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국가와 이해관계: 계급투쟁의 관계적 이론과 정치 2

-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 논쟁3

 

 

근래 미국에서는 좌파진영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변혁의 전략에 대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여성차별, 인종차별, 환경파괴 등에 맞서는 다양한 운동들의 성장, 노동자 파업 물결의 부활, 버니 샌더스와 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의 급부상 등이 이런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그런 논쟁의 일환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몇 번에 나누어 소개한다.

 

첫 번째 글은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가 쓴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에 대한 글이었다.(https://www.anotherworld.kr/746)고 이어서 마이클 A 맥카시(Michael A. McCarthy)의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7개의 테제를 실었다.(https://www.anotherworld.kr/755) 이어서 세 번째로 매카시에 대한 응답글을 싣는다.

 

이 글의 필자인 자카리 레벤슨(Zachary Levenson)과 테레사 칼리즈(Teresa Kalisz)는 국가를 진정으로 상관관계적으로 보아야만 계급적 기반 건설의 필수적인 활동보다 국가 내부에서 조직화에 과도하게 중점을 두는 함정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이자 학자이다.

 

이런 논쟁들이 단지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검찰개혁, 사법개혁 등을 둘러싼 국가기구와 각 정치세력과 대중들의 충돌과 운동이 복잡하게 벌어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검찰과 사법부 등 국가기구, 정치세력들의 충돌과 갈등을 국가와 자본의 관계,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모순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접근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글이 다소 어렵고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2편이다.(번역: 두견)


 

출처:

https://www.versobooks.com/blogs/4489-states-and-stakes-relational-theory-and-the-politics-of-class-struggle?fbclid=IwAR3VXqXPcrXbJl4myghFPxWgtrK_ljHhzsq2ftNfq1gbUsQ-6Ny8RXAK4z4




 


1편에서 이어짐


 

IV. 풀란차스가 "관계"로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매카시에게 관계성은 계급들과 국가 기관들 사이에 있다. , 계급은 외적으로 획일적인 국가와 "관련된다". 각 계급이나 계급 분파가 경쟁적으로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은 이 모델에서 국가의 기능적 통일성과 상충되지 않는다. 풀란차스의 형상화에 따르면, 국가는 각 이익 집단이 스스로 커버를 잡아당겨, 정해진 어떤 종류의 타협에 도달하는 침대가 아니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계급투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국가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을 사물이나 대상으로 취급하는 개념과는 달리, 국가는 그 자체로 분열되어 있다. 모순과 투쟁이 국가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마치 이미 구성된 실체를 관통하거나 이미 그곳에 있는 비어있는 장소를 통과하는 문제인 것처럼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계급적 모순은 국가의 본질이다: 그들은 그것의 물질적 틀에 존재하고 그것의 조직을 형성한다; 반면 국가의 정책은 국가 내에서 그들의 기능을 발휘한 결과다.”

 

그래서 계급투쟁은 중립적 국가의 지형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다. 매카시가 묘사한 편향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국가라 불리는 안정된 "사물"은 없다. 그의 애초의 주장은 비록 "국가란 중립적인 경기장이거나 단일화된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편향"이라는 개념은 고정된 지형에 대한 영향력을 위해 로비하는 개인 자본가들 중 한 명에게 자본과 국가의 관계를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자본의 첫 방어선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로비하기, 네트워크 만들기 및 직접 자금 지원 캠페인을 통해 본질적으로 편향성을 부여함으로써, 자본은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수익성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만약 이것이 효과가 없다면, 자본의 두 번째 방어선은 투자를 보류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업 신용도 급락에 뿌리를 둔 정당성의 위기를 촉발시킬 것이다. 물론, 다른 모든 것들이 실패했을 때, 최후의 선택권은 항상 있다. 자본 파업. 그러나 현대 미국에서 대부분의 경우, 이런 설명은 로비와 자본 이동성에만 의존하지 않는 자본가들에 의해 실제로 전개된 전략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설명 체계는 그것을 본질적으로 나뉘어진 투쟁의 현장으로 취급하기보다는 국가의 통일성을 상정하고 있다.

