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여성과 노동: 슈 퍼거슨과의 인터뷰 - 1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슈 퍼거슨(Sue Ferguson)과의 인터뷰 기사이다. 슈 퍼거슨의 새책인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Women And Work: Feminism, Labour, and Social Reproduction - Pluto, 2020)을 중심으로 성별화된 노동, 반자본주의 투쟁,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해서 폭넓게 이야기하고 있다. 슈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발전시키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체계화시키는 경험을 수십 년간 해 왔다.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글이 다소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1편이다.(번역: 두견)

 

출처:

http://newsocialist.org/women-and-work-an-interview-with-sue-ferguson/?fbclid=IwAR3wP6sehhZHJXbHrfBkxzcVlGZiX9Em9hnlusaG3ha5VyVvM_Ll4HVqog4

 





당신의 책에 대해 나와 이야기를 해주고 글을 쓰게 해줘서 고맙다. 특히, 나는 당신이 젠더 억압을 계급투쟁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는 다른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조심스럽게 구분되는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계보, 이른바 "비판적인 평등"(critical equality)의 전통에 있다는 것이 반갑다. 나는 또한 당신이 오늘날의 "평등"이나 자유주의적인 페미니즘을 메리 울프턴크래프트와 그녀의 동료들의 경향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하는 직업의 힘에 대한 어떤 도덕적 과잉 투자라는 공통의 줄기를 식별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그럼 당신 책의 결론에서부터 시작하자. 최근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작업장 투쟁 중 일부는 사회적 재생산, 즉 자본을 위한 잉여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또는 때로는 추가적으로) 인간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직업에 종사해 왔던 곳에서 나왔다. 미국에서 교사들의 파업 #RedForEd 물결이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예일 것이고, 우리는 지금 온타리오에서 교사들의 일자리 행동이 급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이 설명하듯이, 이러한 투쟁의 중심에 있는 노동은 여성화되곤 하지만, 항상 여성에 의해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왜 이런 식의 투쟁이 "99%를 위한 페미니즘"(신시아 아루자Cinzia Arruzza, 티티 바타차리야Tithi Bhattacharya,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문구)의 중심이라고 보는지에 대해 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교육 노동자들은 실제로 인간의 삶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다. 교훈을 만들고 전달하고, 학생들의 정서적, 신체적, 지적 욕구를 더 일반적으로 지원하면서, 그들은 인간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다. 그들은 물론, 자본이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다. 그 결과, 교육 노동자들은 생명과 임금 노동자들을 만들어낸다. 영리적 사립학교에 고용된 일부 교사들도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나 2018년 내내 미국에서, 2019년 다시 시카고에서 파업한 사람들과 현재 온타리오에서 파업 중인 사람들은 공공 부문 종사자들이다. 즉 그들은 자본가에게 직접 고용되지도 않고, 공개 시장에서 그들의 수업과 돌봄 노동을 판매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노동은 자본주의적 경쟁의 법칙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배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책에서 더 상세히 논의하는 중요한 구별이다. 공공 부문 교사들(교직원, 관리인, 구내식당 근로자, 버스 운전사 등 학생 교육에 관련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에게 자본의 가치 창출 명령에서 상대적 거리는, 사회적 재생산 작업의 핵심인 모순을 협상할 수 있는 더 커다란 모멘텀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삶을 만드는 것과 현재와 미래의 임노동자들을 만드는 것 사이의 모순.

그리고 그 협상은 근본적으로 최근의 교육 파업에 관한 것이다. 교사들이 파업을 할 때, 그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것만큼이나 학생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그렇게 한다. 예를 들어, 온타리오의 파업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생활비 인상을 확보하는 것만이 아니라 종일 돌봄 유치원, 특수 교육을 위한 자원, 더 작은 학급 규모 및 학급 내(온라인이 아니라) 교육을 보호하고자 한다. 그러한 요구는 노동조합의 벽을 훨씬 넘어서서 학교들이 규율있고 교양있는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것 이상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또한 결정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항하여 파업했다. 성공적인 파업으로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아이들은 백인, 상층 중간계급 또는 지배계급 가정 출신들이 아니다.(그런 아이들은 갈수록 사립학교로 간다.) 그들은 수십년 동안 다른 사회 서비스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에 대한 투자 삭감에 정면으로 맞서온 변두리에 사는 다인종 노동계급 가정 99%의 자녀들이다. 자원 공급이 형편없는 교실에서 인종화되고 성소수자인 사람들에게 안전하지 않은 거리, 변두리 도서관의 폐쇄, 문닫은 여성 쉼터까지 일직선으로 선을 그을 수 있기 때문이다.

 

99%의 페미니즘을 위한 선언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억압과 싸우는 것을 자본에 맞선 투쟁의 중심에 두는 포괄적이고 활동적인 운동을 주장한다. 교육 파업은 그것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방향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세계에서 잘 살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나날의 노력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도요타나 아마존의 파업 노동자들은 대개 그들의 노동 조건과 임금을 놓고 투쟁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누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 경쟁하고 있다. 생산된 자동차나 판매된 상품의 복지는 쟁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사나 다른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그들은 거의 항상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의 삶을 평가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파업은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삶을 더 좋게 만들려는 서로 다른 집단들에게 서로의 삶과 투쟁에 대해 배우고 연대주의적 반격을 건설하는 공간과 시간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들은 새로운 집단적인 삶의 방식이 만들어지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그의 저서 <레드 스테이트의 반란>에서 에릭 블랑과 인터뷰한 교사들은 그들이 이전에 동료로만 알았던 사람들과 투쟁하는 것, 그리고 단지 그들이 붉은 파업 기호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낯선 사람들과의 거리에서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깊은 인간화 효과를 강조한다.

