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코로나19가 지역사회로 급속히 확산되고 불안감이 커지면서, 그 과정에서 바이러스 전파 구실을 한 개인들과 특정 집단에 대한 비난도 더 커지고 있다. 초기에는 ‘혐중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주장이 많았는데, 지금은 ‘신천지’에 대한 비난이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신천지를 강제 해산시켜 달라는 국민청원은 벌써 100만 명을 넘어섰다. 신천지의 부정적 측면과 사례들만을 일면적으로 부각하고 과장해서 “좀비”, “벌레”라며 악마화시키는 주장들도 많다. 또 이미 평소에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집단과 세력을 싫어하던 사람들이 코로나19를 계기로 그런 감정을 분출하고 정당화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신천지 교회의 지도부는 폐쇄적이고 부주의한 대응으로 문제를 악화시키는 데 책임이 있어 보인다. 방역당국에 대한 협조와 정보의 투명한 공개가 중요한 상황에서 책임을 묻고싶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신천지의 과도한 메시아적 구원주의, 음모적 선교 방식, 공격적 교세 확장 시도 등에 대한 비판들도 일정부분 사실일 것이다. 다른 집단들처럼 신천지도 분명 다양한 문제점들이 있고,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통제가 안 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 집단 전체가 항상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용납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일까. 명단을 파악해서 공동체에서 모두 색출해야 될 사람들이라는 뜻일까. 만약 이번 지역사회 감염이 주류 집단이나 주류 종교에서 출발됐어도 이런 식의 낙인과 매도가 벌어졌을까. 만약 이번에 소수자 공동체나 무슬림 등이 지역사회 확산의 매개 구실을 했다면 얼마나 끔찍한 혐오 선동과 아웃팅으로 이어졌을지 섬뜩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신천지라는 교파와 교인들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배척하는 분위기는 옳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불이익과 배척을 예상하고 더 숨어들면서 솔직하게 자신의 정체성과 상황을 드러내지 못하게 내몰 것이다.
더구나 지금 코로나19가 지역사회로 번지게 된 책임이 신천지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신천지 교인들이 ‘지령’에 따라 의도적으로 ‘잠입’해서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식의 주장들은 정말 과도하다. 감염병의 지역사회 확산은 사실 시간이 문제이지 어느 정도 피하기 어려운 수순이고, 부주의한 대처와 실수는 어떤 집단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문제였던 게 사실이다. 이 시기에 실내에서 밀집행사를 진행한 것이 신천지만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신천지 교인들은 확진자가 가장 많이 나온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이처럼 책임을 피해자이기도 한 개개인에게 전가하고, 심지어 표적삼아 공격까지 하면서 더욱 입을 열기 어렵게 만든 나쁜 사례는 이번에 중국 정부가 보여 준 바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의 구호 중 하나는 ‘열이 나는데도 말하지 않는 자는 계급의 적’이라는 것이었다.
신천지를 낙인찍으며 ‘이단’으로 모는 분위기도 과해 보인다. 이미 기독교계에서는 교회 입구에 ‘신천지 출입금지’ 포스터, 스티커까지 붙이고 이단추방 캠페인을 해온지가 꽤 됐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서든 이런 식으로 ‘정통’과 ‘이단’, ‘우리’와 ‘저들’을 나누고, ‘이단과 타자’를 감별해서 배척, 추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사회가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차 있고, 그것을 풀어주지 못하는 기성사회와 종교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많을 때일수록 ‘이단’이 등장하기 마련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도 한국전쟁의 참혹한 후유증, 기아와 질병, 가난과 사회혼란이 극심했던 1950~60년대에 특히 이단종파들이 기성교회에서도 소외된 하층민들을 기반으로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가난하고 억눌린 희망없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더 열정적으로 메시아적 구원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더구나 지금 한국 종교계에서 가장 해악적인 것이 신천지인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사실 신천지의 문제라고 지적되는 것들은 정도가 다를 수는 있지만 다른 개신교 교회나 목사들의 언행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당장 코로나19를 ‘하느님의 천벌이나 마귀의 짓’이라는 식으로 말한 것은 신천지 교주만이 아니다. 지난해 기독교 일부 교단들에서 성소수자 배제적인 여러 입장과 조치들이 발표된 것도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전광훈 목사와 한기총이 한국사회에 끼치는 해악만 봐도 매우 심각하다. 정치의 종교화, 신앙화를 추구하는 전광훈 목사는 ‘공산주의, 동성애, 이슬람을 퍼트리는 북한 간첩총책 문재인을 끌어내리자’며 온갖 막말, 욕설, 저주, 혐오선동을 지속해 왔다. ‘문재인을 죽이자’거나 ‘주사파 50만명이 전향하지 않으면 총살해야 한다’는 섬뜩한 주장도 서슴지 않아 왔다.
