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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토왜"라는 언설이 불편한 이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11. 15.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아마도 체질이겠죠? 제게는 민족주의란 대단히 불편합니다. 어떤 민족주의이든지 말씀입니다. 좌파 민족주의 같은 경우에는, 왜 민족주의로 기울였는지를 대개는 이해하고도 남지만, 그래도 그 언설들을 접하면 굉장히 불편한 뒷맛이 남습니다. "민족주의" 속에서 좌파성이 희석화되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 강한 것이죠. 리버럴들의 민족주의는 더더욱더 그렇습니다.

 

예컨대 일각의 한국 리버럴들은 "토착왜구", "토왜" 같은 언사를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보수 기득권층의 식민지 시대 엘리트에의 뿌리, 그 엘리트들의 친제국주의 부역 행각 등을 강조하는 것 자체야 당연 정당합니다. 그런데도 이 "토왜"라는 언설에 대해서는 엄청난 불편함을 느끼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 포괄성의 문제죠. 부역 행위를 일삼았던 식민지 시대 엘리트들이 삼성 이씨나 동아 김씨, 조선 방씨 등의 "물리적인 조상"에 해당되는 것 맞습니다. 즉, 금일 한국 지배층의 핵심적 족벌 중의 몇 개는 분명히 역사적으로 "식민지형 부역 행위"와 연결은 돼 있죠. 그런데 오늘날 한국 지배층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다기한, 복합적인 대상이죠. 예컨대 보수 측의 킹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김종인을 예를 들어봅시다.

 

그의 할아버지인 가인 김병로는 식민지 시대 엘리트이었지만 "부역자"는 아니었습니다.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을 한 때에 변호했던 민족 변호사이었다가, 일제 말기에 여운형의 건준에 가담한 리버럴한 인물이었죠. 나중에 좌우 합작을 지지하고, 국보법 폐지를 주장한 그는 한국 엘리트 치고는 아마도 가장 자유주의적 부류에 속할 터인데, 좌우간 기득권층의 대들보 같은 존재이기도 했죠.

 

그 물리적 후손, 친인척, 제자 등은 지금도 법조계에 많이 포진돼 있습니다. 그들이 "보수 " 맞고 노동자 등 기층민들과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는 것도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정체성이나 지향 등을 "토왜" 같은 프레임으로는 전혀 기술할 수는 없죠. 즉, 과도 일반화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식민지 시대가 끝난지 이미 76년이나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한국 보수에게는 "친일"보다 "친미"의 색채는 아마도 더 일차적일 것입니다.

 

둘째, 무엇이 일차적인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보수 기득권층의 또 하나의 대들보인 동아 김씨의 족벌을 보시죠.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는 비록 쌀 수출로 흥한 지방 땅 부자 집안의 출신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동시에 김인후 선생이라는 조선 중기의 유명한 성리학자의 후손이기도 하죠. 기대승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바로 그 김인후 말입니다. 조선 성리학의 인맥을 이은 사람으로서는 "섬오랑캐"인 일본인들이 뭐가 그리 좋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멸시의 대상이었죠.

 

김성수는 도일 유학을 했지만, 그것도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고 "근대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특히 일제 말기에 아주 태심한 친일 부역을 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해 관계" 때문입니다. 일제 침략 덕분에 본인의 경방 사업도, 동생 김연수가 일제 침략의 현장인 만주에서 벌였던 사업도 너무나 잘 됐던 것입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이들은 일종의 주니어 파트너, 매판적인 토착 부르주아이었지만, 저들의 입장에서는 일제란 일차적으로 "돈벌이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 그 자체가 아니고 일본 제국이 토착 지배자들에게 준 "기회"이었죠. 일본이 아니라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도 않았습니다. 1945년에 일제를 미 제국이 대체하자 오히려 더 신나서 친미 부역을 하시 시작해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토왜"라기보다는 "부 축적"에 살고 죽는 "기회주의자", 기회주의적 부르주아라는 게 더 맞는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만약 내일 중국 군대가 서울을 접수한다면 이런 "까삐탄 리"들이 중국 공산당 입당 원서를 제출할 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라면, 이런 기회주의적 성격을 타고나지 않는 부르주아란 과연 - 특히 세계 체제의 변두리에서는 - 존재할 수 있느냐 라는 거죠.

 

셋째, 가장 고민이 될 수 있는 문제는, 어차피 직업적인 "까삐탄 리"일 수밖에 없는 엘리트가 아닌, 대중들의 제국관 같은 것입니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제국주의적 착취, 징용이나 징병의 "피해자"이었던 일제 말기나 해방 직후에는 "친일파"는 분명 욕 중의 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아시아의 고소득 국가가 되고, 한국 기업들이 이제 동남아시아 등 외국에 나가서 경제적 착취 행각을 벌일 수 있는, "우리도 선진국이 된" 현 시점에서는 과연 어떨까요?

 

친일파의 후손들이 벌이고 있는 친미 행각들은 과연 사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저항을 받고 있나요? 지금 각종 여론 조사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한미 동맹, 즉 미 제국주의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부역 행각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는 90% 정도입니다. 지속적인 미군 주둔 지지는 70% 정도고요. 가끔 가다가는, 일제가 하다가 실패한 일을, 미 제국이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느낌이 들기마저 합니다. 친일은 처음부터 욕이었고 끝내 대중적 기반을 획득 못했지만, 친미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공기" 같은 거죠.

 

미국 제국이라고 해서 흉악한 짓을 안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한국도 종범으로 참여한) 이라크 침략만 봐도 아실 것입니다. 단, 다수 한국인들의 계산으로는, 아무리 딴 데에 가서 흉악한 짓을 해도 한반도에서는 미 제국이 "우리 국민"들에게 실보다 득이 더 많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계산은 궁극에 가서 엄청난 - 어쩌면 치명적인 - 오산으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좌우간 지금으로서는 한국 엘리트와 한국 대중들의 제국관이 과연 그리 다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토왜"보다는 보수 기득권층을 그냥 "보수 기득권층"이라고 지칭하는 게 아무렴 좀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기사 등록 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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