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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국가와 이해관계: 계급투쟁의 관계적 이론과 정치 1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2. 12.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 논쟁3

 

 

근래 미국에서는 좌파진영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변혁의 전략에 대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여성차별, 인종차별, 환경파괴 등에 맞서는 다양한 운동들의 성장, 노동자 파업 물결의 부활, 버니 샌더스와 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의 급부상 등이 이런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그런 논쟁의 일환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몇 번에 나누어 소개한다

첫 번째 글은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가 쓴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에 대한 글이었다.(https://www.anotherworld.kr/746)고 이어서 마이클 A 맥카시(Michael A. McCarthy)의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7개의 테제를 실었다.(https://www.anotherworld.kr/755) 이어서 세 번째로 매카시에 대한 응답글을 싣는다

이 글의 필자인 자카리 레벤슨(Zachary Levenson)과 테레사 칼리즈(Teresa Kalisz)는 국가를 진정으로 상관관계적으로 보아야만 계급적 기반 건설의 필수적인 활동보다 국가 내부에서 조직화에 과도하게 중점을 두는 함정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이자 학자이다

이런 논쟁들이 단지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검찰개혁, 사법개혁 등을 둘러싼 국가기구와 각 정치세력과 대중들의 충돌과 운동이 복잡하게 벌어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검찰과 사법부 등 국가기구, 정치세력들의 충돌과 갈등을 국가와 자본의 관계,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모순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접근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글이 다소 어렵고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1편이다.(번역: 두견)

 

출처:

https://www.versobooks.com/blogs/4489-states-and-stakes-relational-theory-and-the-politics-of-class-struggle?fbclid=IwAR3VXqXPcrXbJl4myghFPxWgtrK_ljHhzsq2ftNfq1gbUsQ-6Ny8RXAK4z4

 

 


전후 시기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가 미국의 정치적 의제로 돌아왔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도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여러 개의 주요 시의회, 의회, 주 상원의원에 선출된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정례적인 여론조사는 35세 이하의 미국인 대다수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대통령 후보들은 수시로 사회주의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도록 요청 받는다.

 

<뉴 리퍼블릭>, <뉴욕 매거진>, <뉴스위크> 등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주요 잡지들은 사회주의의 발흥에 관한 기사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으며 <뉴욕타임스>1면에 사회주의 회합을 보도하고 있으며 보수와 중도 언론들은 민주당이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공개적으로 우려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이 현재 선거 현장에서 지배적인 세력이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나타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러한 메시지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초들이 있다. 우리 삶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자들이 국가의 최소한 몇 가지 측면을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허황된 꿈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의식적으로 캠페인을 조율하고 실제로 그들의 후보를 선출하고 있다.

 

이것은 그에 따라 국가 이론을 둘러싼 논쟁의 부활을 설명하고, 특히 그리스 마르크스주의자인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의 저작들에 대한 관심의 부활을 설명한다. 1970년대 후반, 풀란차스의 사회주의 전략에서 이중권력적 접근에 대한 비판은 유로코뮤니즘 집단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많은 공산당원들은 사회 투쟁의 "외부적" 압력과 "내부적" 선거 투쟁을 결합한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을 모색했다. 이제 민주적 사회주의가 다시 책상 위에 오른 가운데, 풀란차스의 전략적인 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됐다.

 