황교안과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과시해오던 그는 이번 우파통합에서는 빠졌지만 여전한 정치적 위협이다. 물론 신천지 지도부와 그 교인들을 구분해 보는 게 필요하듯이, 복음주의 부흥회같은 정치집회를 여는 거짓선지자 전광훈과 그에게 열광하는 소외된 가난한 노인 분들도 구분해 봐야 한다. 주된 문제는 그분들의 박탈감과 소외감을 이용하고, 심지어 증오로 연결시키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곳에서 통성기도를 올리고 열정적으로 호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한국사회 모순의 반영이며 그 산물일 것이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없는 세계의 영혼”이며 “행복의 조건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는 제기는 환상이 필요한 조건을 버리라는 말”(마르크스)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이 억눌리고 버림받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변화로 이어져야만 한다.
코로나19로 좁혀 봐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달되고 번져나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특정하고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 같은 바이러스가 왜 서로 다른 반응과 결과를 낳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초동대응을 한 것은 사실이고 공정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정말 고맙게도 질병관리본부와 수많은 방역, 의료인력들이 그 과정에서 엄청난 헌신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고마워요_질병관리본부, #힘내세요_질병관리본부)
그러나 지금 지역사회 확산 속에서 감염병 확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와 체제의 문제점은 다시 드러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중국인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도 아니고, 신천지 교인들이 모두 잘못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핵심은 한국사회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음압시설과 격리병상과 역학조사관과 방역인력, 의료인력과 보건의료 예산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지역으로 갈수록 더 심했다. 대구지역의 공공병원은 대구의료원 하나뿐이었고 역학조사관은 1명에 불과했다. 1339콜센터도 민간위탁으로 운영 중이었고 일하는 사람들도 직접고용 정규직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강제입원 돼 있던 정신질환자 분들이 가장 압도적인 감염율과 치사율을 보이고 있다.
이미 시설에서 격리된 삶은 살고 있던 그 분들은 삶 자체가 취약했는데, 감염병 앞에서 더욱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즉, 공동체의 안전과 보건보다 다른 것들이 우선이었고 공공병원과 공공의료는 여전히 너무 부족하고, 반면 너무 많은 것이 민간병원과 시장에 맡겨져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는 의료체계에서도 소외와 차별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 언론은 검증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며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기능을 하기보다, 공포와 불안과 혐오를 부추기는 구실을 했다. 일부 정치세력은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정치적 이익을 거두려고만 했다.
2008년에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고 붕괴가 시작되자 ‘자유 시장에 맡기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던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입을 닫았고,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은 파산하는 거대은행과 기업들을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스와 메르스의 경험도 이번에 문재인 정부가 신중한 초등대응을 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을 돌아보고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지금의 이윤 우선 체제, 동물과 인간의 관계, 소비문화, 삶의 방식, 민간에 맡겨진 의료와 복지체계, 장애인의 시설 격리 정책, 정치와 언론 등이 과연 최선인 것이지 말이다.
● 누구를 향해서든 혐오는 답이 아니다
중국인 혐오는 안 된다던 사람들이 신천지 혐오에 나서고, ‘우한폐렴’ 용어를 그렇게 고집하던 쪽이 ‘대구코로나’란 용어만 틀렸다고 꾸짖고, 서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혐오에는 강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상대 정치세력에 대한 혐오는 옳다고 믿는 태도, 이번 기회에 평소 자신이 싫어하던 집단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분출하는 모습, 잘못된 입장과 행동에 대한 정치적 비판과 특정한 인간과 집단 자체에 대한 혐오를 구분하지 않는 것 등은 여러모로 씁쓸하고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한다.
