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 트라우마의 계보: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사 – 1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무력에 굴하지 않고 생사를 건 항쟁을 계속 하고 있는 이란에 대해서는, 많은 서양인들이 궁금증을 품고 있습니다. 정부에 도전장을 내미는 자국민을 손쉽게 학살하고, 여성들의 인권 등을 아랑곳하지 않는 종교 근본주의 정권에 도대체 이란의 관료나 군인들이 왜 계속 충성을 다하고, 이 전쟁을 계기 삼아 왜 반정권 민중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가, 라는 궁금증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아무리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약화돼도, 이란 정권은 여전히 그 어떤 밑으로부터의 움직임도 힘으로 분쇄할 만한 내부적 통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부터 기억해야 합니다. 한데 전시 이란의 내부 결속을, 단순히 정권의 억압 능력만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억압적 통치 이외에는 이 정권에는 일말의 헤게모니, 즉 역사적 명분도 분명히 있는데, 그 명분의 핵심은 바로 '반제'입니다. 신정체제나 여성들의 인권 침해 등에 대단히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근대화된 교양인들로서도, 이 '반제'라는 부분을 단순히 무시하기가 힘듭니다. 이건 여느 탈식민 사회와 마찬가지라고 봐야죠.
부자가 되고 스스로를 "명예 구미인"으로 여기는 대한민국의 20-30대들에게는 이제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윗세대 한국인들에게는 일제강점기가 빚어낸 반일의식이나,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이 촉발시킨 통일지향적 민족주의 등은 때때로 상당히 강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백년국치 (百年國恥), 즉 1차 아편전쟁 종식 (1842년)부터 신중국 건국 (1949년)까지의 그 한 세기 동안의 구미열강에 짓밟혀지고 개별적 구미인들의 인종주의 등에 차별을 받고 서러움을 머금고 살아야 했던 시절에 대한 - 상당부분 국가가 매체와 교육체제를 통해서 조종하고 강조하는 - 집단기억들은 현 공산당 정권의 가장 중요한 통치 명분을 이룹니다.
헌법에서 약속한 '민주주의'는 아무리 눈을 씻어봐도 중국에서 찾아낼 수 없지만, 서방 열강에 대해 공산당이 '중국의 위신'을 챙기고 적어도 대등한 관계를 전개할 수 있는 이상 이건 역사적인 집단적 트라우마의 치유가 되는 셈입니다. 북한에서도 대민 선전을 할 때에 남한의 문제로 경제 (북한인들도,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부유하다는 점을 익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미제의 괴뢰"라는 점, 즉 여전히 식민성 극복에 실패해왔다는 점을 꼽습니다. 어느 쪽을 봐도, '탈식민 민족주의'의 정치적인 힘이 가공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란 역시 탈식민 민족주의 힘으로 정권이 버티고 있는 경우라고 보시면 됩니다. 중국에서의 '국치'는 '백년'이라면, 이란은 아예 150년 이상이 될 것이고, 이 '백오십년 국치'의 극복이야말로 신정체제가 내세우고 있는 통치의 명분입니다. 사실, 중국의 '백년국치' 서사만 해도, 가해국으로 나오는 것은 꼭 '구미열강'만은 아닙니다.
현재 중-러 관계가 긴밀하고, 또 미국과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자원이나 핵대국인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 등이 필요해서 지금 중국에서 이 부분을 강조하지 않지만, 명나라나 청나라는 분명히 오늘날 연해주나 사할린의 선주민들을 그 조공체제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거기에서 행정거점을 두기도 했습니다. 즉, 1860년에 제2차아편전쟁으로 힘을 잃은 중국에 북경조약을 강요해 오늘날 연해주(와 조선의 영토이었던 녹둔도 등)를 할양을 받은 러시아 역시 '백년국치' 담론에서는 분명히 '가해국' 중의 하나입니다. 단,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서 이 부분은 대개 전경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죠.
