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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검찰개혁/ 코로나와 장애인/프랑스/볼리비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0. 31.

전지윤

  

사기꾼보다 못 미더운 검찰

 

이번에 국정감사에서 류호정 의원 등 정의당 의원들도 멋진 활약을 보였지만, 윤미향 의원 또한 그 못지않게 많은 기여를 했다. 불안정, 비정규,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인권, 환경보호와 생태보존의 문제 등에서 치열하게 많은 지적과 제안들을 했다. 그러나 이미 보수언론과 정치검찰에 의해서 부정적 낙인이 찍힌 윤미향 의원의 활동은 주요언론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한번 형성된 낙인과 편견이 얼마나 지독하고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이번 국정감사에서 대다수 언론이 주목하고 띄워준 것은 단연 윤석열이었다. 윤석열이 보인 마치 깡패 패거리 두목같은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언론은 열광했다. 품위나 예의라고는 찾기 어려운 윤석열의 마초적 태도에 대한 언론의 호의적 태도는 여성인 추미애의 순순하지 않은 태도에 툭하면 버럭’, ‘오만을 운운하며 공격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개혁의 문제를 -윤 갈등으로 프레임화해서 외면과 짜증을 유도하는 것도 언론의 방식이었다.

 

라임 김봉현의 폭로가 이어지는 지금, 윤석열과 조중동, 국힘당, 진중권 씨 등은 모두 검찰을 못믿고 사기꾼을 믿느냐고 묻는다. 답은 단호하고 명백할 수밖에 없다. 검찰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못 믿겠다! 군부 일당독재 시절에 김기춘이 고문수사와 간첩조작, 인권유린을 하면서 그 뿌리와 뼈대를 만든 게 지금의 검찰이다.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만든 범인이 바로 검찰이다. 용산참사 사건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 게 바로 검찰이다. 서울시 간첩조작 사건의 범인도 검찰이다.

 

내란음모 사건 조작에 함께하고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을 주도한 게 바로 검찰이다. 검찰과 그 수뇌부는 이런 역사를 한 번도 제대로 인정하거나 반성하거나 청산한 적이 없다. 심지어 일부 좌파와 진보지식인들까지 포함해서 이런 검찰과 윤석열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전혀 공감할 수가 없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이런 검찰의 지독한 뒤틀린 역사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별로 나오지 않은 것에도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보수기득권 세력의 핵심축인 검찰이 자유주의 야당과 정치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조작과 탄압에 대한 지적들은 있었다. 그것도 검찰의 중요한 범죄 중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김봉현의 편지에 신뢰가 가는 것은 그런 측면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는 사람잡을 때 눈도 안감기고 산채로 포를 뜬다”, “길가는 사람 아무나 잡아다가도 탈탈 털어 쳐넣어 버릴 수 있다”, “내가 전직 대통령도 뛰어 내리게 만들었다”... 검사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으스댔다는 말을 안 믿기는 어렵다.

 

그 외에도 김봉현이 지적한 것들 - 검사출신 전관 변호사와 검사들이 짜맞추기 수사를 하면서 피의자들이 말을 맞추도록 해주더라, 검찰이 프레임을 짜고 정보를 흘리면 언론은 검증하지도 않고 단독보도와 집중포화를 퍼붓더라, 검찰이 누구는 무혐의 처리해주고 누구는 먼지털이와 별건수사로 집어 넣더라 - 대부분은 우리가 이미 알던 검찰, 언론의 문제들과 일치한다.

 

