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제

[박노자] 우즈베키스탄의 탄생 – 2, 3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11. 28.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앞의 글에서 이어짐 

"주변"으로부터 본 소련의 건국사 (우즈베키스탄의 탄생 2)

부하라 칸국은 약 1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약 5-6백만 명의 주민을 통치하는 러시아 제국의 보호국이었습니다. '보호국'이란 독립적 외교 등을 할 수 없어도 기초적인 국가 주권을 원칙상 여전히 보유하는 나라입니다. 부카라의 절대 군주인 세이드 알림칸 (Said Mir Muhammad Olimxon, 재위 1911-1920)은 러시아 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소 "개화 친화적인" 통치자이었지만, 그가 허용한 개화 정책 (일부 세속적 사립 학교 설립 허가, 민간 신문 및 잡지 출판 허가 등)은 자디드당 등 "강경" 개화파의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1917년 혁명 이후에는 일부 자디드당 소속의 지식인들은 급진화되어 지하 부카라 공산당에 입당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데 1919년 현재 입장자는 약 900명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 교육을 받은 부유한 상인 출신 중심의 자디드당 지지자은 많아야 약 4-5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1910년 한일 "합방" 직전까지 박은식 등 온건 개화주의자들이 고종 등 황실을 대한제국 국권의 보루라고 생각하고 공화주의 사상을 멀리했듯, 근대화에 관심 있는 상당수 부하라인들에게도 세이드 알림칸은 어쨌든 "우리 나라 주권"의 상징이었습니다. 한데 러시아 정착민 볼셰비키들에게는 그는 그저 "무지한 현지민""중세적 방식"으로 통치하는 과거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충실한 피후견인"에 불과했습니다. 정착민 볼셰비키들의 지도자는 표도르 콜레소프는 일단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19183, 자디드당의 급진파인 "청년부하라당", 콜레소프의 제안에 따라 혁명위를 구성하고 약 200명 정도의 혁명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한데, 그 당시 부하라에서는 보수파인 종교 학교 (메드레세)의 재학생만 해도 약 34천명 정도였습니다. , 볼셰비키들과 손을 잡은 급진 개화파는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이죠.

개화파의 혁명 시도는 성공적일 리는 없었고, 그들이 기대를 걸었던 것은 전부 슬라브계 정착민으로 구성된 약 1천 명 정도의 콜레소프의 군대였습니다. 한데 콜레소프의 군이 공격을 하자 세이드 알림칸이 이를 "외세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부하라 주민들을 총동원했습니다. 다수의 부하라 사람들에게는 슬라브계 공격자들은 "이교도"이자 "침략자"이었던 것이죠. 결국 콜레소프의 군대는 절대적 병력 열세로 패배를 당하고 후퇴를 했으며, 부하라 주민들은 부하라 영역내에서의 슬라브계 정착민들을 거의 전부 살해하거나 추방시켜 놓았습니다.

갑진 정변 이후의 조선에서도 그랬듯이, 개화파 격인 자디드당도 마녀사냥을 당해, 15백명이 죽임을 당하고, 8천 명 정도 쫓겨 났습니다. 결국 "외세"를 맹신하고 "외세"의 공격에 올인을 했던 개화파의 전략이 "자충수"가 된 것이죠. 한데 세이드 알림칸 역시 볼셰비키군의 대포와 폭격기에 부하라 군의 구식 소총들이 궁극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18325일에 키질-테페 (Kizil-Tepe)역에서 콜레소프와 화친을 맺고 부하라 군의 규모 축소 (12천 명까지) 및 볼셰비키를 반대해 들고 일어난 각처의 보수주의적 의병 부대인 바스마치 (basmachi)에 대한 협력 중단 등을 약속했습니다. 부하라의 군주는 부라하 혁명 세력이 아닌 정착민 군대의 무기를 두려워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세이드 아림칸이 모스크바에 사절단을 보내 레닌 정부와의 장기적인 공존을 모색하는 등 일단 "온건 노선"을 걸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붉은 군대의 무기 차원에서의 우세때문만이 아니라 부하라 경제의 종속성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부하라는 러시아에 연간 45백만 루블 어치의 목화와 카라쿨 (모직물) 등 원자재를 수출했으며, 러시아로부터 완제품을 구매하곤 했습니다. 이 종속 경제 구도 속에서 매판 자본의 역할을 했던 부유한 상인들은 바로 개화파인 자디드당의 사회적 배경이기도 했습니다.

