의 뒷북 정도로 그치게 될 것이다.”[각주:30]

우리는 계속해서 볼셰비키 당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볼셰비키 당원들이 전제정과 준(準)봉건적 야만주의, 그리고 억압 아래에서 누렸던 것보다도 더 낮은 수준의 민주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분파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으로 일시적으로 재결합했던 1906년에 레닌은 그 당의 구조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항들에 모두 동의한다. 민주집중제 원리, 모든 소수파와 당에 헌신하는 반대파의 권리 보장, 모든 당 기구의 자율성, 모든 당 간부는 선출되어야 한다는 점, 또 이들이 당에 대해 책임을 지고 또 소환당할 수 있다는 점 등.”[각주:31]

(동지들은 여기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독일 공산당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당 간부가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왜 지도부는 우리가 당헌과 당원과의 관계 문제에서 1차 러시아 혁명 기간 동안 가능했던 것보다도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우려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아나키즘과 베버주의 사회학에서 공히 볼 수 있는 대의제의 비민주적 타락은 불가피하다는 명제를 거부한다면, 결국 답은 정치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첫째 원인으로 꼽을 만한 것은 지도부가 비록 거의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의 분열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일정 부분 이해할만 하다. 국제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는 종종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론적 문제로 분열되고 파편화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기억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오류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조직에서조차, 당을 정치적으로 마비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영구 분파가 설립되어 오곤 했다. 영국의 International Marxist Group의 1970년대 경험이나, 정도는 더 약하지만 오늘날 프랑스의 LCR도 이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IS/SWP 우리 자신도 소모적인 내부 분파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 초중반에 한 편으로는 공개적인 입당 그룹이었던 노동자의 싸움파(Worker’s Fight)가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생적인 몇몇 분파가 존재했다.

내가 이 글의 서문에서 썼듯이, SWP를 우리의 지도력, 혹은 최소한 우리의 참여가 없다면 어떤 진지한 [운동의] 주도력이 생기기 어렵다는 맥락에서 영국 급진 좌파의 헤게모니를 쥔 그룹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가 사실상 영국에서 유일한 혁명적 좌파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분열이 생긴다면 그 결과는 심각할 것이다. 게다가, 이는 우리가 그동안 만들어온 성과를 뒤흔드는 것이기도 한데, 특히 분열해 나간 조직은 불가피하게 사실상 우리와 같은 이론적 정치적 지향을 가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CC가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취해온 태도는 그들이 보기에 합리적인 수준이 아닌 토론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합리적 수준이란, 보통 이미 CC가 결정한 정책을 실천적으로 혹은 기술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존재하는 차이를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차이는 내면화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냉소주의로 변하고, 활동의 수동성을 낳으며 결국에는 동지들이 조직을 떠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바로 우리가 피하려고 한 바로 그 상황을 낳는다. 당원들이 다른 조직으로 옮겨가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바로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장기간 당이 좀먹어 가는 것의 결과는 사실 당이 공개적으로 분열하는 것보다도 더 우리를 쇠약하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제 스탈린주의 운동을 떠나가던 1950년 초에 이탈리아의 작가인 이냐치오 실로네(Ignazio Silone)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리더였던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에게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최후의 투쟁은 바로 공산주의자들과 전(前)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이 될 겁니다.”[각주:32] 이는 우리의 운명은 아닐 것이다. 많은,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 과거 당원들은 개인인 사회주의자들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정치는 당의 정치와 동일하다. 이 인재들을 우리는 단지 잃어버린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활동을 자신들이 당을 이탈했을 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의심의 눈길로 바라볼 사람들을 늘려놓은 것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많은 전 당원들이 SWP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뻐하지만 그들은 그 일부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지도부가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두 번째 이유는 SWP가 [운동의] 쇠퇴기로 향하는 2년, 패배의 시기에 창당됐다는 것이다. SWP는 그 경험을 아로새긴 채 태어났다. 1968년부터 1976년 사이에 우리가 발전시킨 혁명 정당 모델은 대체 불가능한 정통 교리에서 거의 바로 추출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이 것 역시 어떤 수준에서는 이해할만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싶다. 우리는 매우 불리한 환경에서 활동했다. 산업에서 노동조합은 계속해서 패배를 경험하고 있었고, 처음에 사회주의자들에게 견인된 것처럼 기세 좋게 행동하며 성장하던 노동당 좌파들은 곧 점점 더 우파들의 선거 압력에 타협해 나갔다. 지적인 차원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체성 정치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조직과 당의 이론적 명확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방어적인 태도는 필요했고, 이는 그 시기를 특징짓는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었다. 가끔 벌어진 계급투쟁의 분출, 특히 광부 파업 기간은 예외였지만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한 시기에 세워졌던 조직 모델을 부여잡고 있다. 그런데 그 시기는 예전에 끝나지 않았는가?

