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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성적인 폭력의 뿌리 2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2. 30.

낸시 린디스판(Nancy Lindisfarne) & 조나선 닐(Jonathan Neale)

번역: 두견

 


'왜 남성과 여성은 불평등할까?' '왜 성소수자들은 억압당하는가?' '왜 많은 남성들이 폭력적인가?' '성폭력이 왜 그렇게 흔한가?' 이것들은 오래되고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다. 오랫동안 이에 대한 강력한 대답은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그 대답은 언제나 전쟁, 불평등, 성폭력은 자연질서의 일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스티븐 핑커, 재러드 다이아몬드, 유발 하리리의 인기있는 책들도 더 현대적인 방식으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남성의 공격성은 인간본성의 불가피한 일부라는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성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운다고 말한다.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트랜스젠더인 조안 러프가든(Joan Roughgarden)은 이것을 '과학적인 척하는 환상'이라고 했다. ‘얄팍하게 감추어진 강간서사라고 말이다.

 

그런 서사는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는 억압받는 취약한 사람들도 항상 정치적 투쟁을 벌이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 왔다. 여기서 하는 말은 그 저항의 일부분으로서, 성폭력의 뿌리를 계급과 젠더 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의 필자인 미국의 독립적 사회주의자인 낸시 린디스판(Nancy Lindisfarne)과 조나선 닐(Jonathan Neale)은 제국주의, 기후정의, 젠더 억압 등에 대한 많은 글을 써왔고 조나선 닐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 <두 개의 미국> 등은 국내에도 출판돼 있다. 글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것은 2편이다.

 

출처:

https://annebonnypirate.wordpress.com/2019/09/23/the-roots-of-sexual-violence/?fbclid=IwAR2KXF6AWtGZtZWRrbgq063Xq6uRbb7lwjxVNbLCCJFNaY4W-GJR7FjUlz0

 


 



1편에서 이어짐 

 

그리고 그런 성폭력이 행해질 수 있는 외설적이고 끔찍한 방법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다. 극단은 연속체의 끝에서 나오지만, 소할라 압둘라이(Sohaila Abdulalai), 록산 게이(Roxanne Gay), 레디 티하비(Redi Tlhabi)의 많은 동시대적 이야기들이 증명하듯이 덜 충격적인 형태의 성적 학대와 모욕도 이런 위협을 수반한다. 전쟁은 같은 동역학의 연장이었다.

 

계급사회의 대부분의 역사에서 전쟁은 근접 몸싸움의 문제였다. 총과 드론은 대단한 젠더의 평준화를 가져왔지만 최근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크기와 힘이 중요했다. 실제로 무리들에서의 일상적 대결에서는 크기와 힘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러면 땅주인들이 고용한 깡패들은 성난 농부를 치기 위해 빨리 움직여야 할 것이고, 따라서 주변에 모여든 군중들을 겁에 질리게 할 것이다. 감독관은 종종 농노나 노예보다 한 단계 위였지만, 주인보다 세 단계 아래였다.

 

그의 상대적 특권은 위태로웠고, 특별히 난폭한 위계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그에게 유리했다. 확실히 화약과 현대의 무기 이전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적으로 조금 더 크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물론 연속된 문제다. 많은 여성들이 많은 남성들보다 더 강하다. 그러나 폭력이 전제조건이 되면, 남성들을 전사의 자리에 앉히고, 젠더적 차이와 사랑과 보살핌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이용하여 더 많은 분열 통치를 하는 것이 이치에 맞게 된다.

 

계급권력은 엘리트들이 식량 공급을 통제하고, 사치품을 거느리고, 그들 자신의 안락함과 안전을 보장받도록 한다. 엘리트의 힘은 또한 흔히 그들이 원하는 누구든지와 언제든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그들의 방종의 근거가 된다. ,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계급 사회에서는, 성적 폭력이 위에서부터 고무되거나 가능하게 되고, 아래로부터 저항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인간들은 종종 자신들을 관대하다고 표현하려고 한다. 통치자들은 온정적 가부장주의를 옹호하며 더 큰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종종 강간범이기도 하며, 높은 지위의 성적 포식자들은 오늘날 가톨릭 사제들에 의한 아동들의 성적 학대와 마찬가지로 친숙하다.

