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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트럼프와 대선/ 코로나/ 기후 위기/ 돌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0. 22.

전지윤

 

미국 대선과 트럼프의 쿠데타 예고

 

미국 대선 1차 티비토론은 혼돈과 재앙이었고 마치 종합격투기 아수라장같았다. 트럼프는 인격모독과 빨갱이 몰이와 거짓비방의 막장 전략을 택해 난장판을 만들었다.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트럼프가 공공연하게 선거 불복의 쿠데타를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티비토론에서도 그는 극우 인종주의 폭력집단(‘프라우드 보이스’)을 직접 거명하면서 물러나서 대기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미국은 툭하면 민주주의와 공정성을 말하며 남미의 선거에 감시단을 보내왔고, 지난해에는 그것을 핑계로 볼리비아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모랄레스를 축출하는 우파 쿠데타까지 도운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정말 유엔감시단이 가서 공명선거와 정상적인 권력교체를 감시해야 할 정치후진국은 바로, 쿠데타 예고라는 초현실적 상황에 놓인 미국이다.

 

최근에 영화 <더 퍼지: 일렉션 이어>를 봤는데 비록 너무 극단적이고 엉성하게 만들어진 면들이 있지만, 적어도 트럼프 시대의 분위기는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미국을 위대하게’, ‘처단과 정화를 외치면서 합법적인 살인을 즐기고 선동하는 백인우월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리더와 지지자들의 살기어린 모습들과 그들에 쫓기는 다인종 하층민들의 모습....

 

영화에서 극우 살인마들은 반대편 대선 후보를 납치해서 하느님의 재물로 바치려고 하는데, 마침 며칠전 미국 미시간주에서 민주당 소속의 여성 주지사를 납치 살해하고 내전을 일으키려고 음모를 꾸미던 극우민병대가 적발된 소식은 영화처럼 살벌한 미국의 민낯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파시즘이 꼭 30년대 독일과 똑같은 형태일 거라고 보지 않는다면, 트럼프 재선으로 21세기 미국형 파시즘의 위험은 더욱 전진할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영화에서 여성 대선 후보는 신념에 차서 극우 폭력집단에 맞서지만, 실제 미국의 바이든에게서는 그런 결기를 찾기 어렵다. 바이든은 티비토론에서도 나는 좌파가 아니고 그린뉴딜과 전국민의료보험 등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수세적으로 빠져나갔다. 더욱 힘빠지는 것은 그런 바이든의 왼쪽에서 대안을 찾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3의 후보인 미국 녹색당의 호이 호킨스 는 노동운동가 출신의 비타협적인 투사이지만 존재감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미국의 좌파들은 지금 세 갈래 나쁜 길 앞에 놓여져 있다. 첫째는 바이든이 당선해서 월스트리트와 손잡고 오바마 2기 신자유주의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둘째는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해서 지난 4년의 재앙을 더 심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셋째는 바이든이 선거에서는 이기지만 트럼프가 그것에 불복하면서 극우 폭력집단을 선동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혼돈과 대재앙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 모든 게 대안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원하는 대로 상황과 조건을 선택하고 최선의 길만 찾을 수 있는 경우는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법이다. 우리의 의지를 거슬러 주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완벽하지 않은 대안들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런 현실을 함께 견디고 바꿔가야 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그나마 나은 길이라고 여길지 봐야 한다.

 

미국의 흑인과 소수인종,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등은 트럼프의 재선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트럼프의 패배를 기대하고 그것에 안도감을 느낄까? 답은 명백해 보인다. 따라서 미국의 많은 좌파들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바이든에 투표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소식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트럼프가 지금 예고하는 대로 선거불복의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그것을 막아낼 것도 분노해서 거리로 나설 기층 민중들의 직접행동이지 민주당이나 연방대법원이 아니다. 그것을 차악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투표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워드 진은 누굴 찍을지는 투표소에 들어가서 고민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함께 힘을 만들자고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투표보다 사회운동의 건설이고, 그렇다면 대선 이후에도 더 큰 연대와 투쟁을 건설하기에 무엇이 더 나은 전술이고 결과인지를 봐야 한다. 또 바이든이 당선하더라도 단순히 오바마 시대의 단순반복은 아닐 것이다. 오바마와 트럼프를 모든 겪어본 미국 민중들은 이번에는 바이든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믿고 가만히 앉아 손놓고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미국의 좌파는 민주당과 독립적인 좌파적 대안 건설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선을 그으며 독립을 선언하는 깔끔한 결별이기보다는,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민주당 지지자들을 왼쪽으로 끌고오는 지저분한 결별이 될 것이라는 분석과 주장이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실천하는 급진적 흑인 지식인 코넬 웨스트의 입장에 공감한다.