당 지도부는 한 편으로는 분열을, 다른 한 편으로는 당 외부로부터 악영향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은 지도부가 당원들이 당의 방향에 관한 결정을 할 수 없다고 믿게끔 만든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당의 방향에 관한 결정은, 루카치가 묘사한 바와 같이 단지 습관적으로 지도부를 단지 추인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결정을 한다는 의미다. 클리프가 정치 이론에 미친 가장 심각한 폐해 중 하나는 “중앙에 의한, 당원들에 대한 조직된 불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광부 파업 기간에 (오래 전에 당을 떠난 전국위원회의 지역 멤버로부터)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물론 나는 모든 결정 때마다 당원 전체가 총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방식이 일을 도무지 진행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사실 이런 일을 굳이 할 필요도 없다. 당 지도부는 매일매일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나 큰 규모의 전략적 결정, 다시 말해 1989년 스코틀랜드 인두세 도입의 경우처럼 긴 시간 여유를 두고 미리 예고된 정부 법안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낸다든가 혹은 잉글랜드에서 2004년에 리스펙트를 출범시킨 것처럼 새로운 정치 단체를 설립한다든가하는 문제에서는 당 전체 차원의 근본적인 고려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은 보통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효율성의 맥락에서 나오는 답변이다. CC가 일반적으로 그들의 판단에 대한 모든 우려를 받아들이고 반응해야 한다는 발상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착증이나 화석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이와 관련해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최근 20년 동안 CC가 언제나 올바른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 현장의 동지들에게 점점 더 우리의 입장에 큰 문제가 있음이 명확해져갈 때조차, 그 사실들을 지적하며 그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CC는 오류를 교정을 하지 않기도 했다.

CC가 최근 20년간 틀렸던 경우를 보자. 인두세에 대한 저항이 노동조합 기반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가정이 틀렸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고, 실제로 그 지적이 옳았는데도, 지도부는 이런 잘못된 결정을 어쩌다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스펙트의 사례에서 보자면, 리스펙트의 붕괴에 대해 지도부는 손쉽게 우리 손을 벗어난 우발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치부했다.

CC 구성원들은 [정치적 책임 논란선 상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고, 이따금 누군가는 특별히 지독한 실패가 벌어지면 그 책임을 지고 희생양이 되었다. (보통 그 희생양들은 특정한 정책이 분명한 오류로 드러날 시점에도 그 정책을 열정적으로 수행하던 사람들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반적인 해명이나 책임성이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를 분명히 하려는 노력들은 대개 이런저런 권고들에 의해 굴절된다. 과거에 살지 말라거나, 옛 상처를 건드리지 말라거나, 내향적이 되지 말라거나. 무엇보다 동지들, 우리에겐 언제나 새로이 조직해야할 집회들과 공개 토론회, 그리고 판매해야할 신문이 있지 않은가? 움직여라, 딛고 일어나라. 우리에게 실수란 없다!

당원 민주주의에 대한 제기에 돌아오는 다른 차원의 답변은, 만약 동지들이 CC의 역할에 불만이 있다면 동지들이 협의회에서 지도부를 바꾸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단지 협의회가 [CC의 주도력 하에] 사전에 준비되는 판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CC에 도전할만한 잠재적 지도부라는 것이 명확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전국적 지도력을 행사할만한 잠재적인 동지들은 이 나라 전체에 걸쳐 존재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1980년대 초기부터 쭉 그 자리를 맡아온 현 CC의 핵심 리더들로부터 그 자리를 양도받을 수 있는 간부가 정말로 없다면, 이는 우리가 우리의 핵심 임무 중 하나를 달성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것일 게다. 미래의 지도부를 성장시키는 임무 말이다. 문제는 그런 잠재력 있는 동지들이 대체로 서로 떨어져 고립된 채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전국적 사안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수단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 나아가 그들이 의식적으로 훈련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일 것이다.

사실, 아주 소수의 예외들을 빼면, 1980년대 초 이후로 CC에 새로 충원되는 대부분의 동지들은 학생이거나 지구 조직자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의 유급 상근자 중에서 충원된 것이었고 그들이 전에 하던 직업은 바로 지도부의 관점을 당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제 그 조직자의 직업은 [좀 더] 필수적이고 어려운 일, 그러나 그렇다고 특별히 돈을 더 주지는 않는 일로 바뀌었다.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동지들은 특권을 가진 관료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들이 과연 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당원들인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CC는 마치 두 레벨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가와 정책 입안자들이 모여 있는(우월한) 그룹과, 그저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 같은 나머지가 모여 있는(열등한) 그룹 말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쉽게 후자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폭은 더욱 더 좁게 만드는 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CC에 소속된 풀타임 상근자 동지들, 즉 “직업 혁명가들”은 한 명만 빼고는 모두 같은 도시(런던)에 살고 있다.