 

이것이 프랑켄슈타인 문제를 그 국가의 구체적인 제도적 위치의 문제와 반대되는 전체 국가의 문제중 하나로 말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이유다. 국가 관리자들의 행동과 전략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본주의의 정치적 힘이 어디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국가 안에서 어떻게 위치하는지를 파악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분석은 또한 국가를 지향하는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 전략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가 아래에서 주장하듯이, 풀란차스의 분석은 권력 블록의 주요 전략들 중 하나가 어떻게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권력의 제도적 위치를 이동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노동자의 연합적 힘을 늘리거나 심지어 선거 승리를 쟁취한다고 해서 반드시 장기적으로 노동자 권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들의 적들은 단순히 급진적인 정치인들을 소외시키기 위해 제도적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최저임금법의 예를 들어보자. 임금을 인상하려는 노동계급의 노력에 맞서면서, 자본가들은 확실히 국가 기구에 특정한 편향을 심어주려고 시도하고, 임금 급등과 실업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노동조합 조직화 정도가 가장 높은 주(: 시애틀, 워싱턴)부터 가장 낮은 주(: 그린스보로, 노스캐롤라이나 주)와 바로 한가운데 있는 주(: 미술라, 몬타나 주)에 이르는 도시의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이득을 설명하지 못한다.

 

노동자의 연합적 힘의 정도는, "아래로부터의" 로비를 통한 이득으로 직접적으로 해석되지 않았고, 말하자면, 이것은 주로 국가 행정가들이 투쟁의 지형을 아래로부터 도전에 상당히 민감한 곳으로부터 노동자들이 상당히 제한적 영향력을 가진 제도적 위치로 옮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우, 국가는 최저임금 인상을 금지하는 법안을 선제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러한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대중적 압력에서 더 멀리 떨어진 기관, 즉 시에서 주 수준으로 성공적으로 이전시켰다.

 

이것은 그 변화의 여파로 지방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초기에 획득할 수 있었던 운동을 비효과적이게 만들었다. 이제, 비교 가능한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조직의 수준을 높이고 훨씬 더 많은 수를 모아야 한다. 운동가들과 비정부 기구들의 연합에 의해 주도된 캠페인의 결과로 덴튼시같은 지방에서 프래킹 방지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텍사스 주의 수준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이뤄졌다.

 

대중 계급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의 기관으로 권력이 옮겨가는 것은 입법 방해에 국한되지 않는다. 행정적 차원에서는, 이것이 최근 미시간 주()에서 노조 조직화 정도가 10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최하위 2개 지역인 노스캐롤라이나와 텍사스 주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988년에 통과된 법률은 공식적으로 지방정부를 주정부의 일부로 규정했고, 주정부는 실질적으로 선출된 지방공무원 대신에 선출되지 않은 금융관리자를 임명할 수 있었다. 이것은 대중운동에 실질적인 장벽을 만들었다.

 

2011년 취임한 릭 스나이더 주지사의 첫 번째 행동은 이 법을 개정하여 비상사태 관리자들의 힘을 증가시키는 것이었지만, 유권자들은 이 법을 큰 폭으로 거부했다. 이에 대해 스나이더는 공공법률 폐지를 분명하게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한 두 번째 버전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들 관리자들은 무엇보다도 공무원들을 해고하고, 노동계약을 재협상하거나 종료하고, 지방 자산을 민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관리자의 세금 인상 능력은 명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투쟁의 지형을 지자체에서 주 수준으로 옮김으로써, 풀란차스가 지적했듯이 "일반적 대중은 특정 국가기구에서 물리적으로 배제된다".

 

이 사례들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정책 그 자체만이 아니라 누가 이 정책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계급투쟁의 문제다. 대중적 압박에 대응하여 한 기관의 위치에서 다른 기관의 위치로 권력이 이동한 것은 국가의 지형에서 전개되는 계급투쟁의 표출이다. 대신에 우리가 매카시가 제시한 시각에서 이러한 투쟁을 검토한다면, 좌파적 선출직 공무원들의 부재는 말할 것도 없고 두 경우 모두 극히 낮은 수준의 연합적 힘을 감안할 때 지역적 최저임금이나 프랙킹 방지 법안은 결코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통과됐거나 통과에 가까운 경우에 자본은 주요 도전자를 위해 일하겠다고 위협하거나 사업을 이전하고 미래의 투자를 보류함으로써 지역의 관료들을 통제할 것이다. 그러나 매카시의 틀 안에 머문다면, 우리는 다른 국가 기관들이 개입하거나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공격을 하기를 기대하지 않게 된다. 그가 이런 추가 사항을 허용한다고 해도, 단지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그의 근본적 이해의 구성요소라기 보다는 이론의 보조적인 측면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국가를 계급들간의 권력 관계로 본다면(사물국가와 계급들간의 관계가 아닌) 이러한 변화를 대중적 권력을 제한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 풀란차스의 관계적 틀은 우리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하는 국가 관료들을 규율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자본가보다는 투쟁의 더 넓은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극히 제한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또는 역사적으로 노동당이 없었고 더구나 노조 조직화 정도가 엄청나게 낮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현재 국가 정책 입안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분명히 우리는 지난해 미국에서 1980년대 이후 가장 많은 파업과 무엇보다도 교사들의 파업 물결을 목격하게 되어 고무되었지만, 우리는 또한 이러한 파업이 움츠리고 탈노조화되던 공공 부문에서 주로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국면에서 계급적 힘의 균형에 대한 어떤 분석도 우리의 현재 힘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를 필요로 한다. 매카시는 그가 제안할 때 무언가를 향한다.