 

권력의 젠더화는 저항도 항상 젠더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대의 사례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거의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낙태 합법화를 위한 법적 투쟁으로부터, 세계적 #미투 운동 속의 슬럿워크’(성폭력에 항의하는 여성행진)까지. 그리고 포식과 저항의 스타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란히 변화한다. <프런트 러너 Front Runner>(2018)는 트럼프를 곤혹스럽게 하기 위해 계산된 영화다. 이것은 1988년 게리 하트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혼외정사 의혹으로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말해준다.

 

하트는 자신의 사생활이 공공적 감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지만, '더 이상 세상은 1972, 아니 1982년도 아니고 1988'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 장면에서 하트의 선거운동 본부장은 린든 존슨이 그의 수행 기자들에게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당신들은 많은 여성들이 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잭(케네디)에게 보여 준 예의를 나에게도 보여 줄 거라고 믿는다.'[기자들이 케네디 전 대통령의 성적비행을 눈감아줬듯이 린든 존슨에게도 눈감아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말] 1988년에, 2물결 페미니즘과 여성 언론인들의 새로운 역할들은 닫힌 눈을 뜨게 했고, 높아진 도덕적 토대와 현실의 관행 간의 격차를 폭로했다.

 

5가지 핵심 아이디어들

 

이 새로운 연구는 우리에게 인간의 기원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20만년의 평등한 협력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최근 12,000년의 계급 불평등의 역사는 가부장제, 젠더화된 폭력과 지속적으로 연관돼 왔다. 문화적 다양성과 문화적 변화의 원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적 폭력의 뿌리를 이해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열어 준다. <성적 폭력의 기원>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부터 콜롬비아 이전의 북 아메리카, 중세 프랑스의 종교 전쟁, 영국 해군 안에서의 남색, 구소련과 중국에서 젠더화된 관계를 통한 독재정치,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까지 전()계급 사회와 계급 사회의 매우 다양한 젠더 역사를 통해 작업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다섯 가지 핵심 아이디어들을 발견했다.

 

첫번째 관심사는 사랑이다. 사랑, 성적 쾌락 그리고 평등에 대한 성향은 인간 진화의 근본이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항상 사랑을 필요로 해 왔다. 하지만 계급 사회에서 우리의 사랑에 대한 욕구는 우리를 취약하게 만든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은 계급 불평등과 젠더 불평등 사이의 완전히 특별한 연관성의 뿌리이다.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곧 다시 볼 것이다.

 

두번째 아이디어는 우리의 아주 오래 된 나눔과 사랑에 대한 기질이 어떻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1%99%,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계급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영원한 원천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는 불평등에 저항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불공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상-이데올로기를 이용한다. 우리가 어디를 보든지, 젠더의 차이는 계급 불평등의 형태를 지지한다. 이 주장의 논리에 주목하라 - 계급 분할이 먼저이고 젠더화된 차이가 계급 분할을 뒷받침하고 자연화하는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다른 이유들로 같지 않다고 여겨져 왔다. 그들은 잘못된 신분이거나 피부색이나 얼굴이 문제가 됐다. 아마도 그들은 잘못된 음식을 먹거나 시신을 그릇된 방법으로 씻긴다. 그러한 형태의 차이들은 '우리''그들'을 만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래된 형태의 차별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인종주의로 재구성됐다 - 백인 권력, 반유대주의, 이슬람혐오증의 새로운 버전으로. 이러한 분할은 엘리트들이 분열 통치하는 것을 돕는다. 이것은 증오스럽지만 혼란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인종, 종파 또는 종족의 차이와 비교하여, 성차별은 우리를 훨씬 더 혼란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그들'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성차별은 '우리' 인종, 종파, 종족 내부에서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성차별은 같은 집단 안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다. 성차별은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자매와 형제를 갈라놓는다.

 

젠더 표시는 또한 남성들을 다른 남성들과 - 지배적인 남성들과 하수인들을 구분한다. 젠더 표시는 또한 클라라 제트킨의 말대로 여성들 사이와 부인과 하녀 사이의 결속을 파괴한다. 그리고 또한 성별 표시는 아빠와 아들, 서로 다른 자매, 우두머리 남성과 그들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나머지와 구분한다.