 

그리고, 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갈 데가 없는 아이들에게 점심을 배달하기 위해 교육 노동자들이 조직된 경우, 파업하는 교육 노동자들은 사회적 재생산 파업이 노동력을 철수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재조직하는 것에도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른 노동자, 학생 및 지역사회와 함께) 인간관계를 육성하고 삶 창출의 가치를 확인하는 사회적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말이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고 있는 연결고리를 먼저 보고, 다가올 파업을 추진할 수 있는 그룹들 간의 신뢰를 쌓으려면 관련자들의 의식적인 정치적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들이 자동적이지는 않더라도 출현하는 데에는 유기적인 무언가가 있으며, 이것은 자본주의에 맞서며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투쟁에서 공공부문의 사회적 재생산 파업들을 유달리 중요하게 만든다.

 

2018년 미국 교사들의 파업에서 나온 일화들은 사회적 재생산 투쟁의 생생하고 감동적인 움직이는 사례들이다! 교육자의 노동 전투성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페미니즘(당신이 책에서 평등 페미니즘이라고 묘사한)이 할 수 없는 분석적이고 실현 가능한 자원을 제공하는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분석이 억압을 자본주의에서 체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평등 페미니즘'이 보는 바와 같이 억압은 주로 무지의 결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본으로 공정한 세계에서 부당한 대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풍토병, 즉 자본주의가 생명 제조의 과정을 값싸게하고 하찮게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귀결이다. 결과적으로, 한 개인이 더 공평하게 대우받거나, 그들의 상사나 파트너의 성차별주의적 또는 인종 차별주의적인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면에서 어떤 성과를 얻든, 그들의 노력은 자본주의 하에서 결코 일반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이득은 다른 사람의 또는 사회적 집단의 복지의 손실일 수도 있다. 이것의 가장 중요한 예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00년대 초부터 여성들에게 더 나은 직업을 얻는 것은, 비록 페미니스트 운동의 중요한 성과이기는 하지만, 저항하기 어려운 가난하고, 인종화되고, 이민자인 다른 여성들이, 더 낮은 임금과 덜 규제되는 가정 서비스 작업으로 들어오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여성과 노동>에서 주장하듯이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은 '평등 페미니즘'의 모순을 피하는 전략적 초점과 방향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억압은 우리가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바로 그 방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 만들기의 과정과 제도를 재조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더 많은 여성을 이사회실이나 국회로 진출시키는 것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현재의 사회적 재생산 체제의 우선순위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도록 고무하고, 삶을 만드는 자원에 대한 집단적이고 책임감 있는 통제와 재조직 방법을 함께 배울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작게는, 교육 노동자들의 파업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시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만드는 힘과 자원을 확장하고 민주화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주장한다.


온타리오에서의 사회적 재생산 투쟁(교사들의 파업)은 서부지역인 Wet'swet'en 지역의 위기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데, 이 지역은 경찰력을 이용하여 미개발된 원주민들의 땅에 파이프라인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2인용 자전거와 같은, 사회적 재생산 위기와 추출과 축적에 대한 자본의 직접적인 추진력에 관한 위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의 동시성을 넘어, 이 투쟁들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러한 투쟁들 사이에 연대를 구축하는 방법을 고려할 때 사회적 재생산 이론(SRT)이 우리의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나는 이 두 가지 사례를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에 대한, 또는 그것을 넘어서는 투쟁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구의 모든 자원은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것을 구성한다. 육체적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 창조적 삶 또한 그렇기 때문에 방어되고 있는 것은 단지, 심지어는 주되게 Wet'swet'en 땅이 아니라 그 땅에 관한 사람들의 육체적, 정신적 관계이다.

 

그래서, 비록 그 투쟁은 온타리오의 교육 파업과는 중요한 면에서 다르지만, 두 투쟁은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사들이 (자본주의 국가가 부과하는 재정적 제약을 통한) 간접적인 침략에 저항하고 있는 동안, 반파이프라인 시위대는 사회적 재생산의 자원에 대한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침략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집단은 삶을 만드는 조건을 삭감하거나 약화시키고 있는 같은 체계적 경향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SRT는 이 연결을 인식하여 단결의 구축이 가능한 근거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왜 교사들과 토착민 주권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공동의 이유를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자본의 삶의 지배에 성공적이고 진정으로 도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모든 사회적 재생산이 다양한 사회적 압력에 의해 강제된 계급구조 안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조직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SRT는 또한 삶을 만드는 노동과 토지를 집단적으로 되찾고 재조직하기 위한 어떠한 광범한 기반의 운동도 사회적 재생산의 현체제를 형성하는 인종주의, 식민주의, (지정성별 이성애를 강요하는) 성차별주의 그리고 다른 사회적 억압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것은 연대감을 표현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서로의 투쟁을 물질적으로 지지하는 방법들, 즉 돈을 보내고, 시위자들을 서로의 이슈들을 알리고, 각각의 투쟁 등에서 연사, 구호, 플래카드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조정된 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은 강력하고 광범위한 반억압 정치를 저항 전략들에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학교 치안 경찰의 폐지의 요구를 포함하거나 피켓 라인에서 지방 공립학교 체제의 식민지적 유산에 대해 가르치는 교사들을 상상할 수 있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0.3.18)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http://www.anotherworld.kr/608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