이미 감찰과 수사로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한 이런 내용들 중에 특히 검찰의 대담함에 혀를 차게 되는 것은 압수수색 정보도 미리 알려줘서 대비시켰다는 이야기와 심지어 라임 김봉현과 이종필의 도피를 검찰이 도왔다는 대목이 있다. 검찰이 펀드사기 주범들의 도피를 돕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체포해서 사건을 조작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펀드사기 사건들은 단지 정치검찰의 실체라는 측면을 넘어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와 금융, 한국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금융화, 국가와 자본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은 자본주의적 축적과 확대재생산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금융은 축적의 추진력이면서 불안정과 위기를 증폭시키는 구실도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금융의 이런 투기적 성격은 더욱 강화됐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IMF 금융위기 때였다. 국제 금융자본의 요구에 따른 IMF 구조조정은 역설적으로 이런 불안정성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역대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규제완화를 확대해 왔다. 특히 자본주의는 이윤율 저하 속에서 생산적 투자가 부진할 때 가공자본에 대한 투자와 투기를 통해서 거품을 형성하면서 탈출구를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결국 거품은 꺼지거나 터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해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좀 더 일반적인 구조와 흐름은 이런 것이다. 저성장, 저금리 시대에 투기적 이윤을 추구하는 금융자본가(투기꾼)들의 요구가 커진다. 친시장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이 자유로운 시장과 투자를 위한 규제완화의 목소리를 높인다. 국가와 자본의 유착 속에서 금융관료들은 투자와 감시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다. 행정사법관료들은 금융범죄에 대한 수사와 처벌에서 법망을 빠져나갈 기술과 구멍을 만들어 준다.

 

이런 바람잡이 속에 금융시장에 많은 돈이 몰리며 투기판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자본가(투기꾼)들의 뒤를 봐준 고위관료들은 퇴직한 후에 회전문처럼 금융회사의 고문과 사회이사, 대형로펌의 전관변호사로 들어가 거액의 연봉을 챙기고 또다시 현직 관료들과 자본가들을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된다. 이들 모두가 사이좋게 배분하는 투기적 이득은 바로 퇴직금이나 평생 모은 목돈을 날린 개미투자자들의 희생 속에 만들어진다.

 

오늘날 줄줄이 터져나오는 펀드사기들의 출발점인 2014년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사모펀드 규제완화도 그런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이것을 주도한 것이 금융위 모피아들이었고, ‘모피아의 대부로 악명높은 전부총리 이헌재가 옵티머스의 고문으로 드러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펀드들을 저금리 시대에 첨단금융상품이라며 광고해 준 것이 바로 주류언론이었다. 옵티머스에 대한 수사의뢰에도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게 중앙지검(당시 윤석열 지검장)이었고, 옵티머스의 변호사는 윤석열의 측근이던 이규철이었다. 남부지검장도 이런 펀드들을 수사하다가 나중에 관련 회사의 변호사로 갔다.

 

이미 <뉴스타파>, <PD수첩> 등은 검찰 특수통(특히 금융범죄조사부)이 금융사기를 수사하고 처벌하기 보다는 오히려 큰손, 현관, 전관들이 얽히고 설켜 뇌물, 향응, 청탁을 주고받는 금융사기의 온상이 돼 왔다는 것을 심층취재해서 보도한 바가 있다. 따라서 이 모든 범죄의 전모를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추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금융적 약탈로 이어지기 쉬운 자유로운시장과 투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금융기관들의 공공적 소유와 통제, 투기적 이윤에 대한 강력한 과세를 추진해야 한다.

 

저금리와 저성장 시대에도 영끌을 통한 갭투자나 동학개미 운동이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와 복지를 통해서 얼마든지 인간다운 삶과 노후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이 아니라 연대와 공존이 필요하다는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 만약, 그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정치적 대안과 요구, 투쟁이 건설된다면, 주식 양도세 기준 3억에 반대하는 청원서명이 20만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회로 전환을 위한 집단적 행동에 수십만이 함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염병의 무게 




지난 주말 저녁에 동지들과 함께 반빈곤 영화제 폐막식과 폐막영화를 보러갔다. 힘든 조건에서도 열심히 영화제를 준비하고 성사시켜낸 분들의 마음과 정성이 느껴지는 폐막식에 이어서 폐막영화는 올해 코로나 발생 초기 상황에서 대구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 <감염병의 무게>였다.

 

영화는 분명 나름의 성과와 장점 덕분에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K방역의 이면, 그 한계와 사각지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초유의 팬데믹 상황에서 대구지역의 장애인들이 감염병에 노출되고 자가격리에 들어가면서 겪었던 일들이 그 내용이었다.

