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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여성, 노동, 그리고 자본주의 권력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5. 19.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슈 퍼거슨(Sue Ferguson)과의 또 다른 인터뷰 기사이다. 슈 퍼거슨의 새책인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Women And Work: Feminism, Labour, and Social Reproduction - Pluto, 2020)을 중심으로 이번에는 유토피아 사회주의 전통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뿌리, 사회적 재생산과 자본주의 국가의 구실, 인간의 유년기와 사회적 재생산의 맥락 등을 폭넓게 이야기하고 있다

슈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발전시키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체계화시키는 경험을 수십 년간 해 왔다.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 글은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더욱 더 중요해진 사회적 재생산과 여성 억압에 대한 이해와 고민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글이 다소 길어서 지난 인터뷰(https://www.anotherworld.kr/793)와 중복되는 부분은 생략하고 번역했다.(번역: 두견)

 

출처:

https://section44.org/2020/03/16/women-work-and-directly-confronting-capitalist-power-interview-with-sue-ferguson/?fbclid=IwAR1EihXqPANL-pH5zlWsye43ztj7ia2jWjraImWsZf2IdHddrVIibsh9C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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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적 시각의 위기"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고,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사상이 많은 호응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의 작업은 이 유산 내의 페미니스트적 등고선에서, 잊혀지거나 공격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성과 내재적인 풍부한 자원을 발견하는 것 같은데?

 

나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로, 나는 최초의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19세기 초에 마르크스 이전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인 안나 휠러(Anna Wheeler)와 윌리엄 톰슨(William Thompson)이었다고 주장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여성 권리의 옹호 A Videntation of Women>(1792)를 쓰고나서 약 30년 이후에 휠러와 톰슨은 여성의 노동에 대한 논의를 일차적인 도덕적인 차원에서보다 과학적이거나 정치경제학적인 차원으로 이동시켰다.

 

그들은 가정에서의 여성의 무급 노동이 전반적인 사회적 부에 기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여성 해방을 위한 가장 진보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비전, 즉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과학적 분석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로 나는 유급 노동의 내부와 외부 영역, 일상적인 자본주의적 관계에는 탈소외의 유토피아적 공간과 순간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노동은 결코 소외된 노동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은 존재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당신이 이 질문에서 구하고 싶은 것은 이것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적 비평이 자본주의적 가치를, 오로지 추상화 과정에 의해 생성 가능한 임금노동의 직접적인 착취를 통해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실수를 범한다.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자본주의 하의 노동이 양면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무시한다. 구체적인 노동이 없이는 추상적인 노동이 있을 수 없다.

 

, 내가 구글이나 H.E.B.(미국의 대형마트)에게 파는 노동력은 내가 그 회사들을 위해 하는 실질적 업무에서 추상화돼서, 자본주의적 가치와 이윤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장의 경쟁 논리를 통해 모든 다른 유형의 노동에 상당하는 양으로 수량화되고 제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 노동력은, 나의 특별하고 구체적인 신체가, 특별하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세상과 상호작용하지 않는 한 결코 나에게서 추출될 수 없다.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노동력은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른 하나의 상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상상력이 풍부하면서 현실적인 존재(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생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를 창출하려는 자본주의적 드라이브에 완전히 지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러한 모순들은 또한 투쟁을 정치적으로도 나타낼 수 있는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은 추상적인 노동에서가 아니라 구체화된 노동자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의 이중성과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능력에 대한 관점을 잃는 경향이 줄어든다. 자본을 위해 일하면서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그들이 만드는 것들에게서, 자연에게서, 그리고 바로 그 인간성에게서(혹은 종으로서)소외된다고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축적과 강탈에 대한 자본가의 끈질긴 추구를 넘어서고 그것과 모순되는, 역사적으로 진화된 구체적 욕구를 가지고 충족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몸은 잠을 자야 하고, 먹고 마시기 위해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운동하고, 상상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창조하고, 놀며, 타인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을 표현하고, 섹스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간 생활의 양상은 사람들이 노동을 할 때 사라지지 않는다. 임금을 받는 아니든, "자본주의적으로 생산적인"(, 상품 생산) 노동자든,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든 간에 말이다. 그들은 억눌러지고, 구획화되며, 뒤로 미뤄진다(내가 책에서 논했듯이, 생산과 작업장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정도로). 그러나 노동자 역시 인간(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주위의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존재)인 한, 그들은 자신의 소외에 맞서고 도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필요를 더 잘 충족시키기 위해 나날의 생산적이고 재생산적인 일을 재조직하거나 심지어 중단할 수 있다. , 화장실 휴식에 대한 보스의 시간 제한을 무시하고, 잠을 자기 위해 수업을 빼먹거나, 지역사회 음식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이민자 추방을 막기 위해 정치인의 사무실을 점거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의 노력은 자본주의적 디스토피아 내에서 유토피아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내는데, 이 순간은 이 세상에서 새로운 생활 방식과 노동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순간들이다.