과연 우리는 혐오 자체를 반대했던 것인가 특정한 대상에 대한 혐오만을 반대했던 것인가, 과연 우리는 그가 누가 됐던 보편적인 인권을 주장했던 것인가 내가 속해있거나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집단, 세력, 계급의 인권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인가. 주도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비판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다르지만, 중국인 입국금지 청원에 이어서 이제는 신천지 해산 청원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신천지 교인들을 ‘벌레’, ‘좀비’로 묘사하고 지령을 받고 잠입해서 일부러 바이러스를 퍼트린 사람들처럼 비난하는 주장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인에 대한 혐오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을 보면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혐오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사실 선택적인 반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유럽에서는 동양인과 한국인에 대한 배척이 나타나고, 한국에서는 중국인과 신천지 교인에 대한 배척이 나타나고, 중국에서는 후베이성과 우한시민에 대한 배척이 나타나는 지금의 상황은 코로나19라는 감염병 자체가 아니라 공포과 불신과 혐오가 우리가 직면한 진짜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얘기를 들어보니 요즘 어린이집에서는 중국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입학을 취소하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코로나19 자체는 치사율이 매우 낮은 수준이라서 이렇게까지 공포와 불안을 느낄 사안은 아닐 수 있다. 1년에 2천명이 독감으로 죽는 나라에서 코로나19의 위험은 매우 과장돼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사람들이 ‘우리’와 ‘저들’로 나뉘어져 서로를 불신하고 혐오하고, ‘우리’는 무척이나 신뢰하고 사랑하지만, ‘저들’은 이해하고 공감해야할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이 훨씬 더 무서운 일이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직장이든 어느 공동체에서든 누가 불이익이나 배제, 편견어린 시선에 대한 두려움없이 자신이 신천지 교인이라고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 지금 나도 ‘나는 종교가 없고 신천지 교인은 아니지만’이라는 사족을 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매우 기분이 더러운, 상당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게 사실이다.
주변 친구에게 들어보니, 알고 지내던 일본인 결혼이주여성이 5년이 지나서야 자신이 통일교 신자라고 자기에게 밝히더란다. 그 여성은 통일교가 아닌 주변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 여성이 ‘정체를 숨기고 잠입’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전혀 아니다. 결혼이주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만만치 않고, 통일교라는 ‘이단’에 대한 편견도 지독한 상황에서 그 여성은 자신의 종교를 솔직히 말하지 못하게 입을 막혀왔던 것이다. 통일교 교회를 찾기 쉽지 않은 조건에서 결혼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적극 선교하려고 하는 교회에 자연스럽게 다니게 된 것이다. 그 교회가 그 여성을 선교하려고 한 것은 ‘좋은’ 의도고 그 여성이 통일교를 알리려고 한다면 ‘나쁜’ 의도가 될까.
물론 자신이 ‘신천지 교인의 이런 잘못된 행태를 봤다’는 증언들 중에는 일부 사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집단 전체를 악마화해도 된다는 뜻인가. 어디서 많이 본 방식 아닌가. 개인이나 일부의 행태를 근거로 ‘좌빨은 다 그래’, ‘운동권은 다 그래’, ‘NL은 다 그래’, ‘PD는 다 그래’, ‘문빠는 다 그래’...
코로나19로 드러난 문제와 지금의 상황들을 외부화하거나 타자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중국’이라는 외부나 ‘신천지’라는 타자 때문이라고 넘기지 말고 우리 자신의 내부적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구같은 대도시에 공공병원이 1개, 역학조사관이 1명이라는 문제를 봐야 한다. 20년 동안 강제입원돼 있던 몸무게 42킬로밖에 안되던 분이 첫 희생자가 된 이유를 봐야 한다. 그 분은 감염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질환자라고 낙인찍혀서 이미 사회에서 격리돼 있었다. 무조건적 격리와 차단은 해법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 발표된 '2019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시선은 1년 동안 더 증가했다고 한다. 단지 차별과 혐오를 선동해온 극우 정치 지도자와 정치세력만 탓한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차별과 혐오 선동이 먹혀들 수 있는 기반을 우리가 같이 만들어 오거나 방치해 왔던 것이 아닐까. 이 사태도 결국 지나갈 것이지만 이번에 받은 상처와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남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계속 고통받기 보다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기사 등록 2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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