 

혼자서는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이 활동지원사도 없이 혼자 자가격리에 들어간 상황 등을 보여줬다. 침대에서 주방까지 거리가 1미터도 안 되는 방에서 두 사람이 2미터 거리두기를 하면서 2주를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관객과 대화에서 감독이 지적했듯이 이 사회의 방역 방식과 지침이 누구를 기본값으로 해서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를 말해 준다. ‘비장애인 중산층 정상가족이 기준이기에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장애인과 소수자들을 배제한 채로 만들어진 구조와 제도를 가진 사회는, 감염병 상황에서도 그것을 반복할뿐 아니라, 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감독이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 대구에 들어가는 대중교통 안에는 오로지 이주노동자들만 있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대구가 코로나 확산의 진원지가 돼서 모두가 피신하는 상황에서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대구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소수자들이 겪게 되는 감염병의 서로 다른 무게는 여기서도 드러난다.

 

정은경 본부장이 말했듯이 팬데믹의 시대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사는게 아니라 흩어져야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흩어지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흩어질 수 있는 자유와 권리에도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감독은 대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후에 정부와 방역당국이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방역 방식과 지침을 개선하고 일부 제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예산과 인력, 구체적인 실행으로 뒷받침돼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얼마전 삼성 이건희의 사망과 그것에 대한 한국사회 주류와 대다수 언론 등의 반응은 이 사회에서 누구의 삶과 죽음이 더 많은 관심과 공감, 애도를 받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과 죽음은 무관심과 심지어 혐오가 뒤따르곤 한다. 그 무게가 다를 것이 없는 모두의 삶과 죽음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존중되는 세상이 와야 한다.

 

이슬람포비아와 이슬람극단주의

 

지난주에 프랑스에서 무함마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한 교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해서 목이 잘려서 죽고, 그 살해범도 경찰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참담하고 슬픈 비극이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행동한 그 교사의 잘못도 있다는 식으로 물타기할 수는 없는 문제임이 명백하다.

 

미국에서 반인종주의 시위 참가자에게 총격을 가해서 살해한 우익 민병대원의 행동이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였듯이, 그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행동도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잔혹한 범죄였다. 그런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의 피해자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정치적 입장이었는지와 무관하게 애도해야 하듯이, 그런 사건의 가해자도 어떤 유보도 없이 규탄과 단죄를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 소식의 충격 속에서 그 범인이 그 교사를 그런 방식으로 죽여도 되는 악마라고 생각할 정도로 증오하게 된 이유와 배경이 무엇일지 계속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그런 증오와 폭력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왔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주의 선동으로 극우 무장 민병대원들의 폭력과 증오를 부추겼다면, 프랑스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부추긴 마크롱과 주류사회가 그런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느낀 일부 무슬림들 속에서 우리를 모욕하는 저 이교도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극단주의적 대응이 먹혀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 제3세계 출신의 가난한 무슬림 이민자들은 분명 억압받는 소수자이고 억압과 차별의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크롱 정부는 그들을 겨냥한 반분리주의법안까지 추진하며 억압을 강화했다. 이것이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만평을 보여주면서 무슬림 학생들에게 불편하면 교실에서 나가라고 말하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표현의 자유'라고 보기 어렵다. 교실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모욕하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여학생들에게 불편하면 나가라고 하는 게 옳지 않듯이 말이다. 이것은 많은 무슬림들 속에서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증오와 멸시,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울분을 만들어 냈다.

 

물론 마크롱과 주류사회의 억압과 차별이 문제였다는 비판이 결코 그 극단주의 살인범의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누군가를 낙인찍고 모독하고 조리돌리는 수구언론들의 행태가 아무리 문제라고 해도, 그에 대한 보복으로 기자들에게 욕설, 폭언, 협박을 보내는 사람들의 행태가 정당화될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미국에서 극우익 무장민병대의 테러든, 프랑스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살인이든 몇 가지 공통된 교훈을 보여준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 혐오는 어떤 식으로든 증오를 쌓이게 만들고 그것은 비극으로 표출될 수 있다. ,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며 조롱하고 낙인찍는 것을 단순히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어떤 식으로든 개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고 대안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경찰 폭력과 제도적 인종주의가 낳은 분노가 초기에 방화와 약탈 등 개별적 폭력행위로 나타난 바가 있다. 그러나 인종, 젠더, 세대, 지역을 뛰어넘는 거대한 운동이 벌어지면서 이런 양상과 행동들은 많이 줄어들어 왔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르펜과 국민전선과 같은 나치들이 이슬람포비아를 부추기고 있는 가운데, 마크롱뿐 아니라 대부분의 좌파들까지고 세속주의공화주의라는 명분 아래 무슬림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많은 자유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여기에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벌어진 비극을 계기로 마크롱 정부와 프랑스 사회는 일부 무슬림들의 사상을 검증해서 추방하고 무슬림 지원단체들을 강제해산하겠다는 등 무슬림에 대한 억압과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이것이 또 다른 더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볼리비아 민중의 역사적 전진