 

물론 그러한 순간들은 대부분 집단화되고 정치화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책에서 내가 주장하듯이, 그들은 행해지고 있는 노동(유급이든 무급이든)이 자본주의적 축적 논리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배되지 않는 그런 공동체나 직장에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즉 사물이 아닌 삶의 생산(교직, 보건, 급식, 의복, 보살핌 등을 통한)이 노동의 목적인 장소에서 말이다. 그러한 순간들은 집단화되고 정치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로서 우리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연대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어떤 견인력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순간들에 대한 이해는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나 캐티 위크스(Kathi Weeks)와 같은 사람들의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스트적 주장과 관련이 있지만 구별된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탈소외적인 양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이러한 양식은 (유급과 무급의 사회적 재생산을 포함한) 생산 과정에서 자본의 지배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그들의 설명에서 자본주의적 동역학은 모든 노동을 자본을 위한 추상적이고 가치 창출적인 노동으로 바꾸어 총체화하고 있다. 그때 자본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노동자 협동조합이나 공동식당같은 대안적이고 예시적인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성격의 "커먼스(공공성:Commons)"은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이 될 수 있으며, 확실히 계급의식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측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싸우기 위한 전략으로서,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을 건설하는 데 너무 많은 중점을 두면서, 자본주의 내에서 우리의 나날의 생활 안에서 공간과 운동을 지원하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연대를 건설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하나의 위험요소가 있다. 사람들이 이미 삶과 노동을 사회화(그리고 탈소외화)하기 위한 노력에 참여하고 있는 공간과 운동들을 말이다.

 

더 나은 주거를 위한 공동체의 시위, 작업장 파업, 여성 파업, 토착지 방어와 같은 것들은 그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그들에게 대안적, 비자본주의적, 존재의 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하면서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 있다. 자본주의 내에서의 그러한 유토피아적 공간과 그것을 확장하고 정치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인식하는 것은, 자본주의 권력에 직접 맞설 수 있는 진정한 대중 운동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중요하다.

 

: 이 책에서, 당신은 '비판적인 평등 페미니즘'에서는 분석이 충분치 않았지만,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은 상품 생산과 삶의 재생산 사이의 모순된 관계 속에서 성공적으로 가정과 선을 그으면서 여성 억압을 위치짓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책에서 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인데, 당신은 이 설명 속에서 그리고 새로워진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안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가?

 

나는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은 그것이 재배치되는 한은 가정과 선을 긋는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일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스트를 포함해서)은 가정을 여성 억압의 결정적인 현장으로 보고 그 내부적인 가부장제 동역학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그때 리즈 보겔(Lise Vogel)이 나타나서, 단순히 그 내부의 역학관계를 살펴보기 보다는 자본주의 재생산 속에서 (가정과 가치 생산의 자본주의적 동역학의 관계에 관한) 가정의 역할에 대해 좀더 체계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여성이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러한 관계에 그러한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국가의 역할과 씨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너무나 큰 주제인 까닭에, 국가와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 할 말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생각만을 스케치할 수 있을 뿐이다. 먼저, 자본은 노동계급의 삶을 만드는 활동을 요구하지만 적절하게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정확하게 중심이 된다. 즉 그것이 없다면 자본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인간의 노동력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은 가치 창출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노동력은 인간에게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은 인간의 삶의, 노동자의 재생산이 필요하다.

