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한국에서 종종 소련이나 북한에 대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이용할 때에 저로서 좀 불편한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물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를 지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1945년 이후 북한 혁명의 지도자들 역시 적어도 관념적으로 '사회주의'를 새 나라 건국의 모델로 지향한 것입니다. 한데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사회주의"라고 했을 때에는 이미 자본의 축적 및 국민 국가의 수준을 훨씬 넘는 (세계적인) 탈자본주의 사회를 함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나 북한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말로 바로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공고화, 그리고 (국가적) 자본 축적의 한 형태라고 할 국가 주도 공업화이었습니다. 즉, 초기 건국 집단의 사회주의 지향, 그리고 아주 많은 소련사 내지 북한사의 진보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를 총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래도 "탈자본주의"라기보다는 고전적인 자본주의를 "대체"한 또 다른 방식의 혁명 이후의 근대화라는 결론을, 솔직히 회피하기가 힘듭니다.
소련의 최초의 아시아에서의 피후견 국가, 즉 몽골의 근현대사를 보면, 이 결론은 더더욱 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몽골 인민들의 상당수가 "사회주의"를 꿈꾼 것은 맞겠지만, 1921년 친소련 정권 성립 이후의 몽골에서 소련이 취해온 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정말 양심에 걸립니다.
몽골의 역사를 보면 많은 측면에서 조선의 역사가 떠오릅니다. 17세기 명청교체 이후 몽골의 귀족들은 조선의 국왕과 마찬가지로 청에 조공하고 청으로부터 형식적인 책봉, 즉 인장 등을 받았습니다. 조선 총사들이 나선정벌에 동원된 것처럼, 몽골의 치릭 (tsirik, 군인)들이 대러시아 국경 경비에 계속 동원됐습니다. 조선보다 청의 조공체제에서 몽골의 위치가 더 중요하여, 몽골어는 청 황실의 공식 언어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한데 1880년대의 양무 운동 과정에서 청은 가면 갈수록 "보편 제국"에서 메이지 일본과 같은 중상주의적인 근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조선에서도 1882년 이후 원세개 등 중국 관료들의 보호에 힘입어 중국의 상공인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어 머지 않아 동순태(同順泰, 1885~1937년)의 담걸생 (譚傑生)처럼 한성의 재계에서 거상으로 군림하게 됐습니다.
나름의 토착적인 상공인 계층이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된 조선에서도 그랬다면, 토착적인 "원자본가 계급" (proto-bourgeoisie)이 거의 없었던 외몽골은 어느 정도이었을까요? 1900년대에 외몽골 인구의 6분의 1 정도 이미 한족 이주민들이 차지했으며 약 7만5천 명 정도 되는 한인 상인, 고리대업자 등이 몽골 유목민의 "땅"을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위협을 느낀 몽골인들은 곳곳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중국인 정착민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일부의 경우에는 그 의병 부대 뒤에 몽골을 언젠가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러시아 제국이 있었던 것이죠.
1911년에 신해 혁명으로 청 황조는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몽골에서 주요 귀족들이 이 기회에 독립을 선포하여 게룩파 라는 몽골과 티베트의 지배적인 금강승 불교 종파의 지도자인 제쮠담바 후툭투를 옹립하여 제정일치의 군주인 복드 칸으로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들이 러시아에 도움을 청원했으며, 결국 러-중 교섭의 끝에 외몽골이 "자치권"을 얻어 사실상 말기 로마노프 제국의 일종의 보호국이 된 것입니다. 그 수도인 우르가 (오늘날 울란바토르)에 러시아 정착민들의 상당수가 들어오고, 그 군대를 러시아 군관들이 양성했습니다.
그 영향 하에 있었던 일부의 몽골인들은 나중에 바로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 부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 사회주의를 이야기하자면 1910년대의 몽골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던, 상당히 러시아화된 진보파의 부랴트인들을 언급해야 합니다. 예컨대 사회주의를 모호하게 지향하면서 몽골계 모든 민족들의 대동단결 등을 꿈꾸었던 부랴트족의 좌파 민족주의자인 체베엔 잠차라노 (Tsyben Zhamtsarano, 1881-1942)는 1910년대 몽골의 최초의 근대식 학교를 열고 최고의 근대식 언론인 <시네 돌리> (새로운 거울)를 발행했습니다.
