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아(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인권연대>(http://hrights.or.kr/gasi/?uid=12226&mod=document&pageid=1)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블랙독’이라는 드라마가 방영 중인가 보다. 시청하지 않아 정확히 모르겠지만 방송사의 드라마 소개란을 보니 ‘기간제 교사가 된 사회 초년생 주인공이 우리 삶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꿈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고 되어있다. 교사들 사이에도 꽤 리얼하다는 소문이 돌아 관심 있는 일부 내용만 찾아보았는데, 내가 근무했던 여러 학교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과 내가 기억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이 제법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재밌다기보다는 ‘웃프다’는 감상이 더 맞을 거 같다.
얼핏 보면 비정규 교사의 성장기 같아 보이지만 세심히 들여다보면 ‘학교 판 미생’이라고 불릴 만큼 촘촘한 갑을관계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타 직종보다 구성원들이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도 예외 없이 착취와 억압의 구조가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크게 교사와 교육을 지원하는 행정 노동자로만 구분되어 보이지만 사실 학교는 비정규직 백화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학교 내 비정규직은 교육공무원직, 방과후 강사, 파견·용역, 기간제 교사 등으로 고용방식도 초단기 계약직부터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까지 천차만별이다. 또 교육 당국이 단기성 정책으로 비정규직을 늘리고 없애고를 반복하다 보니 현재 학교 비정규직 직종은 공식적으로는 크게 15종이나 노조 측에서는 세부 직종으로 나누면 100여 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이들 중 1/3 정도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기도 하였지만, 인건비, 각종 수당, 복지 등 정규직과 차별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중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의제 중에서도 뜨거운 감자로 갈등과 찬반논쟁도 거세어 해법도 요원한 데다 (무기계약직이 아니므로) 계약의 불안정성으로 드라마보다 실제는 백배 더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학교 내 정규직들은 같은 업무(혹은 기피하거나 더 강도 높은)를 하는 비정규직의 차별을 인지하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차별한 적은 없을까? 아마 차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적은 없어도 차별하는 당사자는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 있다.
내가 교육청이나 관리자에게 을이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갑으로 군림하고 있을 수 있고, 또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약 형태나 처우 등에 따라 보이지 않는 서열 피라미드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학교 내에서 정규직의 목소리(사실 비정규직이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를 먼저 듣고, 정규직의 안건(역시 비정규직의 안건도 거의 상정되지 않는다)을 주요하게 생각했던 사고와 태도가 몸에 배어 있음을 고백한다.
최근 몇 년간 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만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간 권력 관계와 나아가 개인이 가진 정체성의 교차성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는데, 그 시작은 내가 가진 특권을 인식하면서부터였다. 교사로서의 나는 주로 국가나 자본, 교육청, 관리자의 권력으로부터 받는 억압에 집중하였는데, 나 역시 학교 내 비정규직, 학생, 보호자들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일 수 있음을 성찰하게 된 것이다.
내가 부당하다고 여기고 비판하는 것들은 주로 지식으로 무장한 권리이거나 내가 더 가지지 못한 권리들을 향해있었고, 내가 남보다 더 누리는 권리나 특권에 대해서는 당연시하거나 불감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을 인지도 성찰도 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 의식적인 노력을 한다 해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권력이 함축된 언어적 폭력으로 차별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은 나의 사고와 언행이 ‘꼰대’라서 그런 건 아닐까? 라는 자문을 수없이 되새긴 한 해였다.
학교 밖에서도 그렇겠지만, 학교 내에서도 자주 하는 말들이 있다. ‘원래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야’, ‘어쩔 수 없어’, ‘적당히(작작 좀) 해라’ 등등 ~ 이 말들은 얼핏 상대의 입장에 공감하며 평화로운 너와 나의 일상을 유지하자는 삶의 지혜가 담긴 조언 같기도 하지만 이 말이 사용되는 상황과 맥락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원래 그래’ : 인류의 시작과 동시에 원래 그런 것은 별로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그 옛날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무탈(?)하고 유구하게 내려져 오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1월 중순쯤 방영된 모 프로그램에서 페루의 돌고래학살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약 700여 년간 자행되어 오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이를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주민들은 아마도 우리 동네에서는 ‘원래 그래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학살 행위를 금지하고 다양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현재에도 그 마을에서는 전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무고한 동물들만 희생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남자는, 여자는 ‘원래 그래’ 라는 말은 왜 지양해야 하는지는 익히 알고 계실 테니 여기서 또 서술하지는 않기로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야’ : 부정이나 청탁이 오가는 상황에서 은밀한 어조로 자주 사용되는 이 말은 과연 누구에게 좋은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발화자는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즉 윈윈전략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신의 의견을 발화할 수 있는 경우는 대개 강자이거나 주류에 속하는 다수일 테니 결국 ‘좋은 것’이란 이들의 관점에서다. 내 취향도, 나에게 이득도 가져오지 않는 그 ‘좋은 것’은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인 나에게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외모 칭찬도 결국 ‘내가 칭찬해 주니 너는 기뻐해야만 한다’라는 발화자의 고정관념에 근거한 오판일 뿐 외모 품평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날이면 날마다 “예쁘다고 말해주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냐?”라는 질책만 되돌아올 뿐이다.
