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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노태우 시절"을 회상한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11. 6.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며칠 전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아마도 머나먼 서울에서 그 "국가장"이 진행되고 있을 것입니다. 불법 정변, 독재, 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에 연루된 사람을 "국가장"으로 보내는 게 도대체 어떤 논리인지 "촛불 정권"을 한 때에 믿었던 사람들이 의아하기만 합니다.

 

결국 "한 통치자는 다른 통치자를 예우한다"는, 통치자 서로 사이의 "카르텔" 논리 같은 것이겠죠? 좌우간, 노 전 대통령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에 돌연히 제가 30년 전에 가본 한국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 때 바로 그는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때의 한국은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과 참 다른 사회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강한 지속성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점을 이야기하자면, 그 당시의, 아직 군사 정권 시절이었던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폭력적인 사회이었습니다. 제가 성장한 후기의 소련도 결코 평화스럽고 비폭력적인 곳이 아니었지만, 군 독재가 아닌 당 독재이었던 만큼 아무래도 일상적 폭력성은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태우 시절의 대한민국에서는... 박노해 시인이 1991년에 잡혀 갔을 때에 24일간 참혹한 고문을 받아야 했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허울 좋은 "민주화" 가면 뒤에는 여전한 국가 폭력의 횡행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1991년 가을, 한국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귀정 열사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고 군에 갔다가 거기에서 의문사를 당한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고 해서 권위주의 통치가 종식된 게 전혀 아니었습니다. 30년 동안 군사 독재를 겪어 온 사회에서는, 여전한 국가 폭력 이외에는 개개인의 위계서열적 폭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학 선배가 후배를 폭행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국가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소사회도 전체적인 폭력성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가짜 학생" (기관 프락치로 의심 받는 사람)을 폭행하면서 "조사"하는 데에 대해서 "권" 일각에서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이었습니다. 체제 반대자를 포함해서 전사회가 병영의 악습을 다 배운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나마 그 때에 비해 인권 감수성이 훨씬 발전된 상황입니다.

 

또 다른 차이는, 그 폭력 속에서도 어떤 '낙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군사 독재(의 막바지)이었지만, 1991년의 한국은 미래를 아직도 기대에 찬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산업 시스템과 국가 시스템이 급속히 확장돼 온 사회인만큼 아직은 "인사이더" 아닌 사람도 국가나 재벌의 "이너 서클"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서울의 명문대 기숙사나 식당에서는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말을 붙여 이야기를 좀 하다 보면 그가 지방 빈농의 자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던 시절입니다. 기숙사에서는 실제로 알아듣기 힘든 온갖 지역 사투리들을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1990년대 초중반은, 가난한 지방 수재들이 "공부만 잘하면" 서울 명문대에 진학해서 그 다음에 사회 상층으로 직행할 수 있는 "마지막"의 시대이었습니다.

 

그런데 명문대 같은 "패스트 트랙"(fast track) 아니더라도 거의 25년 지속돼 온 초고속 성장과 민주화 투쟁의 열기, 88올림픽 등은 사회 전체에 어떤 기대와 희망을 심어준 건 사실입니다. "우리"가 머지않아 더 민주적이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이라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장이 끝나고 끝없는 약육강식의 오징어게임과 신분대물림만 남은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다른 나라 같은 느낌입니다....

 

용이 개천에서 날 수 있었던 마지막의 시절이었지만, 1990년대 초반의 한국도 "두 세계"가 공존하는 나라이었습니다. 대학 교수나 재벌 사무직의 삶은, 이미 구미권의 중산층과는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택 면적은 미국보다 좁고 임금 액수도 미국보다 낮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주택 가격 상승률도 구미권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높았죠. 그들이 이미 1년에 한 두번의 외유를 즐길 수 있었고 국내 리조트를 드나들 수 있었고 아프면 질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아이들에게 미국 어학연수나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대문이나 남대문의 뒷골목에서 만난 영세상인들이나, 구로 공단의 노동자들에게는 "어학 연수"나 "외유"는 그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었습니다. 30년 전의 한국도 철저히 이원화된 경제 구조와 사회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뒤의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그 부분은 더더욱 더 악화돼 이젠 산업화된 세계의 영미권 다음으로 최악의 "격차 사회"가 된 겁니다.

 

좌우간, 노태우는 갔습니다. 그가 고르바쵸브에게 "자선에 쓰라"고 꺼낸 10만 달러가 무엇이었는지 이제 알 수도 없는 것이 됐습니다. 그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KAL858 비극의 진실을, 우리가 과연 언젠가 알 수 있을까요? 6공은 5공의 과거사 정리에 실패했듯이, 우리도 아직도 "노태우 시절"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기사 등록 20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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