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세상읽기 – 차별금지법/이대남/바이든/총격살해 무죄?

전지윤

 

 

● 차별금지법 국회 앞 농성에 참가하고서

 

얼마전 아침부터 저녁까지 국회 앞 차별금지법 제정 농성장 지킴이를 했다. 농성장에서 자면서 24시간을 지키는 분들도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고, 앞으로도 기회될 때마다 동참해야겠다.

 

촛불 이후에 내가 새정부와 국회에 가장 크게 기대한 것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차별금지법의 제정과 국가보안법의 폐지(관련해 덧붙여 이석기 의원의 석방)였다. 이중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매우 부족한 상태로 제정됐고, 나머지 두 개는 아직도다.(이석기 의원은 8년 넘게 감옥에 있고)

 

차별금지법(평등법)은 국민의힘 대표, 원내대표, 대선후보 모두 공개적 반대 발언을 했고, 현재 ‘당론으로 반대’다. 대선 경선 토론에서도 이 당의 후보들은 온갖 차별과 혐오, 낙인의 발언을 쏟아냈다. 최종 후보가 된 윤석열은 1일1망언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족벌언론들과 많은 주류언론들은 차별금지법에 적대적이거나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로봇 학대’에는 관심과 열의가 넘치지만 차별, 혐오, 학대에 시달리는 소수자들에게는 관심과 열의가 별로 없다.

 

반면, 이 문제에서 민주당이 국민의힘과 똑같다고 한다면 정확하고 공정한 평가는 아니다. 민주당은 당론으로 반대는 아니고 (찬성도 아니지만), 그 당의 일부 의원들(권인숙, 박주민 등)은 평등법의 대표 발의나 공동 발의에 함께했고 노력도 하고 있다.(물론 김진표, 김회재 등은 가로막고 있다) 이재명 후보도 이 법이 필요하고 찬성한다는 입장이기는 하다.

 

문제는 민주당이 180석을 가진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집권여당인데, 계속 국민의힘과 기독교우파와 혐오세력의 눈치를 보고 타협하려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재명 후보가 불평등과 차별을 옹호하는 ‘남초사이트’의 글들을 ‘직면하자’며 공유한 것도 그 연장으로 보였다.

 

아마 민주당은 말할 것이다. ‘저들도 국민의 일부인데 그냥 무시하고 일방강행 처리할 수는 없지 않냐.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고. 완전히 무시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간과 과정’이 너무 오래 질질 끌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너무 많은 소중한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제 기다리던 사람들은 지쳤고 인내심과 믿음을 잃었다.

 

차별, 혐오, 편견 속에 너무 많은 고통이 쌓이고 있다. <오징어게임>에서 희망도 미래도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더 먼저 희생되던 사람들은 여성이고 탈북자이고 이주노동자였다. 이제 더 이상 ‘나중에’는 없어야 한다. 이제 모두 힘을 모아, 민주당이 정말 눈치보고 타협해야 할 것은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마음들이라는 것을 보여줘야만 한다.

 

#차별금지법 #지금당장 #차별금지법연내제정

 

 

● 이대남 현상과 젠더, 계급, 젠더의 교차

 

이번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서 홍준표가 2030 남성들의 큰 지지를 얻고, 윤석열 당선 이후에는 일부 탈당이 이뤄지고, 그렇게 이탈한 ‘이대남’들을 이재명이 흡수하려고 시도하며 ‘남초 사이트’의 글을 공유하는 등의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대남’들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경향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기득권 모두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언제든지 국민의힘을 대거 이탈하고 이재명 쪽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대남’들이 삶의 고통과 희망 없음에 분노하는 것이지 보수적 가치와 방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거듭 말해왔지만, 이것이 ‘맞다, 아니다'는 공방은 헛된 것이다. 지금 상황의 저변에는 둘 모두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홍준표는 명백히 최근에 여론조사에서 ‘이대남’들의 가장 높은 지지를 얻은 정치인이다. 윤석열이나 이재명과 비교해 4~5배나 더 많은 지지율을 보였다. 홍준표가 ‘웃기고, 재미있고, 귀여워서’ 그랬다고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물론 ‘재미’는 이 집단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홍카콜라TV>에 가서 홍준표를 지지한 ‘이대남’들 수십 명이 1분연설을 통해서 이유를 설명하는 ‘나는 홍빠다’같은 영상을 보면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같이 ‘문재인 정부가 중국, 북한, 페미, 민노총에 이끌려 이 나라와 우리의 삶과 미래를 망쳤고, 홍준표는 이 모든 것을 화끈하게 해결해 줄 것’이라며 확신에 차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이것은 새롭지 않다. 이미 청년우파 유튜브들, 청년남성들이 주도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대세가 된 논리와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의 고통 속에 불만과 분노에 가득찬 ‘이대남’들의 중요한 일부를 포퓰리즘적 우파가 나름의 총체적이고 일관된 세계관으로 묶어내는 데 어느정도 성공했다는 것을 뜻한다.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받던 강경우파적 주장을 고집해온 노년 정치인(홍준표)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청년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서, 오래동안 급진적 비전을 포기하지 않아온 버니 샌더스가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을 얻은 것의 뒤집어진 버전이다.