 

경제의 구성이 자본주의적 기업의 고용에서 공공 일자리와 작업장 민주주의로 옮겨갈수록, 민중이 국제적 금융의 제약에 덜 의존하고 제국주의적 국제 관계의 방식에서 자유로워짐에 따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른 계급에 비해 상대적인 자본의 구조적인 힘은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에는 두드러진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는 그것을 맥락적으로 분석해야만 전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맥락적 분석이 아니라 규범적 명령으로, 강화된 노동자의 힘으로 특징지어지는 공공부문의 확대에 대한 뿌리 깊은 소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맥락이 "심각하게 편향된 기관들의 집합"을 변혁하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라면, 그 힘의 비대칭성으로 유명한 맥락에서 사회주의적 전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때문에 풀란차스는 신자유주의의 격렬한 태생기에 자본주의 국가를 권위주의적인 국가주의로 특징짓는다. 이것은 각 국가들이 "대중적 투쟁과 계급적 헤게모니에 억제된 위험의 증가를 막기 위한 전반적인 제도적 구조"를 확립하는 재편성 기간이라는 것이다. 국가의 이러한 정치적 역할 증대는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권력블록 내부의 모순을 고조시킨다. 예를 들어, 미국 자본의 많은 부분들은 단지 그들의 비용으로 공공기금을 만들어 월스트리트로 이전한다는 이유로 오바마의 TARP(부실자산구제계획) 프로그램에 반대했다. 그러나 노동자 억압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뭉침으로써 권위주의적인 국가주의는 권력블록을 재구성하고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재생산한다.

 

V. 전략적 함의

 

사회주의 전략과 관련해서 왜 이렇게 골치아프게 따지는 것이 중요한가? 이 토론에 걸린 진짜 중요한 이해관계는 무엇인가? 적어도 매카시의 개입을 뒷받침하는 전략으로서, 그는 풀란차스가 <국가, 권력, 사회주의>의 마지막 장에서 말한 것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그는 잘못된 판단으로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하고 대신 내부로부터 국가를 변형하는 것을 선택했다.

 

국가의 고사를 지향하는 국가 기구의 변형은 국가 안에서 수많은 대중의 개입이 증가할 때에만 만들어질 수 있다: 확실히 그들의 노동조합과 정치적 형태의 대표성만이 아니라 국가 자체 내에서 그들 자신의 주도성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 과정은 직접적, 평조합원적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의 발전을 동반해야 하고, 스스로 운영되는 네트워크와 센터들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에게 유리하도록 힘의 균형을 바꾸려는 풀란차스의 전략에서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내부로부터 개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어라도 스스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힘이 빠져있는 노동자들이 있는 현재의 국면에서는 이 두 세력이 어디서 생겨날 것인가? 전국적, 지역적, 그리고 도시적 차원의 경쟁에서 한줌의 좌파 후보자들의 선거나 실행 가능한 캠페인들은 노동계급의 잠재력의 증가와 급진주의를 대신할 수 없다.

 

다른 이들은 최근 여론 조사를 인용하여 미국인의 40%(그리고 밀레니얼 세대의 다수)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들처럼 우리도 이러한 결과를 환호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연합적 힘으로 착각할 수는 없다. 2015년에 샌더스의 선거 캠페인이 시작된 이후부터 '사회주의'는 사르트르의 개념을 빌리자면 노동자들을 일련화’(serialized)하는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표현되어 왔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그는 일련화된 사람들을 "노동을 통해, 투쟁을 통해 또는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조직화된 집단의 다른 활동을 통해 통합되지는 않았지만 결합된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요컨대 "상호적인 고립"(reciprocal isolations)이라고 한다. 노동계급 조직화 능력의 증대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적인 "일련"은 일종의 선거주의가 낳은 '단결'이다. 선거주의는 전략적 조정이 필요한 투쟁은 물론, 공통의 물질적 이해관계의 인식을 통해 집단적 힘을 구축하기보다는 사회주의를 집행 연기될 목표로 표현한다.

 

각각의 노동자들이 그들 계급의 나머지 사람들과 공통되는 것은 그들이 모두 동시에 선거운동을 하거나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각 유권자들은 후보와 관련 맺지만 서로가 연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확실히 캠페인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의 조직이 생겨나지만, 이들은 대부분 자원봉사자나 정치 운동원으로, 프롤레타리아 집단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계급적 행동이 아니라, 계급의 구성원들에 의해 수행된 행동이다. 그 차이는 중요하다.