쉼이 있는 저녁과 칼퇴근을 원하는 직장인들에게 상사가 시혜처럼 지정해 주는 회식 날짜와 방식에 직원들은 고맙기는커녕 왜 자기 가족과 지인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자신들에게 놀아달라고 조르는지 의아할 뿐이다. ‘가족 같은 직장’을 사훈으로 하는 사용자들은 직장(공적)을 사적 영역으로도 활용하는 상황이 본인도 모르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격려와 감사를 ‘밥’ 한 끼로 꼭 전하고 싶다면 먼저 의견을 묻고 정하는 게 순서다.
‘어쩔 수 없어’ : 이 또한 시공을 가리지 않고 참으로 많이 듣는 말이다. 비합리적이고 부당하고 아무튼, 아닌 것은 알겠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의견을 말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능력(아니 사실 용기와 의로움)이 없다고 자기 자신을 변명하거나 혹은 을들의 처지를 묵인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불공정한 것은 알겠지만 부당한 대우나 차별을 받아도 나도 어쩔(도울) 수 없고 너도 어쩔(피해) 수 없다는 논리다. 그다음에 이어서 하는 더 짜증스러운 말은 ‘억울하면 출세해라, 준비해서 공채 봐라’ 등등이 있겠다.
‘적당히 해라’ : 최근 지인 중에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과 식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외식의 경우 식당과 메뉴 선택이 쉽지 않다. 인원이 다수면 대체로 채식주의자들이 양보(사실 체념임)하거나 본인의 기호에 상관없이 채소로만 이루어진 메뉴를 비자발적으로 먹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깃집이라도 갈 작정을 한 날에는 ‘적당히 좀 하고 살 것이지~ 저렇게 해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냐’ 라는 뒷담들이 등 뒤에서 오가곤 한다. ‘적당’하다는 것은 어느 선까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의 주체는 누구이며, 설사 대중의 기준이 있다 치더라도 왜 적당이라고 명명하는 그 지점에서 다수에 의해 내 취향과 선택을 강제 종료해야 하는가?
드라마 ‘블랙독’에서 교원평가를 소재로 하는 방영분만 또 찾아보았다. 거기서 편법을 쓰는 교감(관리자)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평교사들을 대변하려는 부장 교사에게 나름 절친 교사가 ‘(결국, 너보다 을인 너희 부원들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가니) 적당히 해라’라는 진심?(그 순간만큼은 진심 같아 보였음) 어린 조언을 한다. 현실이다. 학교는 공공기관(공무원)이라는 한계가 있기도 하고, 또 늘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많아 그 어느 조직보다도 변화와 진보가 더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적잖은 학교의 구성원들이 그 느린 변화의 속도에도 좌절하지 않고 ‘프로불편러’ 낙인도 감수하며 포기하지 않고 ‘적당’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가지의 권리와 책임, 정체성 등을 가지고 산다. 언제나 특권을 누리지도 언제나 차별만 받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차별을 받을 때도 명확히 인지하고 대응해야겠지만, 내가 가진 특권으로 상대를 차별하는 경우는 인지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한국 사회에서 나이가 권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 성찰해야 한다. 특히 교사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든 학생과의 권력 관계에 대한 성찰이 절실하다.(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써 보려고 한다) 요즘 차별이 줄어 정말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권력이 점점 많아져 오히려 인권 감수성은 떨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권김현영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든 운동과 이념이 특권을 성찰하지 않는 순간 억압의 일부가 된다 ……’
(기사 등록 20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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