 

그러면 왜 윤석열이 아니라 홍준표였는가? 여기서 우리는 2016 촛불 이후 우파정치 재구성의 두 줄기를 살펴봐야 한다. 한 줄기는 검찰대란(‘조국대전’) 국면에서 등장한, 문재인 정부를 ‘반칙과 부패’로 몰면서 ‘상식과 정의’의 회복을 말하며 중도층을 흡수하려는 흐름이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윤석열, 김종인, 진중권, 금태섭 등이다.

 

또 다른 줄기는 청년남성들의 불만과 분노를 반페미, 반난민, 반중국 등으로 돌리던 흐름으로 하태경, 이준석, 이언주, 홍준표 등이 주도했다. 두 흐름 사이에는 균열이 존재한다. 진중권 등은 스스로 친페미니즘을 자처하며, 홍준표는 검찰대란에 대한 다른 의견 때문에 ‘조국수홍’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균열은 부분적이며 두 흐름의 중첩과 공통기반이 훨씬 더 주된 것이다. 두 흐름은 강조점이 다를 뿐 재구성된 우파의 총체적 세계관 속에 통합돼 있다. 이준석은 국민의힘 대표이고 하태경은 진작 윤석열 캠프에 합류했다. 윤석열 쪽의 서민 교수는 검찰숭배적 입장과 반페미니즘 신념을 융합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 이재명이 ‘남초사이트’에 올라온 반페미니즘적 악선동의 글들을 공유하며 ‘이대남’들에게 손짓한 것은 어리석고 헛된 일이다. 그 이유는 첫째, 홍준표를 지지한 ‘이대남’들의 보수우파적 코어는 이재명 지지로 이동할 리가 없고 결국은 대부분 국민의힘에 흡수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고 고학력인 이들이 주도하는 이 코어에서 이재명은 ‘친북좌파’로 낙인찍혀 있다.

 

둘째, 성평등과 반차별에 대한 이재명의 타협 시도가 ‘이대남’들 중에서 주변적인 일부를 이끌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성평등과 반차별에 진지한 ‘이대남’들과 ‘이대녀’들은 이재명의 지지기반에서 이탈할 것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것이다. 셋째, 천관율 등이 지적처럼 지금의 ‘이대남’ 현상에는 계급문제가 중첩돼 있다.(물론 ‘젠더가 아니라 계급이 중요하다’는 단순해석은 틀렸다.) 따라서 젠더 문제에서의 후퇴는 이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없다,

 

넷째,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기반의 일부가 샌더스의 지지기반과 겹쳤던 것에서 올바른 교훈을 배워야 한다. 샌더스는 페미니즘과 인종주의 문제에서 트럼프와 타협하기는커녕 가장 정면으로 대립했고, 자신의 급진적 계급정치로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을 얻었다.

 

반면 반페미니즘 정치와 타협하면서 ‘저성장으로 기회총량이 줄어든 것이 성별 갈등을 낳는다’며 성장을 내세우는 이재명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급진적 비전을 찾기가 어렵다. 문제는 급진좌파는 이재명만 비판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민주당에 대한 불만을 우파정치에 대한 지지로 표출하는 청년층에 대한 추종은 급진좌파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국학생행진’은 최근 ‘정권교체를 위해서 윤석열도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 내용 속에는 ’민주당이 친북, 친중적‘이다는 전형적인 우파 논리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동을 통해 결국 우파정치에 대한 지지로까지 나아간 경우는 이미 진중권, 김경율, 권경애 등이 보여줘 왔기에 단순 해프닝도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계급, 젠더, 세대는 어지럽게 갈라지고 교차하며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 준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절망, 분노를 포퓰리즘적 우파정치가 파고드는 현상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삶의 고통과 불안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보편적 권리와 평등의 요구, 급진적 재분배라는 좌파적 대안으로 모아내는 성공적인 시도는 잘 보이지 않고 있다.

 

● 바이든의 위기가 보여주는 것

 

최근 미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한국과 비교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트럼프에 대한 반감 속에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바이든이 처음 취임할 때만해도 사람들의 기대감이 컸다. 바이든이 초기에 내놓은 조치와 정책들은 트럼프가 망쳐놓은 것들을 되돌려 놓는다는 것만으로도 환영과 박수를 받았다.

