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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트라우마의 계보: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사 4,5,6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6. 6. 21.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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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의 계보: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사 (4)

1979년의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슬람 혁명이라지만, 그 주된 명분은 "반제", "반미"인 만큼, 현재 미국과 이란의 꼬인 관계는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데 이란의 혁명사는 1979년에 시작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시아 국가 치고 이란은 최초의 헌정 혁명을 경험한 나라였습니다. 이게 바로 1905-11년 이란의 민주, 헌정 혁명이었죠.

동아시아 역사학에서 "반봉건 반외세 혁명 운동"이라는, 클리세처럼 들리는 문구를 자주 사용하는데, 사실 이 용어는 - 비록 약간 부정확하지만 - 1905-11년 이란의 혁명 운동에 그대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봉건"이라고 말하기에는 가자르 왕조의 이란은 중앙집권적 국가였지만, 근대형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바로 혁명가들의 불만이었습니다. 중앙 정권은 각 지방 유력자, 각종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막지도 못하고 막으려 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 발달에 필수적인 "투자 안정의 보장"을 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인 입장에서는, 세금을 받아먹는 만큼의 "서비스", 국가가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비스 제공하기는커녕 반대로 잡세를 매김으로써 장사를 크게 방해하고, 또 상인들에게 각종의 징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상인층은, 부르주아들의 자원을 약탈하는 강탈 국가가 아닌, 부르주아들의 재산을 보호할 근대적 야경 국가를 원했던 것이죠.

가자르 왕조가 자국의 재산가들을 약탈하면서 열강들의 자본에 동시에 약탈적 이윤 창출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은 더 큰 문제였습니다. 1900, 황제 ()의 유럽 시찰 비용을 러시아로부터 빌린 22백만 루블 어치의 차관으로 충당하고 그 상환의 담보로 러시아에 세관의 소득을 주었다는 것은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습니다. 인프라 구축 등 자국의 개발에 들어갔어야 할 돈이 외세인 러시아에 넘어간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약탈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전인 1890년에 대영제국의 로이터 남작에게 담배 전매권을 팔아넘긴 것도 커다란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외국 자본과 왕권이 결탁됐으며, 자국민 자본이 이런 상황에서, 불평등 조약 레짐하에 보호관세도 도입 못하는 상태에서 도저히 발전될 수 없다는 것은 그 당시 이란의 상인층이나 대중들의 체감이었습니다. 이 외국 자본이란 러시아와 영국을 의미했습니다. 영국 자본의 진출은 가장 빠르고 가장 두드러졌지만, 자본력이 약한 러시아는 이란 민중을 탄압하는 군사력을 투입시키는 등 민심을 잃은 정권을 인위적으로 유지시키는 데에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1905년은 기점이었습니다. 일본에 패배 당한 러시아에서는 1차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란을 한 세기 동안 침탈해온 열강의 패배도 거기에서 일어난 혁명과 니콜라이 2세가 헌법 채택을 약속해야만 했던 것도 이란인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습니다. 1905년부터 격렬한 데모들이 시작되고,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들이 지속적으로 가두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헌정에의 전환에 반대했지만, 영국은 헌정을 지지하는 부르주아 세력과의 타협이 가능하다고 보고 황제에게 "양보"를 요구했습니다.

길거리에서의 시위 진압을, 황제의 보디가드 격인 러시아 카자크 연대가 맡았습니다. 환도로 무장된 카자크들이 진압을 하면서 22명의 시민을 살인하는 등 거리에서 유혈극을 벌이곤 했습니다. 결국 190610월에 황제는 양원제의 국회 소집에 찬동하고, 헌법에 서명했습니다. 이란은 이렇게 해서 입헌군주국으로 재탄생된 것입니다. 여러모로 상황이 비슷한 그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것이 중요한 참고이었으며, "입헌은 바로 자강의 길"이라는 그 믿음을 뒷받침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최초의 헌정인 이란의 헌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07년에 즉위한 새 황제는 헌정이 아닌 절대 왕권을 지향했으며, 그의 반혁명적 경향을 뒷받침한 것은 바로 러시아와 영국의 지원이었습니다. 황제를 지원하면서 러시아와 영국은 19078월에 협정을 맺어 북이란을 러시아 영향권으로, 그리고 남이란을 영국의 영향권으로 각각 확정시켜 놓았습니다. "이란의 영향권 분할"과 영-러 협정에 뒤이은 러시아군의 이란 혁명의 유혈 탄압은 이란인들에게 가장 아픈 역사적 트라우마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트라우마의 계보: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사 (5)

1907-8년 그 당시, 조선의 계몽 운동가들에게도 이란의 헌법 도입 운동, 즉 민주 혁명은 상당한 관심사가 됐습니다. 조선에서도 '헌정'을 도입함으로써 조선을 열강들로부터 지키고 부국강병책을 쓰고자 했던 그들에게는, 머나먼 "파사" (波斯 , 페르시아, 이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19076<대한자강회월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波斯立憲請願 倫敦電則 波斯國內非常騷亂하야 人民波斯王에게 憲法確定함을 請願하얏더라"

'인민'들과 '파사왕', 즉 샤 사이의 갈등을, 주로 영국 쪽의 정보에 의거한 <월보>의 편집진들은 일단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소요", 즉 혁명은 그야말로 "비상"했습니다. 이미 1907년에 "비상"했지만, 다음해에는 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대한협회회보>19087월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波斯內亂 波斯國內亂하야 다부리스總督放逐되고 議會에셔 秘密開會하나 波皇依然强硬態度하야 人民의게 宣言하기를 軍隊十分 活動하야 內亂鎭壓되리라 하얏다더라."