 

이러한 사랑의 매듭은 엘리트들이 불평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의 친밀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 불평등이 그렇게 깊이 자연화되면, '아니,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조금 더 말해보자, 왜냐하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에 안드레아 콘월과 낸시(Andrea Cornwall and Nancy)<남성성의 혼란>에서 정리했듯이, 젠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인종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달려있다. 우리는 피부색의 차이가 실제적이고 생물학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러한 차이점들이 인간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들은 엘리트들에 의해 분열 통치를 위해 무기화되었을 때 엄청나게 중요해질 수 있다. 여남의 차이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성차별은 너무나 교묘해서 여남의 유사점을 말하는 것이 어색해진다.

 

물론 우리의 생식기관, 생식기, 그리고 이차적 성적 특징의 다양성을 포함하여 우리의 몸은 다르다. 하지만 그래서? 피부색처럼, 차이점은 연속체 속에 있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 우리의 생식능력, 욕망과 성적 습관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종의 차이가 아니라 단지 정도의 차이다. 한편, 우리의 심장과 폐와 신진대사 방식,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언어 능력, 우리의 감정과 욕구는 사회적 동물로서 똑같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이 유사성을 절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동일성은 계급의 위계에 도전하는 주장이다. 그리고 동일성은 오늘날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체성 정치의 버전에도 도전한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부(Boo)를 연기하는 코미디언이자 활동가인 리아 델라리아(Lea DeLaria)는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이 어떻게 분열 통치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날카로운 논평을 제시한다.

 

“LGBTQ,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성전환자...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말할 때 그 지긋지긋한 퍼레이드는 끝난다. 나는 퀴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모두를 포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알파벳 나열이 우리가 공유하는 억압보다는 우리의 차이점들을 강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변화된 집단은 끊임없이 포용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다른 모든 주변화된 집단의 많은 사람들을 배제한다... 그것은 당신도 알다시피, 힘과 돈과 통제력을 가진 사람들의 오래된 무기다... [그러니까] ‘잠깐만, 내가 왜 그 권력자들이 아니라 너를 손가락질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동일성에 대한 주장은 우리를 겁먹게 한다. 동일성을 믿을 수 없거나, 터무니없거나, 단순히 미친 것으로 묵살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바로 우리가 성차별을 인식할 수 있는 장소로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계급, 인종 또는 젠더의 차이가 표시되고 자연화될 때면 마치 그것들이 '신이 부여한 것'이거나 운명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핑크색과 청색의 두뇌를 가지고 있는 여성과 남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지배적인 추정에서 벗어나 것이 요령이다. 우리는 모든 방향 전환에서 젠더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변화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아로서 우리는 무력하기도 하고 의존적이기도 하고 자기 중심적이기도 하고 요구가 많기도 하다. 성인 남성과 여성으로서 우리는 자녀와 손주, 친구, 이웃에 대한 공감과 사랑으로 겸손해지면서 권위에 복종한다. 그러나 우리가 계급사회에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기 때문에 그런 추정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평등을 자연스럽게 보게 만드는 방법으로 사랑을 경험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사랑이 아무리 친절하고 자상해도 올가미라는 것을 배운다.

 

어머니의 사랑은 종종 우리가 계급의 기대에 부합하는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죄책감과 '규율'을 사용하는 것에 의존한다. 데니즈 칸디요티(Deniz Kandiyoti)의 놀랍도록 유용한 가부장제와 흥정하기에 대한 설명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조작과 죄책감은 남편과 아내,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을 체계적으로 분열시킬 수 있다. 그러한 배열의 일부인 성차별은 평생 지속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래퍼 투팍(Tupac)거친 인생이라는 약어로 말했듯이 당신이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증오가 우리 모두를 망친다.’

 

죄책감과 통제, 성차별과 계급적 기대는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우리 삶에서 큰 역할을 한다. 집안일, 육아, , , 섹스, 그리고 휴일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정 싸움에 일상적인 성차별이 어떻게 스며드는지 생각해 보라. 이런 식으로 불평등은 우리의 친밀한 애정어린 자아의 일부가 된다 - 침대에서, 아침식사 동안, 직장에서, 파티를 열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올 때. 서로를 탓하기 쉬워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계급의 불평등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를 가두어 놓고 길을 잃고 홀로 남겨둘 수 있다. 사랑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화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차별은 때때로 사람을 죽인다.