사실, 1980년대 초반에 끝난 마지막 토론 이후 사회주의 전략과 관련하여 국가에 대한 글이 이렇게 쇄도한 적은 없었다. 2016년 샌더스 캠페인 이전에는 이러한 논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북미 마르크스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명백한 예외는 레오 패니치와 샘 긴딘, 그리고 <뷰포인트 매거진: Viewpoint Magazine>의 국가에 대한 특집호이다. 좌파에게 선거는 더 이상 단순히 항의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드러낸 사회주의자가 주요 국가직에 선출되는 것을 정당하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이러한 논쟁에 걸린 이해관계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의 맥락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전략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국가를 어떤 계급에 의해서든 휘둘릴 수 있는 중립적인 수단으로 간주하는 도구주의적 관점을 취한다면, 우리는 선거주의를 제안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이라면 우리의 임무는 이러한 자본가를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일 것이다. 혹은 우리가 대신 국가를 구조주의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는 단순히 사회주의자들을 선출하는 것이 그런 마술을 낳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그리스] 시리자의 사례처럼, 자본가들은 사회주의 정부가 그 계획을 완화하거나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투자를 보류할 구조적 영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근의 마이클 A. 매카시처럼 이 두 가지 대안을 모두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국가를 단순히 획득하거나(도구주의) 거부할(구조주의) 경품으로 보지 않는다. 그 대신에 풀란차스가 1978년의 저서 <국가, 권력, 사회주의>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우리는 국가를 획득해야할 어떤 것으로 보든지, 아니면 자체의 합의대로 행동해야할 것으로 보든지, 사회적 관계와는 무관한 '사물'로 보는 도식을 거부한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국가 분석의 두 가지 함정이라고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사물-국가’(Thing-State)대상으로서 국가’(State as Subject).

 

국가는 단순히 외부 세력에 의해 장악되는 기존의 어떤 한정된 묶음의 기관들이 아니라, 대신 이러한 세력들에 의해 구성된다. 당시의 풀란차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주의 전략에서 국가에 대해 보다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국가에 대한 개입은 사회주의 전략의 핵심 요소로서 선거를 우선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계산은 대규모 시위, 파업, 사회 운동의 활동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국가가 관계적이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이 불가분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를 관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계급이 외부 국가기구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 간의 관계가 바로 국가의 구조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합된 자본가 계급이 다른 모든 계급 부분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는 이 국가를 풀란차스가 "부르주아 지배의 단순한 부속물"이라고 부른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응집력 있는 자본가 계급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의 중심적 역할은 산업, 농업, 금융, 물류 등에서 자본의 다양한 경쟁 분파를 지배적인 사회적 세력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II. 매카시의 관점

 

최근 버소(Verso) 블로그에 기고한 그의 기고문에서 매카시는 풀란차스처럼, 도구주의자들이 그렇듯이 국가를 중립적인 경기장으로 보거나, 또는 단일한 대상처럼 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대신에" 그는 "그것은 느슨하게 연결된 기관들의 집합으로서 투쟁의 장"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가 "사물"이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피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를 "자본 그 자체가 사회적 관계라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서 사회적 관계"로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 당시 풀란차스와 마찬가지로 매카시는 두 가지 이론적 오류에 맞서고 있다.

 

첫째로, 그는 국가가 본질적으로 계급중립적이어서 그것의 통제자가 결정하는 어떤 목적에 따라 이용될 수 있는 비어있는 기구라는 개혁주의적 개념을 거부한다. 그리고 둘째, 그는 지배계급과 불가분하게 연결된 반드시 파괴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서 국가라의 조잡한 이해를 거부한다. 후자의 경우, 그는 이러한 기능주의적 사고의 반복은 사회 민주주의의 경험, 또는 적어도 계급투쟁의 고조를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프레드 불록(Fred Block)에 이어서, 그는 자본가들이 국가를 직접 통제한다면, 그들은 축적을 위한 장기적 전제 조건이지만 즉각적인 수익을 낳지는 않는 교육, 사회기반시설, R&D같은 것에 투자할 가능성이 낮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게다가, 국가의 개입이 없다면, 자본가들은 경쟁하는 각각의 분파들이 즉각적인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위기와 이윤율의 하락을 관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매카시는 어떻게 이런 다양한 형태의 기능주의에 맞설 수 있을까? 여기서 그는 풀란차스로 눈을 돌린다. 자본주의 국가를 사회적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계급투쟁이 국가의 영역에서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이런 국가가 자본가와 일대일로 조응한다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논의하는 구조적 한계는, 다시 블록의 논의를 강력하게 가져와서, 국가가 중립적인 경기장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도 투자를 보류할 수 있는 자본가들의 위협은 사회주의 정책이 단순히 입법화되거나 심지어 집행되는 것에 객관적인 제한을 가하고 있다.