이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전경화되지 않고 있지만, 러시아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어마어마하죠. 중국보다 더한 부분이 있다면, 피해의 역사가 훨씬 더 길고 그 규모가 훨씬 더 현저하고, 또 지금 러사아의 상위 파트너가 된 중국과 달리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가 지금도 러시아가 비교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더더욱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가 중국에 강요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은 1858년의 아이훈조약 (愛琿條約)이라면, 이란과 러시아 관계의 경우에는 아예 1813년의 굴리스탄 조약부터 그 관계가 "불평등"이 되는 기점을 봐야 할 것입니다. 카스피안해에 이란이 아닌 오로지 러시아만이 해군을 둘 수 있고, 이란이 러시아산 방직물 등을 수입할 때에 5% 이상의 관세를 둘 수 없다는 점 (관세 조정 자유의 부정) 등은, 차후 다른 구미열강들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을 때에 하나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러시아의 후계 국가인 소련이 중국 혁명을 지원한 것이 그나마 긍정적인 역사적 이미지 조성에 도움되지만, 이란의 경우 1908년에 러시아 장교들이 거느렸던 이란 카자크 부대는 신생의 이란 국회를 포격하여 민주혁명 탄압과 절대왕권의 복구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1909-11년에는 러시아 군대는 이란 북부를 점령하여 혁명가들의 부대들을 패배시키고 주요 혁명 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역사상 러시아 내지 소련이 북부 이란을 점령한 것만 해도 2번이나 있었던 일입니다. 이란의 탈식민 트라우마에 있어서는 러시아 내지 소련의 역할에 대해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기에, 저는 앞으로 몇 회에 나누어서 이 부분에 대해 상술해보겠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서 지금 싸우고 있는 이란 민족주의의 '배경'을, 우리가 이렇게 해서 역사적으로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트라우마의 계보: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사 – 2
이란과의 관계란, 러시아 역사의 시초부터 있어 온 것입니다. 이란은 수천년의 국가 운영 역사를 가졌던 전통시대 유라시아의 문명의 중심지였고, 9세기 중후반에 바이킹 추장들에 의해서 세워진 "루시" (Rus') 공국은 유라시아 교역체계의 주변부에 해당됐습니다. 즉, 그들이 이란에서는 동전이나 위신재, 고급 방직물 등을 수입하면서 역으로 이란에 모피나 노예 등을 수출한 것이죠. 러시아가 몽골 지배기를 거쳐 '제국'이 된 뒤인 1521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 제국: Muscovy)와 이란 (사파비 왕조) 사이에 정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는데, 양 제국이 교역에 관심이 있었고 그 관계는 대체로 동등했습니다.
이란은 러시아보다 훨씬 부유한 지역이었기에 러시아의 의적들이 이란에 가서 노략질을 벌이는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노래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스텐카 라진이라는 의적 두목이 수백 명의 카자크들을 이끌어 1667-69년에 이란 북부의 길란주 (라슈트시 등)를 크게 노략질하고, 그 뒤에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서 살상, 강탈 행위를 벌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전리품은 결국 그의 그 유명한 봉기 ("농민 전쟁")를 위한 밑천이 된 것입니다.
코카서스 지역에서의 변강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싼 이란-러시아 사이의 무력 충돌 (1651-53 등)도 없지 않았으나, 16-17세기의 양국 관계는 전쟁보다 '무역' 본위였습니다. 비교적 가까운 교역관계였기에, 오늘날 러시아어에는 이란 (파르시)어에서 차용된 단어만 해도 수십개나 있습니다. арбуз(수박, 파르시어 xarboze: 멜론)이나 чемодан(여행가방, 파르시어 jāmedān) 등은 가장 대표적인데, 이외에도 특히 여행, 무역 관련 어휘 중에는 아주 많습니다.
상황은 피터 1세 대제 (재위: 1682-1725) 시절에 본질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서구화와 부국강병 정책을 펼치고, 향후 메이지유신 시대의 일본 정치인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된 피터1세는 재위 기간 동안에 지속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1722-23년의 이란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침공을 받아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터키의 침공도 받고 있었습니다. 피터1세는 그 상황을 틈타 코카서스지역을 점령, 병합하여, 나아가서 그 지역을 통과하는 교역로를 장악해 이란과 유럽 대륙 사이의 교역을 독점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란산 건포도나 향신료, 그리고 고급 방직물 등은 그 당시 동유럽이나 중앙유럽에서 아주 잘 팔리고 있었는데, 러시아 제국으로서는 이란으로의 교역로 장악은 중간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으로 보였습니다. 피터 1세의 작업 방식은 제국주의자들의 고전적인 분리통치책이었습니다. 그는 일단 조지아 (그루지아, 가르틀리 왕국의 와크탕6세 국왕)와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교회의 총주교 등) 세력을 자기 편을 끌어들여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인 그 당시 이란의 카스파인해 해변의 지방들을 공격했습니다.
공격의 주된 목표는 무역의 중심지였던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와 다게스탄의 요충지인 데르벤트 등이었습니다. 일단 바쿠 지역과 일부 오늘날 다게스탄 지역의 점령에는 러시아가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그 뒤에 이란에서의 혼란이 수습돼 방어가 곤란한 이 지역들을 다시 반환해야 했습니다. 결국 현재의 그루지아 일부 영토의 사실상 병합 (위성국으로서의 관리)이나 다게스탄 등에 대한 상당히 폭력적인 지배 등의 역사적 뿌리는 피터1세의 코카서스 점령의 시도로 거슬러올라갑니다.