 

더욱이, 그러한 노동자들은 사회-역사적으로 주어진 수준에 맞게 재생산되어야 한다(교육, 체력 등의 측면에서). 동시에, 자본이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은 삶의 제공에 대해서 가차없이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학교 교육이나 건강관리와 같은 일에 들어가는 임금과 세금을 낮게 유지해야만 한다. 자본이 사회적 재생산의 과정을 조직하고 통제하기 위해 국가로 눈을 돌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과 자본의 모순된 관계 때문이다. 국가는 고용주로서 그리고 많은 사회적 재생산 활동이 일어나는 공공 지형을 형성함으로써 이것을 한다. 그것은 법률, 자원 할당, 그리고 치안, 군사 및 사법 기능을 통해 그 지형을 형성한다.

 

국가는 자본주의의 시작에서부터 사회적 재생산을 조직해 왔다. 예를 들어 가족법, 의무교육법, 부랑아법 등의 진화가 시대를 통해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노동자들의 능력을 어떻게 시행, 지속, 변화시켰는지 생각해 보라. 그래서 근무 시간, 다른 노동 규정, 이민, 시민권, 교육, 범죄, 주거, 건강관리 등 모든 것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다. 치안유지, 전쟁, 식민지 확장, 정착도 그렇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노동의 사회적 재생산을 사적인 가정에 강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 과제를 그 가정 내의 개인에게 맡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에 크게 의존해서 그것을 관리한다.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국가는 역사적으로 기존의 사회적 압제에 의지하고 그것을 강화하려는 강한 경향을 보여 왔다. , 내가 방금 언급한 모든 영역과 관련된 입법, 자원 할당 및 치안유지 관행은, 자본에 관하여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있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변덕스러운 수준의 가치절하가 적용되는 사회적으로 차별화된 인구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경향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적 재생산의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자본과 노동자의 재생산 관계는 모순된 것이라고 말해준다. 한편에서 자본은 가능한 한 그 재생산의 비용을 낮게 유지해야 한다. 반면에 자본은 노동자들을 재생산(그리고 사회-역사적으로 어떤 일정하게 주어진 수준에서)하도록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착취 가능한 노동자들의 충분한 가용성을 위협할 정도로 비용을 낮게 책정할 수는 없다.

 

문: 이런 설명에서 어떤 전략적 결론이 뒤따르게 되는가?

 

랠프 밀리반드(Ralph Miliband)1983년에 저술한 <계급 권력과 국가 권력Class Power and State Power>에서 언급했듯이, 그 이익에 따라 여전히 행동하는 동안에도 자본의 요구에 따라 직접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속성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 법률과 제도는 자본의 좁은 경제적 이익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생명을 만드는 과정을 넘어서서 생명의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공간과 시간을 만들 수 있고 종종 그렇게 한다.

 

국가는, , 경찰력을 학교에 투입하거나 콘도 개발자들에게 보조금을 주는 것보다 거리 조명, 음악 축제, 학생들을 위한 아침 식사 프로그램, 이민자들을 위한 언어 수업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국가와 대립하는 것은 정당하며 잠재적으로 생산적이며 중요한 저항 전략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생명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무엇이든 끌어내는 것은 자본 그 자체에 맞서는 승리다.

 

동시에 국가가 축적과 강탈이라는 자본주의 과정을 뒤바꾸거나 심각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속아 넘어가지는 말아야 한다. 노동계급인 사람들에 대한 착취(따라서 강탈과 박탈)에 의존하는 바로 그 시스템의 국가 부분과 묶음일 뿐만 아니라, 역사는 우리에게 국가가 자본주의가 받아들일만한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권한을 얼마나 진지하게 행사하는지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것은 가난하고 인종화된 원주민들을 감시하거나, 소위 불법 이민자들을 내쫓고 이민자 아이들을 유치장에 가두는 데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붓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의 일부로 개입될 필요가 있다.

 

국가 정책과 제도는 인종차별, 장애인 차별, 지정성별 이성애 성차별주의, 식민주의 등을 뿌리 뽑기보다는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또한 국가가 궁극적으로 자본을 위해 노동의 사회적 재생산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면서, 국가를 향해 요구하는 행동주의 사회운동간에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그러한 연대는 자본보다 삶의 중요성을 주장하려는 일반적인 충동에 기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국가와의 투쟁을 통해서 새롭고 더 나은 방식으로 삶을 만드는 과정을 재편하는데 필요한 아이디어와 전략을 개발할 수 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상상력이 풍부하고 실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조직과 저항을 통해 실제로 생명을 만드는 관행과 제도를 재편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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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이전에 탐구한 또 다른 영역은 자본주의 아래서 유년기의 특성이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서 당신은 유년기의 사회적 재생산과 자본의 훈육적 요구 사이에 모순이 있을 뿐만 아니라 - <여성과 노동>에서 당신이 발전시킨 주장과 관련해 - 자본의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유년기의 상대적 거리가 성인들이 존재의 대안적 방식으로 인식하는 전복의 공간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입을 어떻게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주도하는 '청소년 기후 파업' 운동에 비추어 볼 수 있을까? , 부모들과 노동조합들까지 그들 뒤로 끌어들이는 순간을 말이다.

