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성폭력 사건에서 구조와 문화에 대한 성찰
보수언론, 주류언론들을 불신할 이유는 많다. 최근에도 이재용 기소와 박덕흠 비리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보면 기가 막힌다. 그동안 민주당 쪽 인사들의 부정 의혹들과 비교하면 이 문제들은 훨씬 더 분명하고 심각하다. 하지만 언론의 보도 태도는 하늘과 땅이다.
왜? 비리와 부정을 저지른 자들이 자기들 진영이거나, 삼성과 건설사들은 언론사들의 대주주이자 최대 광고주이기 때문이다. 한국 주류언론에게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비판의 성역이자 금단의 영역은 문재인이 아니라 이재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 박원순 시장 관련 사건에서 마치 여권 지지자들이 대부분 피해자를 불신하고 2차가해에 동참하고 있다는 식의 언론 보도와 프레임도 믿지 않는다. 일부 극단적 목소리를 마치 공식적이고 대표적인 목소리인 것처럼 모는 것이 기성언론들의 상습적 수법이다. 오히려 민주당 쪽에서도 성찰적이고 의미있는 목소리가 있었다.
권인숙, 정춘숙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 모두는 치열하게 생각해야 해요. 박원순이 그럴 리 없어라는 생각을 벗어나면 바로 물어보게 되죠. 박원순조차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박원순조차 그랬다면 어떻게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까?” (정춘숙) 권인숙 의원은 ‘조직 문화가 근본적 원인’이라고 지적하면서 권력형 성범죄 근절 법안도 제출했다.
물론 여권의 적극적 지지자들 속에서 소극적 태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믿고 지지했던 사람의, 같은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허울을 직시하는 것은, 항상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많은 멋진 언행을 보여온 오카시오 코르테즈도 조 바이든의 성폭력 의혹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거나 침묵하고 있다.
그래도 일부 여권 지지자들, 친여 유튜버들이 침묵을 넘어 피해자와 조력자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그것은 김재련 변호사를 인신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혐오성 언행과 욕설까지 등장한 것은 너무 심각하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공격일 수밖에 없다.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김재련 변호사의 전력이나 정치성향을 문제삼는 것도 옳지 않다. 나도 김재련 변호사가 최근에 정의연 마녀사냥에 동조한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과 피해자 조력은 별개의 문제이다. 폭력이나 마녀사냥을 당하는 사람의 정치적 견해와 진영이 어디인지를 따져보고 나서 방어한다면 그것은 진지한 태도가 아니다.
피해자가 과거에 찍은 단편적 사진과 영상을 들고 나와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도, 아직 진상이 확실치 않으니 피해자와 조력자를 공격해도 된다는 논리도 안 맞다. 그런 식이면 조국 교수가 과거에 찍은 사진 몇장으로 비리 누명을 덮어씌우고, 진상도 불확실한데 추미애를 일단 마구 욕하고 본 언론들도 문제가 없다고 볼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무조건 불신하며 피해자와 조력자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피해 호소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안희정 사건의 피해자인 김지은 씨가 쓴 <김지은입니다>를 보면 그런 불신과 공격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의 작은 말에도 심장이 산산조각 깨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2차 가해는 현재의 삶, 과거와 미래, 자아, 인격에 대한 살인이었다. 성폭력이 비공개 살인이라면, 2차 가해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칼로 난도질하는 살인 같았다. 옷이 산산이 찢기고 벗겨져 알몸인 채로 마구 채찍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모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피해 사실을 알리고, 더 많은 피해를 막았을 뿐입니다. 직장을 잃었고, 마음의 병을 얻었습니다. 의인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단지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지금 저는 또 다른 폭력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고통과 상처에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겪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 진영에게 유리하게 이용된다는 이유로, 등을 돌린다면 옳지 않다. 특히 과거 서울시에서 피해자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피해자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는 것은 유감스럽다. <김지은입니다>를 보면 김지은 씨는 믿고 의지하던 동료와 상급자들에게 가장 상처받았다. “권력 앞에서 사인간의 우정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배웠다. 인간은 없고 조직만 있었다.”
