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현실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소위 농업 집단화입니다. 집단화의 논리는 뻔했으며, 그 논리는 그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와도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공업화에 막대한 투자 자본 (와국에서 사들이는 기계의 대금, 건설비, 기술 이전 비용 등등)이 필요한데, 혁명 이후 정권이라면 핵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손쉽게 투자하거나 차관을 공여할 일은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고, 저리 차관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은 공업화 시기의 농업 정책에 있어서는 그냥 도시민들의 물가 안정화를 본위로 하고 농민을 다소 희생시키는 저곡가 정책 정도로 족할 수 있었지만, 소련이나 중국, 북한 등은 아예 농업 부문의 잉여를 모조리 빼내 공업 부문에 투자를 해서 외부의 투자/차관 없는 내포적인 초고속 공업 성장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북한의 경우 토지개혁 이후에는 이미 25% 현물세의 형태로 농촌 잉여의 대부분을 국가가 수취했지만, 1950년대 중후반의 집단화로 농업 집단화로 아예 농촌 잉여의 전부를 국가가 가져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가가 획득한 내부 자원은 바로 1970년대말까지 상당히 높았던 북한 공업 성장률의 뒷받침이 된 것이죠.
그런데 북한의 경우에는 이미 일제말기의 농산물 공출 등이 있어서 "현실 사회주의" 이전에도 농촌에 대한 국가의 관리망이 촘촘했습니다. 거기에다 퇴역 군인 등 정권에 충성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 집단이 농촌을 이끌게 되어서, 농촌집단화에 대한 소극적 저항 (도시로의 대대적인 이주)은 있어도 적극적 저항은 없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달리 몽골 유목민들을 그 어느 국가도 역사상 촘촘히 관리한 적이 없으며, 그 내부에서 정권에의 충성을 할 수 있는 "기간 집단"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몽골에서는 농촌 집단화의 시도는 바로 폭발의 도화선이었습니다.
공청 출신의 초급진적인 젊은 간부 젠겔티인 직지자브 (Tsengeltiin Jigjidjav, 1893-1933)가 1930년에 내각 총리에 취임합니다. 소련의 전례대로 사찰 재산은 국가에 강제 귀속되고, 사기업들이 전면 금지되고 유목민들에게 집단 (hamtral) 가입이 강요됩니다. 그 강요에 저항하여 유목민들이 가축을 도살해, 2년 사이에 몽골 가축 두수는 약 3분의 1이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1932년에 바로 소련의 국경에 위치한 훕수굴 (Khuvsgul)이라는 지역에서 대대적인 농민 반란이 일어납니다.
농민군을 지도하게 된 이는 바로 한 사찰의 주지스님이었던 지매디인 삼부우 (Chimediin Sambuu)스님이었는데, 그 부하들 중에서는 스님 이외에는 집단화 정책이 초래한 파국에 놀란 몽골인민혁명당 당원 출신들도 수두룩했습니다. 반란군이 채채를래그 (Tsetserleg)이라는 지역 거점 도시를 함락시키자 그 주둔병의 10분의 9는 반란군에 합류할 정도로, 정권의 집단화 정책에 대한 불만은 이미 극에 달했던 것입니다. 반첸라마와 연락하여 제정일치의 체제를 복구하려 했던 반란군은 순식간에 몽골 국토 4분의 1을 통제하게 되어 친소련 정권은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수도 울란바토르가 곧 합락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현지의 소련 대표자들이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즉각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한데 스탈린이 "파병하면 우리가 점령군이 되고 중국이나 일본군이 해방군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여 현명하게도 파병을 거절하고, 파병 대신에 몽골 정부군에 기관총과 야전포, 그리고 폭격기를 지원했습니다. 결국 기관총과 공중 폭격으로 정부군이 이기고 농민 반란군이 졌습니다. 몽골 총인구 60만 명 중 약 1만명이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개 계급 투쟁을 역사 진보의 원천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 훕수굴 반란의 경우에는 농민이라는 직접 생산자 계급의 적극 투쟁이 그들에게 위로부터 강요되었던 착취적 정책을 적어도 지연시킬 수 있었던 "계급 투쟁 승리"의 경우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착취적 정책을 강요하려 했던 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그 기치로 내걸었던 것이었죠.