 

민주당이 미국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제도적 수단이 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나는 트럼프 갱단을 백악관에서 몰아내기 위한 반파시스트 연합의 일부로서 바이든에 투표할 것이다. 그것은 바이든이 초래할 신자유주의적 재앙에 대한 지지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민주주의적 실천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방법일 뿐이다.’

 

<더 트라이얼 시카고7>을 보고

 

넷플릭스는 가끔 아주 잘 만든 작품을 선물처럼 던져 주는데 최근에 올라온 <더 트라이얼 시카고7>도 그런 경우다. 이 영화는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68년 반란의 불길 속에 있던 미국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영화의 배경과 내용은 19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반전시위를 위해 모였던 7명의 활동가들이 그 후 재판을 받는 과정이다.(스포 있음)

 

시카고 전당대회는 미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여기에 모인 시위대를 민주당 주정부와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 짓밟았고, 그것은 민주당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미국의 학생들과 활동가들을 급진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의 파장과 상징성이 컸기에 그해 연말에 권력을 잡은 공화당 닉슨 정부의 법무부는 이들 7명을 일종의 소요죄로 기소하고 처벌하라는 지시를 검찰에 내린다.

 

이 지시에 따라 검찰은 이 활동가들을 정부의 폭력적 전복을 음모한 위험천만한 집단으로 몰아가며 마녀사냥한다. 경찰이 반전운동가로 위장해 침투시켰던 프락치들이 수집한 정보와 증언들이 그것에 이용된다. 사법부는 이것을 충실하게 집행한다. 이 과정은 미국에는 민사재판과 형사재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정치재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시대착오적 악법으로 좌파를 표적 처벌하려는 우파정부의 시도, 정치검찰의 기소권 악용, 정보경찰이 조작한 증거, 그것에 협력하는 사법부 - 이것은 박근혜 정부 때의 내란음모 조작과 통합진보당 해산도 떠올리게 한다.(그리고 한국 정치검찰의 조작과 공작은 과거에도 지금도 전방위로 계속되고 있다는 게 나날이 드러나는 중이다.)

 

그 밖에도 영화는 역사를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민주사회를위한학생연합, 청년국제당, 반전시민단체, 흑표범당 등의 운동 단체들이 서로 다른 노선과 방향 속에 갈등하면서도 어떻게 같이 싸우고 또 탄압받았는가의 장면들은 운동에서 연대의 의미를 보여 준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7명에 덧붙여 상관도 없이 억지로 끼워넣어진 흑표범당의 바비 실이 재판 과정에서 당하는 야만적인 처우다. 바비 실은 재판정에서 그야말로 폭력으로 짓밟히고, 바비 실을 돕던 흑표범당의 전설적 지도자 프레드 햄프턴은 경찰 총격으로 처형당하듯 죽는다. 흑인 활동가들은 인종차별에도 맞서야 했고 흑표범당의 방어적 무장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흑백의 기록영상을 중간 중간 삽입해서 당시의 분위기나 경찰의 폭력성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 권위적인 재판부를 비웃고 조롱하는 활동가들의 용기는 아주 재미있고, 마지막에 재판받던 활동가들을 대표한 최후진술에서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모든 병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민주당 문제가 역시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전을 처음에 수행한 것은 민주당의 린든 존슨 정부였다. 시위대가 공화당 전당대회가 아니라 민주당 전당대회로 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반전운동은 전쟁 반대를 말하던 민주당의 케네디나 매카시 후보에게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민주당 후보가 된 것은 전쟁을 지지하던 험프리이고, 대통령이 된 것은 공화당의 닉슨이며, 닉슨은 전쟁을 업그레이드했다. 좌파 활동가 8명을 표적 기소하고 처벌하려 한 것도 닉슨 정부였고, 반면에 재판정에 나와서 활동가들을 방어하는 증언을 한 것은 민주당 정부 때 법무장관이었다. 68 반란이 퇴조하고 나서 이 활동가들의 일부가 나중에 민주당으로 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론 소킨 감독이 미국 대선을 얼마 앞둔 지금 <더 트라이얼 시카고7>를 만들어서 개봉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스티브 원더가 최근 신곡을 발표해서 증오와 불의에 맞선 저항을 호소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사실 지금 조 바이든도 아마 그 자체로 보면 결코 진보적 대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편에 트럼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찍어야 하는 후보로 보여지고 있다. 미국에서 얼마 전 있었던 사전투표는 4년 전보다 몇 배나 높은 참가율을 보이며 몇시간씩 줄을 서서 투표했다고 한다. 지친 아이가 왜 이렇게 기다려야 하냐고 묻자 엄마가 더 이상 흑인이 경찰에 총 맞아 죽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럴 가치가 있다고 답했다는 뉴스는 참 인상적이다.