 

사회주의 전략의 이 버전은 궁극적으로 집합적 능력을 갖추는 대신에 개별화하기 때문에, 아무리 그것이 증가해도 어떤 변혁의 힘도 구성하지 못한다. 이것을 매카시의 용어로 풀어내자면,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편향을 되돌리도록 하기 위해 노동자와 정치적 투쟁을 결합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사회와 국가의 변혁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형태의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풀란차스가 묘사한 국가 안에서 일종의 노동계급 개입의 토대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국면에서 이러한 전략적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매카시가 원하는 노동계급의 힘을 정확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일련화'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의 현재 순간을 선거적 수단이나 파업 행동을 통해서 국가의 편향에 반드시 대응해야 하는 문제로 특정된다고 보는 것은 이 순간의 과업을 오해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현재의 토론에 대한 많은 기여는, 풀란차스를 따라서, 무엇을 "이중권력" 전략으로서 묵살하는지, 즉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독립된 (그리고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기관의 집단적 권력을 구축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시각을 훈련시킨다.

 

대신에 그들은, 선거적 길이 현재 유일하게 노동자들의 눈에 정당화된다고 인식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국가의 내부적 모순을 급습의 구멍으로 보기 때문인지 "조직화, 도전, 자본주의 국가의 안팎에서의 변형"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중권력' 전략과 내부/외부 전략은 모두 전투적이고 잘 조직된 노동계급의 존재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더 자주 언급하거나 노동자들의 더 광범위한 횡단면에 호소하는 더 나은 캠페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잠재적으로 이 전략을 "계급 투쟁적 사회민주주의"라고 언급할 수 있는 정도는 계급투쟁에 의존할 것이다.

 

어떤 전략이 "계급 투쟁"을 구체화하는 정도는 지도자들의 겉치레 말이나 근거지에서 탈구된 집단행동에 대한 호소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한 전략이 진정한 독립적인 노동계급 조직과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선호하는 전략이 이중권력이든, 선거주의든,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든, 기반 건설이 그것의 불가피한 전제 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 전투적인 조직 구축,

프롤레타리아를 더욱 더 '일련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계급 전체의 힘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국가에 개입하는 것, 그리고

국가 행위자들을 통제하고 무엇보다도 자칭 사회주의적 대표자들이 젠트리피케이션(고급주택화)에 맞서는 동원, 이민자 억압과의 투쟁, 재생산 정의의 요구, 경찰의 만행에 도전하기 등을 포함하고 그것에 제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운동에 책임을 지는 방법을 찾아내기.

 

이런 전략 하나하나가 대표자들에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 나라에서 조직된 노동계급을 갖게 되면, 우리는 풀란차스가 <국가, 권력, 사회주의>에서 설명한 몇 가지 전략의 기초를 쌓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유로코뮤니즘의 좌파적 반복(이 에세이의 범위를 벗어난 비평)에도 마뜩치 않지만, 적어도 풀란차스는 1970년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철저하게 조직된 노동계급은 물론 각각의 국가적인 맥락에서 독립적인 공산당들을 중심으로 전략을 세웠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의 미국은 태프트-하틀리 법안의 통과 이후 노조원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서 그것과 대략적인 유사성도 없다. 우리는 1986년 이래로 작년에 다른 어떤 때보다 더 많은 작업 중단이 있었다는 것을 읽고 분명 고무되었지만, 우리는 또한 전후맥락에서 이 통계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4년 이전에는 2018년만큼 작업중단이 적었던 적이 없었다. 이래서 우리는 지금의 국면을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우리는 중요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부문에 대해 권위주의적 국가가 점점 더 집중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점진적이지만 이제 막 전투성을 증가시키기 시작한 체계적이지 못한 노동계급; 공직에 선출된 다양한 전투성을 가진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한 사람들, 점점 더 민족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이 되가는 무역 정책,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이 제안한 사회 정책에 대한 보수적 역풍의 시작. 이것은 우리가 비관주의를 연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맥락적이고 냉철한 관점에서 우리의 현재 순간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노동계급을 더욱 일련화시키고,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에게 희망을 미루며, 성공적으로 대항할 계급적 힘을 갖지 못한 채 역풍을 불러일으킬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이다. 국가 내부에서 조직하기보다는 기반 건설이 현 시점의 열쇠인 이유다. 이러한 전략들이 어떻게 대중적 조직화 능력을 형성하는지를, 국가기관 내에서 조직화에 대한 지지자들이 보여줄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접근법이 상응하는 정당이나 계급 기반이 없는 의회적 길의 확보를 상정한다는 여전한 우려를 가지게 될 것이다


(기사 등록 20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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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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