지금 서울시 관계자들의 주장에서는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더 민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 자신들의 조직 문화와 위계구조에서 무엇이 부족했을지 돌아보는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고인에 대한 충정이 아니라, 조직문화와 공동체의 문제점을 외면함으로써 고인의 개인적 문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기본으로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은 개인의 일탈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을 용인하고 가능하게 한 공동체의 구조와 문화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도 인권과 반성폭력에 기여를 한 고인마저도 이 나라 공직사회의 그러한 구조와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을 보려고 해야 한다. 그런 구조와 문화가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인 4월 사건의 배경이 됐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것이 피해자의 치유와 공동체의 변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러한 비극으로 발전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 바탕에는 성폭력 사건을 개인적 일탈로만 몰아가고, 정쟁과 진영대립으로 만들고, 선정적 기사거리로만 소비하는 한국사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류언론들은 지금도 불신과 갈등, 대립을 부추기는 구실만 하고 있다.
<김지은입니다>를 보면 안희정 사건에서도 언론이 얼마나 문제였는지 알 수 있다. 언론은 초기에 아직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김지은 씨의 부탁을 간단히 무시했고, 단독 경쟁을 하면서 사생활과 개인정보를 유출했고, 사건의 자극적 측면을 계속 부각했다. “직업윤리나 별다른 의도조차 없이 트래픽 조회 수에만 관심있는 기자들이 많았다... ‘너는 이 취재 요청에 응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마구잡이였다.”
오거돈 때도 조중동은 소리높여 가해자를 비난했지만, 사실은 피해자에 대한 배려나 걱정 때문이 전혀 아니었기에 피해자의 강한 반발을 낳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보수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자신들도 책임이 있는 성차별, 성폭력적인 사회와 구조에 대한 고민과 성찰들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고인과 민주당과 문정부를 극단적으로 악마화하고, 여권 일부 지지자들과 피해자와 조력자들의 반응을 취사선택하고 맥락에서 떼어내 과장 왜곡하고 있다. 그렇게 갈등과 대립을 부추겨서 클릭수를 높이고 정략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일부 여권 지지자들, 유튜버들의 과도하고 잘못된 태도가 그런 보수언론들에게 땔감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의문이나 토론을 제기하는 것을 전부 2차가해로 볼 수는 없다. 풀리지 않는 불신과 의문을 숨기고 겉으로만 지지하는 척 하기보다, 설명 속에 의문이 풀려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지지해주길 바라는 것은 누구보다 피해자일 것이다. 문제는 피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과 공격을 ‘합리적 의문 제기’라고 포장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신뢰하고 지지하던 사람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비극을 단기간에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보다 더 큰 충격과 혼란 속에 있을 피해자에 대한 원망과 공격으로 나갈 이유는 없다. 이 아픔을 딛고 우리 사회가 한발 더 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낸 사람으로서 존중해야 하고, 그 옆에서 돕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마워해야할 일이다.
