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프리즘
케어 파국에 관한 소고: 조금 더 나은 공존을 위하여
윤미래
정신 질환을 앓는 주변 사람을 둔 경험이 있는지? 정신 질환자들, 특히 증상이 극심하거나 자살 경향성이 높은 이들은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것 자체에도 많은 힘과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은 위로하고, 함께 있고, 식사, 생활을 챙기고, 관계망에서 적응을 돕는 등 돌봄 노동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부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종종 한 사람들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이러한 돌봄을 분담하면서 케어자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많은 경우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인간의 따뜻함이나 선의보다는 오히려 타인과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가르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격언처럼, 서로 도우려고 했다가 서로를 해치고 끝나는 관계가 정신 질환 당사자와 조력자 사이에는 몹시 빈번하다.
그 절정이자 최후라 할 만한 사태는 케어자들이 당사자와 크게 다투고 완전히 의지를 잃어버린 채 관계에서 철수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케어 파국’이라고 부른다. 이 국면에서 케어자는 당사자에게 ‘나아지려는 의지가 없다’ ‘사람을 조종하고 착취한다’ ‘주변의 사람과 관계까지 망가뜨린다’는 비난을, 당사자는 케어자에게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와주려는 사람은 결국 배신한다’ ‘모두 자신이 먼저다’는 원망을 흔히 주고받는다.
‘케어 파국’은 정신 질환이나 장애 당사자가 흔히 가지는 환상만큼 선량하고 무해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증상으로 인해 쉬이 폭력이나 착취의 가해자가 되곤 한다는 소화하기 힘든 진실을 폭로하지만, 당사자가 자원과 권력을 박탈당한 약자라는 사실을 반증하지는 않는다. 케어 파국의 장기적 결과는 대개 장애에 대한 혐오가 더욱 심해지고 당사자는 더욱 고립되며, 케어자를 비롯한 비장애인들은 ‘쎄한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장애 배제적인 사회의 규범을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갈등 끝에 한 쪽은 생존의 근거를 잃고 한 쪽은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이 관계에서 누가 약자인지는 분명한 일이다.
본질적으로, ‘케어 파국’이란 누군가의 생존이 타인의 선의라는 가는 실 한 가닥에 위태롭게 매달려서 지탱되어 왔음을, 그리고 그 선의는 비장애인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 쉽게 철회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승인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이다. 이런 상황에 성공담은 드물고 실패담은 흔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고, 사회가 질병과 장애를 품고 공존할 수 있도록 재조직되기 전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숱한 시행착오에서 배울 것을 정리하고 조금 더 나은 관계 맺기를 모색하는 것은 가능하며, 그 속에서 대안적인 사고와 실천을 키워나가는 것이야말로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해야만 할 일이기에, 이 글에서는 몇 가지의 흔한 실수들을 정리하고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인식들 몇 가지를 제안해보려고 한다. 케어자나 당사자들 사이에 널리 합의된 원칙이거나 과학적 검증을 거친 전문 지식이 아니니 개인적인 편향이 많이 섞여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 문제를 언어화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비판을 각오하고 설익은 의견을 내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경험이 없는 조력자들은 특히, 별 생각 없이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미루어 ‘자신이 생각하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것들을 당사자가 그것을 어떻게 느낄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부지불식간에 강요하기가 쉽다. 식사와 수면 패턴을 단속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하도록 억지로 ‘끌어내’거나, 증상을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관계들(많은 경우 연애관계)에 개입해서 ‘떼어놓는’ 등의 행동이 대표적이다. 싫어하는 일을 강요할 의도가 없더라도, 이러한 것들이 도움이 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당사자가 반기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태도만으로도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조력자 하나하나가 아쉬운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거절하기 힘든 압력이 된다.
또다른 전형적이고 상식적이어 보이지만 배제적인 대응은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가라’로 문제를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 진심으로 환자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종사자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들에 의해 비장애인들의 자원으로 비장애인들의 사회에 맞게 연구되고 실시되는 임상의학은 기본적으로 ‘정상적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광기’ ‘증상’ ‘비정상적 행동’이 당사자가 처한 입장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가능성은 많은 경우 고려 대상이 되지 않으며, 적지 않은 종사자들은 심지어 증상을 ‘교정’해야 할 일탈처럼 치부하기도 한다. 때문에 정신 질환자가 병원 문턱을 넘는 일은 단순히 ‘귀찮음’의 문제도 ‘의지’의 문제도 아닌, 결단을 요구하는 타협의 문제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기술에 내 가장 내밀하고 깊은 고통들을 내맡겨야 하는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국가 종교에 가까운 과학의 권위에 ‘미친 사람’이 느끼는 반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설득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며, 설령 성공한다 한들 ‘병식’이나 치료 의지가 없다는 판단으로 환원되기 일쑤이기에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 중에 이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수많은 비장애인들은 그래서 환자가 ‘고통에 취한다’는 형용모순으로 이를 설명하려 시도하는데, 그 결과로 나타나는 ‘너의 고통은 네가 자초하고 있는 것’이라는 비난은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 폭력의 가장 흔한 유형 중 하나다.