"내란"은 딱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19086월에 타브리즈라는 이란의 주요 도시에서 혁명파에 의해 총독 등 기존 권력자들이 쫓겨나고 호헌파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같은 달에 수도 테헤란에서 최초의 국회, 즉 메즐리스가 개회했는데, (波皇: 페르시아 황제)는 군사 진압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대한협회회보>, 그의 조력자 - 내지 후견인 - 들이 누구이었는지 정확히 밝혀주기도 했습니다:

"波斯內亂俄國: 俄國에셔 哥薩克兵波斯首府 데헤란에 派送하야 國會議員包圍하고 議員 若干名出給强請하얏스나 拒絶함으로 砲火相交하얏으며 哥薩克兵 數名援兵更到하야 數時間交戰하얏다더라"

이 서술도 대체로 정확했습니다. 이란을 영국과의 공동의 피후견 지역으로 여겼던 러시아 제정 정부는, 샤의 친위군으로 그에게 카자크 (哥薩克兵) 부대를 붙여주었습니다. 샤는 1908623일에 그 카자크 부대를 국회 의사당 앞의 광장으로 보내 국회를 공격케 했습니다. 처음에는 호헌파의 무장 민병대와의 교전에서 러시아군이 약 20여명의 인명 손실을 봤지만, 그 뒤에 대포 등을 사용해 국회 의사당을 파괴하고 약 300여명의 호헌파 민병대 등을 사살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러시아 군대가, 이란에서의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국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킨 군주의 편에 서서 결정적인 순간에 무력을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한데 제정 러시아 군대의 총검만으로는 이란의 황제는 더이상 절대왕정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던 형국이었습니다. 19102월에는, <대한흥학보>에서 도일 유학생으로 추측되는 "嘯卬生"이라는 필자는, 1908-10년 사이에 이란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申辰 以後 列國 大勢變動"):

"마호메도 卽位한지 未久議會政府間軋轢遂起하거늘 政府妄佞되히 憲法廢止하고 議院閉鎖하며 反對黨首魁數人捕縛하여 人心激昻하고 輿論沸騰하야 國王自働車하야 爆發藥함에 하야 犯人處刑하얏더니 도로혀 王政反對徒黨의게 反抗機會籍與한지라 兵器하고 데헤란에 侵入하니 露國公使館避亂하엿다가 不得已 讓位後 新王卽位하야 英 露兩國壓力平均苟且半獨立面目維持하얏시니 비록 偉大改革으로 國光揚揮치 못하엿으나 專制憲政하고 羈絆하야 獨立維持하는 特占戰爭以後 國民民權産物이로다"

익명의 도일 유학생이 쓴 그대로, 러시아 군의 힘을 빌린 1908년의 폭거는 모하메드알리 샤의 권력을 도리어 약화시킨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사민당 계열의 혁명가들과 관계를 가진 직접행동파 혁명가들이 샤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는데, 샤는 비록 살아남아도 그 암살 시도가 기점이 되어 호헌파 민병대들이 테헤란을 향해 행진하게 됐습니다. 결국에 샤는 처음에는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결국에는 러시아로 망명가고, 헌법을 인정한 그 아들 아흐마드가 즉위하게 됐습니다.

"嘯卬生"이 말한 대로, 이란 러시아와 영국의 압박 사이에서 그 주권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무너지기 직전의 조선에서 이를 멀리에서 관찰했던 이들은, 아마도 이란과 헌정 사수에 나선 그 국민들에 대해 "동병상린"의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데,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지식인들이 유의주시한 혁명이 이란에서 진행됐던 그 사이, 러시아 군대는 1909년부터 노골적인 침공에 나서 이란의 일부분을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 트라우마의 계보: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사 (6)

1909년의 여름. 대한제국의 국운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시기. 국내 의병들이 잔인한 일제의 토벌을 당하고, 신민회 계열의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해외에서의 독립투쟁의 지속의 가능성을 논했던 그 급박한 시기에 신민회 세력의 기관지 격인 <대한매일신보>는 돌연히 이란 국민을 찬양하는 논설을 게재합니다:

"壯哉波斯國民이여 偉哉波斯國民이여至今彼頑迷國王國民壓殺코저 하니 俄兵國民仇敵될뿐 아니라 國王亦國民仇敵이니 赤手同起國民軍壹仇敵하기 하려던 況兩仇敵左提右絜함인가 이나 國民意氣益益奮發하야 國王黨擊破하고 外人國王하야 平和케하니 壯哉" ("壯哉波斯國民", 1909723).