한데 레닌 정부의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경쟁 열강인 대영제국에 손을 내밀 수 있었던 부하라의 군주는 "신뢰할 수 없는" 피후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독립국에 대한 침략을 하지 않는다"는 대원칙과 무관하게 레닌은 1920824일자의 전보로 부하라에 대한 공격을 최종 결재했습니다. 물론 형식은 "부하라 혁명에 대한 형제적인 방조"이었습니다. , 부하라 공산당이 먼저 혁명위를 구성하고 "지원 요청서"를 보낸 것이죠. 하지만, 이 거사 계획을 미리 짠 것은 미하일 프룬제 (Mikhail Frunze, 1885-1925)라는 중앙아시아에서의 붉은 군대 총사령관이었습니다.

1920825일로 전투가 개시됐는데, 부하라 함락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5일만에 붉은 군대는 약 200명의 전몰자를 내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부하라군은 사력을 다 해서 "이교도"와 싸웠으며, 그 고향을 그야말로 "사수"를 한 것입니다. 한데 붉은 군대는, 부하라군이 보유하지 못한 특별한 무기인 폭격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831일 세계 문화 유산 격인 부하라 중심의 폭격이 개시되며, 11기의 폭격기는 약 200정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부하라 시내에서 엄청난 화재가 일어나 약 6천 명의 민간인들이 화염 속에서 희생됐습니다.

91일에 붉은 군대의 대포들은 약 12천정의 포탄을 발사해 부하라의 상당부분을 파괴했으며, 이와 동시에 붉은 군대의 보병은 도시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붉은 군대의 일부 포탄에는 독가스가 들어 있었는 등 그들이 소총밖에 없었던 도시를 상대로 해서 화학무기까지 이용한 것입니다. 종교 학교 학생 등은 결사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뻔했습니다. 붉은 군대는 도합 약 6백명의 병력 손실을 보면서 부하라를 점령했습니다. 반대쪽의 손실은 수천명에 달했고, 세이드 알림칸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이드 알림칸은 - 레닌의 예상대로 - 거기에서 대영제국 당국에 연락을 취했지만, 영국은 그에 대한 일체 협력을 냉정히 거절했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중앙아시아는 일단 러시아나 그 후속 국가 (소련)"식민지"였고, 그 식민지 문제에 개입할 경우 러시아나 그 후속 국가는 인도 문제에 개입하는 등 영국부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탈식민적 입장에서 본다면 부하라 점령 작전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요?

점령 이후에 부하라인민소비에트공화국이 선포되고 표면상 자디드당 지도자들이 주요 장관직 등을 가졌지만, 그들은 실질적으로 어디까지나 "하위 동반자"에 불과했습니다. 총지휘권은 러시아 정착민 볼셰비키들과 붉은 군대의 현지 사령관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지만, 결국 러시아인의 힘을 빌어 "개화"를 이루려 했던 현지 개화파와 정착민 출신의 볼셰비키 당원들의 연합은 실질적으로 제정러시아 시절보다는 부하라 등을 훨씬 더 강력하게 러시아/소련의 중앙정권에 복속케 한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러시아 정착민들이 결정권을 가진 데에 대해 자디드당 출신의 우스만호지 불라트호자예프 (Usmonxoʻja Poʻlatxoʻjayev, 1878-1968) 등 초기 부하라인민소비에트공화국의 일부 장관들이 불만을 품고 바스마치, 즉 반소련 의병의 편에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부하라인민소비에트공화국 등 우즈벡인들이 다수를 이룬 지역을 통합해 1924년에 만든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공화국은 분명히 개화, 즉 근대화를 강하게 지향했지만, 모스크바의 지휘권을 절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간판은, 급진적이며 대안적인 근대 사상의 내용을 일부 반영한 방식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만큼 꼭 "거짓"만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식민지 지배의 패턴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변"으로부터 본 소련의 건국사 (우즈베키스탄의 탄생-3)