주변인들이 잠시 부담을 지고 희생해서 당사자가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여기서 ‘의사’를 ‘주변인’으로 바꾸었을 뿐 당사자를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그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믿음은 ‘곤경에 빠진 처녀’와 그를 구원하는 ‘백마 탄 왕자’라는 성역할과 결합했을 때 특히 파괴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규제하는 사회적 성 각본, 연애 각본에 내재되어 있는 착취적 성격과 권력 불균등을 극단까지 증폭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혐오로써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착취와 폭력을 ‘돌봄과 보호’로 위장하고 여성의 고통과 분노를 ‘감정적 반응’ ‘과민함’으로 격하하는 오래된 전략을 훨씬 더 상식적이고 동의할 만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오류들의 기저에 있는 것은 병을 일상에서 벗어난 것,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 빨리 고치고 돌려놓아야 할 것으로 보는 인식이다. 바로 이 인식이 고칠 수 없거나 고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병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사회에 섞일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어떤 사람들에게 병과 장애는 삶의 일부이며, 일상이며, 자신의 일부다. 그것을 삶의 다른 부분들과, 또 사회에서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사자와 주변인 모두의 책무이다.
이것은 당연히 당사자들이 져야 할 책임도 있다는 뜻이다. 주변인들이 저지르는 과오가 있듯이, 당사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도 많다. 흔히 ‘이상화’와 ‘평가절하’라고도 불리는, 모든 관계적·정서적 욕구를 충족해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좌절되면 상대를 비난하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기대나 그에 수반되는 좌절은 많은 경우 통제할 수 없는 증상이다. 그러나 그것을 증상으로 인지하고 증상을 완화할 방법을 모색할지, 그것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며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와 부당한 비난을 반복할지는 분명히 당사자에게 달린 선택이다.
자신의 증상으로 인한 고통은 분담해주기를 요구하면서, 그에 관련된 결정(치료의 여부나 방식, 과업, 트리거를 작동시킬 수 있는 상황 등)은 소통하고 의논하지 않는 것 또한 주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물론 당사자의 인생, 일상, 치료는 일차적으로 당사자의 소관이다. 그러나 증상으로 인한 물질적·정신적·사회적 비용을 주변인이 분담하고 있다면, 그 역시 그만큼은 증상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조력자는 자신의 감정 노동, 돌봄노동에 대한 통제를 잃고 착취당하는 소모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받아야 할 조력과 지지가 감사해야 할 호의가 되는 것은 물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게 보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고, 마땅하게 누려야 할 많은 것을 당장의 현실에서는 호의에 기대서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 호의는 베푸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많은 경우에 부담이고 희생이다. 사회적 차별에 대한 보상을 개인에게서 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 사실을 잊고 돌봄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는 순간부터 관계는 착취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물론 비장애인들만이 공존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니다. 비장애인들에게 당연한 일상에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 당사자들이 치러야 하는 스스로와의, 또 주변 환경과의 싸움에 대해 우리는 좀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사람과 그것을 도우려는 문제 없는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있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을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대하는 세계가 필요하기에, 그런 세계를 함께 만들 협력자로서 만나는 것이다. 거치적거리고 주위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격리하거나 없애버리면서 그런 세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그 일에 기여하고 대가를 치르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남이 치르는 대가를 사소하게 생각하거나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정신질환자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은 옳으면서도 옳지 않다. 질환 당사자가 사는 세계는 비장애인들이 사는 세계와 명백하게 다르다. 우리는 영영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인간이라면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고, 입장과 이익이 다르며, 서로를 착취하거나 지배하고 싶은 그릇된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이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있고,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협력하고 타협할 수 있다. 병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지장도 없이 일상에 섞여 살려면 사회를 완전히 갈아엎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보다 좀더 나은 타협점은 지금부터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은 그것을 목표로 했으면 한다.
(기사 등록 2019.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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