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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윤석열의 반동/ 난민 문제/ 영화 갈매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9. 18.

전지윤

 

● 드러난 윤석열과 검언정 카르텔의 반동 시도

 

얼마전 기자회견에서 윤석열은 “메이저언론”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과시했지만,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메이저 족벌언론들이다. 또 윤석열은 “재소자”에 대한 편견과 불신을 이용해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뉴스타파의 <죄수와 검사>를 본 사람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믿을 수 없는 것은 재소자가 아니라 정치검사들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범죄자들은 감옥 안이 아니라 밖에 있고, 법 밑이 아니라 위에 있기 마련이다. 볼수록 정치검사들의 행태는 조폭과 유사한데(이들이 조폭을 흉내내는 게 아니라, 조폭이 이들을 흉내내는 것), 김웅의 고백에 따르면 이들은 숨길게 얼마나 많은지 정기적으로 휴대폰을 교체하고 단톡방을 폭파한다. 최근 KBS의 탐사 보도로 이들이 상대를 공갈협박하는 수법도 다시 드러났다.

 

”당신 내가 탈탈 털어서 최하 15년 이상 살게 해줄게. 당신 와이프, 형, 엄마, 내가 싹 다 공범으로 구속시킬 거야. 당신 회사도 전부 탈탈 털 거고 매스컴도 타게 해줄게. 구속 재판만 3~4년 받게 될 거야. 변호사비만 수억 쓰게 해줄게", “어머니까지 조사 받으시게 하는 건 너무 불효 아니냐”, “그런데 엄마 아빠 다 구속되면 애들은 누가 보지?” 조국 가족, 윤미향 가족이 바로 이런 수법으로 털렸던 것이다.

 

윤미향 의원의 아버님은 딸의 부탁으로 쉼터 관리인이 돼서 최저임금도 못받으며 컨테이너에서 먹고자며 온갖 고생을 했는데, 그것이 언론을 통해서 특혜와 부정으로 탈바꿈됐다. 이것을, 부동산 투기로 10억여 원을 벌어들인 자기들 아버지의 문제를 사과는커녕 버럭 화만 내던 윤희숙, 이준석과 그들을 쉴드치는 언론과 비교해 보라.

 

사실 이번에 드러난 ‘고발 사주’ 의혹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국정원과 검찰이 사찰을 통해서 정보를 축적해 나가고, 그러다가 표적이 정해지면 언론이 여론몰이를 시작하고, 분위기가 조성되면 정권 차원의 지시가 내려가고, 검찰이 무자비한 칼을 휘두르고, 사법부는 권력의 입맛에 맞는 판결로 보조를 맞추고... 이런 일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아주 일상이었다.

 

87년 민주항쟁 이후 한국 국가의 성격과 통치 방식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박근혜 시절에 이것은 다시 부활했다. 그 시절에 국정원이 정보를 수집하고, 김기춘이 작전을 짜고, 우병우가 검찰에 그것을 하달하고, 족벌언론이 마녀사냥에 나서고, 어버이연합 등이 시위로 힘을 보태고, 사법부는 알아서 기면서 일사천리로 압수수색, 체포 구속, 유죄 판결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내란음모 조작과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이었다. 당시에도 족벌언론이 쏟아낸 기사들과 검찰의 기소장과 재판부의 판결문은 판박이였다. 당시에 맹활약을 한 공안검사가 바로 이번에도 등장한 국힘당 의원 정점식이다. 그 외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지만, 2016년 촛불이 낳은 정치적 변화와 권력 교체로 이런 방식은 더는 작동할 수 없었다. 검찰 선배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법무장관이 위에서 하달하고 지휘하는 구조는 사라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지금의 방식일 것이다. 정치검사들은 더 이상 정치권력의 하청업체가 아니다. ‘검찰 독립’을 내세우며 이들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짜고, 족벌언론들에 정보와 기사를 흘리고, 오히려 우파 야당과 우익 시민단체들에 업무를 ‘외주화’한다. 그러면 검찰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 시민단체의 고발, 정치권의 요구’에 등 떠밀려 수사에 나서는 시늉을 한다.