한데 이 반란으로 스탈린이 몽골에 집단화를 강요하다가는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지역에서 "화"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몽골에서의 집단화를 취소했습니다 (1958년이 돼야 몽골 정부는 급기야 집단화를 실시했습니다). 쓸 모가 없게 된 직지자브는 총리직에서 해임돼 좌천됐다가 다음해에 "괴한의 흉탄"에 의문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속된 말로 "팽"을 당한 것이죠. 다음 총리는 벨지딘 겐덴 (Peljidiin Genden, 1892-1937)이라는, 좀 더 온건한 노선의 공청 출신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미 완전한 국유 경제로 진입했지만, 농민들의 저항으로 몽골에서는 겐덴 정권하에서 여전히 민영 경제가 남아 있는 '신경제정책', 즉 혼합 경제가 잔존했습니다. 겐덴은 공청과 당을 통해 초고속 출세를 할 수 있게 된 농민 출신의 간부이었지만, 그에게는 혁명이란 일차적으로 '민족 혁명'이었으며, '민족 문화'의 요체는....맞습니다. 바로 불교이었습니다. 겐덴은 레닌과 석가모니불을 똑같이 존경한다고 맨날 공언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는 민족 독립의 차원에서 적극적 대일, 대중국 외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몽골에서의 소련군 진입을 반대하고, 몽골에서의 소련 고문관들의 "식민주의적 태도"를 질타했습니다. 거게다가 그는 스탈린과의 한 술자리에서 스탈린에게 "니가 러시아의 황제처럼 군림하는 놈!"이라고 욕을 퍼붓고 뺨을 때렸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살아 남았을 리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1936년에 해임되고, 소련에 진료차 갔다가 거기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몽골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서는 스탈린이 일단 "무조건 충성파"를 꽂아야 했습니다. 한데 겐덴의 뒤를 이은 이들도, 아무리 빈민 출신의 공청 내지 당 간부를 거쳐 올라온 "혁명의 신옐리트"이었다 해도, 기본적으로 '민족'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1936-39년 사이에는 몽골의 총리는 가난한 하급 귀족 출신의 독실한 불교 신자 아난든 아마르 (Anandyn Amar, 1886-1941)이었으며, 실권은 그의 부총리인 호를로긴 초이발산 (Khorlogiin Choibalsan, 1895-1952)에게 있었습니다.
아마르는 소련 군대의 몽골 진입 (1937년8월27일)을 반대했으며 피의 숙청에도 반대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소련 군대는 총리인 아마르의 허가 없이 몽골로 들어왔는가 하면, 숙청을 1917년 이전에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식 교육을 이수한, 그리고 스탈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초이발산은 진행했습니다. 초이발산과 함께 숙청을 진행한 이들은 소련에서 파견된 러이사인 비밀 경찰이었습니다. 결국 1937-8년 숙청의 결과로 약 1만7천명의 불교 성직자 (라마)와 함께, 몽골의 상당수 당 간부 등도 죽었습니다.
전통 사회의 엘리트 (성직자와 귀공족)와 함께 신사회 엘리트 (당 간부)의 상당부분은 거의 물리적으로 멸절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 빈 자리를 채운 이들은, 1939년에 아마르를 대신하여 총리가 된 초이발산 '수령'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아주 젊은 새로운 청년 간부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초이발산은 석가모니불 이상의 위인이었던 것이죠. 그들이 초고속 출세를 하게 됐지만, 그 대가는 약 3-4만 명 (그 당시 몽골 총인구의 약 4-5%) 숙청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나는 몽골인데 왜 나를 소련 재판소가 재판하느냐?"라고 소련의 식민주의적 정책을 질타한 아마르 총리는, 해임되고 나서 모스크바에서 재판을 받아 거기에서 총살됐습니다. 동시에 초이발산 총리는 몽골에서의 "무신론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무신론"은 모든 사찰의 강제 철거와 모든 승려들의 총살 내지 강제 환속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면 "사회주의"는?
몽골의 혁명은 애당초에 중국인의 고리대 자본과 토지 잠식 등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했지만, 농민 집단화에 실패한 1930년대 몽골에서 그나마 건설된 공업, 즉 금광이나 석탄광산 등은 철저하게 소련 경제의 수요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한데 종주국 소련에 비해서는 몽골의 "사회주의적 발전"은 더뎌도 아주 더뎠습니다. 아마르가 소련에서 총살 당한 1941년 그 당시 몽골인의 80%는 여전히 문맹이었습니다.
이건 문맹이 거의 청산된 소련보다 차라리 식민지 조선을 더 방불케 했습니다. 참, 식민지 조선은 그나마 마지 못해 1925년에 국립대 하나 (경성제대)를 세워야 했지만, 몽골에서는 1941년에 12개의 고교가 있고 몇 개 전문학교가 있어도 대학 한 군데 없었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으려면 무조건 러어를 익혀 소련 유학 가야 했습니다. 몽골의 경제나 인프라, 교육 시설에 죽어도 투자를 하지 않았던 종주국 소련은, 몽골에서 진력을 다하여 키운 건 단 하나, 바로 몽골군이었습니다. 대일 전선에서 몽골군이라는 보조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죠.