 

특히 바이든이 제시한 3조 5000억 달러 규모의 사회복지 예산안은 그 천문학적 규모로 인해서 루즈벨트의 뉴딜과 비교되면서 기대를 모았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버니 샌더스가 상원 예산위원장이 되고, 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의 지지를 받는 오카시오 코르테즈같은 유색인 좌파 청년여성 의원들이 부각되면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당시에 한국의 일부 논객들은 미국과 한국 상황을 대비하면서 ‘문재인은 뭐하냐’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1년이 채 안된 지금, 바이든의 지지율은 계속 추락하고 있고, 주요 지방선거에서 패배했으며, 핵심 정책과 법안들은 지지부진하고, 사회복지 예산안은 계속 깎이다 못해서 절반 수준으로 축소됐다. 트럼프는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공화당은 내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할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만약 공화당이 승리해서 하원에서 다수당이 된다면, 더욱 바이든의 손발을 묶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역시나 ‘바이든이 너무 왼쪽으로 간 것이 문제였다. 이제부터라도 방향을 조정하고 중도층을 잡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어디서 많은 들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바로 한국에서도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지지율이 정체하고 윤석열에 크게 뒤지는 결과가 계속 나오자 민주당 안팎에서 나오는 목소리들하고도 비슷하다.

 

그러나 바이든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공화당과 기득권 세력의 방해만이 아니라 민주당 내부에서도 바이든의 발목을 잡는 세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바이든의 야심만만한 사회복지 예산안이 반토막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상원에서 조 만친(Joe Manchin) 의원의 반대 때문이었다. 상원은 현재 민주당과 공화당이 50:50인 상황인데 여기서 민주당 의원 1명만 반대해도 공화당의 뜻대로 되는 구조인 것이다.

 

이렇게 키를 쥐게 된 조 만친은 지금 사회복지 예산안만이 아니라 바이든이 약속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의제들을 사사건건 발목잡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재 ‘상원의 왕’이라고 불리고 있고, 바이든은 몇 번씩 그를 따로 독대하면서 협조를 애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조 만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민주당의 성격과 본질을 봐야 할 문제이다.

 

민주당에서 오카시오 코르테즈같이 노동계급 출신이면서 진보적 의제와 차별받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민주당의 주류는 대도시의 고학력 엘리트 출신의 자유주의자들이면서 월 스트리트와 대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또 다른 일부에는 조 만친처럼 공화당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보수파들까지 존재한다.(이런 점도 한국 민주당과 유사한 부분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바이든은 공화당의 반대만이 아니라 민주당 주류의 눈치를 보고 후퇴와 타협을 거듭하고 있고, 대선 때 약속했던 것들은 흐지부지되고 있고, 기대는 실망으로 변하고 있다. 그나마 소신 발언과 행보를 보여주던 오카시오 코르테즈같은 좌파 의원도 얼마전 이스라엘의 아이언돔(무기체계)을 지원해주는 법안에 반대하지 않고 기권하며 급진좌파들의 비판을 받게 됐다.

 

코르테즈는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지만, ‘스쿼드’(Squad: 코르테즈를 포함한 미국 민주당 소속 좌파의원들을 뜻하는 별칭)는 이 투표에서 서로 분열했다. 이 상황 자체가 민주당 내부에서 좌파적 노선과 의제를 형성하고 관철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보여 줬다. DSA 안팎에서도 계속 민주당을 기반으로 활동할 것인지, 아니면 제3의 당을 만들어 분리해 나갈 것인지 논쟁이 더 격해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좌파의 대중적 기반이 아직 충분히 넓지도, 튼튼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분리해 나간다고 당장 성공이 보장될 리는 없다. 바로 이 때문에 그동안 민주당 밖에서 제3의 좌파적 대안을 만든다는 노선은 오랜동안 성공하지 못해왔고, 민주당 내부에서 대선경선에 출마하는 버니 샌더스의 시도가 등장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분명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민주당 좌파는 물론 민주당도 아직 미국에서 변두리 지역의 저학력 저소득 노동자들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인종주의를 선동하는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지지기반을 유지하거나 넓혀가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민주당을 진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만큼이나, 당장 민주당을 나와서 독자적 좌파 정당만 만들면 된다는 이야기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해답은 더욱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만 봐도 미국 상황과 한국 상황, 미국 바이든 정부와 한국 문재인 정부의 유사성은 꽤 있어 보인다. 따라서 문재인도 바이든처럼 좀 잘해 보라던 주장도, 샌더스나 코르테즈같은 좌파가 우리와 다른 선명하고 성공적인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주장도 잘 수긍이 안 가던 것이 사실이다.