 

어떨 때는 ‘양심을 억누르지 못한 검사의 공익제보’에 따라서 수사가 시작되기도 한다. 채널A 사건 때 한동훈이 이동재에게 한 말에 많은 것이 담겨있다. "제보해. 그 내용을 가지고 대검 범정을 접촉해. 필요하면 내가 범정을 연결해 줄 수도 있어. 그러면 손준성같은 친구는 믿을 만한 친구거든. 그러면 정식 루트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될 거 하나도 없고",

 

이번에 최강욱, 유시민, 황희석이 표적이었던 경우가 드러났지만, 조국 교수의 경우에도 같은 방식이 더 거대하게 반복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윤미향 의원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김학의가 빠져나가고 오히려 김학의를 처벌하려던 사람들이 고발당했다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김웅을 통해서가 아니라 윤석열에게서 정점식에게 직접 간 고발장이 더 핵심이고 많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

 

물론 족벌언론과 우파야당은 단지 외주업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에 손준성이 보내고 김웅이 전달한 자료와 국힘당 정점식이 전달한 고발장과 조선일보 등에 실린 기사 내용에 같은 표현과 문구들이 거듭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시나리오의 공동창작자로 보는게 맞다. 더구나 족벌언론은 그 시나리오에 살을 붙이고, 다른 언론들도 끌어들이며 생명력을 부여했다.

 

또 족벌언론들이 떠받드는 진중권 등의 ‘혐오와 조롱 전문가’들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다. <뉴스타파>를 “어용방송”이라고 했던 진중권의 표현은 이번 고발장에도 또 등장한다. 그러나 윤석열이 대선후보로 추대된 과정을 보면 ‘검언정 카르텔’에서 윤석열과 정치검사들이 상당히 주도적인 위치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들의 구상과 야욕은 지금 벽에 부닥치고 있다. ‘재벌-족벌언론-검찰-우파’의 기득권 카르텔은 2016년 촛불을 전후해 겪은 위기와 분열을 벗어나 부활하는 듯 했지만, 여전히 뒷심이 딸리고 있다. 국힘당 내부 인사와 조선일보에서 분리한 뉴스버스가 고발과 보도에 나선 것 자체가 상징적이다. 전통적 우파는 일부 중도층과 청년층까지 끌어들이며 재구성과 재결집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그 과정에서 균열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러나 기득권 카르텔의 힘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추미애 후보의 폭로에 따르면 검찰의 인적쇄신을 가로막고, 윤석열을 비호하는 목소리와 압력은 청와대와 집권여당 내부에서도 제기됐다고 한다. 촛불이 낳은 변화를 중단시키고 되돌리려는 기득권 카르텔, 거기에 굴복하고 타협하려는 자유주의 세력이라는 구도는 여전이 강력하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사건의 본질은 단지 ‘고발 사주’, ‘선거 개입’이 아니고 기득권 카르텔의 민주주의 유린과 촛불에 대한 반동(반혁명) 시도이다. 이것이 주로 자유주의 세력과 민주당 정치인을 표적으로 벌어져 왔으니 ‘저들만의 리그와 다툼’일 뿐이고 우리는 관심을 꺼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최근 민주노총과 택배노조를 표적으로 진행되는 조중동의 허위, 조작, 왜곡, 과장 보도들과 우파 시민단체의 고발, 경찰의 민주노총 침탈과 양경수 위원장 체포에서도 같은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갇혀있는 이석기 의원과 이제는 우리 곁에 없는 노회찬 의원도 이런 방식으로 당했던 것이다.

 

진보정당 의원들, '진보논객'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목소리를 실어주는 족벌언론들을 보면서 우리가 저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유주의 세력과 제한적인 개혁마저 가로막고 공격하려는 기득권 카르텔에게 오히려 우리가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의 온건한 개혁과 타협적 태도조차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기득권 카르텔과 족벌언론은, 역사가 증명하듯이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좌파가 권력에 가까이 갈수록 훨씬 더 야비한 공작과 무자비한 방식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드러나고 있는 민주주의 유린 사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진보좌파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아프가니스탄의 비극과 난민 문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탈레반이 돌아오면서 서방언론과 주류언론들도 난민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여러 이야기들을 한다. 그들이 잘 말하지 않는 것은 난민 문제는 이번에 새로 생긴게 아니라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과 20년 동안의 점령과 전쟁을 통해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아프간을 ‘제국의 무덤’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의 본질은 무엇보다 아프간이 ‘죄없는 민중의 무덤’이 됐다는 것이다. 자원 확보와 지정학적 패권을 노린 강대국들의 침공, 폭격, 점령으로 수십만 명의 아프간 사람들이 죽었다.

 

미군은 마을을 폭격하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했다. 미군 폭격의 사망자 중에 40%가 아동이었다. 어떤 미군은 아프간 사람의 두개골과 절단된 팔다리를 트로피처럼 수집했고, 어떤 미군은 테러리스트라며 잡아간 남자의 항문에 막대기를 꽂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주류언론들은 지금과 같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8월 26일 카불 공항에서 벌어진 ‘이슬람국가-호라산’(IS-K)의 자폭 테러와 며칠 뒤 그것에 대한 미군의 보복 폭격은 지난 20년간 아프간에서 벌어진 일들의 축약판과 같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갈가리 찢겨져 죽은 9명(6명이 어린이)은 이슬람국가도 테러리스트도 전혀 아니었고 무고한 한 가족이었다.