소련에서 살면서 한 가지 피할 수 없었던 경험은, <사막의 태양> (Beloe solntse pustyni, 1970)이라는 영화를 보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북한의 <피바다> (1969)<명령027> (1986)처럼, 소련에서는 누구나 보게 돼 있는 "국민 영화"였습니다. <피바다>"혁명의 역사"를 주제로 했고, <명령027>는 전형적인 무술액션이었지만, <사막의 태양> 같은 경우에는 "혁명의 역사"를 다루면서 장르적으로는 서부활극을 본딴 "소련식 웨스턴"이었습니다. 그런 장르를 종종 "이스턴" (동구식 서부활극)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고전적인 서부활극은 "카우보이와 인디언" 사이의 전투신을 그 주요 내용으로 삼는데, <사막의 태양>의 내용은 1920년대 초반 중앙아시아에서의 붉은 군대와 바스마치 (basmachi; 우즈벡어로 "도적") 사이의 전투를 다루었습니다. 내용은 즉, 제대와 귀가를 앞둔 붉은 군대 군인 수코브(Sukhov), 옛 러시아 군대의 장교이자 세관 공무원이었던 베레차긴 (Vereshchagin)등과 연대하면서 바스마치의 두목인 압둘라와 싸워 결국 압둘라를 사살하고, 압둘라의 처첩 등 여성을 구해주고 동시에 바스마치의 피해자가 된 일부의 토착민들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전형적인 서부활극에서는 인디언이 빌런이고 카우보이나 세리프는 그 빌런들을 제안하는 설명인 것처럼, 여기에서는 "착한 백인"이라고 할 붉은 군대 군인과 과거의 제정 러시아 군인은 토착민들에게 "구원 천사"가 되고 "여성 보호"도 해주면서 "빌런""나쁜 토착민"을 징벌하는 설정인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의 소련에서 "탈식민 비평"이라는 걸 들어본 적도 없는 평범한 소련 청소년인 저로서도, 이 설정은 왠지 모종의 식민성의 악취가 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서부활극을 본 적도 있고 해서 <사막의 태양>에서의 붉은 군대 군인 수코브가 사실 서부활극의 세리프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쉽게 눈치챌 수도 있어 "왜 미제와 싸운다는 우리들은 미제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답습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이 영화의 "빌런"역인 바스마치들이 궁금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때문에 필승의 붉은 군대에 도전하는, 이 무모한 일을 왜 했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나중에 중앙아시아인들을 만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스마치"는 자칭이 아닌 타칭이었습니다. 바스마치, "도적"이라고는, 그 상대자들을 붉은 군대가 불렀던 것인데, 그게 마침 의병 토벌에 나선 일군이 의병들을 "폭도"라고 멸칭한 것과 같은 선상이었습니다. 물론 의병들이 스스로를 의병 내지 근왕병이라고 보는 것이었지, 절대 스스로를 "폭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에서 1910년대말부터 아예 1942(!)까지, 20년 이상 활약한 바스마치들은 스스로를 "무자헤딘", 즉 신앙의 투사라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의 거사를 "의거"라고 생각하고, 붉은 군대의 폭격기와 대포에 소총만 든 채 맞서는 이유는 "향토와 신앙의 사수"이었습니다. 1909년 일군의 "남한대토벌" 때에 그들의 최신의 무기에 죽은 조선 의병은 17779명이었다면, 붉은 군대의 야전포와 기관총에 도저히 대응하기 어려웠던 바스마치들의 병력 손실 규모도 비슷했습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1921-22년만 해도, 적군인 붉은 군대 측의 잡계로는, 바스마치들은 적어도 1만 명의 사망자와 약 4만 명의 부상자 등을 낸 것이었습니다.

"바스마치 진압", 즉 토착적인 저항 운동의 진압이 20년 넘게 진행됐기에 저항자 측의 총 병력 손실을 약 10만 명의 사망자 정도로 평가하는 사학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특히 바스마치 운동이 활발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에는 붉은 군대는 중앙아시아에서는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조선보다 훨씬 넓은, 광활한 영토에 또 매우 다양한, 유목민 등을 포함한 주민 집단들이 살고 있었기에 바스마치들이 조선의 의병들보다는 훨씬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가 조선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의병들의 이념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유인석 (1842-1915)과 같은 극도로 보수적인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의병장들도 있었지만, 왕산 허위 (許蔿 , 1854-1908)의 경우 평리원 재판장 등 개화파 관료 생활을 하다가 근왕병 성격의 의병을 일으킨 관료도 있었고 홍범도 장군과 같은 전설적인 평민 의병들도 있었습니다.