 

그는 관계적 국가는 그것의 구성 기관들 내에서 일어나는 계급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견해의 결론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의 제도에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위해 작동하는 깊은 편향들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편향들은 민주주의 세력들이 같은 지형에 대항해서 조직할 기회와 공존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편향에도 불구하고 매카시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실질적인 기회라고 주장한다. ,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직접적으로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노동자들과 그들의 동맹들에게 그것에 관여할 기회를 준다. 클라우스 오페(Claus Offe)와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의 뒤를 이어 그는 이것을 "프랑켄슈타인 문제"라고 부른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자본을 위해 운영되는 경향이 있지만, 동시에 한때 개별 자본에 맞서서 자본주의를 재생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정책적 도구들이 그것을 휘두르는 자본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는 편향이 계급의 어느 쪽에도 지나치게 압력을 가하지 않게 하는 면에서는 충분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시기에는 계급적 편향들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제도적 진출을 위한 개방을 보존하는 일종의 평형 상태가 존재한다.

 

 

III. 관계적 국가에서 누가 누구를 위해 연결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매카시의 성격 규정에 대해 문제제기하고자 한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를 관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첫 번째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논의를 진행하면서 그는 거의 독점적으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선호하면서, 그의 전략적 주장을 계급간의 권력 관계가 아니라 계급에 관한 국가의 관계에 치중하면서 이 개념을 포기한다. 그에 따라서 매카시의 자본주의 국가는, 계급 간의 어떤 관계도 없이, 각각의 계급과 관련된 상호 연결된 기관들의 집합인 하나의 단일체로 남아 있다.

 

풀란차스가 맞섰던 것은 정확히 이런 종류의 단일체적 국가 개념이었다. 그의 사물 국가("Thing-State")는 계급투쟁과 독립적으로 한 계급 또는 다른 계급에 의해 압박을 받는 통합된 독립체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국가의 구성 기관들은 그들 자신의 내부 역학관계와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단일체 국가에 맞서는 주장의 충분한 힘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풀란차스가 계급투쟁은 국가를 가로지른다고 주장할 때, 그는 이러한 모순이 그 횡단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를 가로지르는 계급투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카시에게 이것은 주로 경쟁하는 편향의 측면에서 나타난다. 국가에 대한 다원주의적 개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모델, 즉 대립하는 사상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다원적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평형 상태이다.

 

물론 자본가들은 불균형적인 몫을 가지고 있지만, 두 계급 모두 특정 자원을 이용함으로써 "정책 결정 과정을 촉진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들은 "법적 인재를 고용하고, 캠페인에 기부하고, 조율된 로비력을 발전시키고, 기술적 컨설턴트를 고용하고, 사회적 위신을 높이고 유권자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를 재구성함으로써 정치적 통제와 영향력 둘 다를 위해 집중된 자원을 더 잘 사용할 수 있다." 또는 간단히 말해서, 이데올로기 전투를 전개할 수 있다.

 

우리는 국가가 자본주의 수익성의 방향으로 깊이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이러한 편향의 개념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그러한 중심적 설명에서 로비의 구실이 커지는 것은 개별 자본가들, 또는 다른 특정한 자본 분파가 사실상 집단으로서 자본가 전체를 대신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자본은 일반적으로 캠페인에 자금을 대는 경향이 있지는 않다. 대신에 우리는 월 스트리트나 빅 파마’[거대제약회사]나 다른 부유한 개인 후원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카시가 (블록을 따라서) 주장하듯이, 개인 자본가는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보장하기에는 "너무 근시안적이고 이익 창출에만 신경쓴다"는 점에서 문제다. 우리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자본주의적 편향을 어떻게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둘째, 이러한 편향에 초점을 맞추면 국가는 경제적 기능, 즉 이윤 창출의 또 다른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풀란차스에게 국가는 단지 경제적 개입의 수단이 아니다; 그 경제적 기능은 정치적 차원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단순히 기존에 존재하는 계급연합이 국가 위에서나 그것을 통해서 행동한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는 이러한 동맹이 구축되고, 버팀목이 되고, 파괴되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의 무대라는 것이다.