 

IS의 야만성을 규탄하며 미군의 첨단무기가 얼마나 신속 정밀하게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했는지 찬양하기 바쁘던 주류언론들(<조선일보>: “6개의 칼날로 콕집어 때렸다”, “핀셋처럼 제거”)은 나중에 이런 진실이 밝혀졌지만 모른 척하고 있다. 이렇게 아프간 민중은 그것이 누구의 폭탄인지도 모르고 계속 죽어갔고, 난민이 됐다.

 

바로 이런 끔찍한 현실이 탈레반을 부활시켰다. 무자비한 공중폭격과 처참한 난민수용소는 극단주의 세력이 힘을 키우는 토대가 됐다. 따라서 미군은 단지 철수만 할 것이 아니라 전범들을 처벌하고, 20년 동안의 피해를 배상하고, 난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놓아야 했다. 그러나 물론 미국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 전세계 난민의 압도적 부분은 바로 이라크와 아프간 등에서 강대국들이 전개한 ‘테러와의 전쟁’이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에 파병해서 미국을 도왔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책임을 생각해 봐야 한다. ‘미라클 작전’의 성공에 자부심만 느끼기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물론 난민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과 그들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는 마음은 의미있다. 그들을 환대하는 진천 주민들의 태도도 감동적이다.

 

이것을 5백 명의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왔을 때 ‘난민 반대’에 순식간에 70만 명이 서명하며 최고 숫자의 청와대 국민청원을 기록했던 2018년과 비교해보면 더 의미가 깊다. 이번에도 8월 22일부터 난민 반대 청원이 시작되긴 했지만 아직 3만에 그쳤다. 그러나 이것이 일시적이고, 예외적이고, 자족적인 ‘환대’에 그치지 않으려면 한국사회는 더 많은 것을 살펴보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한국 정부의 난민 관련 예산은 총예산의 0.001%도 안 된다. 난민심사관은 전국을 통틀어 4명뿐이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1% 정도에 불과해 99%가 거부되고 있다. 이런데도 정부와 국회는 난민 신청의 문턱을 더욱 높이고 ‘가짜 난민’을 걸러내겠다는 난민법 개악을 추진중이었다. 결국 한국에서 난민들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것은 바늘구멍인 셈이다.

 

‘그래도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와 인연도 없는 낯선 이들을 무조건 다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위험이 될 사람은 거르고 무해하거나 도움이 될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피하지 않은가?’ 이것이 난민을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심리적 장벽이다.

 

그리고 이번에 정부가 그러한 장벽을 피하고자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특별기여자’라고 분류한 것은, 고육지책으로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 벽을 더욱 높이고 강화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고향을 떠나서 꿈을 찾아 온 사람들에게 계속 스스로를 증명하도록 만들 것이고, 우리는 계속 그들을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별하게 될 것이다.

 

말 잘듣고 일 잘하는 사람만 받아들이는 ‘고용허가제’, 출산과 육아를 잘할 여성만 받아들이는 결혼이주제, 우리와 인연이 있고 도움이 될 진짜 난민만 받아들이는 난민제도... 이것은 ‘배타적 환대’이고, 따라서 진정한 환대가 아니다. 위험을 피해서 정든 고향을 떠나 멀리 낯선 곳으로 희망을 찾아 온 사람들에게 벽을 세우는 것은 정말 불가피한 것일까?

 

“오늘날 인간의 이동을 제한하는 군사화된 국경은 신성불가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나 역사의 토대가 아니다. 유럽인들이 자기 나라를 에워싸는 국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세기 전부터다... 국경이 열려 있거나 닫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니야 샤, <인류, 이주, 생존>)

 

● 영화 <갈매기>와 성폭력 피해자의 투쟁

 

지지난 주말에 영화 <갈매기>를 봤다. 김미조 감독이 연출하고 정애화 씨가 열연한 이 영화는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과 투쟁을 다룬다. 피해자가 증인으로 직접 나서야 했던 노동자연대의 손배소송 재판 며칠 전에 이 영화를 봐서 더욱 의미있었다.(이하 스포있음)

 

정말 이 세상에 많이 있을 법한 피해 경험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내 더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의 주인공은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중년여성 오복이다. 오복은 재개발 조합에서도 같이 투쟁하고 있는데, 어느날 조합원들과 함께한 흥겨운 뒤풀이에서 만취하고, 조합의 위원장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처럼 성폭력 그 자체의 고통에 이어서 소문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오복은 고통을 겪게 된다. 당장 남편부터 ‘여성이 응하지 않으면 강제적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말로 등에 칼을 박고, 딸은 ‘얼마나 술을 많이 먹고 다녔길래 그러냐’고 가슴을 후벼판다. 더구나 큰 딸의 결혼을 앞둔 상황이 오복의 입을 가로막는다.