바스마치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소련 정권에 손 잡았다가 실망한 개화파 출신과 종래 부족장이나 법조인, 관료 출신, 그리고 일부 평민 출신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붉은 군대는 그들을 싸잡아 "범죄자" 취급했지만, 사실 그들 사이에는 직업적 강도 등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망한 개화파 부류의 가장 유명한 바스마치 지도자는 터키 출신의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 (Ismail Enver Pasha, 1881-1922)이었습니다.

터키 청년당의 지도자로, 1차 세계대전 때에 터키를 통치했던 3명의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아르메니아인의 제노사이드 등 상당수 전쟁 범죄에도 책임 있었던) 엔베르는 터키의 패전 이후에 1920년부터 소련에서 활약하면서 부하라의 함락 이후에 부하라 소비에트 정부의 고문관 지격으로 부하라에 파견됐습니다.

처음에 소련 정부의 협조를 얻어 대영제국에 맞서 이슬람 지역을 해방시키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가졌던 엔베르는, 내전 종식 이후 소련 정부와 영국이 점차 관계 복구에 가까워져가고, 부하라에서는 토착민이 아닌 러시아인 간부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는 데에 실망하여 "결국 소련도 식민주의 국가"라고 결론지어 1922년에 바스마치 진영에 넘어갔습니다.

소련 정부는 그의 명망성 등을 감안하여 그에 대한 제거를 최우선시하여 결국 같은 해 84일에 그를 전투에서 사살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일종의 사회진화론적인 세계관을 갖고, 터키 계열의 민족들을 하나의 근대 국가 틀로 묶고자 했던 엔베르는 정확히 국가주의적 계열의 개화파에 가까웠지, "도적""종교 광신도"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숫자로 따져보면 바스마치 지도자들의 다수는 "근대주의자"보다 절대 군주권 시대의 관료 출신으로, 근왕병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이브라힘베크 자카바예브 (İbrahimbek Çaqabayev, 1889-1931) 같은 부하라 바스마치 지도자이었습니다. 부하라국의 독사보 (대령)급 장교 출신으로서는, 이브라힘베크는 자디드운동에 반대하여 절대왕권 밑에서 그가 속하는 우즈벡 부족이 과거와 같은 삶의 방식을 영위할 수 있길 원했습니다.

그는 1920년의 부하라 함락 이후에는 "복벽"을 그 운동의 목적으로 정하고, 1921년 이후에 그 근거지를 인접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 부하라, 그리고 그 뒤에는 우즈베키스탄 영토로 매년 월경 진공을 하곤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국내 진공 공작은 19313월에 이루어졌는데, 붉은 군대의 장비 등이 우세해서 그가 그해 623일에 생포되어 곧 비상재판소에 회부돼 사형을 받고 처형됐습니다.

그 관련의 보고건들을 종종 작성했던 영국 첩보기관들도 그를 "극도로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했는데, 과연 그가 10년 넘도록 활약을 하고, 이미 우즈베키스탄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공고화된 1931년에 국내 진공 공작을 시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즈백 농민들의 엄청난 불만을 산 스탈린 지도부의 소위 "농업 집단화 정책"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이용해 대중적인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의도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 극도로 보수적인 과거 관료 출신의 바스마치 지도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활약한 이유는 결국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의 소비에트의 정책이 현지만들의 어떤 민주적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경우 현지민들에게 가혹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농업 집단화"는 러시아에서도 농민 반란 등에 점화를 했지만, 특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이는 단순히 "농민으로부터 빼앗은 잉여에 의해서 공업화를 촉진하는", 즉 농민들을 공업화에 희생시키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인 ("모스크바"/"슬러바 정착민") 권력에 의한 강압적인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책에 직면한 일부 우즈베키스탄 민중은 보수적인 관료 출신들의 복벽 운동에 호응할 정도로 반소적인 정서가 강했다는 것이죠. 만약 중앙아시아에서의 소비에트 정권에게 식민주의적 특색이 전혀 없었다면 이와 같은 저항 운동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진행될 수 있었겠습니까

(기사 등록 2025.11.28)   

* '다른세상을향한함께읽기와열린토론' 참가자 모집 

https://forms.gle/d7mJxD21kDYtoHb8A

*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http://www.anotherworld.kr/1300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