결국 몽골의 혁명은 '민족 혁명'으로 시작돼어 중국에 대한 독립 쟁취에 성공했지만, 대소련 종속 속에서 몽골의 자주적 발전은 거의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멸절을 당한 귀공족과 라마를 대신하여 새로운 관료 계급이라는 지배층이 형성되었지만, 몽골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잉여가 적고 소련은 몽골을 경제적으로 착취해도 투자를 거의 안했던 상황에서 이들이 쟁취할 수 있는 근대화의 수준 역시 그다지 높지 못했습니다. 1941년 그 당시의 몽골은 여전히 종속과 빈곤의 늪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1921년 몽골 혁명의 "쌍두마차"는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이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해방'이라기보다는 '교체'가 된 것닙니다. 과거의 상위 계급, 즉 귀공족이나 고급 승려, (주로 중국인이었던) 부유한 상인 등은 '물리적으로' 궤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귀공족은 거의 생존자가 없었던 듯하고, 승려의 경우에는 일부가 환속되어 군에 징집되는 등의 방식으로 목숨을 간신히 부지했습니다. 1990년 민주화 이후 그런 승려들이 다시 사찰로 돌아가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역사적 거찰인 에르데네 주 (Erdene Zuu)에서는 1991년 현재 승려의 약 절반은 1937년 대숙청 때에 환속해서 겨우 살아남은, 그 당시의 젊은 라마들이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는 그들은 사찰로 '노승'의 자격으로 귀환했습니다. 한데 물리적으로 거의 죽임이나 강제 환속, 즉 신분 강등을 당한 과거의 상위 계층들 대신에 현대식 고등 교육을 받고 당원증을 가진 새로운 간부 계급은 부상했습니다. 간부층은 과거의 귀공족과 고급 승려들이 차지했던 위치를 이제 독점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몽골에서 고등교육기관들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이 간부층의 대부분은 러어를 습득하고 소련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해야만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대학원 이상 재소련 몽골 유학생들의 숫자는 약 1만 명 정도이었습니다. 소련에서는 대한을 나오지 않았다 해도, 적어도 연수 정도는 필수였습니다. 그러면 거의 전부 종주국의 지식 자원과 문화, 상징 자본에 의존해야 하는 새로운 지배층의 정책은 과연 어디까지 "민족적"이었을까요?
일부 다른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민족 공산주의"는 사실 결국 주류가 됐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아예 1960년 이후 소련과 결별을 했고, 북한만 해도 1960년 이후에는 사실상 소련의 영향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도 특히 루마니아와 알바니아, 유고 등은 이와 같은 유형에 속했습니다. 한데 몽골은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가장 강력하게 받았던 불가리아 이상으로 소련 영향의 자장으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소련 영향의 자장"은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적 착취를 의미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소독 전쟁 시절 (1941-5)에 몽골은 그 금 보유고 전체를 소련에 상납하고, 50만 두의 말을 비롯하여 수백만 두의 가축 등을 소련 정부에 바쳐야 했습니다.
소독 전쟁 시절에 그렇게 해서 몽골인들의 "생명줄"인 가축의 두수는 2천7백만 두에서 약 2천만두로 급감한 것이죠. 물론 이것을 "자발적인 기여"로 포장돼 있었지만, 사실은 태평양 전쟁 시절 일제의 그 악명 높았던 "공출"과 큰 차이 없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거부"가 불가능했던, 그런 "기여"이었습니다. 1921년의 혁명은 중국 상인 등의 경제적 착취 행위가 촉발한 인민의 분노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 과연 중국이라는 국가 안에 남아도 이 정도의 착취를 당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민족'에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경제적 착취의 반대급부라도 있었을까요? 아마도 가장 큰 것은 몽골 군대의 '건군'이었을 겁니다. 1945년에 만주 해방 작전에 소련군의 보조 병력으로 참전하여 나름의 전과를 올린 몽골 인민군은 일단 그 규모상 적어도 6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습니다. 몽골 총인구의 약 8-9%가 상비군에 징집돼 있었던 건인데, 이건 오늘날 북한 이상의 군사화의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한데 이 몽골군은 기마병만 보유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제 76.2 및 122구경의 야전포와 경전차, 그리고 폭격기 및 전투기 등 공군을 보유한, 현대화된 군이었습니다.