다시 루카치를 보자. “당의 모든 위계질서는 (투쟁이 격렬한 동안에 당이 위계화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반드시 투쟁의 특정한 국면이 객관적으로 요구하는 인재들을 적합하게 배치하는 것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만일 혁명이 한 단계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간다면, 이 전의 전술과 이 전의 조직 형태를 바꾸지 않고서는 새로운 긴박한 상황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즉] 당의 위계질서를 재조직할 필요가 있다. 어떤 개인을 선택하는 문제는 반드시 투쟁의 새로운 국면에 그 인사가 확실히 적합한가에 달려있다.”[각주:33]

분명, CC의 현 멤버들 중 일부는 조직의 형태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자리를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전부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CC의 우월한 그룹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실무 부담도 없고 권력은 막강한 자리를 영원한 붙박이로 차지하거나, 또는 그들이 자신들의 실수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와 무관하게 그들의 자리를ㅡ그들 중 일부라도ㅡ지킬 수 있다면, 이런 현실만큼 혁명정당의 지도부에 대한 관점에 해악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CC는 구조나 그 구성이라는 측면 모두에서 재조직될 필요가 있다. 지도부 구성은 현재 풀타임 상근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 이상으로 작업장과 대학, 캠페인, 지역 사회, 지식인 출신 활동가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는 계급의 상이한 부문의 경험을 반영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다.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상황은 [잉글랜드와] 다르고, 정도 차는 있으나 웨일즈도 그렇다. 따라서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영국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 결정이란 있을 수 없다. (다른 모든 것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런 상황 차이는 영국 전체 지역에서 ‘이윤이 아닌 인간 헌장(People not Profit Charter)’을 운동의 요구로 곧장 연결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북부 지방[스코틀랜드]은 이미 이 요구들을 [일부] 성취했기 때문이다!)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이러한 [CC의 구성과 선출에 대한] 변화들은 중요하지만, 이에 더해 다른 것들도 필요하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영국의 현실, 즉 우리의 전장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빨리빨리 내려야 한다. 특히, 혁명 전략은 반드시 노동계급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근거해야 한다. 물론 그런 평가는 이론적 탐구만큼이나 지속적인 실천 개입을 통해 얻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투쟁에서 얻은 직접적인 경험은 반드시 분석되어야만 한다. 내가 보기에, [당의] 불충분한 이론적 뼈대는 우리에게 필요한 분석 작업을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 때 그 때 우리는 특정 관점에 의해 걸러진 부분적 정보들에 의존해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래를 단지 과거의 반복으로 바라보는 그런 관점 말이다.

물론, 명백하게 틀렸다고 증명될 때까지 사람들이 기존의 전통과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그 때 그 때 쉽게 입장을 바꿔대는 것보다 나은 점도 많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보수주의는 혁명가들의 가치 중에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는 덕목이다. 특히 안정적인 정세에서는 더 그렇다. 예를 들어, 그것은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않은 계획을 발의하거나 [특정 시기에] 유행하는 아둔한 풍조를 당 내에 적용하려는 것을 막아준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수 십 년간 보인 양태는 그저 이론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스콜라주의였다. 우리가 지켜봐왔듯이, 당은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때마다 언제나 역사적으로 유비될 법한 사례들이나 위대한 맑스주의자들 중 누군가를 끌어오곤 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믿어왔다.[각주:34] 우리는 이런 말을 믿지 않는다. 코민테른 첫 4개 대회의 테제나, [예컨대] 1934년 프랑스 지부 내의 좌익반대파에 대한 트로츠키의 어록이 새로운 경제적 · 정치적 상황, 새로운 운동의 형태 등에 대해 어느 때고 답을 줄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우리 현실과 관련 있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고전적 전통이 제공하는 관점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내가 [루카치나 독일 공산당 사례 등을 언급하며] 이 글에서 그러려고 노력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오늘날과의 연속성 덕에 분명 유용성을 갖지만 동시에 한계도 지니고 있다. 특히 그 선례들이 우리로 하여금 단절성을 보지 못하게 방해할 때 그렇다. 모든 상황마다 역사적 선례를 뒤지는 것은 우리가 영국 법률 체계의 특수성을 떠나서 생각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선례가 제한적인 유용성만을 갖는 상황에서 살고 있다.