 

또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주당을 진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만큼이나, 민주당 안에서 진보적 의제를 추구하는 박주민 등도 전부 배신자이고 변절자라는 이야기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좌파적 노선과 의제가 대중적 지지를 얻어서 물질적 힘으로 전환되는 것이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고정된 정답으로 주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얼마 전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장악한 텍사스주에서 낙태금지법 시행에 반발하는 거대한 규모의 ‘여성 대행진’이 벌어졌다. 여기에 일부 좌파는 ‘이 행진은 민주당과 자유주의자들, 상층 백인여성들이 주도하고 반자본주의적인 성격도 아니다’라고 비판하면서 참가하지 않았다. 반면에 또다른 좌파들은 그 한계들을 인식하면서도 참가해서 연대하면서 비판하고 토론하려고 했다. 이 경우에 후자가 더 나은 대응이었다고 본다.

 

올해 미국에서는 노동자 파업이 공공부문을 넘어서 민간부문으로 확대되면서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 수십배가 넘는 역대급 성장률을 보이고 있고 노조에 대한 지지여론도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바이든 정부의 등장 등이 낳은 이런 의외의 효과를 어떻게 더 확장하고 활용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뛰어난 소수의 선각자가 아니라 다수 대중 스스로의 힘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해야 한다.

 

● 미국 사법부의 끔찍한 판결

 

한국에서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민주시민의 상식에 정면으로 어긋나고 정의롭지 않은 사법부의 판결을 보면서 몇 번이나 분노를 느낀 바가 있다. 그런데 엊그제 미국에서도 충격적이고 참담하고 끔찍한 판결이 내려졌다.

 

지난해 여름에 미국 위스콘신 커노샤에서 백인 극우민병대원들과 함께 흑인인권을 요구하던 시위대를 공격해서 2명을 총으로 쏴 죽인 18세(범행 당시 17세) 백인 청년 남성 카일 리튼하우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진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평등과 인권을 요구하던 많은 이들이 큰 충격과 슬픔을 느끼고 있다.

 

반면에 혐오와 폭력을 부추기며 리튼하우스를 옹호해오던 트럼프같은 이들은 환영과 축하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지난해로 돌아가보면 먼저 있었던 것은 흑인남성 제이컵 블레이크가 어린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에게 7발의 총기난사를 당한 일이었다. 이것은 끝없이 이어지던 경찰 폭력과 흑인 살해의 또 하나의 사례였다.

 

이런 만행은 당연히 흑인들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거대한 분노와 투쟁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지난해 미국에서는 인종주의적 경찰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거대하게 분출해서 역사적 규모로 발전했던 바 있다.

 

트럼프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이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종주의 악선동을 통해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거리로 나가서 폭도를 막아내고 법과 질서를 지키자’고 선동한 것이다. 이것은 백인남성과 청년들이 주도하는 무장한 극우민병대들을 출동시켰다.

 

리튼하우스는 그 치기어린 이들 중에 한명이었다. 그는 ‘폭도에 맞서서 위대한 미국을 지키자’는 사명감에 불타서 반자동 소총을 들고 커노샤로 달려갔다.(아래 사진) 그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외치는 비무장 시위대를 위협했고, 경찰은 극우민병대가 시위대를 압박하도록 사주했다. 경찰과 민병대가 협력 작전을 벌이는 장면이 여러 사람에게 목격됐다.

 

리튼하우스는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시위대를 총격 살해했고 한 명에게 영구적 장애가 남을 치명적 중상을 입혔다. 희생자들은 총을 들고 위협하는 리튼하우스로부터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용기있는 시민들이었다. 지난해 커노샤에서 벌어진 비극과 이번 판결 모두 미국에서 인종주의가 얼마나 뿌리깊은 문제인지, 그리고 트럼프주의가 여전히 얼마나 심각한 위협인지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 흑인은 잠재적 범죄자들이라는 낙인, 유색인 이민자들이 미국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는 편견, 법과 질서를 지키려는 백인들의 총기소유와 사용은 자유로운 권리이고 정당방위라는 허위의식이 뒤얽혀 있다. 미국의 군사화된 경찰과 감옥-산업 복합체는 이것의 물리적 토대로 작동해 왔다.

 

트럼프는 집권 시기에 이것을 바탕으로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면서 지지층을 결집하고 더 우경화시켜 왔다. 기독교복음주의자들과 백인우월주의자, 신나치 등이 그를 중심으로 힘을 키워 갔고, 마지막에 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트럼프는 쿠데타를 시도하기까지 했다.(비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트럼프주의자들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자유지상주의, 혐오, 폭력을 뒤섞은 반동적 칵테일을 만들내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디스토피아를 제시해 왔다. 트럼프는 물러났지만, 이번 판결은 여전히 그 잔재와 토대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미국에서는 기독교복음주의-백인우월주의-군사화된 경찰-트럼프와 공화당이라는 카르텔이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재기를 노리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극우개신교-태극기부대-정치검찰과 족벌언론- 윤석열과 국민의힘이라는 카르텔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부활을 꿈꾸고 있다. 여러모로 우울한 나날이다.

 

(기사 등록 202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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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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