참, 그는 그 전에 저의 모교인 상트-페테르스부르그 황립대학에서 몽골어를 교수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이미 서구화된 부랴트의 고급 지식인들은, 강제로라도 "아직도 중세적 삶을 사는 우리 동족"인 외몽골 몽골인들을 "초고속 근대화"시키고 싶어했던 것이죠. 그러나 "초고속 근대화"에 외부적 힘부터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외부적 힘"이 생긴 과정은, 어쩌면 소설과도 같았습니다. 1919년, 로마노프 황조가 망하고 혼란에 빠진 러시아가 무대에서 잠깐 발을 뺀 틈을 타서, 중화민국의 북양정부는 몽골의 자치권을 취소하여 그 수도 우르가에 군을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1920년에 상황은 돌변했습니다. 시베라이에서 붉은 군대와 (조선인 유격대를 포함한) 민중 반란 세력의 협공에 반동의 백위군 콜차크 정권이 붕괴되고, 그 백위군의 일부인 웅게른-세른베르그 남작 (1886-1921)의 "아시아 기마사단"은 몽골에 쳐들어 중국군을 패배시켜 몰아냈습니다.
복도 칸으로부터 "친왕"의 호칭까지 받은, 거의 동물적 수준의 반유대주의 (우르가의 모든 우대계 주민들은 그에게 학살을 당했습니다)와 반동성을 그 특색으로 한 "미친 남작" 웅게른은 유목민들을 단결시켜 칭기스칸 제국을 다소 건설한다는, 그야말로 망상적인 "꿈"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칭기스칸 꿈"은 러시아인과 부랴트인으로부터 모종의 좌파 민족주의적 이념을 전수 받은 극소수의 몽골 중산층들에게는 아무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잠재적 후원 세력으로 "붉은 러시아"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25년 4월 17일에 중국 식당 아서원에서 조선 공산당을 창당한 19명 (박헌영, 김찬, 조봉암, 김약수, 윤덕병, 독고전, 홍덕유, 김기수, 김상주, 강달영 등) 중에서는 한 명의 공장 노동자도 없었습니다. "노동자 혁명"은, 결국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혁명에 나선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한데 1920년에, "미친 남작" 웅게른 군이 들어아고 있었던 우르가에서는 노조를 조직, 급진화시켜 투쟁에 나서게끔 할 수 있는 노동자마저도 없었습니다.
차후 몽골인민당 (몽골 공산당)의 중핵이 된 약 15-20명의 창당 주역들의 면모를 보면 하급 라마 출신의 언론인 (닥소믄 보도, 1885-1922), 하급 관료, 사무원 (전보국 종사자), 그리고 중급 직업 군인 (담디느 수해바토르, 1893-1923) 등이 있어도 노동자들을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단, 이 그룹 멤버들의 하나의 공통의 분모는 잠차라노 같은 부랴트 근대주의자나 러시아의 외교관 내지 사무원 등과의 "인연"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계급 투쟁"을 목적으로 했는가요?
글쎄, 웅게른이 중국군을 몰아내기 전인 1920년8월에 그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서명한 이는...다름이 아닌 "봉건 귀족" 복도 칸이었습니다. 계급보다는 (북양 정부로부터의) "민족 해방"은 문제였고, 이 "민족 해방"의 문제 차원에서 "봉건 군주"인 복도 칸은 붉은 러시아라는 가장 유력한 "외부적 조력자"에 연줄을 댈 수 있었던, 그 일부가 아예 라마이기도 했던 중산층 혁명가들에게는 충분히 기댈 수 있었습니다. 몽골의 "사회주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1921년9월14일. "미친 남작" 웅게른의 백위군을 몽골에서 내몬 (사실상 붉은 러시아 장교들이 지휘하는) "몽골인민혁명군"과 붉은 군대의 연합 부대들이 몽골 수도 우르가를 이미 점령했습니다. 복도 칸이라는 신정일치의 군주를 옹립한 새 정부는 일단 "입헌군주제"를 선언하고 중국에 대한 "완전한 독립"은 표방했습니다. 아마도 1921년 몽골 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이 "민족 독립"이었던 것일 겁니다. "민족 독립"을 넘어서 "계급 혁명"으로 가는 것을, 이 시점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유명무실의 군주인 복도 칸은 물론이고, 막후에서 몽골의 새로운 내각을 사실상 직접 지명하고 지휘한 붉은 러시아의 대표자인 외무인민위원회의 시베리아 대표 보리스 슈먀츠키 (조선의 이르쿠츠크 공산당의 후견인이기도 한 인물이죠) 역시 레닌에게 보낸 메모에서 "몽골 같은 후진국에는 입헌군주제와 점차적 개혁만이 필요하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라마로서 제정 러시아의 영사관 부속 학교에서 러어를 익힌 하급 친러파 지식인 출신의 새로운 "혁명 내각"의 첫 지도자인 독소믄 보도 (Dogsomyn Bodoo, 1885-1922) 역시 그가 정중히 모시려 했던 복도 칸 밑에서의 "자주적 민족 근대화" 정도를 생각했습니다.