● 서해의 비극과 국경없는 세상의 꿈
기본적으로 이번에 서해에서 벌어진 비극의 진상에 대해서, 돌아가신 이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쁜 남북한 군부의 주장들을 모두 불신한다. 군대는 국가기구 중에서도 특히 더욱 억압적이고 비밀주의, 관료주의, 보신주의가 심각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터지면 일단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진실을 덮고 '안보'를 핑계로 정보를 비공개하는 일이 너무 자주 있는 곳이 군대이다. 숱한 의문사와 풀리지 않는 한국 현대사의 의혹들은 대부분 군대와 연관돼 있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투명성과 거리가 먼 곳이다. 최근에 ‘병장회의’가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큰 웃음을 준 것도 그 때문이다. ‘카투사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병사 소비에트가 등장했다는 말인가’라는 비아냥이 나올만 했던 게, 군대는 철저한 상명하복과 계급적 위계질서로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치고 아프고 심지어 수술을 해서 잘 걷지 못하면 당연히 휴식과 회복이 필요하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군대이다. 청년들을 가둬두고 살상 훈련을 시키며 서로 감시하고 갈구도록 만드는 곳이 군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부의 고위장성들은 기본적으로 호전적이고 냉전적, 권위주의적, 우익적이다. 국힘당에서 최근에 추미애 공격을 주도한 신원식이 대표적이다. "문재인이라는 뿌리를 따라가면 김정은이라고 하는 악의 뿌리에 도달할 수 있다", "문재인 모가지 따는 것은 시간문제"라던 신원식은 전광훈의 절친이고 광화문 태극기 집회의 단골연사였다.
더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 군부 고위장성들은 대표적으로 선출 통제되지 않는 진정한 권력자들이다. 국가의 군사안보 정책과 전략은 기본적으로 이들의 통제와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은 기본적으로 냉전적 대립, 군사적 대치와 긴장, 군비증강, 무기 수입, 심지어 전쟁을 선호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지위와 기득권 유지에 긴밀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서해는 이런 남북한의 군부와 주변 강대국의 군부가 오랫동안 군사적 대치를 유지하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로 만들어 온 곳이다. 각종 포격 사태와 두 차례의 해상교전이 모두 이 곳에서 벌어졌다. 미군의 전투기와 항공모항, 잠수함 등이 수시로 전개되는 곳이기도 하다. 사소한 충돌이나 심지어 오해와 오판이 국지적 충돌이나 전쟁으로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번에도 어업지도원이 사망하던 무렵에 주한미군은 전투기 3대를 그 지역에 출격시켜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고인의 유해라도 수습해야 하는 상황에서 NLL을 두고 또 긴장이 벌어지고 있다. ‘NLL이라는 이상한 것이 함부로 못 건드리는 괴물이 돼서, 우리 어릴 때 책상에 줄 그어놓고 넘어오면 칼로 찍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노무현 전대통령)하게 돼 있는 것이다.
파도치는 바다 위에 무슨 선이 있느냐, 넘어오면 어떻고 넘어가면 어떠냐, 같이 힘을 모아서 주검이라도 빨리 찾아 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지 않냐...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이런 상식은 통하지 않고 있다.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논리만 불거지고 있다. 일본이 식민지배와 전시에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들에 대해선 사과도 없이 넘어가자거나,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 게 ‘반일 종족주의’라던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 점에서 정의당 김종대 전의원의 ‘북한 함정을 격파했어야 했다’는 발언은 너무나 안타깝다. 평소의 합리적 견해와 비교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언론이 또 발언을 왜곡한 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국힘당은 김종대 전의원 발언을 환영하며 악용하고 있다. 민주당과 차별성 긋기가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다. 이것은 정의당이 초기에 종북몰이에 굴복하면서 ‘헌법 내 진보’를 말했던 것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정의당이 기성체제가 강요하는 논리에 머무르며 진보정당으로서 차별성을 흐리게 된 출발점이었다. 이번에 세워질 정의당 새지도부가 이런 오류의 뿌리에서 벗어나 기득권 우파에 누구보다 단호히 맞서며, 미적거리는 민주당을 뛰어넘는 급진적 차별성 긋기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차별금지법 문제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오늘날 청년남성들 속에서 <가짜사나이> 유튜브와 ‘이근 대위’가 커다란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은 불길하다. 군사훈련 과정에서 대상자들을 강압적으로 학대하며 가학적인 괴롭힘과 막말, 욕설까지 난무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민간군사기업이 만든 이 프로는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인 군대문화를 멋있는 것처럼 묘사하며, 마초적인 남성성을 우상화하고 있다.