18세기에는 코카서스는 러시아와 이란, 그리고 터키, 3개 제국의 "전장"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애당초에는 특히 오스만 터키와 같은 세계 제국에 비해 상대적인 약자이었지만, 서구화와 무기생산의 발전, 유럽 장교 초빙, 유럽식 군대 정비 등으로 점차 우위를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터키가 상대적으로 힘이 더 강했기에 18세기 초중반에는 러시아와 이란은 힘을 합쳐 터키에 같이 맞서고, 그 사이의 코카서스 영토를 상호 협상을 통해 분할 지배했습니다. 즉, 러시아가 이란을 침략한다기보다는, 그 때까지만 해도 차라리 "동등한 제국"으로 대우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상황이 변화된 것은 이란을 이미 또 다른 튜르크 계열의 왕조인 카자르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던 19세기 초반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속에서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군사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됐지만, 이란은 여전히 기존의, 기마병 위주의 재래 전술을 사용하고 화기 발달에 있어서는 더 이상 러시아나 영국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다시 코카서스 지역을 1804-13년 사이에 공략하여 1813년에 누명 높은 굴리스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이란에 강요했습니다.
이란은 오늘날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를 잃었고 카스피안해에서 해군을 둘 권리도 잃어 사실상 러시아 침략 위험에 계속 노출된 상황이 됐습니다. 이란은 설욕전을 1826-8년에 시도했지만, 그것도 패배로 끝나 1828년의 투르크만차이 조약으로 오늘날 아르메니아 지역도 러시아에 잃었습니다. 이란이 러시아와 영국의 영향권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계기는, 바로 1804-28년 사이의 일련의 전쟁들과 불평등 조약의 강요였습니다.
'불평등 조약'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맨먼저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남경조약 (1842년) 정도일 것입니다. 그 조약과 그 뒤의 호문조약 (1843년)으로 영국이 청나라에 영국인들을 위한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 등을 따내고, 전시에 영국에 협조한 중국인을 위한 일괄 사면 등을 강요했습니다. 한데, 이와 같은 조항들은 이미 러시아가 이란에 강요한 투르크만차이조약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 신민들이 이란에서 치외법권과 영사재판의 권리를 얻었지만, 러시아제국 영토 내에서의 이란인들은 그런 권리를 당연히 (?) 누릴 리 없었습니다. 러시아에 전시에 협조했던 이란 신민들이 사면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도 들어 있었는데, 그걸 나중에 영국이 그대로 중국에 강요했습니다.
그러니 엄격히 말하자면 세계사적으로는 남경조약보다 차라리 투르크만차이 조약이 불평등조약의 "기원"으로 기억돼야 할 것입니다. 이란으로서는 국가적인, 민족적인 치욕이 된 러시아와의 전쟁들은 역사속 하나의 트라우마로 기억되고 말았습니다. 그 상황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은 코카서스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이란-러시아 전쟁 때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같은 기독교인"인 러시아군에 비교적 원활히 협조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인인 이슬람계 주민들은 "이교도"인 러시아군에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결국에 제국주의적 개입과 침략, 점령은 아르메이나인과 아제르바이잔인 사이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틀어놓았으며, 이 관계 악화는 20세기, 21세기의 수많은 비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비극들 말이죠.
● 트라우마의 계보: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사 – 3
제국주의 침략은, 각종의 인간적 비극들을 낳게 돼 있습니다. 침략자들의 구조적 폭력이나 직접적 만행들은 가장 큰 비극들을 낳지만, 침략에 대한 저항의 과정 역시 이런저런 비극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1900년 중국의 의화단 봉기는 그 본질상 분명히 기층민들의 반제 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의화단이라는 다소 전통주의적 저항 세력에 가장 많이 희생된 이들은 "서구 침략자"라기보다는 "서구 종교"로 인식되는 기독교에 개종된 같은 중국인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살해됐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지만, 약 3-5만명으로 추산되죠.
제국주의 세력과 저항 세력 사이에 "낀" 접경지대의 중간적 존재들은 제국주의 침략이 낳는 충돌에 가장 쉽게 희생됩니다. 제국주의 국가쪽 사람이라 해도, 저항에 희생되는 사람들은 꼭 침략의 직접적인 관계자만도 아닙니다. 같은 의화단 봉기에 희생된 188명의 서구 선교사들 중에서는 비록 침략국 국민이지만 중국인과 중국 문화에 상당히 친화적인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한데 침략이 낳는 갈등 속에서는 이런 세밀한 "차이"들은 쉽게 무시되죠. 침략도 잔혹한 거고, 침략에 맞서는 투쟁 역시 관대한 편은 결코 아닙니다.