 

매카시는 이러한 점을 인정하지만, 그는 이를 "정치인들이 자본가들의 투자에 의존하고 있으며, 정치에서 기업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의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의 상대적 통합을 전제로 하여 말 앞에 수레를 놓는 것이다. 만약 국가가 자본가들을 (그들의 단결 속에서) 이런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자본가 계급을 조직한다면, 우리는 동어반복으로 남게 된다. 그것은 또한 (1)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들이 성공적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이라는 국가에 대한 재구성된 기능주의적 관점을 제시하며, 그러므로 (2) 계급투쟁의 장이라기보다는 장악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면 자본주의 국가는 어떻게 지배계급을 조직하면서 동시에 민중 계급들을 파괴하는 것인가? 첫째로, 그것은 자본의 다양한 대립적 분파를 일관된 권력 블록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모든 자본가들에게 바람직한 것으로서 각 특정 분파의 목적을 표현함으로써 이것을 행한다. 우리는 미국 농장주들이 세계 남반부의 농업 생산자들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국가 보조금을 요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그들의 세금 납부를 증가시키거나, 나아가 규제가 없는 시장의 이상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에 반대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적인 수사법을 배치함으로써 정부는 미국 제품을 시장에서 최고라고 도장찍는 것이 잠재적으로 그들에게도 이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본의 다른 부분들이 양보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계급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전략들 중 하나로서, 우리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본의 분파들을 하나의 권력 블록으로 통합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떤 분파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파를 배제하는 것이 전략적일 수 있다. 우리는 브렉시트의 경우에 금융자본의 배제를, 혹은 어떤 탈식민지적 맥락에서 농업자본의 주변화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요점은 통일된 자본가 계급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기보다는, 권력블록을 구성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람시(Gramsci)를 따라서, 이것은 정부의 공식 기관과 협력하여 상업적 회의실에서 중소기업 집행부에 이르기까지 이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모든 종류의 싱크 탱크와 민간 조직들을 포함한, 정치 사회적 적합성을 넘어 국가 개념의 확대가 필요하다.

 

한편, 이 국가는 프롤레타리아를 파괴하는 일을 한다. 종종 이것은 입법 및 사법 영역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태프트-하틀리법을 노동 파괴 전투의 핵심 무기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시민연합에서 야누스[조합비 납부 여부를 노조원 개개인이 선택하도록 하는 판결]까지 국가 수준의 노동권법과 대법원의 결정을 쉽게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자본주의 국가가 단순히 편향적인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그것의 목표를 바꿀 수 있는 어떤 세력도 파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명, 즉 편향과 파괴는 서로 손을 맞잡고 가지 않는가? 맞다, 하지만 유보적 경고가 있어야 한다. 국가가 선천적인 편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비관계적인 방식으로 - 단일체나, 또는 사물로서 - 국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편향"이라는 개념은 계급이 영향과 압력을 행사하는 외부적인 것으로서 국가를 만든다.

 

풀란차스의 표현대로, "국가는 사회 계급과 외부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어떤 종류의 균열도 없는 단일체적 블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일관성 있는 일련의 편향을 가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매카시는 계급 내부적 및 제도적 모순을 국가 외부적 마찰이나 붕괴로 개념화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의 "프랑켄슈타인 문제"에 의해 가장 잘 예시되고 있는데, 이 문제들은 통합된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여 사용될 자본주의적 영향으로부터 단일체적 국가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이러한 모순들을 활용할 수 있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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