이런 청년들의 정서는 이해하거나 공감할 것이 아니고 도전할 문제다. 군대도, 국경도, 국가도, 소유도 없는 세상이 오면 살인도, 전쟁도, 희생자도 없을 것이고 평화와 인류애 속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될 것이라던, 존 레넌이 <이매진>에서 노래했던, 그런 이상주의가 진보좌파들 속에서 강력하게 부활하기를 소망한다.
● 종북이 아니면 눈에 핏발을 세우라고?
서해에서 벌어진 비극은 참혹하다. 많은 이들이 돌아가신 분을 애도하고 슬픔을 견뎌야 하는 분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을 것이다. 북한이 관련된 일에서는 정부의 발표나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믿는 것이 섣부른 일이고, 더구나 이번 일은 납득가지 않는 부분들이 꽤 많지만, 그래도 이것들을 사실이라고 전제했을 때 북한 정권과 군부의 행태는 명백히 반인도적인 것이었고 규탄받아 마땅하다. 분명하고 철저한 반성과 사과, 재발방지 조처가 있어야 한다.
코로나 방역 때문이라는 추측들이 맞다면, 이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낳은 카오스적 공포 속에서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대응 중에 하나로 남을 것이다. 사람을 바이러스 취급하면서 입국금지를 주장하고, 다수를 위해 소수 병약한 사람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 취급하고, 검은 가방에 넣은 시신들의 화장 처리를 지원도 없이 방치하던 세계 곳곳의 권력자와 언론들은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북한 정권과 군부만을 타자화하고 악마화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잘못된 프레임으로 몰아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국힘당과 많은 주류언론이 보이는 지독히 선택적인 분노와 철저히 이중적인 반응에는 공감보다 거부감이 들뿐이다. ‘어떻게 이런 야만적이고 엽기적인 행태가 있을 수 있냐’고? ‘비무장한 민간인에게 저렇게 대응하는 국가가 어디있냐’고? ‘우리 국민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데 정부는 뭐하고 있냐’고?
국경을 넘어가려는 사람을 사살하는 일은 멕시코 국경에서 미국 국경수비대나 흔히 저지르는 일이고 트럼프는 그 벽을 더 쌓아 올리고 있다. 비무장한 민간인을 잔인하게 총살하는 것은 미국 경찰이 너무 많이 해 온 일이어서 지금 거대한 운동이 촉발된 상황이다. 우리 국민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데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만들지 말라고 막아온 것이 누구인가?
남북간의 국경에서 벌어져온 야만도 어느 한쪽만 저질러온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 때 휴전선을 넘어 월북하려던 사람을 사살한 것은 한국군이었고, 그게 ‘매뉴얼에 따른 정상적 대응’이었다. 그때 보수언론들은 뭐라 한 적이 없다. 휴전선에서 사소한 일만 벌어져도 ‘대응 사격과 응징’을 주문하고, 소극적 대응에는 ‘노크 귀순’ 운운하면서 ‘휴전선 뚫렸다’, ‘안보가 무너졌다’, ‘교전수칙이 사라졌다’며 목소리를 높여온 것도 국힘당과 냉전 보수언론들이다.
이런 냉전적이고 호전적이 태도가 당연히 북한에도 있고, 이런 비극을 낳은 것이다. 무엇보다 이 비극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땅과 바다에 선을 긋고 벽을 세워놓고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넘어가면 총을 쏘고 처벌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군사적 대치 구조를 하루 빨리 없애야 한다는 것을 다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필요한 것은 벽을 세우는 게 아니라 다리를 놓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지금 보수언론들이 비난하듯이 문정부와 통일부 등이 ‘이 지경에도 평화, 대화, 화해, 종전을 강조’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옳은 태도이고 나는 기꺼이 그것을 적극 지지하고 응원할 것이다. 그러니 국힘당과 주류언론들에게 말한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당신 눈에는 왜 핏발이 안 서 있냐? 혹시 종북이냐?’고 다그치지 좀 말라. 이 비극 속에서 슬퍼하기도 아까운 시간에 당신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도 괴롭다.