이란과 러시아 관계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은 의화단 봉기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곤 했습니다. 한국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장 괄목할 만한 사건은 주이란 러시아 외교관이자 유명한 작가인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 (1795-1829)의 데헤란에서의 잔혹사이었습니다. 그리보예도프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알려져 있었고, 저만 해도 그의 유명한 희곡 <지혜의 슬픔>에 푹 빠져 상당부분을 지금도 낭독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슬픔>을 보면 바로 느껴질 만한 일이지만, 그리보예도프는 그 시대 치고 상당히 자유주의적 풍의 인물이었고, 귀족 사회의 고루한 보수성이나 영혼 없는 관료들의 삶을 깊이 경멸했습니다.
12월파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12월파 자유주의자들에게 가까운 사람이었죠. 한데, 영국이나 러시아나 마찬가지인데, 자유주의자들은 대개 결코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의 반대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보예도프는 자유주의 지향이었지만 동시에 본인 역시 관료였죠. 외교부 품관이었으며, 대학에서 이란어 (파르시어)를 습득한 관계로 대이란 외교 일선에서 활약해야 했습니다. 그 누명 높은 불평등 조약인 투르크만차이 조약의 기초에 그 역시 참여했으며, 그 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그 조약대로 이란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라는 어명을 띠고 그가 데헤란으로 향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 외교관이었지만, 푸시킨의 평가대로 "우리 시대 러시아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인 그리보예도프는, 똑똑한 만큼 이 제국주의 외교가 결국 큰 비극으로 끝날 것을 정확히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데헤란에 와서 상황 파악한 그는, 니콜라이 황제에게 장계를 올려 러시아가 받아내려는 배상금을 이란 조정이 모든 장식품을 다 팔아도 모을 수 없는 금액이고, 배상금 지급의 담보로 러시아가 일부 이란 북부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 이란인들의 민족 감정을 크게 건드리는 일로, 배상금을 현물 지급 허용하고 이란 영토의 점령을 종식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한데 황제는 이란의 참상에 무관심했으며, 그리보예도프는 자신의 행동이 낳을 무서운 결과를 십분 예견하면서도 훈령대로 배상금 지급을 계속 독촉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불평등 조약이 아르메니아인과 그루지아인들을 "러시아 황제 신민이 될 수 있는 이"로 규정하고 그들의 러시아로의 이적을 허용하고 러시아 신민들에게 이란에서의 치외법권을 보장했기에, "러시아 신민"이라고 행세하고 이런저런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 때문에 데헤란의 민심은 흉흉했습니다. 러시아 대사관 직원들의 횡포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그 판에 조정의 기밀을 알고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환관 한 명과 궁녀 두 명이 러시아 대사관에 들어가 보호를 요청하고, 그리보예도프는 조약대로 그들을 "피보호인"으로 선포했습니다. "내정 간섭이 극에 달했다"고 민심의 분노는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조정은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하고 싶어했지만, 민심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없었습니다.
1829년 2월 11일에 드디어 예견된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러시아 대사관 직원 한 명이 현지인을 살해했다는 소문들을 들은 수백 명의 군중들이 러시아 대사관에 운집하여 그 안으로 난입해버렸습니다. 그리보예도프는 환도를 들고 그 직원 그리고 친위대와 함께 사투를 벌였지만, 힘의 열세로 곧 패배해 성난 군중들에게 그야말로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시체를 나중에 겨우 확인한 만큼 성난 군중들이 그 몸을 토막내고 살점을 뜯어낸 것입니다. 직원과 친위대 일동은, 한 사람만 빼고 전원 사망했습니다. 마침 러시아는 그 때에 터키와 전쟁하는 바람에 일단 이란에 쓸 신경이 없어 이란 조정의 사과와 배상금 (커다란 다이아먼드)을 받고 이 사건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내내 러시아 외교관들이 이처럼 집단 횡사를 당한 일도 두 번 없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념비적 사건이었죠.
이건 197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거의 2백년이나 지난 것이고, 그 2백년 동안 "외세", "침략", "반제 투쟁", 그리고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란 역사의 주된 주제들이었습니다. 신정 정권은 아무리 싫어도 이번 전쟁은 다수의 이란인들에게 1800-20년대에 시작된 이 "반외세 투쟁"의 연장선상으로 파악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내부 결속이 다시 회복되어 적어도 전쟁 기간에는 내부 갈등은 다시 점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반제 투쟁"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죠.
(기사 등록 20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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