 

아마도 더 이상 난민이 국경을 넘다가 죽어가지 않고, 더 이상 여성이 모욕당하지 않고, 더 이상 백인우월주의 선동가가 대통령이라고 설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고...’ 등등의 심정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이들을 단지 민주당에 기대하는 한심한 이들 취급할 수는 없다. 이들의 심정과 위기의식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무엇보다 민주당이나 바이든 보다는, 이들 스스로의 용기와 행동이 대선불복의 쿠테타까지도 공개 예고한 트럼프에 맞설 진정한 힘일 것이다. 지금, 볼리비아 민중은 미국이 후원한 우익과 군부의 쿠데타를 1년만에 바로잡고 있다. 타이 민중은 역사상 최초로 군주제에 맞서는 세손가락 항쟁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제 미국 민중이 곧 다시 그것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코로나와 극우파의 음모론

 

얼마 전 미국에서 민주당 소속의 여성 주지사를 납치해서 즉결재판을 하고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며 폭탄과 총기를 준비하다가 적발된 극우민병대는 특히 주지사의 코로나 봉쇄 조치에 격분해서 증오를 키웠던 것이었다. 코로나 위험은 가짜라는 논리였다. 중국과 손잡고 코로나를 이용해서 민주당과 어둠의 세력이 공포를 조장해서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가짜 뉴스와 증오, 폭력,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를 선동한 것은 바로 트럼프였다. 그리고 트럼프가 칭찬해온 이런 극우 음모론자들의 최고봉은 큐어넌그룹이다. 이들은 민주당과 빌 게이츠 등이 소아성애자이며, 아동 식인까지 하는 괴물들인데 트럼프가 이들에 맞서서 하느님의 가치와 미국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종주의 극우파가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펼치며 마스크를 벗자고 선동하며 코로나 방역을 방해하는 집회를 하는 것은 지금 국제적인 현상이다. 지난주 <PD수첩>은 영국과 독일에서도 나치와 극우가 코로나 음모론을 주장하며 봉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광경을 보여줬다. <PD수첩>의 지적처럼 개천절과 한글날에 광화문에 모이려 했던 한국의 극우파들은 이런 국제적 현상의 일부였던 것이다.

 

