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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멀지만 가야 할 길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9. 25.

주윤아(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인권연대>(http://hrights.or.kr/gasi/?uid=11908&mod=document&pageid=1)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미국 조지아주(Georgia)에 사는 친구 집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지역의 박물관과 명소를 둘러보는 동안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큐레이터가 여성 운동이나 위인에 대한 소개를 해 주거나 관련 내용이 대체로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애틀랜타 히스토리 센터에는 그 지역 출신의 여성 활동가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한 역사가 소개되어 있었는데 그 중 애틀랜타(Atlanta) 출신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역사학자인 할아버지에게 수없이 들었던 남북 전쟁과 노예 이야기를 자신의 고향인 남부의 시선으로 풀어내었다. 그리고 소설의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는 당시 여성들의 진출이 드물었던 직업에 도전했던 작가 자신의 성향과 닮은 면이 있어 보였다.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대공황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녀는 출간 이후인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작가로서가 아닌 여성 운동가로서 활동했다. 진학이 어려운 흑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정하고 남부의 형편이 어려운 흑인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구호와 기부 활동을 했다. 그녀의 이러한 숨은 활동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에야 점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단 하나의 대작만을 남긴 채 요절한 그녀를 베스트셀러 작가로만 알고 있지만, 여성 운동가로서의 그녀의 후반기 생애도 재조명받기를 바란다. 만약 그녀가 북부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떠한 삶을 살았을지, 혹은 어떤 내용의 작품을 썼을까 하는 상상도 잠시 해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명, Space Museum에서 알게 된 ‘MERCURY 13’ 중의 1인인 제리 코브(Jerrie Cobb)의 이야기는 더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최초의 예비 여성 우주비행사이자 평생 우주 비행을 염원했던 파일럿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경비행기를 타 본 이후 비행의 자유와 해방감을 잊지 못해 파일럿의 꿈을 갖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운송 파일럿으로 취업한다. 이후 여성 우주비행사 육성 프로그램인 ‘Mercury project’에서 'FLAT(First Lady Astronaut Trainees)'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13(일명 ‘MERCURY 13’) 1인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비행경력과 실력보다 외모를 부각하여 소개하는 등 대부분의 예비 여성 우주인들을 가십거리로 소비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험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우주여행에 적합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성도 높다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 여성들에 대한 테스트는 NASA의 달 탐사(아폴로 계획)에 밀려 최종 단계 직전에 중단됐다. 여성 승무원들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우주 비행 계획이 중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게 비공식적인 이유였다. 코브는 시험 과정 결과를 근거로 여성도 우주 비행사 육성 프로그램에 선발해 달라고 2년 동안 미국 의회에 청원 운동을 벌였으나 정부와 NASA의 성차별로 인해 끝내 우주비행사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1963년부터 우주 비행 대신에 자신의 경비행기를 타고 아마존 지역에 의료 생필품 등 인도 물자를 전달하며 항공 선교사로서 자원봉사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

 

 

제리 코브(Jerrie Cobb), 사진 출처 - AP 연합뉴스

 


2012년 미 우주항공 명예의 전당(NAHF)에 이름을 올릴 당시 나는 개척자가 아니다. 단지 마음껏 날지 못한 한 여성일 뿐이다라는 그녀의 탄식에 가슴이 먹먹하다. NASA에 따르면 여성 우주인의 우주유영은 1984년 옛 소련의 스베틀라나 사비츠카야가 처음 개척한 이래로 35년간 계속됐지만, 현재까지 500여 명이 넘는 전체 우주인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1%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고,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부터 17호까지 6대의 우주선에 여성 우주인은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최근 NASA는 아르테미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의 쌍둥이 남매) 프로그램을 발표하여 2024년까지 달에 다음 미국인이자 최초의 여성을 착륙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아폴로 11호가 최초로 달 표면에 착륙한 이후 5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이 우주 탐사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주복, 우주선의 좌석 등 우주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이 평균 남성의 크기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 등을 볼 때 우주 탐사의 성평등 철학에 대한 진정성에 의구심이 든다. 실제로 올해 초 NASA는 여성 우주비행사들이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입을 우주복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여성 팀'의 우주유영 계획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인류 역사상 달을 밟는 최초의 여성 우주인의 탄생을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인권과 젠더의 렌즈로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의 기본부터 전 과정을 철저히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번에 둘러본 곳은 관광 명소보다는 시골 마을들인데, 이곳의 주민들은 비교적 아동과 여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정착되어 있었다. 또 양육과 가정을 우선시하므로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능력과 여건에 따라 가사와 돌봄 노동을 합리적으로 분담하고 있었고,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에 남성들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또 의류나 액세서리 일반 매장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디자인의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20여 일의 아주 짧은 체험으로 속단할 수 없고 그것이 미국 전체의 모습이라고 착각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미국은 여전히 인종 갈등이 심각하고 통계적인 성평등 지수 순위도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마을, 사회 곳곳에서 성차별을 줄여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자세를 눈으로 확인한 시간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그 길은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더디고 미숙하고 불편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더구나 내가 깨우쳐 내 일상부터 하나둘 바꿔가기 시작하는 것 외에 달리 대단한 해법도 없다. 예컨대 가사와 돌봄 노동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런 마음이 출발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국가나 정부에서 이와 관련한 다양한 법과 제도를 완벽히 마련한다 해도 내 마음이 온전히 수용하지 않는다면 성평등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그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 등록 2019.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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