● ‘레닌주의’ 좌파가 보여 온 문제들
최근에 <현시기 유럽좌파당 운동>(저자 박석삼) 책을 읽어보았다. 오늘날 유럽 좌파의 성격과 구성, 역사적 배경과 맥락, 다양한 유형과 성장 과정, 투쟁과 선거에서 유럽 좌파의 대응과 성과 등을 논쟁과 함께 소개 정리하면서 정치적 차이를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태도와 열린 토론의 문화를 강조하는 교훈도 끌어내는 내용들이 유익했다. 특히 아무래도 내 경험상 이런 지적들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연구한 존 켈리는 남성중심적인 문화와 민주집중제에 따른 권위주의적 문화가 여성주의에 둔감하게 만들고 다른 당들보다 성폭력과 그 은폐의 경우가 많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신좌파 의제의 수용을 거부하거나 부차화하는 경우는 보수적 공산당과 혁명적 극단좌파의 일부에만 해당된다.”
“이처럼 지나친 분파주의의 배경은 자기 당의 해석이나 입장만이 옳다는 교조주의의 병폐이기도 하지만 차이를 용인하지 않고 규율을 강요하는 민주집중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주집중제는 표면상으로는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결정이 되면 중앙집중적으로 실천하자는 취지이지만 당내의 다양한 의견이나 소수파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되어 왔다.”
이런 지적들은 최근에 팜 빈(Pham Binh)의 글을 보면서 공감했던 부분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미국에서 트로츠키주의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팜 빈은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선구자인 토니 클리프의 ‘레닌주의’ 해석에 대해서 여러 날카로운 비판들을 한 바가 있다.
“오늘날의 레닌주의 단체들에 대한 세 가지 관찰 - 단일한 이데올기적 관점의 우위, 진정한 적보다는 경쟁 좌파를 향하는 기강, 그리고 이들 집단 내에 존재하는 사소한 논쟁으로 가치 있는 사람, 즉 '진정한 신도'를 한정하는 것. 이것은 교리가 운동보다, 생각이 행동보다, 강령이 결과보다 더 우선하고 중요해질 때 일어나는 일이다...
“볼셰비키를 본받고자 하는 집단의 핵심 문제는 두 가지다: 철저하게 민주적이고 비교조적인 관행을 모방하지 않고, 더 중요하게는 RSDLP(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가 처음부터 노동계급 정당으로 생겨났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의 강령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전한 것이지, 그것으로부터도 분리되거나 외부에서 오지 않았다...
“레닌주의 단체들에게 있어서, <이스크라>를 본뜬 신문과 유급 전임자로 주로 구성된 전능한 중앙위원회의 보유 여부는 필수불가결하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그 조직을 ‘우리’라고 결코 느끼지 못한다... 모든 질문은 회원 가입 전에 해결되어, 그들은 어디서든 회원을 모집하고, 신문을 팔고, 조직의 노선을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거의 할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은 회원들의 높은 회전문 현상을 설명해준다. 수 년, 수십 년 동안 해당 조직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제한된 시야 내에서만 사고하게 되고, 그 틀 밖에서는 사고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런 지적들은 내 스스로가 과거 활동하면서 얽매여 있었고 벗어나지 못했었던 문제들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고 생각하게 해 준다. 그리고 여전히 이런 구조와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류를 시정하고 잘못을 반성하기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문제 속에 상처받았던 피해자들에게 어떤 사과도 없이 계속 새로운 고통을 가하고 있는 모습들을 본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경쟁 좌파나 반대파, 자유주의 세력의 잘못과 결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소리높여 비난한다는 것이다. 다른 좌파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잘 비판하고 평가하면서 스스로는 같은 오류를 고수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고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자신부터 항상 경계하고 돌아볼 일이다.
(기사 등록 20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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