조선 혁명가들에게는 "1차 민족민주 혁명"과 "2차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두 단계 혁명론"을 가르쳤던 코민테른으로서는, 이런 "점진주의", 즉 사실상의 1당 체제 국가에서의 점차적 근대화 개혁 방향을 지지하는 건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문제는, 새 내각이 표방한 "민족 독립"이란 사실상 러시아 보호국 체제에서는 어디까지나 "허구"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1894-5년 청일 전쟁 결과로 청제국 중심의 조공체제로부터 벗어난 조선이 바로 일제 침략의 대상이 된 것처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몽골은 제정 러시아를 대체한 붉은 러시아의 "보호막" 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혁명의 열정이 식지 않았던,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친구"를 필요로 했던 초기 소련이 몽골에 제시한 조건은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1921년 몽-러 협정으로 몽골이 제정 러시아에 진 5백만 루불의 외채는 전부 탕감되고, 새로운 차관이 제공되고, 러시아 제국의 몽골에서의 모든 이권들이 회수되고 몽골 정부에 귀속됐습니다. 일단 레닌 정부만큼 나름대로 "아시아 약소국에 대한 혁명적 연대주의"를 실천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붉은 러시아는 사실상 몽골의 국정 운영을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약 5천 명의 러시아 "고문관"들이 군을 비롯한 국가 각 기관에 포진됐으며, 특히 군의 경우에는 참모본부 부장 등 핵심 보직을 계속해서 러이사인들이 맡았습니다. 1926년 소련군 부대들이 몽골에서 일시 철수했지만, 몽골군 자체가 소련에 장악돼 있는 상황에서는 이건 큰 차이를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921년의 "민족 혁명"은 지정학적인 완충지대에서는 한 열강에서 다른 열강에의 "종속 관계의 변경" 정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한데 몽-러 관계에서는 또 하나의 변수로 뜬 것은 바로 러시아 "고문관"들의 상당수를 차지한 부랴트 공산주의자들의 "민족 공산주의" 지향이었습니다. 조선과 비교하자면, 북조선 건국 초기에도 약 400명의 고려인들이 파북되어 새나라 건설 과정에서 요직을 맡은 바 있었습니다. 한데 박진순이나 남만춘, 한명세, 최고려 등 1세대 재러 혁명 지도자들이 이미 다 숙청된 판에 파북된 고려인들은 대개 스탈린 체제하에 키워진, 독립적인 정치 구상이 없었던 20-30대의 기술 관료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 리더 격인 허가이가 1953년에 "자살을 당한" 일이 있고 나서 그 중에서는 극소수는 1956년 종파 사건과 같은 형태로 저항했다가 패배 당하고, 다수는 숙청되거나 소련으로 돌아가고, 일부 (방학세, 남일, 박정애 등)는 김일성파에 붙고 말았습니다. "야성"이라고 별로 없는 이들 파북 고려인들과 달리, 파몽 부랴트인들이 제1세대 혁명가로서 그 포부가 아주 컸습니다. "몽골의 허가이"라고 할 엘베크도르지 린치노 (Elbekdordzhi Rinchino, 1888-1938)는, 무색무취의 스탈린 시대 관료인 허가이와 달리 1903년부터 보리스 슈먀츠키의 지도 밑에서 지하 마르크스주의 셔클 생활을 해본 혁명가이자 학자였습니다 (남만춘의 여동생인 남마리야의 남편이기도 했죠. 남마리야는 아주 훌륭한 생물학자였고요).