특히, 나는 우리가 “쇠퇴기”라는 은유를 사용하면서 심각하게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후반에 영국 노동 계급이 경험하기 시작한 후퇴와 사기저하를 요약하는 말로써는 이 용어가 큰 도움이 됐다. 문제는 그런 규정 이후부터였다. 우리는 [산업 투쟁의] 발전 상황을 전적으로 “쇠퇴기”와 그 것의 반대 개념인 “고양기”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 이것은 도움이 되는 분석틀이 전혀 아니었다.

첫째, 지도부가 제시한 시기 구분에 따르자면 쇠퇴기와 고양기는 순식간에 뒤바뀐다. 그러나 영국 노동 계급의 대부분의 역사는 그렇게 쉽게 어떤 측면에서 반대 측면으로 변화해오지 않았다. 1910~1914년, 1919년, 혹은 1971~74년과 같은 시기들은 아주 예외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1989년부터 “고양기”를 예측해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산업 투쟁의 “고양기”] 대신, 아주 커다란 쟁점이었던 인두세 문제와 범죄 처벌법(Criminal Justice Bill) · BNP · 망명자 문제 · 제국주의 전쟁 등의 이슈를 둘러싸고 운동이 벌어졌다. 이 중 반전 쟁점은 그들의 공동체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지정학적 패권주의 반대하는 사람들을 연루시켰다. 이 운동들에 노동조합은 분명히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 규모는 아주 작은 수준에 그쳤다.

이러한 상황 판단 오류는 신자유주의가 노동계급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심각한 과소평가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최근까지도 우리는 그 점을 인정하기를 애써 회피해왔다. 노동 운동과 노동 계급의 삶의 조건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첫 번째 공격은 인두세 투쟁에서 [저들이] 패배하고 나서야 중단됐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지배계급이 더 신중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합원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게끔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기 때문에 저들이 공격을 중단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세 가지 상황 변화로 이어졌다. 하나는 임금이 삭감되거나 오르지 않게 됐고 그 덕에 자본이 이윤에서 가져가는 몫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업 구조조정이 가능해졌다는 것인데, 그들은 “비생산적인” 부분을 없애버리고 작업장 안에서 관리자의 관리 권한을 강화했다. 셋째, 그리고 보다 장기적인 전략 문제로 염두에 두어야할 사항으로써,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신자유주의에 타협했다. 이것은 광범한 노동 운동으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을 약화시켰기에 가능해진 결과였다.

그 이후, 특히 1997년 이후, 두 개 이상의 화학적 과정이 따라왔다. 하나는 자본이 노조 조직률이 낮거나 노조가 없는 곳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고 노조 설립을 통한 연대의 문화를 훼방 놓는 것이었다. 특히 노동조합 조직화가 거의 되지 않은 민간부문에서, 이제 그런 [노동] 문제들은 시장에 맡겨져야 하는 영역으로 취급됐다.

또 하나의 과정은 점진적으로 거대한 사회생활의 영역이 시장 질서에 편입된 것이다. 공짜였던 서비스들이 이제는 돈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정부] 보조금을 받던 서비스들이 이제 경쟁의 영역으로 내몰렸다. 시장의 지배라는 말은 단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루하루 일상의 경험으로 옭아 들어왔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 지배자들의 맹렬한 공세보다 더 도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기존과 같은 날카로운 대립 상태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누적적으로 가해지는 충격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모순된 의식으로서의 개혁주의는 노동 계급의 삶에서 영구적인 요소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에서 사회민주주의로 표현되는 개혁주의는 영구적으로 강화되거나 지속되지 않는다.

일례로, 노동 계급의 개혁주의 의식을 구체화한 노동당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조직이 자본주의에 노골적으로 헌신적이 된 것은 무엇을 함의하겠는가? 지난 삼십년간 지역 서비스의 공급이 백년 전만해도 상상도 못할 시장 논리와 “반개혁주의”로 물들었다. 이것이 노동 계급에게 무엇을 기대하게 만들었겠는가? 이미 금융 붕괴 사태 이전부터 착취당할 기회마저 잃어버린 젊은이들에게 작업장을 사회주의적으로 변화시키고 노조로 조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과거에 우리는 그런 청년 실업자들이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이나 평화 시기의 경제 성장의 효과로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해왔다. 우리는 지금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혹은 경제 붐을 기대하는 중인가?

때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노동 계급이 그로 인한 부정적 효과들은 모두 박차버리고 오로지 분노와 저항만을 표출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낳는 것은 단지 분노와 저항만이 아니다. <Observer>는 최근 노동자들이 322명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임금 삭감에 동의한 JCB 社[각주:35]의 경우를 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는 영국일반노조(GMB) 간부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쟁의 행위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파업이 힘을 발휘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죠. 누구도 자신들의 [깎인] 돈을 돌려받지 못했어요. 비싼 음식 값에, 자동차 기름 값, 게다가 이제는 일당도 깎였죠. 사는 게 힘드네요.”