 

수산시장의 동료들에게도 외면받은 오복에게 그럼에도 역시 연대하는 것은 두 딸이었다. 딸들의 도움으로 경찰에 신고한 오복에게 닥치는 것은 이제 성폭력 피해자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법과 제도이다. 경찰은 증거나 증인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피해자에게 모든 것을 떠넘긴다.

 

이 영화가 특히 와 닿았던 것은 이것이 일종의 ‘운동사회 성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산시장 재개발에 반대하는 상인들은 ‘단결’과 ‘투쟁’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일을 하고 집회를 하고 뒤풀이도 한다. 가해자인 조합 위원장은 집회에서 ‘가진 자’들과 용역깡패의 폭력을 규탄하며 ‘누구나 평등하고 인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연설 한다.

 

오복도 그런 집단적 투쟁의 일부였고, 동료들과 잘 어울렸고, 집회에도 열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이 사건화되면서 이제 개인의 아픔은 집단적 단결과 투쟁을 위해 가슴에 묻어야할 문제가 된다. 동료들과 힘을 모으던 집회는 이제 피해자가 가해자를 마주해야 하는 부담스럽고 차마 발길이 가지 않는 공간이 된다.

 

피해자가 믿고 의지했던 동료들은 대부분 등을 돌리고 증언과 도움에 대한 호소를 거절한다. 동료들은 도움을 거절할 뿐 아니라 침묵을 강요하고 공격하기까지 한다. 오복은 가까스로 증언해줄 동료 1명을 구하지만, 증언 당일에 그는 나오지 않고 오복의 기대는 배신당한다.

 

그것이 가장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허름한 집들이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의 저 멀리서 오복이 터덜터덜 걸어온다. 동료에게 매달리며 부탁하던 오복은 증언해주겠다는 말에 연신 허리를 굽히며 고마움에 어쩔줄 몰라한다. 이어서 다시 오복은 좁은 골목길 사이로 터덜터덜 멀어져 간다.

 

운동사회 성폭력에서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고 상처받는 것이 이렇다. 가까웠던 사람들, 믿었던 사람들, 누구보다 정의롭고 이런 일에 나서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 성차별과 성폭력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 언론에 부각되고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에서는 너도나도 나서던 사람, 단체, 언론들이 등을 돌리고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읽고도 답이 없는 문자들, 확인하고도 돌아오지 않는 메일, 기다려도 반응이 없는 사람들... 이런 일들이 쌓이다보면, 돕고 증언해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면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들은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고립돼 있던 피해자에게는 엄청난 힘과 용기가 된 것이다.

 

오복이 원한 것은 단지 사과였다. 폭력으로 상처를 준 사람이 나에게 사과한다는 것은 다시 나를 인간으로 존중한다는 의미가 된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지만, 쓰러진 사람은 손을 잡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해자들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오복의 마지막 선택은 홀로 가해자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철거된 건물 옥상에서 외로이 1인시위를 하던 누군가를 보고 배운 것이다. 이렇게 투쟁은 그 자체로 승리하지 못해도 또 다른 투쟁을 낳는다. 오복의 슬픈 눈을 보면서 또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는 투쟁을 다짐할 것이다.

 

● [광고] 기후위기비상행동 "지금 당장, 기후정의"

 

9월 25일 집중 기후행동의 날

- 대규모 1인 시위, 온라인 집회

"지금 당장, 기후정의"

 

일시 : 2021년 9월 25일 토요일 15:00-16:30

 

2021년 9월, 전 세계에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행동이 진행됩니다. 날로 가속되는 기후재난 속에,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 기업들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Business as Usual)"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의 책임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과 정책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은 9월 25일,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1인시위를 진행합니다.

 

▲한국의 공정한 책임에 부합하는 정의로운 탄소감축 실현과 이를 가로막는 걸림돌 철폐를 위한 의지를 표명하고

 

▲사회체제 대전환을 위한 각계각층의 목소리와 요구를 함께 모아내기 위해 행동을 제안합니다.

 

참여할 수 있는 단체와 개인이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 출입구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합니다. 구체적인 장소는 개별적으로 알려드립니다. 또한 동시간대에 온라인 집회를 통해 각 지역에서 1인시위 참여자들과 연결할 예정입니다. 코로나 방역의 범위 안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1인 시위에 함께 해주세요!

 

신청 : https://bit.ly/2WQHQbt (서울 지역만 신청 가능합니다) 

 

 

(기사 등록 202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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