구한말의 조선어는 오늘날의 표준어와 많이 달라 독자들에게 이 기사를 읽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얼핏 봐도 그 대략적 내용은 다수의 독자들에게 파악될 것입니다. 국민의 자유, 입헌 지향의 의지를 압살하고자 했던 "완고한" 국왕과 왕당파를 반대해서 국민이 들고 일어나 결국 이란인들의 적이 된 러시아 군대의 도움을 받는 왕당파를 격파하여 이겼다는 것이 장하도다 라는 내용입니다. 조선에서는 국망의 암운이 짙어져가고, 아무리 <대한매일신보> 등 중심의 계몽운동가들이 "입헌이 바로 구국"이라는 요지로 설득 작업을 해도 이미 "구국"이 극히 어려워 보였던 그 절망적인 시절에,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바로 머나먼 서아시아의 "파사국", 즉 이란이었습니다.

실은 이란에서는 러시아군의 총검에 기댔던 극도로 보수적인 군주인 모하메드 알리 샤 가자르는 1909716일자로 양위를 하고, 입헌과 국회를 인정한 그 아들 아흐마드 샤 카자르가 즉위하는 것은 바로 <대한매일신보> 편집실로 하여금 "장하도다!"의 환호성을 지르게 했습니다. 먼 이란에서 일단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반외세 지향의 입헌 혁명은, 조선인들에게는 영감을 넣어주었던 것이죠. 한데 동시에 이란 혁명에 있어서의 러시아군의 역할에 대해서도 <대한매일신보>는 상당히 강렬한 어조로 논한 것이었습니다:

"野心勃勃하야 疆土擴張코저 하는 俄國其首都進向하고 兵威耀하며 國王하얏스니 波斯覆亡인가 抑忠憤烈烈하야 邦國支保코저 하는 國民壹邊으로 國王廢位宣言하며 壹邊으로 外兵對抗하니 波斯中興인가"

<대한매일신보> 측이 옳게 파악한 대로, 1909년 그 당시의 상황에서 입헌파를 대체로 지지한 다수의 이란인 중산층과 대중, 그리고 상당수의 성직자 등의 반대편에 선 것은 바로 러시아 간섭군이었습니다. 영국의 양해를 얻은 러시아 간섭군은, 19074월에 입헌파 민병대가 왕당파의 포위를 당하고 있었던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 등 북부 이란의 여러 요충지에 파병됐습니다. 영국은 이란 남부를 자국의 영향권으로 확정 받은 만큼, 북부에서의 러시아군 무장 간섭에 반대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데, 이 무장 간섭의 동기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파악은 꼭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러시아는 "야심이 발발해서 강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관료들 사이에 왕래했던 서신들을 보면, 그들로서는 러시아령 아제르바이잔이나 아르메니아 계열의 사회주의 혁명가 등 "불온 세력"의 북부 이란으로의 집결이 두렵기도 하고, 내전으로 인해서 이란 안에서 상업활동을 하거나 이런저런 이권을 획득한 러시아 자본가들이 보는 손실도 문제가 됐고 전체적으로 북부 이란에서의 내전이 러시아 자국의 "소요", 1905-7년 혁명의 연속으로 보여서, 이를 진압해야 하는 논리였습니다. 일단 러시아군이 1909년봄에 타브리즈에 입성하자마자 코카서스로부터의 사회주의 등 지향의 혁명가들에 대한 사냥부터 벌인 것입니다.

1909년 그 당시에는 입헌파는 - 러시아군의 무장 간섭에도 불구하고 - <대한매일신보>에 영감을 줄만한 임시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한데 그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대한제국이 이미 국망을 당하고 난 뒤인 1911년에, 유럽에서는 독일과 영, 불 세력 사이의 긴장이 팽팽한 만큼 영국은 이란 북부에 대한 러시아의 장악에 그 어떤 반대로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유럽에서의 러시아와의 반독일적 연합이 더 중시됐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샤의 세력이 이란 전국에서 입헌파를 탄압하는 가운데 타브리즈에서는 러시아군이 도시를 완전히 장악해 아르메니아인 등 러시아로부터 망명해온 이들을 포함한 혁명가들에 대한 공개 교수형을 벌였습니다. 도시 장악의 과정에서는 많은 가옥들이 러시아군 대포에 파괴되고, 민간인 살상, 약탈도 태심했습니다. 이렇게 러시아라는 외세는 이란 혁명이라는 아시아의 최초의 입헌 혁명을 압살하는 주된 세력의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란인들에게는 영국과 치밀하게 조율된 1905-11년 사이의 러시아 간섭은, '외세'에 대한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긴 것입니다. 지금 신정 정권을 극히 혐오하는 일부 고학력 중산층마저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불법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신정 정권을 중심으로 결속된 것도, 이런 과거 트라우마의 경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데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혁명가들과 "혁명 협력"도 그 시기의 하나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경험 역시 러시아 1917년 혁명 이후의 친소련 혁명 세력들의 "-소 혁명 연대" 실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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