기사는 HR 컨설턴트 社[각주:36]의 경영 감독인 마샬-제임스(Marshall-James)의 말도 인용했다.

“요즘 사람들은 파업을 잘 벌이려고 하지 않아요. 그들은 덜 정치적입니다. 또 과거[노동자들]에 비해 더 이기적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각주:37]

이것이 노동계급 전부에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많은 이들이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제껏 거의 그래왔던 것처럼, 이런 문제들을 간단히 답변할 수 있는 주제쯤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노조 관료들의 배신”이나 “평조합원들의 자신감 부족” 같이 종종 심각하게 몰역사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런 논평은 마치 절망적인 인상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실, 나는 지금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종류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일반적인 차원과 구체적인 차원에서 모두 논의해 볼 수 있다.

일반적 측면에서 얘기하자면, 레닌이 1920년에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이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포함해 제국주의 전쟁과 경제 위기가 존재하는 시기라면 언제나 진실일 것이다.

“전체 역사, 그리고 특히 혁명의 역사는 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의 의식적 선봉대인 최상의 당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언제나 내용상 더 풍부하고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독창성에 빛나 생생히 살아있다. (…) 세계적인 경제 · 정치 위기가 온갖 나라에 흩뿌려 놓은 셀 수 없이 많은 불씨 중 어떤 것이 폭발로 이어질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공산주의적 원칙들을 통해 낡고 썩은 내나며 절망적인 분위기를 일신하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실패할 것이다. 또 [미래를] 이해하며 대비하지 못할 것이다.”[각주:38]

프랑스의 맑스주의자인 다니엘 벤사이드가 언젠가 맑시즘에서 말했듯이, 이런 관점은 준비라는 개념과 결합될 수 있다. “일어나지 않을 법한 미래, 예상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발생한 일에 대해 준비[해야한다.]”[각주:39]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는, 클리프가 1968년에 잘 포착한 바를 살펴볼 수 있겠다.

“수십 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저런 제도적 잣대-조직원 여부, 신문 구독 여부 등-을 통해 대중의 의식 상태를 추론해오곤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좌파] 조직들로부터 노동자들이 멀어졌기 때문에 이런 잣대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1968년 5월의 급격한 봉기를 [좌파들이 사전에] 감지할 방법이 왜 없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또한, 더 중요하게 이는 당시 투쟁의 극렬하고 폭발적인 성격을 설명해준다. 만일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공산당이나 노조의 산하 지부에 일상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면, 이런 제도적 장치들은 분명 투쟁을 원조하는 동시에 파업이 어떤 통제도 없이 급격히 확산되는 것을 막는 일도 했을 것이다.

무관심 혹은 개인화라는 말은 전략적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특정 단계에서는-개인적인 방식으로 삶을 개선하는 것이 어려워지거나 아예 불가능해질 때-무관심은 급격히 신속한 대중 행동이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뒤바뀐다. (…) 전통적인 조직들에 충성심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몇 년 동안 마비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곧 그들 자신을 극렬하고 폭발적인 투쟁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었다.”[각주:40]

클리프가 묘사한 조건들은 40년 전 프랑스에서보다 오늘날 영국에서 훨씬 더 심각해졌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노동계급에게 미치는 효과는 거의 같을 것이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준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도부와 평당원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그람시와 톨리아티는 1926년에 혁명정당의 중요한 측면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당에서 중요한 것은] 지도부의 지침이 떨어지기 전에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적절한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지부 조직과 당원 동지들 개개인의 능력이다. 이것은 (…) 위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릴 줄만 아는 태도를 포함하는 [여러] 소극적 태도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필요하다. 당은 아래로부터의 ‘주도력’에 의해 특징지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기층 조직은 모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각주:41]

앞으로 벌어질, “주도력”이 필요한 상황들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이미 오늘날의 위기가 낳은 두 가지 직접적 결과에 직면하고 있다.

하나는 갈수록 늘어나는 압류와 퇴거 조치 문제다. 나는 여기에 개인 파산 문제를 더해야 한다고 본다. 개인 파산 역시 [앞의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개인적인 비극이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내가 일전에 썼듯이,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진실로 우리가 공동전선 전술을 펴야하는 곳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일자리에 대한 위협이다. 은행 대출 시스템이 붕괴됨에 따라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중핵에 타격이 가해졌다.

두 가지 경우에 모두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 맞선 주장을 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대안적 정치경제 체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에서 폭발적 투쟁이 벌어질지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대비해야만 할 두 가지 다른 상황이 있다.