이런 '대군'을 키운 것은 단순히 스탈린의 지침에만 의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의 가장 충실한 제자"를 자임했던 초이발산 원수는 실제로는 김일성 만큼이나 민족주의적인 포부가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몽골에서 일제가 세운 괴뢰 '몽강연합자치정부" 등이 무너진 뒤에 내몽골, 그리고 나아가서는 과거에 몽골 귀공족들이 청나라를 위해 지배했던 투바 (Tuva) 등이 몽골로 '귀속'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일제가 세운 괴뢰국이 무너진 뒤에 내몽골에서는 잠깐 내몽고인민공화국 (內蒙古人民共和國)이 선포되는 등 민족 독립(과 몽골에의 귀속)에의 움직임들이 없지 않았는데, 중국 국민당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중국 공산당도 이를 결사 반대했습니다. 소련은 내몽골의 문제에 있어서는 몽골이 아닌 중국 공산당의 손을 들어주고, 투바는 이미 1944년에 소련에 합병된 관계로 그 지역의 몽골에의 귀속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초이발산이 신강도 몽골인인 준갈민족의 옛 고향으로 인식하여 1940년대의 신강 이슬람 교도들의 분리 독립 운동을 지원했는데, 이건 결국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스탈린의 가장 충실한 제자" 초이발산은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거기에서 1952년 벽두에 의문이 많은 병원에서의 최후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내몽골과 투바 등 "몽골인들의 모든 땅"을 하나로 모이려는 그의 "민족적 대야망"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계급"의 차원에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대두되고, "민족"의 차원에서는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었던 몽골 초기 혁명자들의 범몽골주의적 꿈들이 산산조각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몽골에서의 '현실 사회주의'는 예컨대 북한이나 불가리아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공업의 개발, 즉 산업화의 효과라도 가져다주었는가요? 즉, 적어도 성공적인 ("적색") 개발주의 역할이라도 했던 건가요? 아쉽게도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러시아에서 아마도 인정하기를 꺼리겠지만, 1950-80년대의 몽골 경제는 사실 비공식 식민지 경제의 전형이었습니다. 레닌의 정의대로라면 식민지란 무엇인가요? "원재료 공급 지역이자 공업재 및 완제품의 포획 시장"이지요.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그들이 몽골에서 운영한 경제는 레닌의 이 "식민지" 정의에 완벽하게 틀어맞았습니다.
1974년에 소련이 지은 거대한 에르데넷 (Erdenet) 동광산 (구리, 몰리브덴 등 채굴, 생산)의 경우에는, 몽골을 관통하는 모스크바-북경 철도의 몽골 구간 등과 함께 애당초부터 소련의 자산이었고, 소련 경제에 필요한 구리 등을 공급했습니다. 1984년이 돼야 몽골에서의 반소련 정서의 확산 등을 우려한 소련은 드디어 이 광산과 철도의 자산 가치 절반을 몽골 정부에 이양했습니다. 몽골 경제는 에르데넷 광산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제철소와 정유소를 정말로 필요했습니다.
한데 소련은 끝내 몽골에서의 제철 및 정유 시설의 건설을 불허하고, 소련제 철강 및 석유의 구매를 강요했습니다. 몽골은 동구나 북한에 비해 훨씬 더 공업화됐고, 몽골의 원재료를 소련이 싼 값에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몽골에 소련이 강요한 육류 수매 가격은 소련 내부 가격보다 3배나 낮았습니다. 몽골의 값싼 원재료는 소련의 고도의 산업화 등을 뒷받침했던 하나의 기반이 된 것이죠. 결국 이런 구조적 착취와 만성적인 가난, 개발의 부족에 대한 분노는 1990년에 몽골에서 민주 혁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결론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몽골에서의 '현실 사회주의' 성적은 다소 초라했습니다. 지배 계급의 교체는 이루어졌는데, 매우 폭력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대몽골"의 민족주의적인 꿈은 좌절됐고, 결국 소련과의 관계는 전형적인 '식민지'에 가까웠습니다. 소련은 몽골의 매장 자원과 육류 등을 착취, 수탈하면서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으며 몽골에 투자다운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1990년데 이르러 몽골의 1인당 국민 총생산은 약 미화 1천600백 불로, 소련의 4분의 1도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난과 대외 종속, 수탈에 대한 분노는 1990년에 민중 혁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향후 '대안 사회'를 지향하자면, 과거의 이와 같은 쓰라린 경험을 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비/탈자본주의적 미래를 건설하면서 자본주의적 식민주의 등을 사실상 그대로 복제한다면 이건 '대안 사회'에 대한 꿈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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