 

 

나는 당신이 그 질문을 한 것이 기쁘다. 왜냐하면 코비드19 위기가 그때까지 해결되었다고 가정하면서, 내가 4월에 휴스턴 대학에서 하는 강연을 위해 '청소년 기후 파업'에 대한 연구로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주제를 정확히 선택했다. 그것은 내가 자본주의 유년기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 잠시 동안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유년기는 실로 복잡하고 모순된 공간이며, 한편으로는 감각적이고 창조적인(, 장난기 많은) 인간으로서 자기 재생산, 또 한편으로는 (많은 인간의 창조성과 감각적 능력을 억압당하는)미래의 착취될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자기 재생산 사이의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아이들의 사회적, 역사적, 지리적 위치에 따라 다르지만, 모든 아이들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느 정도는 그 모순을 협상한다.

 

그리고 우리의 후기 자본주의 세계에서 많은 경우에 아이들은 비록 제한된 정도이지만 장난기 있는 모습을 표현하도록 기대되고 권장된다.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장난기 많은 존재로서 이 세상에서 그들의 능력은 자본주의적으로 소외된 타인과의, 사물과의, 그들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암암리에 뒤집어 버린다.(이것이 많은 어른들을 혼란스럽거나 당혹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내 생각에 의미심장하다. 한편으로 그들은 어린 시절의 장난기를 옹호하고, 이상화하고, 심지어 축하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면서 억제하고 통제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이것은 청소년 기후 파업에 관한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창의적이고 감각적으로 자본의 일상적인 공간과 시간을 이용함으로써 사회적 재생산(학교 교육)의 일상적인 제도를 교란하는 것이다. 내 말은, 파업 참가자들이 정기적으로 그들의 상상력과 몸을 노동자(또는 앞으로 일할 노동자)보다는 플레이어로서 더 많이 사용한다는 뜻이다. 교실에 앉아서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 거리로, 환승 시스템으로, 스웨덴 의회 계단이나 뉴욕 유엔 건물 앞 인도로 이동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자본주의가 어린이(, 장난기 많은 존재)가 되도록 그들에게 제공하는 공간(당신이 말한 상대적인 거리”)을 시스템 자체에 대항하는 것으로 돌린다. 이것은 자본이 우리의 생태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면 그들이 잃을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을 분명히 두렵게 한다. 우리는 이것을 일부 언론의 사설과 특히 청소년 기후 파업 운동에 영감을 준 10대 그레타 툰베리에 대한 우파의 혐오스러운 반발에서 본다.

 

그들의 극단적이고 성차별적인 공격은 아이들의 몸과 목소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어른들이 얼마나 깊이 경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공개적으로 폄하하는 것이 얼마나 잘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청소년 기후 파업은 또한 많은,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에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것이 대부분의 어른들도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장난기 넘치는 자아, 즉 감각적이고 상상력이 넘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억압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위와 연좌에서 그들이 목격하는 자발성, 기쁨, 그리고 사회성을 확인하고 축하할 수 있다. 그리고 파업은 자본을 넘어서 삶의 가치를 주장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많은 부모, 교사, 과학자, 정치인, 그리고 다른 어른들에게도 반향을 일으킨다. 아마도 8살의 뉴요커 아만다 카브레라(Amanda Cabrera)는 워싱턴 포스트 의 영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면 학교에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세상을 갖지 못한다면 교육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삶과 생명 만들기(또는 사회적 재생산)를 우선순위로 정하려는 그 충동은 어른과 아이들뿐만 아니라 온갖 배경과 정체성의 사람들까지도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통합의 기초를 육성하고 강화하는 반억압, 반자본주의 조직과 운동을 지지하고 건설하는 것은 사회주의 좌파에게 득이 된다.

 

 (기사 등록 20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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