하나는 도시와 농촌에 젊은층의 높은 실업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초기에 보던 폭동(경찰과 기타 국가 권력 등의 점증하는 억압이 상황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과 같은 형태의 저항을 낳을 수 있다. 혹은 이런 실업에 대한 불만이 파시스트들과 인종주의자들의 소수자 희생양 삼기에 호응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사회가 양극화된다는 것은 곧 양 끝도 둘로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대비가 필요한 다른 하나는 [위와는] 반대의 상황으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 그러나 노동조합으로는 미조직된 경우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라면 절대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유용하게 다가오는 역사적 선례가 있다.[각주:42]

1930년대 미국에서 경제 불황은 길드보다 산업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운동을 다시 떠오르게 만든 배경이었다. 1930년대 미국의 광범한 노조 조직화 운동은 이민 2세대 노동자들의 욕망이 중요한 동기가 됐다. 그들은 지난 십년간 저임금으로 인해 배제되어왔던 소비 천국의 일부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 경제 불황은 다시금 그 기회를 날려버린 듯했다.

그들의 저항에 불을 붙인 더 중요한 요소는 현장 주임들의 횡포와 생산라인에서 자리를 뜨지 말라는 압박감이었다. 이런 내부 관리 체계는 여기저기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됐다. 특히 텔레마케팅을 하는 거대한 사무실과 공장, 거대한 슈퍼, 그리고 금융 회사 등이 그랬다. 사람들은 이 산업들이 기업 구조조정 과정을 공유하면서 갈수록 악독해지고 있다고 의심했다.

다른 한 측면에서, 미국의 경험은 특별히 우리에게 중요성을 갖는다. 30년대 중반의 성공적인 파업들을 보면, 사실상 정치적 지도력은 좌파 정치 조직들에게 있었다. 현장에 존재하고 있고, 공산주의자 노동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 혹은 A. J. 무스티(A. J. Muste)[각주:43]의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현명하게 말할 줄 안다면, 어떤 성향의 조직이든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 영국 내의 유일한 혁명정당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자기만족에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다른 조직들도 표면적으로 그럴듯한 논의와 전략을 가지고 있다면, 새로운 운동의 부양 상황에서 얼마든지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운동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우리는 협의회 사전 토론 기간을 늘려야 한다. 전략과 조직 내부, 두 가지 주제 모두에 대해 더 큰 규모의 토론을 허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특히 현 CC가 위 두 가지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런 맥락의 제안이 포함된 협의회 안건은 이 글 뒤에 첨부했다.)

이런 제안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내부적 논쟁이 분명히 좌파 종파들에 의해 유출될 것이라고 반응할 것 같다. 언젠가 조지 리히트하임(George Lichtheim)이 적절하게 묘사했듯이, 이 종파들은 마치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을 삼키려고 서로 게걸스레 달려드는 작은 포악한 생물들”[각주:44] 같다. 차이나 미엘빌과 리처드 시모어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룬 바 있다[각주:45]. 시의적절하게도 <Internal Bulletin> 2호에서 그들이 “토론의 문화”라고 제목을 붙인 글을 통해서 말이다.