 

변화하는 계급과 젠더 역사를 설명하는 세 번째 핵심 아이디어는 간단하지만 종종 그 방정식에서 제외된다. 중요한 경제적 변화는 필연적으로 엘리트들의 특권에 도전한다. 어느 시대든 지배계급의 과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바퀴, 화약, 증기력, 인터넷 등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해 왔다. 새로운 사람들이 금과 은, 면과 설탕, 석탄과 석유와 가스 등 원자재에 대한 통제권을 잡아챘다. 또는 새로운 사람들이 기존의 기업이나 은행을 인수했다.

 

변화가 지배계급의 권력을 위협할 때, 그들은 가능한 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한다. 지배계급이 동질적이거나, 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그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불평등에 대한 헌신을 공유한다.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젠더와 친밀한 사랑의 경험에 대한 우리의 사고 방식을 재구성하기 위해 열심히 애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우리가 결혼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규칙을 바꾸고, 긴축을 강요하고, 교육과 사회적 서비스를 쥐어짜고, 낙태에 대한 논쟁을 재개하고, 게이들과 레즈비언들을 공격하고, 트랜스젠더 권리를 폐지하거나, 성적 학대를 숨긴다. 그리고 그들은 완벽한 가족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설명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다.

 

네 번째 요점은 이 투쟁은 그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과 나머지 우리들 사이에 깊고 지속적인 긴장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통치자들이 어떤 새로운 생각을 내놓든 그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최고위층의 사람들은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종종 행해지고 항상 잠복하는 폭력은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어떤 체제에서든 필수적인 일부다. 그리고 사랑이 우리 존재의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폭력은 또한 성별화되고 성적으로 표현된다. 가장 두드러진 이데올로기적 버팀목, 즉 전사(warrior) 서사와 남성 폭력에 성적인 매력을 부여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의례를 생각해 보자.

 

저항의 이데올로기도 엘리트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결합될 수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사랑받은 공격적인 군국주의였던 '친동성애 국가주의'가 그 한 사례다. 그리고 폭력은 저항이 강력하고 지배계급 권력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곳에서 가장 눈에 잘 띄고 가장 끔찍하다. 간단히 말해서 폭력은 모든 성별화된 불평등 체제의 중심적 일부다. 가정폭력과 강간은 불행한 변칙이 아니다. 그들은 계급적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본이다. 어림잡아 보면 불평등이 심할수록 그에 따르는 성차별도 두드러지고 악랄하다.

 

계급 사회는 이제 세계 구석구석을 정복했다. 어디에서나 엘리트들은 성적 불평등의 복잡한 체제를 고정시키는 성폭력과 강간을 통해서 우리를 효과적으로 길들이며 성차별 사상을 장려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럼에도 저항한다. 우리는 평등과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기대하는만큼 우리가 남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황금률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주민들, 난민들, 대리 전쟁의 희생자들 등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진 폭력의 증인으로서 우리는 신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엘리트 권력을 전복하고 조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우리는 최고의 구애 속에서, 작은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는 기쁨 속에서, 누군가를 돌보거나 누군가가 우리를 돌볼 때, 음악과 춤에 빠져들때, 예배나 집단적인 정치적 행동에서 연민을 경험한다. 이것은 언제나 사랑의 매듭의 역설이었다. 계급사회에서 사랑은 감옥이면서 탈옥이다.

 

계급 통치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억압에서 달아나고, 반란을 일으켜 폭군을 쓰러뜨리고 혁명을 촉진한다. 북아메리카 전사들은 영국의 통치를 끝내기 위해 티파티를 조직했고, 프랑스의 투사들은 왕과 그의 동료들을 단두대로 보냈다. 또는 노예제도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리고 투표권을 위해 그리고 연금과 사회보장을 위해 싸웠던 남성과 여성들을 보라.

 

2019920일의 세계 기후 행진은 스웨덴의 여학생 그레타 툰베리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 세계의 길거리에 나섰다. 이 행동주의는 강력한 성별화된 저항의 한 형태였다. 탄소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은 극단적인 새로운 형태의 여성혐오주의와 인종주의적 남성성이 자신들의 먹거리를 구해주기를 바라는 탄소 엘리트들 속의 급격한 우경화 움직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섯 번째 핵심 아이디어는 저항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감정과 꿈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순간적이나마 우리의 피부색, 그리고 우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잊어버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공통성을 우리의 차이보다 우선시할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저항은 힘과 기쁨으로 폭발하면서 혁명의 추동력이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어머니 대자연(Mother Earth)에 대한 강간을 미연에 방지하는 혁명의 순간이다.

 


(기사 등록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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