한국 극우파들(대한민국바로세우기운동본부,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 자유연대, 기독자유통일당)의 논리와 주장도 해외의 그 동류들과 비슷하다. ‘중국, 북한과 손잡은 문재인 주사파 정권이 코로나를 이용해 독재를 꾀하며 공산화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이주민, 난민,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며 차별금지법에 반대해온 핵심 세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그들을 향해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르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말을 꺼낼 생각이 별로 없다. 사회적 강자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소수자들을 증오하고 공격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볼테르의 저 말이 정말 필요한 것은, 한국의 모든 진보정당과 시민사회가 한 목소리로 그 자유를 옹호해야 하는 것도 저들 보다 아직도 감옥에 있는 이석기 의원일 것이다.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는 특수한 형태의 반동적 대중운동인 파시즘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악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사회적 위기의 시대에 분노와 절망을 이용해서 기층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증오에 기반한 폭력적 극우정치가 성장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핵심은 그들의 기반이 되는 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좌파적 대안을 건설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 광화문에서 저들이 가로막힌 것은 정치적 음모나 탄압과도 거리가 멀었다. 주로 코로나 방역 2.5단계 차원에서 이뤄진 일로 보인다. 방역을 위한 격리, 차단, 봉쇄는 분명 자유를 침해하는 측면이 있다. 이것이 선을 넘어서거나 악용될 가능성을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항상 마스크를 쓰고, 수시로 손을 씻고, 모임을 자제하고, 심지어 졸업식과 결혼식과 장례식도 연기하거나 축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대부분 같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아프지 않았으면 하고 살리고 싶은 마음, 힘없고 약한 사람에게 더 가혹한 이 시간을 함께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극우민병대의 납치살해의 표적이 됐던 미국 미시간주 그레첸 휘트머 주지사가 그 소감과 입장을 밝히는 아래 동영상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을 증오하고 살해하려고 한 자들에게 말한다. ‘나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한 친절함과 공감, 품위를 보여달라’. 영어라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수어통역관의 열정적 몸짓과 표정만 봐도 그 용기와 결의가 느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qJZymHL_Wx0&feature=youtu.be&fbclid=IwAR1rI1wZ5lTUDz_9TvnymdmKzbgGLb_1WNdqRhQVNmXx6Jo9MMCg7AqLU1o

 

 

기후 위기와 생태주의

 

"기후와 생태학적 위기는 오늘날의 정치경제 체제 안에서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의견이 아니라 사실이다." "권력자들은 이미 다음 세대에 괜찮은 미래를 물려줄 가능성을 사실상 포기했다." “희망은 정치, 기업, 금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로부터, 당신으로부터, 그리고 상황의 부조리를 깨닫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것은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너무 인기가 없고, 수익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레타 툰베리가 얼마 전 연설한 내용이라고 한다. 정말 급진적이면서도 가슴에 다가오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최근에 한 해외 좌파 쪽에서 그레타 툰베리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봤다. 국제회의에 다니면서 국제기구나 선진국의 정치지도자를 만나서 압박하고 호소하는 것이, 그들의 선한 의지와 양심으로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오는 기만극이라는 취지였다.

 

이러한 과도한 주장을 보니 급진성과 포용성을 겸비한 생태사회주의자인 이안 앵거스가 예전에 좌파의 교조적 태도를 비판한 것이 떠올랐다. 저명한 과학자들조차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주류정치인들마저 그린뉴딜을 말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환영하기보다는, 그것의 한계만을 주목하면서 기만이고 가짜라고 폭로하는데 주력하는 좌파를 비판한 것이었다.

 

소수의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이 견지하던 관념들이 이제 세계 전역의 과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는데, 그런 주목할 만한 발전을 환영하는 대신에 일부 좌파들은, 그 과학자들은 진정한 반자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 그들은 체제 개혁에 관한 환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주력하며 과학자들과 좌파 사이에 벽을 쌓는다. 우리는 위기의 기원, 특징 그리고 방향에 대한 사회생태학적 설명에 있어서 가장 최근의 과학적 발견 결과를 생태적 마르크스주의 분석과 통합하기 위해 이런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좌파가 그런 논의에서 물러나 옆에서 비난만 한다면, 사람들을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아래 남겨 두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안 앵거스는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라는 주장에도 이견을 제시한다. ‘현재 시대가 자본세라면, 이전의 시대는 봉건세, 노예세로 재명명되어야 하는가? 다른 낱말(좌파용으로)을 고집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쟁점들로부터 주의를 멀어지게 할 뿐이다. 바퀴에 집중하고, 색깔에 매달리지 말자.’ 이것은 세계생태론을 주장하는 좌파학자인 제이슨 무어와의 치열한 논쟁과 연결된 문제라서 쉽게 이해나 판단은 안가지만 그 취지는 이해가 간다.