좀 더 분명하고 진지하게 내 제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회] 위기의 정도와 그 결과 벌어진 상황의 긴박함이 너무 커서 당 내부 구조 같은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시위와 공개 모임을 열어왔고, 신문을 팔았으며, 파업을 조직하는 등 많은 일을 해왔다. 우리는 확실히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제기한 토론과 이런 작업들을 병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회피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조직을 혁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만난 사람들을 위의 사업들로 끌어들일 수 있겠는가? 지난 30년간 우리는 심각하게 성장해오지 못 했는데, 정말 아무 변화도 주지 않아도 앞으로는 성장할 수 있는 것인가? 점점 경제 위기가 심해지고, 우리는 하던 대로 일을 계속하고, 심지어 더 열광적인 분위기로 맡은 일에 헌신하면, 그에 따라 당원들이 [저절로] 늘어나게 될까?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은 전혀 진지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혁명이 시작되고 끝났던 1968년과 1975년 사이의 기간에, 우리는 당의 구조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추가 협의회를 개최했다. 지금보다도 훨씬 운동의 수위가 높았던 당시에도 이런 문제를 논의한 선례를 봤을 때, 우리도 더 이상 현재의 운동 상황이 이런 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설사 당을 개혁하는데 실패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단지 조직을 보존하는 것 그 이상이다. 우리는 영국 노동 계급으로부터 지도력을 쟁취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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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주] http://www.socialistunity.com/leadership-membership-and-democracy-in-the-revolutionary-party/ [본문으로]
  2. [역주] 영국의 방송인이자 인권운동가. [본문으로]
  3. Paul Foot, “David Widgery’” New Left Review I/196 (November/December 1992), p122. [본문으로]
  4. Arund Kundnani, “Islamism and the Roots of Liberal Rage”, Race and Class, 50, 2 (October-December 2008), pp61-62. [본문으로]
  5. Georg Lukacs, “Tailism and the Dialectic”, in A Defenc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Tailism and the Dialectic (London: Verso, 2000), p78. [본문으로]
  6. Duncan Hallas, “How Can we Move on?”, The Socialist Register 1977, edited by R. Milliband and J. Saville, p9. (http://www.marxists.org/archive/hallas/works/1977/xx/moveon.htm) [본문으로]
  7. 역주] 남한 조직에 빗대면 일종의 권리회원 개념이다. 문맥상 영국 동지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신이 당원임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다시 ‘등록’을 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8. Central Committee, “Building the Party during the Economic Crisis”, Pre-Conference Bulletin 1 (October 2008), p9. [본문으로]
  9. [역주] 1,100만 명이 참여한 주민세 납부 거부 운동이 벌어진 이후였고, 노동당이 블레어의 “신 노동당”으로 우경화한 시기로 보인다. [본문으로]
  10. [역주] 원자력 무기 연구소가 있으며 CND(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의 핵무기 폐지 운동 행진(1958-63)의 출발점이자 종점인 도시다. [본문으로]
  11. [역주] 1960년에 노동당에서 재창건된 청년 조직의 명칭이 Young Socialists인데, 이것의 오기로 판단된다. IS는 이 그룹을 겨냥해 영국 노동당에 한동안 엔트리해서 활동했다. [본문으로]
  12. Peter Sedgwick, “Introduction: Farewell Leicester Square”, in David Widgery, The Left in Britain, 1956-1968 (Harmondsworth: Penguin, 1976), pp20-21. (http://www.marxists.org/archive/sedgwick/1976/xx/grosvenorsquare.htm) [본문으로]
  13. Alasdair MacIntyre, “In Place of Harold Wilson?”, in Alasdair MacIntyre’s Engagement with Marxism: Selected Writings, 1953-1974, edited by Paul Blackledge and Neil Davidson (Leiden: Brill, 2008), p371. [본문으로]
  14. [역주] 원래 경제학에서 “수확 체감의 법칙”은 단위 토지 당 투입되는 노동력의 양이 늘어나도, 수확량은 투입된 노동량에 비해 낮은 수준에 늘어난다고 설명하는 법칙이다. 이 개념을 제조 분야에 적용하면,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드는 단위당 비용은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급격히 증가한다. Alasdair MacIntyre는 개혁적 성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그보다 더 큰 목표, 즉 혁명을 준하는 노동량을 투입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본문으로]
  15. Trotsky, Leon [1939], “The USSR in War”, in In Defence of Marxism (Against the Petty Bourgeois Opposition) (London: New Park, 1971), p11. [본문으로]
  16. [역주] 원문은 Special Branch로, 영국 경찰 산하 특별 조직이며 한국의 국정원 격이다. 정치 폭력과 체제 전복 음모에 대응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고, 주요 정치 인사의 경호 또한 담당하고 있다. [본문으로]
  17. William Shakespeare, Julius Caesar, Act 1, Scene 2, lines 139-141. [본문으로]
  18. John Rees, “Anti-Capitalism, Reformism and Soci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Second Series, 90 (Spring 2001), p32(http://pubs.socialistreviewindex.org.uk/isj90/rees/htm); Alex Callinicos, “Where is the Radical Left Going?”, International Socialism, Second Series, 120 (Autumn 2008), p102-103(http://www.isj.org.uk/index.php4?id=484&issue=120). [본문으로]
  19. Central Committee, “The Economic Crisis, the United Front and the Charter”, Pre-Conference Bulletin 2 (November 2008), p9. [본문으로]
  20. L. D. Trotsky, “For a Worker’s United Front Against Fascism”, in The Struggle Against Fascism in Germany, introduced by Ernest Mandel (Harmondsworth: Penguin, 1971), pp102-103, 107-108. [본문으로]