 

1년 전에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우파와 군부에 의해서 축출됐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와 사회주의운동당(MAS)이 결국 다시 거꾸로 간 시계를 되돌리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볼리비아 원주민과 기층민중의 연대와 투쟁의 결과다. 그들은 군부와 쿠데타 세력이 선거를 계속 연기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자 시위와 행진, 도로 점거와 봉쇄, 파업을 벌이면서 저항했다.

 

결국 선거가 시행되자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가할 뿐 아니라, 선거 결과를 조작하거나 부정하려는 우파와 군부의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투표소 주변에 식량을 쌓아두고 장기농성을 준비하는 결의까지 보였다고 한다.

 

바로 1년 전을 돌아보면 당시에 모랄레스 정부는 부패, 위선, 독재라고 비난받았다. 개혁을 배신하고, 장기집권을 추진하고, 부패 사건에 연루됐고, 선거 부정까지 저질렀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마치 광화문 태극기 시위처럼 우파 대중 시위가 폭력적으로 벌어졌고, 미국의 후원을 받는 우파와 군부, 언론과 관료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모랄레스를 축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모랄레스를 비난하는 대열에는 단지 우파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이거나 진보적인 지식인들도 속해 있었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들도 자주 인용하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무너트리고 있다<위험한 민주주의>의 저자 야스차 뭉크가 있다. 뭉크가 당시에 모랄레스를 비판하던 논리는 요즘 진중권 씨 등의 논리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지식인과 진보인사들의 문제는 개혁정부에 대한 기성언론과 우파, 국가기구들의 비난과 의혹 제기들을 너무 쉽게 믿어주면서 사실로 단정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개혁정부에 대한 불신과 비판에는 분명 부분적 사실에 근거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모랄레스 정부가 개혁에 대한 기대를 배신하고, 기득권과 타협하고, 부패 사건에도 연루되고, 무리하게 장기집권을 추진한 것은 분명 일부분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런 비판과 공격들이 어느 방향에서 제기돼서 누구를 위해,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의 맥락을 못 보거나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는 데 있었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그것은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고 그 싹을 자르려는 극우파와 기득권 세력이 과거로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데 이용됐다. 모랄레스가 얼마나 원칙을 지키면서 일관되게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는가는 핵심이나 본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볼리비아 민중은 일단 1년 전의 쿠데타 결과를 다시 원상으로 돌려놓는데 함께 힘을 합치고 MAS에게 권력을 되찾아 준 것이다. 만약 MAS가 다시 개혁을 약속을 어기고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면서 부패한 기성체제의 일부가 되려고 한다면, 볼리비아 민중의 분노와 투쟁은 이번에는 MAS를 정면 겨냥해서 스스로 그 권력을 회수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그 점에서 모랄레스와 MAS는 이제 더욱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언제나 중요한 것은 구체적 상황과 정치적 맥락이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1년 전 볼리비아 우파와 군부의 쿠데타를 후원했던 트럼프는 지금 선거불복의 쿠데타를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노동조합과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치총파업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당-공화당 양당구조 속에서 권력다툼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역사적 투쟁의 전진이 될 것이다.

 

타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세손가락 항쟁이 10년전 레드셔츠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레드셔츠는 탁신 전 총리에 대한 지지가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레드셔츠 투쟁과 세손가락 항쟁은 모두 억만장자 출신의 신자유주의자인 탁신을 지지하는 한심한 운동이 아니라 왕정과 군부에 맞선 역사적 민주항쟁으로 봐야 한다. 볼리비아와 미국과 타이의 사례는 모두 자유민주주의마저도 자유주의적 자본가들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아래로부터 투쟁으로 지켜지고 전진한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기사 등록 202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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