 

전반적으로 앵거스의 취지는 급진적 좌파가 아직 소수라는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이 좌파의 입장과 불일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급진좌파는 그런 사람들과 자신과의 차이를 부각하면서 구별짓고 밖에서 계속 비판거리를 찾는 게 바람직한 일일까? 고립 속에 안정감을 느끼고, 사람들과 자신들 사이에 존재하던 벽이 무너지면 불편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많은 부분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호적으로 대화하고 함께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차이를 부각하기 보다는 작은 공통점이라도 환영하면서 그것을 더 확대하려고 노려해야 한다. 이것이 앵거스가 말하는 취지인 것 같다. 물론 그것은 매우 오래고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은 매일매일 그 자리에 서서 따분하고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다음과 같은 일을 꾸준한 열정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흥미를 가진 사람을 끊임없이 만나고 설득하고, 조금씩 조직을 확장하며, 다음 단계 일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실천하며, 때로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고, 결국 어떠한 성과를 얻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상을 바꾸는 방식입니다.”(노엄 촘스키)

 

인간을 완성하는 돌봄

 

요즘 <가짜사나이>가 인기를 끌면서 다시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 진짜 남자가 된다이런 말이 다시 나오나 보다. 정말과 웃기는 허튼소리다. 정말로 사람이 되는 과정은 대부분 남성들이 잘 경험해보지 않는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돌봄이다. 정신의학자이자 의류인류학자인 아서 클라인먼은 치매에 걸린 부인을 10년 동안 간병한 힘겨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케어>에서 돌봄은 소중하고 숭고하고 신성하고 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인간애의 실존이면서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고, 정신적 성숙으로 인간을 완성하는 일이며, 무엇보다 영혼의 돌봄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단언한다.

 

사실 이 돌봄과 돌봄노동, 가사노동의 중요성과 가치는 주류사회와 학문만이 아니라 좌파적 분석에서도 오래 동안 외면, 간과돼 왔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마르크스도 노동력의 재생산이 요리, 세탁, 보육 등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을 필요로 한다고 것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대부분이 여성들이 무급으로 수행하는 돌봄, 가사노동이 노동력 재생산의 열쇠이며 자본축적에서 핵심적이라는 것을 페미니스트들이 밝혀내 왔다고 지적했다.

 

이런 통찰은 오늘날 작업장 안에서의 상품 생산만이 아니라 작업장 밖에서의 노동력 재생산까지 포괄하면서, 특히 노동력 재생산이 얼마나 국제적인 과정이고 성차별, 인종차별적 위계질서 속에서 수행되는지, 따라서 착취만이 아니라 억압과 차별도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사회적 재생산 이론으로 발전해 있다. 제이슨 무어같은 생태학자도 필요노동 시간과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가치에는 여성들이 수행하는 무급 가사노동이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코로나10 팬데믹은 오늘날 우리가 재생산과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제는 국제기구나 주류학자, 언론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지적한다. 돌봄, 간호, 보육, 요양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영국에서는 주축 노동자’(key workers), 미국에서는 필수 직원’(essential employees)이라고 부른다. 장하준 교수도 최근에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이번 위기를 통해 우리는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기에 전혀 보수를 받지 않는(거의 대부분 여성들이 행하는) 가사 및 육아 노동, 그리고 주로 저임 노동자들이 종사하는 의료(의사는 제외), 양로, 교육, 식자재 생산과 판매, 배달 등을 포함하는, 소위 재생산 경제’(reproductive economy), 혹은 돌봄이 경제’ (care economy)가 사회의 존재와 경제활동의 지속을 위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것인가를 보았다.”

 

문제는 이처럼 소중하고 중요하며 필수불가결한 노동이 대부분 여성, 비정규직,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들이나 가족구성원들(대부분이 여성)에 의해서 수행되면서 저평가 되고 그 책임과 피로, 좌절과 분노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속에서 아이들, 노인들, 돌봄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정말로 힘들고 중요한 일들이 과연 누구에게 떠넘겨지고 있는가.

 

최근에 <서울신문>은 별다른 지원과 관심도 없는 속에서 코로나 자가격리 2주 동안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어야 했던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통을 시리즈로 다루었다. 코로나 이후가 이전과 달라야 할 핵심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돌봄과 재생산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지원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나오미 클라인은 지금 밑바닥에서 혹사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회를 만들 주역이라고 말한다.

 

필수 노동자가 누구인가를 보면 노동계급이고 배달하는 사람들이고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시대에 대한 지렛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그것은 혹사당하는 필수 노동자들에게 있다. 자신과 가족도 돌보지도 못하고 COVID-19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파견된 간호사 등 지금 당장 당연하고 정당하게도 격분한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행동으로 동원할 수 있다면 그 안에 힘이 있다.”

 

(기사 등록 20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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