  21. Callinicos, “Where is the Radical Left Going?”, p103. [본문으로]
  22. 이에 대해서는 Franz Borkenau [1939], World Communism: a History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new introduction by Raymond Aron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62), pp264-265; E. H. Carr, The Interregnum, 1923-1924 (Harmondsworth, Penguin, 1969), pp204-205; Socialism in One Country, vol. 3, 1924-1926 (Harmondsworth: Penguin, 1972), pp244-255; Duncan Hallas, The Comintern (London: Bookmarks, 1985), pp112-113. (http://www.marxists.org/archive/hallas/works/1985/comintern/ch5.htm#s1) [본문으로]
  23. Callinicos, “Where is the Radical Left Going?”, pp106-109. [본문으로]
  24. [역주] 원문은 guided democracy로, 지도부가 정해놓은 방향 안에서 작동되는 민주주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본문으로]
  25. Peter Sedgwick, “The French May…”, International Socialism, first series, 36 (April/May 1969), p40. (http://www.marxists.org/archive/sedgwick/1969/xx/may.htm) [본문으로]
  26. V. I. Lenin [1906], “The Reorganisation of the Party”, in Collected Works, vol. 10 (London: Lawrence and Wishart, 1962), p34.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05/reorg/ii.htm#v10pp65-033) [본문으로]
  27. Hal Draper, “The Myth of Lenin’s ‘Concept of the Party’: or what they did to What is to be Done?”, Historical Materialism 4 (Summer 1999), p208. (http://www.marxists.org/archive/draper/1990/myth/myth.htm#section3-1) [본문으로]
  28. Pierre Broue, The German Revolution, 1917-1923, translated by John Archer, edited by Ian Birchall and Brian Pearce, with an introduction by Eric Weitz (Leiden: Brill, 2005), pp628, 634-636. [본문으로]
  29. John Molyneaux, “Democracy in IS”, Pre-Conference Discussion Documents (April 1975), p40. [본문으로]
  30. Georg Lukacs, “Towards a Methodology of the Problem of Organisation”, in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Essays on Marxist Dialectics (London: Merlin, 1971), p337. (http://www.marxists.org/archive/lukacs/works/history/ch08.htm) [본문으로]
  31. V. I. Lenin [1906], “An Appeal to the Party by Delegates to the Unity Congress who Belonged to the Former ‘Bolshevik’ Group”, in Collected Works, vol. 10, p314.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06/apr/26.htm) [본문으로]
  32. Ignazio Silone, in A Koestler et al, The God that Failed: Six Studies in Communism, with an Introduction by Richard Crossman (London: The Right Book Club, 1951), p118. [본문으로]
  33. Lukacs, “Towards a Methodology of the Problem of Organisation”, p336. (http://www.marxists.org/archive/lukacs/works/history/ch08.htm) [본문으로]
  34. Ecclesiastes, 1:9. ([역주] 전도서 1장 9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본문으로]
  35. [역주] 건설,기계,농업,보험 등의 품목을 다루는 영국 소재의 다국적 기업이다. [본문으로]
  36. [역주] 영국의 인력 수급 회사. [본문으로]
  37. Tim Webb, “Workers Reject Strike Weapon”, The Observer, 2 November 2008. (http://www.guardian.co.uk/politics/2008/nov/02/trade-unions-recession) [본문으로]
  38. V I. Lenin [1920], ‘”Left-Wing” Communism–an Infantile Disorder’, in Collected Works, vol. 31 (London: Lawrence and Wishart, 1966), pp95, 99.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20/lwc/ch10.htm) [본문으로]
  39. Daniel Bensaid, “Leaps! Leaps! Leaps!”, International Socialism, first series, 95 (Summer 2002), p77; Lenin Reloaded: towards a Politics of Truth, edited by Sebastian Budgen, Stathis Kouvelakis and Slavoj Zizek (Durham, North Carolina: Duke University Press, 2007), p153. (http://pubs.socialistreviewindex.org.uk/isj95/bensaid.htm) [본문으로]
  40. Tony Cliff, “On Perspectives”, International Socialism, first series, 36 (April/May 1969), p17; In the Thick of Worker’s Struggles, Selected Writings, vol. 2 (London: Bookmarks, 2002), p134. (http://www.marxists.org/archive/cliff/works/1969/04/perspectives.htm) [본문으로]
  41. Antonio Gramsci and Palmiro Togliatti, “The Italian Situation and the Tasks of the PCI (‘Lyons Theses’)”, in Selections from the Political Writings, 1921-1926, translated and edited by Quintin Hoare (London: Lawrence and Wishart, 1977), p367. [본문으로]
  42. Mike Davis, “The Barren Marriage of American Labour and the Democratic Party”, Prisoners of the American Dream: Politics and Economy in the History of the American Working Class (London: Verso, 1986), pp55-56. [본문으로]
  43. [역주] 미국 태생의 독일계 성직자이자 평화운동가, 노동운동가, 시민권 운동가. [본문으로]
  44. George Lichtheim, Imperialism (Harmondsworth: Penguin, 1974), p17. [본문으로]
  45. China Mieville and Richard Seymour, “Dissent and Discussion: an Analysis and Proposal”, Pre-Conference Bulletin 2 (November 20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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