1921년에 (남마리야와 함께) 몽골에 온 린치노는 - 붉은 러시아 여권을 가지면서도 - 몽골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수해바토르와 함께 몽골의 "수령"이 됩니다. 수해바토르가 1923년에 의문사되자 부랴트인 린치노가 1923-1925년 사이에 사실상의 몽골의 독재자가 됩니다. 참, 복도 칸도 55세도 안된 나이에 1924년에 - 천수를 다하지 못한 채 - 요절하자 린치노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부랴트 지역에서 "부랴트 민족 위원회"를 꾸려 일종의 준 민족국가를 만들어본 린치노의 구상은 참 대담했습니다. 상트-페테브루브르 제국대학 법학부에 다닌 바 있는 러시아와된 부랴트 지식인인 린치노는 불교를 대단히 싫어하고 몽골을 탈불교화시키려 했습니다. 종교를 대체할 것은 "피억압 민족"으로서의 전세계 몽골인들의 대동단결이었습니다. 린치노는 외몽골과 부랴트 자치 공화국, 투바 (우량하이 지역), 내몽골 등 몽골어 사용자들이 살거나 역사적으로 몽골과 인연이 있는 모든 지역들이 하나로 합치는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범몽골 대동단결" 계획을 실현하자면, 일단 린치노파는 몽골에서의 권력 장악을 튼튼히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이해 "탈불교화" 절대 찬성할 수 없었던 라마 출신의 독소믄 보도 총리는 1922년에 그 추종자들과 함께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곧 충살됐습니다. 린치노의 탈불교화 등 급진적 방향에 반대했던 세관 관료 출신의 또 한 명의 혁명 지도자인 몽골인민당 총서기 솔리인 단잔 (Solyin Danzan, 1885-1924) 역시 "친일 간첩"으로 몰려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한데 몽골 시민도 아닌 린치노가 단잔의 숙청 이후에 몽골의 독재자가 된 것을, 몽골인민당의 주된 기반인 우르가의 중상층에게 불만이었습니다. 린치노는 "범몽골주의적" 꿈을 꾸었지만, 몽골의 교양인, 관료 등에게는 린치노는 몽골을 "식민 통치"하는 "소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르가로 코민테른의 대표 자격으로 온 투라르 르스쿨로브 (Turar Ryskulov, 1894-1938)라는 카자흐 혁명가의 입장에서는 린치노의 대담한 구상들도 위험하기도 하고 소련의 외교 정책에 위배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내몽골을 떼내는 것은 중국 혁명가들과의 관계를 망칠 수 있는 등 "파몽 부랴트파"와 소련의 정책적 구상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련은 린치노를 다시 소련으로 소환했으며, 권력은 청나라 시대때부터 관직에 있어온 노련한 관료인 발린긴 체렌도르즈 (Balingiin Tserendorj, 1968-1928)에게 돌아갔습니다.
체렌도르즈의 구상이란 사실 오늘날 몽골 정부의 노선을 방불케 합니다. 대외적으로 그는 다축 외교, 특히 일본과 유럽,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원했으며, 대내적으로 불교 전통의 존중과 혼합 경제, 매우 점차적인 공업화를 지향했습니다. 1930년대에 대숙청의 회오리에 빨려들어간 몽골에서 많은 이들이 체렌도르즈의 시대를 "황금기"처럼 회상했지만, 이런 독립적이고 중도적인 노선을 걷는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외부에서는 소련이 특히 비밀경찰과 군 인사를 쥐락펴락하려고 하는 등 계속해서 인사 정책과 외교 정책에 간섭하고, 대내적으로 공청 (혁명청년단) 출신의 청년 급진파, 즉 소련과 같은 국가 주도의 경제와 강력한 당-국가 체제 건설을 원하는 젊은 간부 후보생들이 그를 "보수파"로 지목해 계속 비판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1930년대 초반부터 급진파의 소장 간부들이 결국 당과 국가의 요직을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는 몽골의 진정한 수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후속 편의 글로 이어집니다)
(기사 등록 202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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